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무덤

 

 

종이 무덤

 

 

 

장은진

 

 

 



삽화_종이무덤

 

 

    가족 같은 강아지를 찾습니다.

 

 

    드디어 삼일 만에 강아지를 찾는 인쇄물이 벽에 붙었다. 컬러로 출력한 전단지에는 늘 그렇듯 강아지 이름과 잃어버린 장소, 특징, 연락처가 꼼꼼하게 적혀 있었다. 맨 밑줄 ‘사례금 있음’이란 문장에는 놓치지 말라는 듯 빨간색으로 밑줄이 두 개나 그어져 있었다. 남자의 예상과 선택은 이번에도 적중했다. 남자는 신나게 휘파람을 불며 전단지를 떼어 여러 번 접은 뒤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마트에 들러 부탄가스와 담배 한 갑, 너비아니를 샀다.
    방으로 들어서며 남자는 나나야, 하고 강아지 이름을 불러 봤다. 삼일 내내 불안한 표정이던 강아지가 귀를 쫑긋 세우며 남자를 돌아봤다. 제 이름이 맞는 모양이었다. 니 이름이 나나였구나? 남자는 주머니에서 전단지를 꺼내 녀석의 얼굴에 가까이 댔다. 생김새며 특징이 완벽하게 일치했다. 이따 집에 데려다줄게. 이 오빠가 지금은 배가 고파서. 남자는 라면을 끓이기 위해 버너에 부탄가스를 넣고 양은냄비를 올렸다.
    상자 안에는 안성탕면이 달랑 한 개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남자는 그제야 어젯밤 친구 셋이 소주를 들고 찾아와 라면 열 개를 앉은자리에서 해치웠다는 걸 상기했다. 남자는 책상에 앉아 급하게 편지를 쓰느라 그 술판에 낄 수 없었다. 돈 없는 놈들에게 남자의 자취방은 술 마시기에 부담 없고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눈치 볼 식구가 없으니 진탕 취하고 놀기에 그만이었고, 그러다 늦어지면 택시비 할증 걱정 않고 자고 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요즘 들어 남자한테는 상당한 부담이 되고 있었다. 주인집 아줌마는 방세도 제때 안 내는 주제에 사흘돌이로 술판까지 벌여 시끄럽게 떠든다고 불평했다. 주인집에는 대한민국에서 요즘 가장 무섭다는 수험생도 있었다. 남자 또한 편지 쓰는 일에 방해를 받고 있어서 그들의 방문이 슬슬 짜증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그들을 내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은 남자의 잠재적 ‘밥벌이’이기 때문이었다.
    라면 국물을 바닥까지 깨끗이 비운 남자는 담배 한 대를 태우고 방으로 들어왔다. 귀하게 자라 입맛이 까다로운 나나는 라면 같은 건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대신 나나는 맛좋은 너비아니 세 덩이를 게 눈 감추듯 해치웠다. 나나의 식사가 끝나자 남자는 유인물에 적힌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다. 통화음이 시작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여자가 황급히 전화를 받았다. 나나를 보호하고 있다는 남자의 말에 여자는 안도의 눈물부터 흘렸다. 남자는 알면서도 능청스럽게 댁이 어디냐고 물었고, 여자는 울먹이느라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건강하니까 걱정 마세요. 여자는 그제야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남자는 전화를 끊은 뒤 나나를 품에 안고 방을 나갔다.
    주인과 강아지의 재회는 늘 이산가족상봉만큼이나 극적이었다. 강아지에 대한 사랑과 애정이 남다를수록 강아지를 찾아 준 남자에 대한 감사 표현 또한 극진해졌다. 오늘 남자는 나나의 주인으로부터 사례금 삼십만 원을 받았다. 그것은 주인이 나나에게 부여한 존재가치였다. 돌아오는 길에 남자는 나나의 존재가치로 안성탕면 한 상자와 모나미 볼펜심 두 통을 샀다.

 

 

    *

 

    남자가 편지를 쓰는 시간은 주로 새벽이었다. 고즈넉한 새벽은 바닥에 눌러 붙은 감성의 마지막 찌꺼기까지 끌어올려 주는 고마운 시간이었다. 남자가 현재 관리하고 있는 친구의 편지는 모두 다섯이었다. 남자 앞에는 아리따운 여자들이 보내온 각양각색의 편지 다섯 통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남자는 편지를 한 장씩 읽으며 이면지에 답장을 써 내려갔다. 쓰다 글이 맘에 안 들면 가차 없이 구겨 어깨 너머로 던졌다. 털실처럼 동글동글 뭉쳐진, 실패한 편지는 벽에 한 번 맞고 튕겨 나와 방바닥으로 데구르르 굴러갔다.
    친구들은 남자를 세상에서 가장 불가사의한 놈으로 생각했다. 기똥차네. 누가 보면 연애를 백 년은 한 줄 알겠어. 친구들의 평가처럼 연애편지만 놓고 보면 남자의 연애 실력은 백 단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스물아홉 먹도록 연애 한 번 못 해본 바보였다. 물론 키스도 못 해봤다. 나는 왜 그 많은 세월 동안 연애를 못 해본 걸까. 왜 나는 바보가 되어야만 했을까. 어느 날 남자는 발그레한 분홍색 편지지를 앞에 두고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그때 남자의 양쪽 볼이 분홍빛으로 발그레해지기 시작했다. 가만히 떠올려 보니 연애를 할 뻔했던 순간, 그러니까 고백의 순간들이 자신에게도 있었음을 남자는 알게 되었다. 문제는 결정적인 타이밍에 남자나 상대방 쪽에서 꼭 방해꾼이 등장했다는 것이었다. 술기운에 용기를 얻어 고백하려는 찰나에 누군가 여자의 허벅지에 술을 쏟는다든지, 전화로 좋아한다고 말할라치면 악을 쓰며 폭주족이 지나간다든지. 그것은 마치 신의 고약한 장난 같은 일이었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을 놓쳐버리면 더 이상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갑자기 어색해진 두 사람은 그래 인연이 아닌 거야, 그때 고백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어, 지금 보니 내 타입이 아니네, 나한테 떡볶이밖에 못 사줄 위인이야, 가슴이 너무 납작해 등등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다 곧 그 상대를 잊었다.
    그렇지만 남자는 늘 연애에 목말라 있었다. 그것도 아주 미치도록. 언젠가 자신에게도 ‘연애’가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남자는 피씨방에서 눈치를 살피며 ‘키스하는 법’을 검색해 봤고, 필름 끊긴 친구 놈을 상대로 연습도 몇 번 해봤다. 그 나이에 키스가 서툴면 여자는 불안해할 수 있었고, 처음이란 게 들통 나면 민망함을 넘어 무능해 보일 것 같아서였다. 그렇다고 아무나 붙잡고 연애하자고 덤비는 건 남자 성격에 맞지 않았다. 남자의 연애편지가 기막히게 훌륭할 수밖에 없는 건 용광로처럼 들끓는 욕망 때문이었다. 남자는 그 끝없는 욕망과 무한한 상상력을 영양분 삼아 편지를 썼다. 편지를 쓰고 나면 온몸은 땀에 젖기 일쑤였고 너무 격정적일 때는 아랫도리가 부풀어 오르기도 했다. 그러니까 남자는 친구의 그녀들과 원 없이 두근대는 사랑을 했고, 그녀들이 남자를 향해 쏟아내는 밀어에 밤새 황홀해하다 잠 못 들기도 했다. 비록 대리모나 대리 운전처럼 대리 연애에 불과했지만, 그것은 남자의 불행하고 초라한 이십구 년을 아쉬운 대로 보상해 주었고, 남자도 그런대로 만족하고 있었다.
    남자는 이면지에 휘갈겨 쓴 글을 타자기로 정갈하게 타이핑한 뒤 자신의 인장이라고 할 수 있는 ‘4와 4분의 3의 키스’란 문장을 찍어 넣고 연애편지를 끝마쳤다. 어느새 좁은 들창으로 새순처럼 여린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

