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세대 선정작 리뷰]미완성의 미로를 돌아 나오기

 

[2014년도 차세대 예술인력육성 문학분야 선정작 리뷰 ]

 

 

미완성의 미로를 돌아 나오기

― 정영효,「연설을 원하게 되었다」 외 3편을 읽고

 

 

조재룡(문학평론가)

 

 

 

*

 

    시는 완성되지 않은 어떤 상태를 담아내, 매일 미완으로 남겨지는 어떤 삶을 우리에게 열어 보일 자그마한 가능성을 타진하는, 잘 알아주지 않는 모험일 때, 우리를 낯선 세계로 안내한다. 이 언어는 완성되지 않은 상태를 포섭한다는 사실로, 벌써, 확정되지 않은 무엇인가에 대한 언어, 확인하지 않은 말이며,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양태를 포획한 말이기도 하다. 정영효의 작품은 이러한 상태를 집요하게 궁리하고, 이와 같은 처지에 처한 화자를 내세우거나 그런 상황 속으로 파고들어, 결정되지 않은 것, 주장을 피하는 말들, 흔들리는 상태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미세한 감정을 지금-여기로 끌고 와, 제 시의 텃밭을 가꾸어 나간다. 이 심상은 우선 깃발 같은 것을 보면서 착안된다.

 

굴뚝이 아니라 첨탑이 아니라 움직이는 것
우리도 함께 움직이면서 그 너머를 기대하고
흩어지지 않을 만큼 행렬을 만들면
재빨리 지나칠 곳을 정리할 수 있다.

– 「깃발을 항해」 부분

 

    그는 이렇게, 깃발이 고정되어 있는 딱딱한 세계, 뾰족하게 솟아 있는 날카로운 세계로 우리를 안내하는 것이 아니라, 제 시에서 “흔들리는 곳에서 여행”을 시작할 수 있는 자그마한 계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가 깃발의 운동에서 보고자 하는 것은 “조금 늦게 도착하거나 조금 빨리 출발하는 약속” 같은 것, 그러니까, “날씨와 양심 그리고 죽음처럼” 삶이 우리 주변에서 단단하게 붙잡고 있는 고정관념처럼, “아직 나타나지 않은 곳”에서 우리를 미리 결정하고 우리를 “앞선 사람과 비슷하게” 줄 세우는 이 딱딱한 관념을 부정하거나 그 틀 자체를 깰 수 있는 모종의 가능성이다. 정영효에게 ‘삶의 계획-시의 계획’은 이렇게 “움직이는 미래”를 향하는데, 그것은 확정 속에서 단단한 하루를 그려 보며 살아가는 삶이 사실 기만에 가깝다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시인에게는 우리 모두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삶의 지표로 삼곤 하는 확정된 사실보다는, 확신에 찬 명제들을 물리칠 사유의 통로와 사유를 고안하는 과정, 무언가를 행한 다음에 부차적으로 주어지는 사유에로의 복귀가 아니라, 뭔가를 실행하는 동안에 생겨나는, 지금 생성 중에 있는 실천의 촉촉한 결들을 그러쥘 때, 우리의 삶에 내려앉을 수도 있는 미지의 감정과 감각이 더 중요한 것이다.

 

    확신할수록 멀어지는 게 있었다 과거에 대한 일인지 내가 아닌 것들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 생각이라도 하자며 걷는 동안 그런 궁금증을 뭐라 불러야 좋을지

 

    적당히 어울리는 말을 찾으려고 했다 그냥 기분이라 해버려도 될 것, 매끄럽게 닳은 테처럼 더 근사한 것을 얻기 위해 나는 계속 머뭇거렸다 비가 올 듯이

– 「우상들」 부분

 

    그는 거리를 걷기보다는 “오래 멈춘 채 거리를 들여다”보거나 “불빛에 섞여 가로수가 흔들리고 입간판이 흔들리고 외투가 흔들”리는 추이를 쫓으며, “흐리게 움직이면서 차츰 거세지는 형체들”이 세계에 남긴 흔적들에 주목한다. 물론 그가 흔들리는 시야로 비에 젖은 풍경에서 본 것은 그 자신에게도 항상 확정되지 않은 상태로 주어지며, 그렇게 해서 시인은 “이미 한 생각인지 새로 알게 된 것인지 알 수 없”는 제 감정의 주체가 되어, 삶에 드리워진 통념들을 물리고, 대신, ‘여전히’와 ‘아직’의 세계, 그것의 희미하기만 한 실현 가능성을 조심스레 타진한다.

