[2014_차세대4차_시] 나무의 약속 외 3편

 

[2014년 4차 차세대예술인력육성 문학분야 선정작 ]

 

 

나무의 약속

 

 


박성준

 

 

 

    피아노를 치면서 나무를 생각합니다. 대지는 의견을 감추는 법을 가르칩니다. 고백이 아니더라도. 음악은 나무를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산을 오르는 사람은 대체로 산을 알지 못하고, 직립을 한 이후부터 종이는 누구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피아노를 치면서 피아노가 희박해집니다. 산길은 누구 혼자서 높이를 이해했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아무것도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나무의 후렴은 할애된 공간보다 먼저입니다. 이를테면 석공이 돌 속에서 부처를 꺼내 왔다든가 향불 연기 속에다 절간을 지었다는 풍문이 풍경소리로 노승의 그림자를 흔들었다고 한들, 피아노는 여전히 뿌리가 없습니다. 피아노의 불편은 계단입니다. 각자의 몫으로 넘어지기 좋은 그림자와 오차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나무였을 때를 생각하며 엽록으로 울렁거리는 느림의 명치 곁에는 잘 깎아 놓은 불상이 있습니다. 피아노가 모르는 것을 나무가 알고 있습니다. 희망은 흉기가 되기도 합니다. 또 어떤 불상은 토르소처럼 보이기도 하지요. 나무를 두드리면 목탁소리가 들리고 그 파동 속에는 유어들이 살고 있습니다. 너무 많은 피아노가 잎사귀를 틔우려고 대지와 대결을 합니다. 피아노가 산마루에 기우뚱거립니다. 피아노는 왠지 그늘을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핑퐁

 

 

 

    더 멀리 갈 거야. 시푸른 거품의 시간, 심증만으로는 찌그러지기 쉬운 테두리다. 그녀의 목소리는 자주 모빌처럼 끄덕인다. 나는 금세 울렁거리는 천장이 된다. 내가 그녀의 손을 잡고 걸어갈 때마다 계단이나 벽, 복도 같은 것들이 만져진다 하더라도 우리가 복용하는 중력은 늘상 각자에게 평등했다. 떠나갈 수가 없다.

 

    뜨거운 것을 만지기 싫은 사람 흉내를 내보자. 다치지 않게 간격들을 완성해보자. 미루기 좋은 핑계거리로 만들어진 뼈. 오래 밀어내면서 붙어 있고 싶던 배경 때문이라도 오이는 오이보다 더 시원하게 자란다. 오이꽃이 떨어지면 제 속이 굵어지고 가시의 간격들도 느슨해진다. 밤과 낮이 오간다. 비록 비누향에도 열이 돌지만, 그녀는 알레르기를 알지 못한다. 나는 얼음에서 불이 피어오르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마주 잡은 손을 녹이는 미끄러움과 쑥하고 빠져나가는 허탈감. 찰나가 멀어진다. 발음이 좋지 않다. 나는 더 멀리 갈 거야. 그녀는 부서지면서 도착한다. 그녀가 나무주의자를 만났을 때 나무주의자는 제 손목에 호수를 보여주면서 나이테나 파동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원했다. 그녀는 나무처럼 침묵했고 그늘은 죄책감을 가졌다.

 

    여전히 발에 차이는 건 태양이 아니라 낙엽이다. 태양이 낙엽을 만들었고, 한 계절을 포기하기 위해 태엽을 돌리던 건 나무였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다. 더 커다란 반복이 필요해. 손바닥에 혀가 돋은 것처럼 우리가 필요하지. 애초에 테이블을 벗어나면 안 되는 게 규칙이었다는 듯 멀리 그물을 향해 그녀가 팔을 휘젓는다.

 

    나는 또 도망 갈 거야. 우리는 도약하기 위해서 도망을 방치했고 창백한 맨손은 서로를 악화시키지 못한다. 마치 거품의 첫인상에 대해 신중하지 않았던 것처럼 부딪치지 않으면 시작할 수 없는 시작이 있다. 간격이 우리의 손을 떠났다. 그녀의 손은 사각형이고 내 손의 입구에는 짐승이 산다. 다시 시작해보자. 손이 타오르고 있다.