    “야! 도대체 편지를 어떻게 쓴 거야?”
    저녁에 한 친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친구는 격양된 목소리로 폭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친구가 하는 말을 끝까지 다 들어 주었다. 요지인즉 편지에 받는 사람의 이름은 물론이고 전혀 엉뚱한 내용이 적혀 있어서 여자 친구가 자신을 양다리 걸친 천하의 바람둥이로 오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장작불처럼 뜨거웠던 우리의 어젯밤? 유치 빤스다!”
    “그러니까 내가 누누이 말했잖아. 실수할 수도 있으니까 편지 받으면 꼭 챙겨 보라고. 기본도 안 지킨 니 잘못이 커. 인마!”
    남자는 자신의 잘못이 아닌 듯 차분하면서도 당당하게 얘기했다. 여러 명의 편지를 한꺼번에 관리하다 보면 누가 누구의 애인인지 여자들의 이름과 얼굴이 간혹 헷갈렸고, 누구와 누가 모텔에서 잠을 잤는지, 누구와 누가 놀이공원에서 바이킹을 탔는지 섞갈려 그런 일이 종종 발생했다. 이번처럼 편지 자체가 아예 뒤바뀌는 아찔한 경우도 있었다. 그런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남자는 애인에게 편지를 보내기 전에 반드시 읽고 확인하라고 친구들에게 당부했다.
    “다 넘어왔었는데, 망했어! 전화도 안 받아. 다신 그딴 편지 쓰나 봐라.”
    친구는 오해를 풀 수 없는 막막한 입장에 놓여 있었다. 오해를 풀기 위해 해명을 하자면 지금껏 편지를 제 손으로 쓰지 않았다는 걸 실토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래도 헤어져야 하고 저래도 헤어져야 할 판이었다. 친구가 남자를 원망하며 전화를 끊자 남자는 그들을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남자는 친구들이 편지를 부탁해 오면 제일 먼저 여자를 만나는 일부터 시작했다. 편지를 잘 쓰기 위해서는 상대방에 대한 충분한 정보와 관찰과 탐색은 필수라는 남자의 말에, 친구들은 흔쾌히 오케이 사인을 보내왔다. 남자는 편지를 핑계로 친구의 여자들이랑 호프집과 노래방을 오가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공짜로 술과 음식도 얻어먹었다. 함께 어울려 놀다 보면 간혹 끌리는 여자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차가운 이성(理性)이 나서서 안 돼, 라고 단호하게 선을 그어 주었다. 그날도 남자는 감자튀김을 집어먹으며 친구의 여자를 조목조목 관찰했다. 그런데 친구가 화장실 간 사이, 여자가 남자 옆에 엉덩이를 딱 붙이고 앉아 술을 따라 주었다. 나중에는 휴대폰으로 옆구리를 찌르며 전화번호 좀 찍어 달라고 했다. 처음 당한 일이라 남자는 당황했지만 역시나 듬직한 이성이 안 돼, 라고 벽을 쳐주었다. 굳이 이성이 나서지 않더라도 그 여자는 남자 타입이 아니었다. 여자는 세 통의 편지를 보내야 겨우 짧은 답장을 보내오는 불성실한 사람이었다. 남자가 판단하기에 양다리를 걸칠 사람은 친구가 아니라 그 여자였다. 늙고 병든 친구의 어머니를 제 부모처럼 모시고 살 만한 여자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래서 남자는 고의로 엉뚱한 이름을 적었고 지금까지와 상반된 다소 저질스러운 내용의 편지를 가짜로 지어 보냈다. 무엇보다 친구가 편지를 사전에 읽어 보지 않은 게 주효했다. 남자는 끊겨버린 전화기에 대고 중얼거렸다.
    “여자 보는 눈도 없는 게. 나중에 나한테 고마워할 거다. 이 자식아.”

 

 