 

    가만히 멈춘 채 알게 된 것을 확인해 보며 그걸 기억해 두기 위해 나는 애를 썼다 주변에 느낌이 들어찬 것처럼, 물어봐서 돌아온 것처럼 너의 연설이 닿는 순간이 그곳의 소감이 될 수 있다고 기대했다

– 「연설을 원하게 되었다」

 

    정영효에게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세상에서 우렁차게 울려 나오는 모든 말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거나, 말이 되지도 않는다. 그것은 벌써 나에게서 비껴난 말, 나를 비껴선 말이기도 하다. 이 시인이, 오로지 “느낌이 들어찬 것처럼, 물어봐서 돌아온 것처럼” 무언가에 가닿을 때에야, 비로소 “너의 연설”이 “소감”이 될 수 있다고 말할 때, 우리가 목도하게 되는 것은 소통 가능성이 아니라, 소통 불가능성의 가능성, 차라리 그것이 실현될 아주 희박한 확률이다. 타자의 말을 이해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물음 같지 않아 차라리 귀를 닫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타자의 정체성(타자의 말의 정체성)을 부정하거나 훼손하지 않고서도, 어떻게 나의 주관성, 그러니까 타자와 그의 말에 내 감정을 적재해 낼 것인가? “혼자 다룰 줄 모르는 일을 너에게 빌려”주려는 이 의지가 “너의 연설”에 내가 입회할 유일한 가능성일 수 있을 것이다. 정영효는 이러한 일이 무척 조심스럽고도 힘든 일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아무 말 없는 너를 계속 기다리는 게” 내가 쥔 “너의 연설”의 “유일한 내용”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소통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소통 불가능성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이 자리한 이후, 그러니까 충분히 타자가 내게 젖어들 때까지 기다린 이후, 타자를 그 자체로 보존하려 할 때 내 감정도 내려놓을 수 있는 방식을 정영효가 선택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는 이렇게 해서, “네 연설을 원하게” 된 나의 마음 상태를 “조급한 마음을 묶어 주듯 나를 다시 잡아 보면서”, 세계를 향해, 은밀하게 내비치고, 소통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쏘아 올린다.

 

형체를 버리고서야 조밀해지는
조밀해지고 나서야 깊이를 가두는
틈을 짚는 소리에 숲이 울기 시작했다

 

(…)

 

나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숲을 꺼내는 소리가 느껴졌지만

 

외곽까지 삼키지는 못했다
흩어진 공중을 향해 남은 떨림이 곳곳을 잡아
천천히 숲을 닫을 뿐이었다

 

북소리가 멎은 후에 길이 보였다
비로소 뚜렷해지던 숲의 경계에서

 

북소리가 사라진 것일까
숲이 멈춰버린 것일까

 

모두 끝났다고 짐작했을 때
조용해진 숲이 오히려 내게 물어오는 것 같았다.

 

가까워진 주변에서 여전히
나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들킨 게 없었지만 들리던 것은 있었다

– 「비밀」 부분

 

    정영효는 사물과 풍경과 말과 타자가 “형체를 버리고서야 조밀해지는/ 조밀해지고 나서야 깊이를 가”둘 때까지, 제 존재를 알리는 일을 행할 때까지, “멎은 후 길이 보일 때까지”, “모두 끝났다고 짐작”할 때까지, 기다릴 줄 아는 시인이다. 그는 이들과 소통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라, 소통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방식을 택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만, 사물과 풍경과 말과 타자를 그대로 보존한 채, 그들의 있음과 그들의 감각과 그들의 존재를 만지고 보고 듣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시인은 세계에 아주 조금만 자신의 감정을 내려놓는 문법을 들고 나와, 우리가 아직 가보지 못한 ‘아직’과 ‘여전히’ 사이의 공간을 개척해 내고, 그렇게 그 공간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타자의 존중이란 곧 타자의 보존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작고 섬세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힘주어 말한다. 그의 이 목소리에는 벌써 기다림과 움직임을 보존하려 하며, 불확실성에 거는 내기의 감각이 담겨 있고, 소통 불가능성의 가능성에 대한 조심스러운 타진의 의지가 배어 있다. 그의 목소리는 조금만 보여줘도 큰 울림으로 나를 돌아보게 하고, 기다림으로 전체를 돌보는 뛰어난 감각을 감추지 않는다.

 

 

 

   《문장웹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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