 

 

 

 

 

 

미지의 책

 

 

 

    중간쯤 읽다 만 책을 엎으면 그 책은 새가 되고 싶다

 

    얼지 않게 고안된 장기들
    비상할 무렵에서야 가려운 동공
    사방에서 소리를 잊어본 충고들이 고작
    날개만을 배설한다 그즈음에만 나는 저녁이 된다
    활자들이 위독한 귀를 기다리며 내란을 일으키는 것
    물소리가 들리고
    꿈에서나 볼 수 있는 것들만 수레에서 돈다 나는
    어느 배려심이 많은 번역가의 말을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원본에 없는 사설을 첨가하고 싶은 욕망들은 요컨대
    아무런 책임도 지고 싶지 않은
    창작에 대한 미행이다

 

    그런 그의 안목을 믿기로 했다
    추운 날에만 유독 집 주소가 기억이 나지 않고, 그게 서러워 겨울은 떨림이 많은 사례들로 온다
    편도가 부은 자리에 불빛을 내민 의사는
    그만 끊으라고 이야기를 하고, 나는
    몸 안에 숨겨둔 유리에 대해 생각한다 조심스레
    들것에 실려 가는 유리와 응급실에 방치해둔 유리, 링거를 맞다가 금이 가고 심폐소생술로 빠작 깨져버린 유리의
    죽음을 떠올린다 깨끗하게
    닦인 문장과 울렁거리는 밑줄, 밀린 꿈

 

    왜 유리가 허공인 줄 알고 새는 달려들었을까
    살 안쪽이 늘 젖어 있는 것처럼, 낯선 곳에서 잠을 자고 읽다 만 책을 두고 오는 습관이라든가 에스페란토의 쓸모에 대해 질문을 할 때, 내 장기들은
    다른 세상의 배열에 대해 더 민감하게 고찰한다

 

    중간쯤 읽다 만 책이 새가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다시
    책을 읽는다
    새를 완성하는 것은 날개가 아니라 두 다리라는 것을 안다
    활자가 쏟아진 빈 책을 덮자
    그 책은 관이 되고 싶다

 

 

 

 

 

 

움직이는 자정

 

 

 

    어떤 기분이 들 때
    늘 바깥에 서 있다.

 

    어느 날 구멍가게의 밤이 있었고 나는 쓰지 못하는 것을 쓰려고 한다. 믿음과 용기가 빠져나간 빈자리를 향해, 괜찮아. 채우고 싶은 것을 비우려고. 본다. 본다.

 

    늙은 여자가 평상에 나와 전구를 돌려 끈다. 때마침 용달차에서 키 작은 사내가 내려 어제처럼 양초 두 개를 사 간다.

 

    가까스로 누군가를 포기해야 할 때
    여기서 저 늙은 여자는 젖이 크다.

 

    진열장마다 약을 치는 사람은 범위를 알 수 없는 아들이다. 아버지를 유인하려 했다고 생각하던 찰나, 나는 아버지에 관해 쓰지 않기로 한다.

 

    밤의 다리가 무럭무럭 돋는 일에도 이제 놀라움이라 수식할 힘이 없고. 촛불이 사생활 같은 것들을 보호할 수 있다고? 믿는 일도 하지 않기로 한다. 의지의 문제. 복선의 문제. 이름을 딱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딱딱하게 아들을 생각하기로 한다. 다시 삐딱한 풍경.

 

    왜 양초인가. 여기서 약을 식량이라 믿고 먹은 벌레들은 일찍 죽는다. 나눠 먹은 약 때문에 내장이 하얗고. 묽은 얼굴로 아들이 이제 말을 하려는 찰나, 나는 아들의 말은 듣지 않기로 한다.

 

    기분 없는 기분으로
    바깥을 쓰려고 한다.

 

    밤의 소유물. 변명할 줄거리조차 타당하지 않아. 더 이상 누구의 혀도 자라지 않는다는 사실에 어느덧 골목은 심지처럼 겸손해진다. 사내의 돌아갈 집만은 비워두기로 한다. 벌레가 죽기 직전 필사의 힘을 다해 몸을 뒤집는 것은, 단지 알을 낳기 위해서라고. 믿는 일을, 멈추기로 한다.
    사내를 뒤쫓아 촛불의 용도. 촛불의 위기. 방화의 진실 따위를 묻지도 않기로 한다. 다시 누군가를 믿기 위해 큰 용서가 필요했음으로. 또 누군가를 믿지 않기로 한다.