    *

    고등학교 때 남자는 심심풀이로 연애편지를 대필해 준 적이 있었다. 친구들은 편지 한 장을 써주면 그 대가로 남자가 원하는 것, 밥과 담배를 사주거나 포르노를 보여주거나 콘서트장에 데려가 줬다. 그때는 지독히 돈이 없던 시절이라 학생 신분으로 공짜로 얻어 쓸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다 했다. 다행히 남자에게는 나이에 맞지 않는 감수성과 글재주가 있어서 편지를 써주는 것만으로 충분히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그 좋은 대필의 기회도 자연스레 사라졌다.
    기회가 다시 남자한테 찾아든 건 면접을 무사히 마치고 좁은 방에서 합격 전화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숫기라고는 전혀 없는 친구가 남자에게 전화를 걸어와 연애 상담을 하기 시작했다. 여자 친구에게 전화만 하면 목소리가 떨려 아무 말도 못 하겠다는 것이었다. 오죽 답답했으면 연애 한 번 못 해본 나한테 전화를 했을까. 이해가 가면서도 남자의 눈은 자꾸 벽시계를 향했다. 불통된 전화가 합격취소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엉뚱한 불안감에 남자는 어떻게든 친구와 통화를 끝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남자는, 그럴 땐 글이 직방이야, 라고 말했다. 그건 진짜 사실이었다. 사내자식이 사랑을 고백할 때 말을 더듬는 것만큼 찌질해 보이는 것도 없었다. 심장이 쿵쾅거리니 실수를 하는 건 당연할 테지만 박력을 보여줄 수 없다면 차라리 침묵하는 게 나았다. 반면 글로 하는 고백은 적당히 감성을 자극할 수 있고, 증거를 남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신중을 기하면 실수를 최대한 줄일 수 있었다. 글에는 말이 갖지 못하는 용기라는 게 있었다. 숫기 없는 놈한테 가장 맞는 고백법을 알려줬건만 친구는, 그건 자신한테 더욱 어려운 문제라며 한숨을 찌질하게 내쉬었다. 남자는 시간을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내가 써줄게 써줄게, 반복해 말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삼십 분 동안 이루어진 친구와의 통화 때문인지 그날 합격 전화는 끝내 오지 않았다. 새벽이 되도록 잠이 오지 않자 남자는 책상에 앉아 지금의 답답한 심정을 누군가에게 편지로 남겼다. 그 답답한 편지는 숫기 없는 친구의 여자한테 전해졌고 친구는 고맙다며, 그리고 종종 부탁한다며 남자의 주머니에 만 원 한 장을 찔러 주고 돌아갔다. 남자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빳빳한 종이를 오랫동안 만지작거렸다. 감촉이 좋았다. 그것은 남자가 모처럼 자신의 능력으로 벌어 본 돈이었다. 남자는 번듯한 직장을 잡을 때까지만 편지를 쓰자고 마음먹었다. 당장 다음 달에 내야 할 방세가 조금 모자란 형편이었다.
    오늘 새벽, 남자는 네 통의 편지를 썼으니 사만 원을 번 셈이었다. 백수 주제에 이만하면 꽤 쏠쏠한 수입이었다. 남자는 봉투에 편지를 넣어 하트 스티커로 입구를 봉하고 이면지는 동그랗게 구겨 방바닥에 버렸다. 남자는 편지를 쓸 때마다 수십 장의 이면지를 소비했고 편지를 다 쓰고 자리에서 일어나면 방바닥은 하얀 종이 뭉치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빈곤과 쓰레기는 무관했다. 남자는 빈곤을 알지 못하는 무심한 쓰레기와 더 무심한 비싼 가격의 쓰레기봉투 때문에 실패한 편지가 어느 정도 쌓이면 몰래 인근 공터로 들고 나가 소각했다.
    남자에게는 편지를 버릴 때 찢거나 그냥 버리지 않고 구겨서 버리는 버릇이 있었다. 종이 구길 때 나는 소리와 뭉쳐진 종이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작가가 된 것 같았다. 요즘은 원고지에 글 쓰는 사람을 보기 힘들지만 글이 맘에 들지 않을 때마다 원고지를 구겼던 옛 작가의 고뇌하는 모습이 남자에게는 작가의 전형으로 여겨졌다. 그때 종이를 구기던 남자의 손에 이력서 한 장이 들어왔다. 친구들이 수거해 가져다준 회사 파지에는 간혹 이렇게 이력서가 섞여 있었다. 사진은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이력서 주인공은 대학원까지 나왔음에도 별 볼일 없는 회사에서 떨어진 모양이었다. 남자는 자신의 이력서도 누군가에 의해 이렇게 취급됐을 거라 생각하자 기운이 빠졌다. 남자는 ‘윤정우’란 사내의 이력서를 구기고 다음 종이를 집어 들었다. 그것은 얼마 전 남자가 주인을 찾아 준, 나나를 찾는 전단지였다. 남자는 슬슬 행동을 개시할 때가 왔다고 생각하며 종이를 마저 구겼다.

 

 

    *

 

    강아지를 물색하기에 좋은 장소는 동물병원이었다. 남자는 맞은편 피씨방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동물병원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주도면밀하게 살폈다. 동물병원을 찾는 사람들은 강아지에 대한 애정이 모두들 각별했다. 하지만 그 ‘각별한 애정’에도 수위와 수준이 있었다. 남자가 지금 찾아야 하는 건 그 수위와 수준이 가장 높다고 보이는 사람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아직까지 남자의 판단이 빗나간 적은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좀처럼 그 대상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손톱으로 운동화 밑창에 박힌 돌멩이를 빼가며 장장 두 시간을 기다렸지만 그 ‘영광의 주인공’은 나타나지 않았다. 남자는 자신의 행동에 크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강아지에게 해를 입히는 것도 아니었고, 서로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기회가 되니 오히려 강아지에게나 주인에게나 잊지 못할 사건이 될 거라고 여겼다.
    운동화 밑창이 깨끗해지자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남자는 옆 건물 미니스톱에서 유리벽을 마주하고 앉아 컵라면을 먹었다. 먹으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다 먹고 나서는 입가심으로 월드콘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때 세련된 옷차림을 한 여자가 강아지를 안고 동물병원에서 나오는 게 보였다. 여자는 자동차 문을 열려다 말고 무단횡단 하여 미니스톱을 향해 빠르게 걸어왔다. 조금 다급해 보이는 여자는 편의점으로 들어서자마자 강아지를 바닥에 내려놓고 진열대 끝으로 달려갔다. 여자는 진열대에 가려 보이지 않았고, 살짝 등을 보이고 서 있는 점원은 난해한 표정으로 스포츠신문 십자말풀이를 하고 있었다. 강아지는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남자는 짧은 순간 여자와 강아지의 몸 어딘가에 새겨져 있을 바코드에 스캐너를 댔다. 삐, 소리와 함께 곧바로 정보가 전송됐다. 동물병원에서 미용을 마친 깨끗한 강아지, 여리고 눈물이 많을 것 같은 여자, 게다가 고급 자가용까지 몰고 다니는 강아지 주인.
    남자는 월드콘을 슬그머니 테이블에 올려놓고 강아지가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미니스톱 유리문을 열었다. 강아지는 남자의 계획대로 짤짤거리며 밖으로 나갔고, 남자는 조금 뒤따라가다 잽싸게 강아지를 낚아 올렸다. 그러고는 열심히 집을 향해 뛰었다. 남자는 그때 이상하게도 여자가 급하게 사야만 했던 물건과 점원을 쩔쩔매게 한 십자말풀이 속 낱말이 뭔지 궁금해졌다. 어쩌면 그 둘이 같은 단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남자는 괜스레 헛웃음이 나왔다.

 

    집에 도착했을 때 대문 앞에 자동차 한 대가 주차되어 있었다. IT 회사에 다니는 경수의 차였다. 숨을 헐떡거리며 대문으로 들어서자 경수가 방문 앞에 서서 남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경수는 남자의 절친 중 하나였다.
    “바쁘신 몸이 여기까지 웬 행차시냐?”
    “사람일이란 알 수 없다더니, 내가 김 작가를 찾게 될 줄이야.”
    경수는 스스로도 어이없는 듯 허허롭게 웃었다.
    “무슨 일인데?”
    “알면서 묻기는. 나 글재주 없는 거 천하가 아는 일 아니냐. 잘 부탁한다.”
    “너 제대로 물었구나. 그럼 언제 한번 봐야지?”
    “조만간 연락할게. 근데 그 개새끼는 뭐냐?”
    “그게…… 길을 잃었어.”
    “배고픈데 라면이나 먹고 갈까.”
    남자가 허둥지둥 자물쇠를 따자 경수가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
    “방 좀 치우고 살아라. 이게 뭐냐, 개집도 아니고.”
    경수가 축구공 차듯 종이 뭉치를 발로 뻥뻥 걷어찼다. 방 안은 며칠째 치우지 못한 종이로 잔뜩 어질러져 있었다. 남자는 며칠 전 라면에 넣을 계란을 사러 가다 공터에 동네 주민들이 모여 있는 걸 목격했다. 주민들은 쓰레기를 몰래 갖다 태운 몰지각한 작자를 이참에 잡아내자고 성토 중이었다. 찾으면 반 죽여 놓을 분위기였다. 그 때문에 한동안 처리하지 못한 종이가 좁은 방을 점거하고 있었다. 화난 동네가 잠잠해질 때까지 남자는 이 상태를 계속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라면이 끓을 동안 경수는 사랑에 빠진 눈으로 주절주절 여자 얘기를 늘어놓았다. 경수가 아니더라도 남자에게 편지를 부탁한 친구들은 전화로 자신들의 연애를 주절대곤 했다. 남자는 이야기들에 취해 마치 자신이 그 사랑을 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들기도 했다. 그런 착각이 없었다면 남자는 아마 편지를 잘 쓸 수 없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사랑을 제 안방처럼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당당한 지위. 그게 바로 연애 한 번 못 해본 남자가 연애박사가 된 이유였다.

