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_차세대4차_시] 과도 외 3편

 

[2014년 4차 차세대예술인력육성 문학분야 선정작 ]

 

 

과도

 

 


류성훈

 

 

 

    더위가 더위를 깎는다. 싫어하는 과일만 더 달게 익어가는 일요일이 교과과정에 포함되어간다. 장난감을 돌려주지 않았다고 현관에서 매를 맞은 날. 싸우지 말라고 옥상은 한낮이 어지른 열기를 밤에게 되돌려주었고, 아무도 감사히 받지 않는 걸 알 만큼 머리가 굵어졌다. 수학에는 수학이 있지만 윤리에는 윤리가 없음이 신기했을 뿐. 나는 땀이 없는 동식물들이 예초기에 갈려나가는 것을 바라봤다. 실은 아무도 싸우지 않았고, 어질러진 방은 불안하고, 깨끗하게 마른 집들은 서로가 불안할 뿐. 스스로에게 장점이 없다는 점에서 여름은 나와 닮았고, 그때 나는 더위를 혼자 다 먹었기에 더 진화할 수도, 더 하등할 수도 있었다.

 

    잘 깎은 과육을 연필로 찍어 올려 볼 때도 은밀해야 했던 나이. 혼자만 힘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가정이 스스로 힘을 잃어버린 세상을 아랫목에서 지켜볼 때, 상하기 전의 껍질에선 식물의 창자 냄새가 났다. 지나치게 쏟아진 후에는 늘 지나치게 맑은 것. 아직은 견딜 만했고, 그래서 나는 과도,라는 단어를 좋아했고, 여름은 내가 좋아한 과도함과 지나침 어디쯤 자제력을 잃은 채 매를 들고 있었을 것이다. 아빠 차 전조등에 까맣게 붙은 여름의 체액을 닦는다. 그건 시간보다 세제에 더 잘 지는 거라고 아직 고해성사를 할 수 없는 내게 안도할 때. 아픔은 어떤 병변이 아니라 반추가 없는 모든 목숨이었다.

 

 

 

 

 

 

번개표/KUMHO 220V㉿60W B1

 

 

 

불이 나갔다 모든 불은
밖으로 나가는 발소리

 

전구가 갓 속에서 혼자 죽듯이
나는 철물점처럼 문을 닫는다

 

누구를 볼까,는 결국
무엇을 볼까,로 바뀌는 것
나는 누구에 의해 무엇처럼
던져져 있던 것

 

눈에 먼지가 들어가지 않을
방법이 없을 때, 신발을 벗을 때
붉은 천정에 아직 네가 있다

 

전등갓에 손을 덴다
정리란 다만 제자리가 없으므로
하는 것이다

 

 

 

 

 

 

암순응(暗順應)

 

 

 

    우리는 식은 저녁을 끓였다. 안압(眼壓)은 뭘 읽어도 떨어지지 않아, 나는 서랍 속에서 편광렌즈를 만지작거린다. 해를 등지고 어둠에 맞서라고, 책은 칼을 갈 듯 말했지만 나의 사진엔 등질 만한 명암이 없었다. 석양은 빛을 이해해야만 아름다웠고 용인 없는 빛은 탄저균(炭疽菌)에 가까웠다. 그림자 없는 등(燈)의 존재를 몰랐던 건 내가 어둠에 순응했을 때만 켜졌기 때문이다. 세상이 내 목숨의 무게보다 무거운 줄 알았던 때. 편광판이 부끄러운 수술 쪽으로 돌아간다. 무영(無影)이란 방향도 반향도 없는 원귀(寃鬼)의 형태로 침소를 도는 것. 과부하된 어둠만이 추상(抽象)을 추상(錐狀)할 때. 명부(冥府)는 명부(明部)를 쓰다듬었다. 나를 등지고 누우라고, 너의 암부를 얘기하는 것이 가장 진보적인 믿음인 줄 알았다. 내가 사랑했던 책 제목처럼, 나뭇잎 아래 숨어 있다 혼자 지치던 놀이가 있었으니. 그늘에 대한 뒷담화들은 단지 인사였고, 인간의 간상체(桿狀體)가 달갑지 않다. 렌즈를 닫는다. 식은 눈을 한 칼 오려낸 자리가 나의 첫 암순응이었다.

 

 

 

 

 

 

보이저 1호에게

 

 

 

물통 속에 밤이 퍼진다 물은 차고
내 붓은 천천히 희다
안부라는 건 대개 꿈풍선일 뿐
나는 아직 잘 있는 것이고
이제부턴 함께 잘 있기로 한다
우주엔 최소한 버릴 꿈이 없어서

 

버릴 색이 없어서, 널 닮은
연체동물을 그렸다 저 외성(外星)에서 온
까끌까끌한 입을, 활짝 핀 성기를
중력 없는 팔들의 짙푸른 기별을

 

악수하는 법도 몰랐으면서
우리는 늘 몽상이라는 교신
축하한다, 성간 공간 밖에서
아직도 작동하는 공유전력을

 