 

    지구에 멀미를 느껴 지구를 피해야 할 때
    사람에 위험을 느껴 귀신을 필요로 할 때

 

    양초는 유통기한이 없다. 보고 듣고 상상하는 것을 멈추기로 한다. 이제 약을 핥아 토해내는 짓은 안 하기로 한다. 늙은 여자에 대한 고민을 정지하기로 한다.

 

    사내는 어제보다 더 괜찮은 사람이 되기를 희망했다고 한다. 용달차가 좁은 길을 빠져나간다. 무언가의 기분. 해소가 안 되는 기분. 거짓말의 기분. 기분 없는 기분으로

 

    나는 짐칸 어디쯤에 또 서 있기로 한다. 간신히 몸을 뒤집고.

 

 

 

< 선정평 >

 
시를 읽을 때 대상과 마음이 부딪치는 순간에 어떤 말들이 흘러나오는가를 유심히 본다. 그런 순간 여지없이 드러나는 말의 리듬, 독창적인 의미의 결, 지각의 총체 따위가 시의 성패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나무의 약속」 외 시편들을 내놓은 시인은 남다른 한 편의 시를 밀어 올리는 언어 감수성과 의미의 장력을 만드는 법, 그리고 시의 얼개를 짜는 힘을 보여준다. 미시적인 사물과 현상들 속으로 스며들어 의미의 비등점을 낚아채는 솜씨도 좋다. 함께 내놓은 시들이 산문시라 말의 리듬을 엿볼 수 없는 것은 아쉬웠지만 이것만으로도 상당한 시적 내공을 느낄 수 있었다.
    장석주(시인)

 

===== 작가와 6문6답 =====

 

1. 우선 선정된 소감을 간단히 밝혀주세요.

  제주도를 한 번도 못 가봤는데 제주도에 가고 싶습니다.

 

2. 이 시에 대한 간단한 시작 메모를 좀 부탁드릴게요.

  올해는 시보다 평론 원고가 많았습니다. 평론을 쓴다는 것은 시를 누르는 일입니다. 어떤 영감이 잘 오지 않았습니다. 몸과 정신에서 열어두는 부위가 달라서 그런 거겠죠. 부끄러운 일입니다. 포기와 절충의 차이를 알게 되는 순간부터 다른 욕심이 생겼습니다. 어떤 시도 반성에서부터 시작하지 않는 시는 없는 것 같습니다.

 

3. 글을 쓸 때 특별히 듣는 음악이 있다든가, 자기만의 습관이 있다면요?

  여러 번 쓰니까 약간 민망합니다. 저는 엎드려서 씁니다. 쓰면서 허리랑 어깨가 많이 아파야 좀 잘했다 싶은데, 오십견이 빨리 올 것 같아서 참 다행입니다. 시는 열심히 쓴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점점 알게 됩니다. 이것도 참 다행입니다.

 

4. 동인 활동을 하신다든지, 글을 막 완성했을 때 가장 먼저 읽어 주는 1차 독자가 있으신가요?

  동인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소중한 사람들이고, 은인들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먼저 읽어줍니다.

 

5. 지금 막 발을 뗀 신인이지만, 일평생 작가로 살면서 이것만은 꼭 쓰겠다, 라고 다짐한 주제나 소재가 있으신가요?

  저는 힘의 논리가 싫습니다. 논리도 안 되는 힘이 예술로 치장되는 건 더더욱 끔찍합니다. 몸은 무겁고 말은 가볍고 글을 그 중간쯤 되는 것 같습니다. 생활은 누추하지만 곁을 지켜준 모든 이들 때문에 저는 또 부유합니다. 살면서, 글을 쓰면서 이 격차를 줄여나가고 싶습니다.

 

6. 향후 작품 활동 계획을 좀 부탁드립니다.

  앞으로 시를 계속 쓸 수 있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박성준 (시인)
 

1986년 서울 출생. 2009년 《문학과사회》 시. 2013년 경향신문 평론 등단. 시집으로 『몰아 쓴 일기』 있음.

 

 

   《문장웹진 2015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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