 

 

    *

 

    경수는 급했는지 이튿날 바로 약속을 잡았다. 약속 장소는 호프집이 아니라 ‘마고’란 고상한 이름의 카페였다. 남자가 조금 의아해하자 경수는 희정 씨가 술을 못 해, 라고 자랑하듯 말했다. 남자는 옷을 대충 걸치고 방을 나섰다. 카페에는 경수 혼자 앉아 있었다.
    “옷 좀 잘 차려 입고 오지.”
    경수는 창피한 듯 남자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예상하고 있었던 말이었지만 남자는 내심 기분이 언짢아졌다.
    “내가 선 보냐. 근데 아직이야? 여자들 늦는 고질병은 어딜 가나 똑같구나.”
    “십 분쯤 늦을 것 같다고 전화 왔었어.”
    남자와 경수는 여자가 올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뭐가 그리 신나는지 경수는 엉덩이까지 들썩이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남자는 문득 경수가 왜 갑자기 자신을 찾아왔는지 궁금해졌다. 경수는 학창 시절부터 연애편지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고 하늘이 두 쪽 나도 남자한테 그런 걸 부탁할 녀석이 아니었다. IT 회사 직원답게 경수는 모든 면에서 최첨단이었고 노트북이나 디지털카메라, 휴대폰은 늘 최신기종으로 업그레이드하는 얼리어댑터였다. 사실 연애편지가 아니더라도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빠르고 간편한, 녀석만큼 세련된 매체는 주변에 얼마든지 있었다. 그건 누구보다 녀석이 더 잘 알고 있었다. 다른 놈들처럼 수단 방법 안 가리고 여자만 홀리면 그만이라 생각한다면 경수에게 그것은 더더욱 쓸모없었다. 준수한 외모에 탄탄한 직장, 그리고 빵빵한 부모까지. 그 자체가 여자를 현혹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고였으니 경수는 카사노바도 울고 갈 카사노바였다. 당연히 녀석이 울린 여자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러니 남자가 당장 짐작할 수 있는 건 경수의 여자가 미스코리아 뺨치는 미인이거나 특별한 매력과 능력을 갖춘 재원일 거란 것이었다. 철저하게 이과적인 두뇌를 가지고 있어서 ‘수(數)’에는 강하지만 ‘글’이라면 질색해 어릴 때부터 동화책도 안 읽었다는 경수에게 편지를 쓰게 한 여자. 예전의 경수라면 그런 여자는 맹탕이라고 거들떠도 안 봤거나, 며칠 데리고 놀다 축구공처럼 뻥, 찼을 것이다. 경수한테는 널린 게 여자니. 경수의 휴대폰으로 도착했다는 전화가 걸려오고 오 초 후 흰색 정장 차림의 여자가 카페로 들어섰다.
    “쟤야, 쟤. 어때, 어때?”
    경수는 흥분된 목소리로 단어를 두 번씩이나 반복해 가며 말했다. 솔직히 남자는 실망했다. 지금껏 경수가 울린 수많은 여자들에 비한다면, 박물관에서 일한다는 그 여자는 너무도 소박하고 평범해 보였다. 썩 미인도 아니었고 별 매력도 없어 보였다. 남자는 경수가 여자를 너무 많이 만나 드디어 머리가 어떻게 된 거라고 생각했다. 분노한 신이 녀석에게 여자를 볼 줄 모르게 하는 벌을 내린 거라고.
    여자의 평범함과 매력 없음은 두 시간 동안 계속된 대화 속에서도 여전했다. 편지를 핑계 삼아 친구의 애인들을 많이 만나 본 남자였지만 여자에게서 착하고 얌전하다는 것 말고는 특별한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다른 놈들 애인과 별다를 게 없는, 그야말로 길거리에 널리고 널린 타입의 여자였다. 남자는 고리타분하다는 느낌까지 받았고, 경수와 안 어울린다는 생각도 했다. 여자는 레스토랑으로 자리를 옮기자는 경수의 말에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사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문 경수는 화장실 쪽을 힐끔거리며 급하게 연기를 빨아들였다. 어려운 면접을 치른 것 마냥 긴장이 풀린 표정이었다.
    “담배도 못 피우게 한다.”
    경수는 자기 애인이 담배를 못 피우게 한다는 사실이 대견한 듯 웃으며 말했다. 그건 보통의 여자들이 연애할 때 내거는 흔하디흔한 연애 조건이었다. 선수가 그걸 몰랐을까. 남자는 정말로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있지 편지, 고물 타자기 말고 손글씨로 써서 주면 안 되냐? 자필 편지를 받고 싶단다. 너도 방금 봤겠지만 좀 구식인 데가 있어.”
    남자가 보기에는 좀이 아닌 것 같았다.
    “니가 편지지에 옮겨 적어.”
    “내가 좀 바쁘잖냐. 내 글씨 적당히 흉내 내서 써줘. 두 배, 아니 세 배 쳐줄게. 쟤랑 잘 되면 다 니 덕이다.”
    경수는 남자가 담배를 피운 것처럼 재떨이를 남자 앞으로 바짝 밀어 놓고 손으로 허공을 휘저었다.

 

 

    *

 