불안하지 말기를, 너는 가장 멀어도
모르는 별을 위한 이곳의 기록
그래서 지구에서의 너를 그렸으니
한때 색색 풍선보다 더 필요했던
날숨을, 더운 붓을 휘갈겨 본다
못 배운 전희(前戱)를 이제는 지우며
함부로 언급되던 우리의 외계와
말해지지 못했던 나의 내세

 

화장실 창밖이 밝아오고
벌어진 해바라기가 그려져 있다
그 금빛의 껄끄러움 또한
교신,이라 생각했던 물음을 안고
나는 지금 태양권의 어디쯤을
빠져나가고 있을까

 

 

 

< 선정평 >

 
「과도」 외 3편의 작품들은 암순응의 과정에 대한, 아직은 불분명한 어떤 해답 속을 배회하고 있었다. 밝은 곳에서 갑자기 어두운 곳으로 들어갔을 때, 처음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다가 천천히 사물과 주변이 보이기 시작하는 암순응이라기보다는 그 반대 – 선명하고 분명했던 어떤 규율과 법칙들이 이 세계를 빠져나감으로써 비롯되는 어떤 세계를 만나 볼 수 있었다. 불안해하지 말기를. 본디 윤리에는 윤리가 없는 것이 맞다. 이 세상의 모든 色들은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 맞다. 시에서도 그걸 보여줄 때 훨씬 더 감응력이 있어진다. 어깨 힘 빼고 툭툭, 펀치를 날리시기를 바란다.
    유홍준(시인)

 

===== 작가와 6문6답 =====

 

1. 우선 선정된 소감을 간단히 밝혀주세요.

  선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계속해서 시의 끈을 놓지 말고 열심히 좋은 작품을 위해 노력하라는 뜻으로 생각하겠습니다.

 

2. 이 시에 대한 간단한 시작 메모를 좀 부탁드릴게요.

  저는 시에서 정서보다 언어가 선행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특정한 상황이나 기억 등에서 영감을 받아 시를 쓰는 경우도 물론 많이 있지만, 언어 그 자체가 만들어내는 느낌이나 결, 혹은 미학적 측면에 더 무게를 두어 거기서 만들어지는 새 이미지들을 믿고 가는 쪽으로도 많이 쓰고 있습니다. 전자를 기저로 한 후자의 모색이랄까요. 상당수가 그런 식으로 만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3. 글을 쓸 때 특별히 듣는 음악이 있다든가, 자기만의 습관이 있다면요?

  작품을 쓰면서 가령 음악을 듣는 일이 없지는 않지만, 별다른 습관이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굳이 습관 비슷한 게 있다면 컴퓨터 옆에 차를 한 잔 끓여 놓아두어야 집중이 잘 되는 특성(?)이 있고 시가 될 만한 문장이나 언어가 불현듯 떠오르면 자다가도 웬만하면 메모해두려고 일어나는 정도가 있달까, 그 정돈데 제 생각에는 이 정도는 다른 시인 분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4. 동인 활동을 하신다든지, 글을 막 완성했을 때 가장 먼저 읽어 주는 1차 독자가 있으신가요?

  저는 동인 활동을 해 본 적이 없고 앞으로 할 것인지에 대한 생각도 아직은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그것이 아주 좋다고도 좋지 않다고도 생각하지 않고, 기회와 인연이 된다면 할 수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것이 제 시작 활동에 특별한 영향을 끼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 1차 독자는 동료 시인들 몇몇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쓰면 쓸수록 부끄러워서 쉽사리 보여주지는 않게 되는 것 같습니다.

 

5. 지금 막 발을 뗀 신인이지만, 일평생 작가로 살면서 이것만은 꼭 쓰겠다, 라고 다짐한 주제나 소재가 있으신가요?

  질문에 있는 말 그대로 ‘지금 막 발을 뗀’ 시인이 자기 시의 주제의식에 대해 목표를 세우는 것은 진취적이고 좋은 의미가 될 수는 있겠지만, 저는 그것이 그 의도대로 행해질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고 봅니다. 모든 사람은 끊임없이 배우고 끊임없이 반성하고 변화하며 살고 있습니다. 문학 또한 삶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고 위의 다른 질문에서 답을 드렸듯 저는 모종의 주제의식을 가지고 작품을 쓰지는 않습니다. 도리어 그렇게 태어난 작품들이 모여 저의 주제의식이나 시세계로 나타날 거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즉, 무엇을 쓸 것인지보다는 다만 어떻게 쓸 것인지를 고민하는 쪽에 가까우므로, 그와 같은 끝없는 성찰과 진실된 사유를 통해 작품을 써 나간다면, 앞으로의 ‘노선’이라는 말보다는 밟아온 ’행적’이라는 말에 더 가까운 개념으로서 작품 세계의 양상을 보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6. 향후 작품 활동 계획을 좀 부탁드립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위의 질문들에 대한 대답들 속에 상기 질문에 대한 대부분의 답이 들어 있다고 생각됩니다. 문학이 가진 가치는 언어의 잠재성과 그로 인한 초월적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데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그 본연의 가치를 충실히 따르려고 하며, 또한 그것을 위한 탐구를 계속할 생각입니다.

 

 

류성훈 (시인)
 

201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문장웹진 2015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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