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세대 선정작 리뷰] 복수는 법폭력의 것

 

[2014년도 차세대 예술인력육성 문학분야 선정작 리뷰 ]

 

 

복수는 법폭력의 것

― 임재영, 「24시간」을 읽고

 

 

허희(문학평론가)

 

 

 

 

    와신상담(臥薪嘗膽)은 복수의 고사다. 춘추시대 오 왕 부차의 아버지는 월 왕 구천에게 패해 죽고, 아들인 부차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자 복수의 화신이 된다. 그는 섶 위에서 불편하게 잠을 자면서 복수를 다짐했고, 전쟁에서 승리하여 구천을 굴복시킨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구천도 나라를 빼앗긴 치욕을 갚고자 또 다른 복수의 화신이 된다. 그는 곁에 쓸개를 놓아두고 핥으며 패배의 쓴맛을 다시는 맛보지 않으리라 다짐했고, 전쟁에서 승리하여 부차에게 설욕한다. 여기에는 복수의 두 가지 특성이 드러난다.
    첫째, 복수의 실행을 위해서는 분노의 항상성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거의 모든 것은 시간의 공격을 받는다. 사물뿐만 아니라 감정도 마찬가지다. 속절없이 흐르는 세월 앞에서는 열렬한 사랑이 그렇듯이 맹렬한 증오도 무디어진다. 복수를 이룰 때까지 부차가 땔나무 위에 눕고, 구천이 쓰디쓴 쓸개를 맛본 것은 복수심을 계속 불태우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주는 반증이다.
    둘째, 복수의 칼은 반작용의 법칙에 충실하게 따른다는 것이다. 어떤 행위에 대한 보복이라는 점에서 복수는 태생적으로 작용에 대한 반작용의 성질을 갖고 있다. 그러니까 내가 들고 있는 복수의 칼로 원수를 찌르는 순간 나도 복수의 칼에 찔리고 만다. 복수의 칼날은 손잡이 반대편에서도 튀어나온다. 설령 유형적인 상처를 입지 않는다고 해도 무형적인 상처를 입는 것은 피할 수 없다. 마침내 구천이 부차에게 이겼다고 하나, 그 또한 만신창이의 꼴을 면할 수는 없었으리라.
    위에 서술한 내용은 앞으로 이야기하려는 「24시간」에 관한 서두다. 표면적으로 보면 이 작품은 복수에 대한 서사로, 전술한 복수의 두 가지 특성을 전유하여 체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복수의 화신은 ‘차웅’으로, 그는 ‘엄니(어머니)’를 살해한 ‘선이’를 죽여서 원한을 앙갚음하고자 한다. 어머니가 살해된 직후 곧장 복수에 나서고, 그 기간도 하루뿐이라는 점에서 차웅의 분노는 최대치의 상태로 지속된다. 이것은 복수의 첫 번째 특성을 충족시킨다. 한편 차웅은 선이에게 복수를 하고 나면, 자신은 선이의 아버지인 ‘경찰’에게 죽임을 당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는 스스로에게 돌아올 복수의 칼날을 맞을 각오는 하되 복수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복수의 두 번째 특성을 만족시킨다.
    물론 앞서 언급한 복수의 두 가지 특성을 변형하여 반영했다는 것만으로 이 소설의 의미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한국 문학이 아니라 한국 영화의 예만 들더라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복수는 나의 것>, <올드 보이>, <친절한 금자씨>)이나,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 등 복수에 대한 심도 있는 성찰을 보여준 수작들을 여러 편 떠올릴 수 있다. 그러므로 그보다 뒤에 발표되는 작품이 취할 수 있는 전략은 대체로 이런 것이다. 동일한 지평에서 더 깊게 사유하거나, 다른 지평에서 새롭게 사유하거나. 「24시간」이 택한 방식은 후자다.
    지금까지 알려진 복수에 관한 명작들이 대부분 근대법과 길항하는 사적 복수를 다루었다면, 이 소설은 사적 복수가 공적인 복수법으로 공인된 이후의 딜레마를 다루면서 독창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24시간」의 세계에서는 살인사건 발생 직후 24시간 이내의 사적 복수를 합법적으로 인정한다. 소설에서는 이렇게 설명된다.

 

    단 하루. 복수의 시간. 그 24시간 동안은 희생자의 가족이 살인자를 직접 찾아내 죽여도 무죄가 되었다. 옛날 험준한 산맥 사람들의 일상을 지배하던 복수의 관습이, 현대에 와 다시 부활한 셈이었다. 물론 실제로 이 ‘권리’를 행사하는 건 힘든 일이었다. 까다로운 조건들이 많았다. 살인 시각이 정확해야 했고, 복수 당시가 정확히 몇 시였는지 입증할 증거나 증인도 필요했다. 게다가 이 법은 희생자 가족들에게 ‘권리’만을 주는 것뿐이어서, 공권력의 도움은 일절 받을 수 없고, 하루가 가기 전에 범인이 검거되면 현실적으로 ‘권리행사’는 불가능해졌다. 하지만 이런 모든 난관에도 불구하고 ‘권리행사’는 생각보다 빈번히 이루어지곤 했다.

 

    일부러 냉정하게 보지 않더라도 복수법에는 허점이 많다. 논리적인 체계가 없어서 악용될 가능성도 다분하다. 아무리 소설적 설정이라고 하나, 이와 같은 법이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독자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잠시나마 근대법 성립 이전, 마녀사냥이 공공연하게 자행되던 중세를 떠올려 보면 어떨까. 아니 근대법 성립 이후라도, 예컨대 독일 나치 정권 하에서 법의 이름으로 시행된 터무니없이 잔학한 행위들을 떠올려 보는 것은 어떨까.

 

    ‘권리행사’는 생각보다 빈번히 이루어지곤 했다. 대중들은 그때마다 환호했는데, 특히 가난한 이가 부자나 권력자에게 ‘권리행사’에 성공하면 영웅 대접을 받았다. 결국, 모두가 이 법을 좋아했다. 희생자들은 복수의 분출구가 있어서 좋고, 정부는 법체계의 비인간성을 은폐할 수 있어서 좋고, 정치가는 인기몰이 구실을 하나 얻어 좋고, 대중들은 여흥과 희망을 얻어서 좋았다.

 

    위의 인용문처럼, 결국 모두의 이해득실에 기초하여 복수법은 통과된다. 그런데 복수법의 수혜자는 과연 있을 수 있는가. 어쩌면 복수의 대상이 되는 사람, 복수를 하는 사람, 그리고 이들과 관련된 사람들 전부가 복수법의 피해자가 되는 것은 아닐까. 법의 저촉을 받지 않는다고 해서 복수를 둘러싼 모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로 인해 삶 자체는 철저하게 망가져 간다. 복수법과 얽힌 선이와 차웅과 경찰 중에서, 누구도 본래의 인생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 이러한 가설을 방증한다.
복수에 대한 서사처럼 보이지만, 법과 폭력에 복수를 더한 서사라고 해야 「24시간」을 보다 온전한 프레임에서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 법과 폭력은 근원적으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는데, 복수와 연계되면서 법적 폭력의 강도는 한층 더 높아진다. 이 소설에는
복수와 접합된 법이 작동하고 그것을 의식하며 사는 한, 픽션의 세 인물이 아니라 바로 현실의 우리가 잠재적인 희생양이 될 수 있다는 냉혹한 진실이 담겨 있다. 그래서 ‘법 없는 길’의 꿈은 여전히 아스라하다.

 

 

 

   《문장웹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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