    경수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남자는 전봇대에 붙어 있는 전단지를 발견했다. 며칠 전 유괴해 온 그 강아지였다. 강아지 이름은 ‘해피’였고 생후 6개월 된 스패니얼종이었다. 중요한 건 전단지에 사례금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없다는 것이었다. 보통은 사례금액을 정확하게 명시하거나 아니면 ‘사례금 있음’이란 말이라도 적어 놓는 게 일반적이었다. 최고 100만 원을 사례금으로 내건 주인도 있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남자는 어떻게 해야 할지 조금 난감해졌다. 남자는 일단 전단지를 뜯어 동전지갑만 하게 접은 뒤 주머니에 넣었다. 전단지를 제작했다는 건 찾겠다는 의지는 있다는 뜻이었다.
    방문을 열자 종이 뭉치 속에서 잠들어 있던 해피가 꼬리를 흔들며 나왔다. 해피는 첫날부터 종이 뭉치를 제 집으로 생각하고 그 안에서 잠을 잤다. 해피는 남자가 주인이나 되는 것처럼 정신없이 짖어대며 무릎으로 뛰어올랐다. 머리가 나쁜 건지 성격이 좋은 건지, 해피는 진짜 주인을 벌써 잊어버린 것 같았다. 남자는 조금만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주인의 마음을 좀 더 애태우면 나중에 ‘사례금’이란 단어가 추가된 전단지가 새로 붙게 될 것이다.
    “과연 니 주인은 너의 존재가치를 얼마로 칠까?”
    해피는 그런 거에는 관심 없다는 듯 방 안 가득 쌓여 있는 종이 뭉치를 입으로 물어다 남자 손에 쥐어줬다. 던져 달라는 뜻이었다. 남자가 종이를 벽으로 던지자 해피는 공중으로 가볍게 몸을 날려 그것이 바닥으로 떨어지기 전에 잽싸게 낚아챘다. 놀라운 재주에 남자가 입을 벌리고 박수를 쳤다. 해피는 다시 남자의 손바닥 위에 동그란 종이를 올려놓았다. 그러나 강아지와 노닥거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경수에게 줄 편지를 지금 당장 써야 했다. 뭐가 그리 급한지 경수는 한 시간 후에 편지를 가지러 오겠다고 했다.
    남자는 책상에 앉아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경수의 편지라고 해서 특별히 다를 건 없었다. 남자는 다른 친구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만화적 낭만과 유치함, 문학적 감수성, 그리고 멜로 영화의 애절함이 묻어나도록 편지를 썼다. 그렇다고 매순간 고통스럽게 머리를 쥐어짤 필요는 없었다. 남자는 통속소설에 나오는 간지러운 문장과 영화 대사, 그리고 시집에서 빌려온 시구와 유행가 가사를 적당히 버무렸고 여자들은 그것에 남다른 감동을 받았다. ‘표절과 모방’에서 가장 중요한 건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하도록 교묘히 짜깁기하거나 단어와 그것의 배열을 살짝 바꾸는 기술이었는데, 편지 내용의 삼분의 이가 그 기술로 채워졌다. 모방은 제2의 창조라는 말처럼, 그러다 보면 원문보다 더 빛나는 문장 한 줄이 금세 만들어졌다. 물론 표절을 완벽하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평소 다양한 책과 영화를 섭렵해서 문장을 수집해 둬야 했다. 그것은 남자가 가진 하나의 능력이자 남자가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친구들과 그의 애인들은 프로의 편지를 조금도 의심하지 못했다. 그들은 프로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남자에게 거짓 편지에 대한 죄책감 같은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남자가 거짓 연애를 하고 있으니 거짓 편지를 쓰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남자는 인생이란 어차피 표절이고 모방이라고 생각했다. 잘난 놈들처럼 살고 싶어서 취직을 하고, 연애를 하고, 집을 사고, 스테이크를 먹지 않은가. 그래서 남자는 글재주가 아깝다는 친구들의 말에 자서전 대필을 하다 말고 패러디 작가가 돼보자며 패러디 소설을 써본 적도 있었다. 표절과 모방을 정당화하는 방식의 글 말이다.
    그런데 경수의 편지가 다른 편지들과 차이가 있다면 이번에는 그의 글씨체까지 흉내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완벽해야 하기 때문에 그건 표절과 모방보다 더 어려운 문제였다. 글씨체라는 건 자신의 정체성이기도 하지 않은가. 그래서 정체를 완벽하게 숨기기 위해 남자는 지금껏 편지를 타자기로 옮기는 수고를 해야만 했다. 남자는 컴퓨터를 구입할 만한 여건이 되지 않은 데다 주인아줌마의 전기세 타박도 무시할 수 없어서 벼룩시장에서 수동 타자기 한 대를 구입했다. 그것은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았다. 잘못 치기라도 하면 수정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편지지에 한 자 한 자 집중력을 갖고 타이핑해야 했고, 먹끈을 구하는 일도 어려웠다. 반면 좋은 건, 자판을 누를 때마다 쇠문자가 종이를 두드리는 소리에 지나가버린 노스탤지어를 느끼게 해준다는 것이었다. 그 옛날 상고에 다니던 큰누나가 자격증을 따기 위해 밤마다 다락방에서 두들겨대던 그 소리는 듣기 좋은 음악이었다. 남자는 그 덕분에 남들보다 일찍 팝송 가사를 익히듯 자판을 익힐 수 있었다. 미국의 작가 헨리 제임스는 그 소리에 집착한 나머지 죽기 전에도 타자기를 쳐달라고 했다지 아마.
    남자는 어렵게 경수의 글씨체를 흉내 내어 편지 쓰기를 마쳤다. 물론 다른 편지들과 마찬가지로 ‘4와 4분의 3의 키스’란 문장 옆에 경수의 이름을 적는 것으로 한밤의 편지를.

 

 

    *

 

    해피는 생긴 것 답지 않게 까다롭지 않아 아무거나 잘 먹었다. 특히 남자처럼 라면을 좋아했고 라면 국물에 식은 밥을 말아 주면 더욱 좋아했다. 해피 주인은 사례금을 줄 의사가 없는 듯했다. 그새 인쇄물은 벽에서 깨끗하게 사라졌다. 남자는 며칠 후에 수정된 전단지가 다시 나붙을 거라 기대하고 있었지만 아직까지 감감무소식이었다. 아무래도 이 녀석은 그냥 돌려줘야 할 것 같았다. 남자는 며칠만 더 기다렸다 해피 주인한테 연락을 하기로 했다.
    라면을 먹다 말고 남자의 눈이 책상 위로 향했다. 책상에는 어제 경수가 퇴근길에 전해 주고 간 분홍색 편지봉투가 놓여 있었다. 남자의 편지에 대한 답장, 그러니까 경수의 여자가 남자에게 쓴 편지였다.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다가가 그 편지를 집어 들었다. 봉투를 열어 편지의 첫 줄을 막 읽으려는 참에 경수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너란 놈, 진짜!”
    남자가 전화를 받자마자 경수는 다짜고짜 그렇게 말했다.
    “내일 나와라. 술 사줄게. 드디어 희정이가 날 받아 주겠대.”
    경수는 한참을 혼자서 떠들어댔다.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조그맣게 내쉬었다.
    “근데 4와 4분의 3의 키스가 뭐냐? 희정이도 그 말을 좋아했다며 호들갑 떠는데 당황해서 죽는 줄 알았다. 그냥 대충 얼버무리긴 했는데…….”
    그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저자 루이스 캐럴이 그의 첫사랑이었던 앨리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끝인사로 썼던 표현이었다. 루이스 캐럴은 그 외에도 ‘천만 번의 키스’와 ‘백만 분의 2의 키스’와 같은 표현도 썼었다. 남자는 그 문장을 읽을 때마다 그 키스가 순수하면서도 수줍은 소년의 키스일 거라고 상상했다. 그러나 앨리스와 사랑을 이루지 못한 루이스 캐럴은 평생 결혼도 못 해보고 총각으로 늙어 죽었다. 남자의 설명을 중간쯤 듣고 있던 경수는 그녀한테서 전화가 왔다며 서둘러 끊어버렸다. 남자는 들고 있던 여자의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일단 단정한 글씨체가 한눈에 쏙 들어와 읽는 데 불편하지 않아서 좋았다. 편지 내용은 남자의 편지에 대한 성실한 답장이었다. 그런데 편지를 읽어 내려갈수록 남자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그런 느낌은 난생처음이었다.

 

 

    *

 

    경수가 편지를 가지러 저녁에 남자 집을 찾아왔다. 안성탕면 한 상자와 맥주를 문 옆에 내려놓은 경수는 전보다 더 수북해진 방 안의 종이 뭉치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자존심을 다치고 싶지 않은 남자는 강아지가 저 안에서 자는 걸 좋아해 일부러 치우지 않았다고 둘러댔다. 남자는 방으로 들어오는 걸 내켜하지 않는 경수를 술이나 한잔 하자며 억지로 끌어당겼다.
    “희정 씨 어디가 좋냐? 솔직히 예쁜 얼굴도 아니던데.”
    남자의 질문에 경수는 큭큭거렸다.
    “요즘 같은 시대에 천연기념물을 어디 가서 만나겠냐.”
    “천연기념물?”
    “안 믿어지겠지만 내가 첫 남자란다. 남자랑 자본 적도 없대. 미래의 남편한테 결혼 선물로 자기 순결을 줄 거라나. 그 선물을 받고 싶어졌어. 세상에서 그보다 좋은 선물이 어딨어.”
    “너 결혼까지 생각해?”
    “솔직히 결혼은 그런 애랑 해야지. 살림 잘하고 애 잘 키울 수 있는. 너도 알겠지만 내가 만난 애들 중에 쓸 만한 애가 하나라도 있었냐. 희정이는 내가 찾던, 바로 그런 애야.”
    그런 애? 남자는 ‘그런 애’를 지금껏 찾아 헤매 왔다는 듯한 경수의 말에 화가 났다. 한때 경수는 ‘그런 애’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 경수는 ‘그런 애’를 어떻게 취급했던가. 맹물 같다는 이유로 나중에 헌신짝처럼 버리지 않았는가. 괘씸한 생각이 든 남자는 경수에게 ‘그런 애’의 존재를 상기시키기 위해 그 애의 이름을 넌지시 꺼냈다. 그러나 경수는 ‘그런 애’가 있었는지도 기억 못 하고 있었다. 남자가 좀 더 자세한 얘기를 꺼내려던 참에 눈치 빠른 경수의 휴대폰이 대화 사이로 끼어들었다. 경수는 발신자를 확인하더니 미치겠다는 듯 배터리를 빼버렸다. 경수의 하얗고 가지런한 의치가 형광불빛에 반짝였다.
    “누군데? 너, 혹시?”
    “아니야. 나도 이제 맘 잡았어. 원 없이 놀아 봤겠다, 결혼할 나이도 됐고 이젠 신중하게 만나야지.”
    해명에도 남자가 의심을 풀지 않자 경수는 이실직고했다.
    “아, 짜식 눈치 하나는. 얼마 전 클럽에서 만난 애야. 솔직히 희정이 만나다 보면 흐트러진 애들이 그립기도 해. 그래도 마음까지 주진 않아. 하도 귀찮게 해서 몇 번 만나 줬더니 자길 좋아하는 줄 아는지 맨날 전화질이야. 희정이한텐 비밀이다. 곧 정리할 거야.”
    “언제 희정 씨랑 같이 보자.”
    “편지 때문이라면 그래야지. 아무튼 니 글 솜씨는 백만 불짜리야. 부럽다 부러워.”
    경수 입에서 부럽다는 말이 나온 건 처음이었다. 그 말에 남자는 잠시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분이 좋아졌다. 친구들은 연애하는 것보다 글 쓰는 걸 더 어려워했지만 남자는 세상일이 글 쓰는 것만큼만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랬다면 남자도 경수처럼 좋은 직장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고 많은 연애를 해봤을 것이다. 남자는 경수가 떠나자 그녀의 편지를 봉투에서 꺼내 다시 천천히 읽어 봤다. 경수는 이런 정갈한 편지를 받을 자격이 없었다.

 

 

    *

 

    남자는 다른 친구들의 편지를 대충 마무리 지은 뒤 그녀한테 보낼 편지를 쓰기 위해 마음을 가다듬었다. 지금까지와 다르게 어떤 표절이나 모방 없이 아마추어가 되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참이었다. 남자는 그녀가 보내온 다섯 번째 편지를 들여다보며 한 줄 한 줄 신중을 기해, 진심을 담고 최선을 다해 답장을 써나갔다. 완벽한 창작을 하고 있는 남자는 그래서 괴롭고 고통스러웠다. 그래도 참아야 했다. 남자가 고통을 견딜 수 있는 건 고통 뒤에 찾아올 뿌듯함과 떳떳함 때문이었다. 남자는 시계를 들여다봤다. 글씨체에 신경을 쓰다 보니 평소보다 시간은 서너 배나 더 걸렸고 실패한 편지를 구기는 횟수도 많아졌다. 대신 바쁘고 신난 건 해피였다. 옆에 앉아서 해피는 입으로 종이 뭉치를 낚아채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남자가 실패한 편지를 해피는 한 번도 실패하지 않고 다 받아 물었다.
    남자는 그녀의 편지를 읽었을 때 난생처음,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그녀와의 만남은 지극히 평범했지만 편지는 은근한 매력으로 남자의 마음을 단번에 휘어잡았다. 그녀는 남달랐다. 문장력이나 표현력이 뛰어나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문장이 주는 분위기 같은 거였다. 문장의 외형은 흉내 낼 수 있어도 그 속에 흐르는 분위기란 베끼거나 따라할 수 없었다. 그것은 남자가 무수히 많은 편지를 쓰고 또 받아오면서 느꼈던 설렘과는 명백히 다른 종류였다. 그녀가 남자한테 보내온 설렘은 진짜였고, 아주 오래전 기억을 되살아나게 할 만큼 품격이 있었다. 머리로 쓰지 않은 편지, 과장하지도 꾸미지도 않은 그녀의 편지 앞에서 남자는 예전처럼 설렌 척하거나 억지로 설렘을 흉내 내어 만끽하려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냥 자연스럽게 모든 걸 내맡기면 되었다. 그러자 경수를 흉내 낸 억지스러운 글자들 사이로 남자의 필체가 서서히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남자는 대리 연애를 끝내고 그녀와 진짜 사랑을, 하고 있었다. 풍부하고 부드러운 감성을 지닌 그녀. 남자는 참을 수 없을 만큼 편지 속 그녀에게 호기심이 생겼다.
    남자는 한때 경수가 말한 ‘그런 애’를 좋아한 적이 있었다. 남자한테는 소중한 첫사랑이었기에 조심스러웠고 말을 건네기까지 두 달여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경수는 달랐다. 남자에게 위력을 과시하고 싶었던 경수는 맘에도 없으면서 일부러 ‘그런 애’에게 접근했고 며칠 사귀다 흥미가 없다며 차버렸다. ‘그런 애’는 그 후 ‘다른 애’가 되어버렸다. 남자는 이번만큼은 그녀를 ‘다른 애’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경수가 남자 앞에서 위력을 과시했듯 남자 또한 경수가 보는 앞에서 위력을 과시하고 싶었다. 확실히 경수는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된 여자를 만났다. 아쉽게도 신은 분노하지 않았고, 이제야 녀석에게 제대로 된 여자를 고를 줄 아는 안목을 준 것이다. 그에 남자는 분노했고 이제야 남자에게 제대로 된 용기가 생겼다. 남자는 그녀를 빼앗기로, 자신의 판단이 옳다면 그녀 또한 자신을 선택할 거라 믿었다. 경수는 그녀의 선물을 받을 자격이 없었다. 남자는 녀석에게 상실감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남자는 편지의 마지막 문장인 ‘4와 4분의 3의 키스’ 옆에 향수 한 방울을 떨어뜨렸다. 방 안 가득 퍼진 향수 냄새에, 남자는 편지를 쓰는 내내 계속되었던 긴장에서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편지를 봉하고 의자에서 일어나자 해피가 꼬리를 흔들며 종이를 던져 달라고 보챘다.
    “다 써서 이젠 없어.”
    남자는 편지 쓰는 데 정신이 팔려 해피 주인한테 전화한다는 걸 깜빡 잊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남자는 전단지에 적혀 있는 연락처로 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결번이었다.

 

 

    *

 

    단정하게 옷을 차려입고 카페에 도착했을 때 경수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책을 읽고 있었다. 그녀를 보자 남자는 가슴이 뛰기 시작했고, 그녀가 남자에게 보내왔던 달콤하고 순수한 편지 속 문장들이 고스란히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남자가 다가갔을 때 그녀는 놀란 듯 얼른 책을 덮었다. 『위대한 개츠비』였다.
    “경수 씨가 조금 늦는대요.”
    “네.”
    남자는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좋을지 몰라 고민했다. 자꾸만 길어지는 침묵이 어색했는지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경수 씨랑은 고등학교 때부터 절친했다구요? 경수 씨 학창 시절은 어땠어요?”
    그녀는 호기심 가득한 눈망울을 하고 물었다. 머리만 믿고 놀기 좋아하고, 여자 꼬시는 재주 하나는 비상해 양다리를 넘어 문어다리였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 반짝이는 눈동자를 배신하는 시커먼 말을 꺼내 놓을 수 없었다.
    “남자들 학창 시절이라는 게 다 그렇죠 뭐. 근데 경수 놈 어디가 좋습니까?”
    그녀는 복숭아빛 얼굴을 한쪽 손으로 감싸더니 수줍게 말했다.
    “전에는 그저 그런 사람인 줄 알았는데, 편지 받고 생각이 달라졌어요.”
    남자는 그 말에 마음이 우쭐해지더니 자신감이 생겼다. 그러나 곧 죄책감이 찾아들었다. 따지고 보면 남자의 편지가 그녀를 경수에게 옭아매게 했다는 뜻이니까.
    “『위대한 개츠비』를 읽고 계시네요?”
    “경수 씨가 편지에서 감명 깊게 읽었대서…….”
    “아주 좋은 책이죠. 하루키가 『상실의 시대』에서 그런 말을 했어요.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읽은 사람이면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친구 아니랄까 봐 경수 씨랑 똑같은 말을 하네요. 그러고 보니 두 사람 비슷한 데가 많은 것 같아요.”
    그녀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반짝이는 걸 본 남자는 쑥스러워서 바짝 마른 입술을 오므렸다.
    “이 책 저도 두 번째 읽는 중인데, 형수 씨는 세 번 읽으셨어요?”
    “아니, 두 번이요. 나머지 한 번은 기억이 가물해지면 그때 읽으려구요. 세 번 읽게 되면 우리도 친구가 될 수 있을까요?”
    실은 애인이 될 수 있을까요? 라고 묻고 싶었다.
    “그럴 수도 있겠죠.”
    남자는 그녀의 말에 벌써부터 눈앞이 아득해지면서 『위대한 개츠비』에 대한 기억이 가물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집으로 빨리 달려가 나머지 한 번을 읽어버리고 싶었다.
    “희정 씨는 개츠비 같은 사람 어때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는 거요.”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죠. 그래서 개츠비가 위대한 거 아니겠어요.”
    “그런 사람이 있다면 한 번에 알아볼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데이지처럼 실수하지 않고…….”
    좋아하게 됐다고 말해버릴까. 아니 당신에 대해 깊이 알고 싶다고 말할까. 남자는 그녀의 개츠비가 되고 싶었다. 위대해지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녀석의 실체를 낱낱이 폭로해야 했다. 남자는 지금이 가장 좋은 때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경수한테 더 깊이 빠져들기 전에. 여기서 지체하면 돌이키기 힘들어질 것이고 서로에게 상처만 남을 것이다.
    “경수 편지 말인데요…….”
    “저기 경수 씨 오네요.”
    그녀가 책을 가방에 집어넣으며 경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항상 그렇듯 녀석은 운이 좋았다. 경수는 평소와 다르게 깔끔하게 차려 입고 나온 남자를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봤다.
    “니가 웬일이냐. 어쭈 향수까지?”
    그 말에 남자의 얼굴이 붉어졌고, 그녀는 코를 살짝 킁킁거렸다.

 

 

    *

 

    잔뜩 취해 집으로 돌아온 남자는 책상에 앉아 편지를 썼다. 오늘 본 그녀의 모습들을 떠올리며, 그녀 앞에서 망설였던 바보 같은 자신을 책망하며 한 줄 한 줄 심혈을 다했다. 남자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에게 편지를 써본 적이 없음을 알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보낸 적이 없었다. 수없이 많은 밤을 지새우며 많은 편지를 썼지만 차마 부칠 용기가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밤새 쓴 편지를 읽고 나면 밤에 충만했던 그 용기는 어디로 가버렸는지 부끄러움과 한숨만 남았다. 유치하게 과장된 생각과 잘못된 표현과 문장들, 그리고 그녀들에게 부담을 주는 너무 앞선 말과 희망들. 편지는 매번 이런저런 이유로 갈기갈기 찢겨 쓰레기통으로 들어갔고, 사랑의 감정도 그날부로 그렇게 폐기처분이 됐다.
    지금 남자가 가지고 있는 용기란 아마도 진짜가 아닐 것이다. 그건 자신의 존재가 경수 뒤에 감춰져 있기 때문에 생겨난 반쪽짜리 용기였다. 그러나 그녀에 대한 관심만큼은 진심이었다. 남자는 그녀에게 편지를 쓰는 내내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편지를 읽어 봤고, 잘못된 문장은 바로 고쳤고, 앞선 희망은 잠시 뒤로 미뤘다. 남자가 그녀를 좋아한다는 건 그녀의 편지가 미치도록 기다려진다는 것으로도 충분히 증명되었다. 그녀의 편지는 경수가 아닌 남자에게 보내는 마음이기 때문이었다. 남자가 할 수 있는 건 그녀가 자신을 알아봐 주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남자는 누군가에게 쓸 편지가 있고, 할 얘기가 있다는 건 아주 즐겁고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편지 또한 일종의 대화니까.
    남자는 편지 말미에 적어 놓은 경수의 이름 초성을 ‘ㅎ’으로 바꿔 ‘형’으로 만들었다. 이 편지는 처음으로 경수가 아닌 형수, 남자의 이름으로 전달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남자가 가질 수 있는 마지막 용기였다.

 

 

    *

 

    라면 한 그릇을 다 비운 해피는 더 달라고 남자의 팔로 기어올랐다. 남자는 해피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 중이었다. 그럴듯한 직장이 있다면 모를까 현재 남자가 데리고 있기에는 여러모로 버거웠다. 사람을 잘 따르는 녀석이라 어딜 가든 예쁨 받고 잘살 것 같아서 공원에 내다버리거나 부잣집 대문 밑으로 몰래 밀어 넣고 오려고도 생각했다. 마지막에 가서는 원래 주인을 찾아 주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아 동물병원에 들렀다. 남자는 미용을 담당했던 아가씨로부터 다행히 여자의 바뀐 전화번호를 알아낼 수 있었다. 수화기 너머로 해피 주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마 전에 강아지를 샀어요. 몸집도 작고 얌전하고 똥오줌도 잘 가려요. 버리든지 죽이든지 댁이 알아서 하세요.’ 짐작과 달리 해피 주인의 전화 목소리는 차가웠다. 남자가 아는 해피는 붙임성이 좋았고 똥오줌도 잘 가렸다. 해피가 해피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흔하고 촌스러운 데다 고심한 흔적이라곤 전혀 없는 이름. 그런 성의 없는 이름을 갖다 붙인 강아지한테 사랑을 줄 리 없었다. 남자의 선택은 최초로 실패로 돌아갔고, 해피의 존재가치는 0원으로 밝혀졌다. 남자는 미안한 생각이 들어 해피의 그릇에 라면을 더 퍼주었다. 식사를 마친 남자는 팔베개를 하고 바닥에 누웠다. 남자는 해피를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하다 잠이 들었다.

 

    남자는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잠을 깼다. 창밖에는 어느새 어둠이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방문을 열어젖힌 건 경수였다. 경수는 넥타이를 잡아 늘이며 방문 밖에 서서 남자를 무섭게 노려봤다.
    “내가 지금 희정이한테 무슨 꼴을 당하고 온 줄 알아?”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설 뿐 경수 앞으로 다가가지 않았고, 경수 또한 방 안으로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종이 뭉치와 라면그릇이 어지럽게 늘어져 있는 더러운 방이었다.
    “양처럼 순한 계집애가 눈을 뒤집고 뺨을 갈기는데 미치는 줄 알았어! 너 다른 애들 여자한테도 그런 식으로 접근했냐? 그래서 재미는 몇 번이나 봤냐? 니가 어디까지 가나 수상해서 쭉 지켜봤는데.”
    경수는 기가 막힌 듯 중간에 말을 멈췄다. 경수의 손에는 그녀한테 보냈던 남자의 편지가 전부 들려 있었다.
    “너 일부러 편지에 향수 뿌리고 글씨체 바꿨지? 일부러 만나자고 해서 똑같은 향수 떡칠 하고 나온 거지?”
    “희정 씨는 어떻게 안 거야?”
    “바보가 아닌 이상 그걸 누가 몰라. 어떻게 내 편지에 니 이름을 적을 수 있어? 너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야. 그때 내가 니 여자 뺏었다고 똑같이 복수하겠다는 거냐? 그건 뺏은 것도 아니지. 니가 걔랑 사귄 것도 아니었잖아! 고백 한 마디 못 한 멍청이 주제에.”
    “희정 씨 화 많이 났어?”
    “그걸 말이라고 해? 오늘부로 우리 사이도 끝이다.”
    방문 앞에서 돌아섰던 경수가 화가 덜 풀린 듯 다시 돌아섰다.
    “그날 편의점 앞에서 저 개새끼 훔치는 거, 다 봤다. 사는 게 그렇게 힘들었냐? 진작 나한테 말하지 그랬어. 우리 아버지한테 얘기하면 한 자리 마련해 줄 수 있었을 텐데. 희정이가 개나 훔치는 너 같은 놈한테 관심이나 있을 것 같으냐? 연애하고 싶으면 취직부터 해. 뭐가 우선인지도 모르는 새끼. 편지? 그깟 걸로 뭘 할 수 있는데? 너 설마, 희정이 선물이 탐나서 그랬던 건 아니지?”
    “희정 씨도 날 좋아해. 편지에…….”
    “개새끼, 웃기고 있네. 방구석에서 몇 년 썩더니 머리까지 돌았냐!”
    남자도 끝에 가서는 화가 나기 시작했다. 남자는 자기가 알고 있는 욕을 경수에게 전부 해주었다. 경수가 구둣발로 방으로 들어와 남자의 멱살을 꽉 움켜쥐어 벽으로 밀쳤다. 그러고는 손에 들고 있던 편지를 짝짝 찢어 남자의 얼굴로 뿌렸다. 향수 냄새가 퍼졌다. 경수는 마지막으로 방 안을 휘둘러본 뒤 해피를 걷어차고 나가버렸다. 해피가 깨갱거리며 방구석으로 몸을 피했다.

 

    남자는 그녀한테서 전화가 올 거라 확신하고 밤새 휴대폰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녀한테 하고 싶은 말도 다 준비해 두었다. 그동안 주고받은 편지 속에서 그녀는 데이지가 아니었다. 그녀는 속물적이지 않았고 늘 올발랐으며 진정한 사랑이 뭔지 분명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확신과 달리 그녀한테서 전화 같은 건 걸려오지 않았다. 남자는 그녀가 정말 화가 많이 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실은 그녀는 남자의 전화번호를 모르고 있었다. 어쩌면 프로인 그녀도 한때 남자가 그랬던 것처럼 거짓 연애를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선물이란 것도 그럴 듯하게 포장만 요란하게 한 것인지도. 또 어쩌면 남자는 현실의 그녀가 아닌 편지 속 그녀하고만 사랑을 한 건지도. 프로를 알아보지 못한 남자는 정녕 프로가 아니었는지도.

 

 

    *

 

    늦은 저녁에 친구 한 놈이 만취한 상태로 소주를 들고 남자의 집을 찾아왔다. 남자가 편지를 써주던 친구 중 하나였다. 남자는 걸음도 잘 걷지 못하는 친구를 부축해 이불 위에 눕히고 안주로 라면을 끓였다.
    “나 걔랑 깨졌다. 니 편지도 별 효력이 없더라.”
    잘 돼도, 못 돼도 모두 다 남자 탓이었다. 남자는 종이 잔에 술을 한가득 따라 친구에게 건네고 나머지를 병째 들이켰다. 술이 쓰다고 느낀 건 참 오랜만이었다. 친구는 종이 잔을 내려놓더니 아주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그 여자를 아주 많이 좋아한 모양이었다. 남자는 혹 자신이 편지를 잘못 써서 헤어진 게 아닌가 싶어 괜히 미안해졌다. 자세한 얘기를 해달라고 했지만 친구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술만 마셨다.
    남자는 이제 편지를 그만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편지란 상대방을 생각하고 느끼면서 손수 써야 하는 것이었다. 사랑을 대신해 줄 수 없듯 편지도 그러했다. 대신 남자는 자서전 대필 말고 진짜 자신의 글을 써볼까 생각했다. 어떤 종류의 글이든 자기 글을 쓴다면 세상살이가 지금보다는 조금 쉬워질 것 같았다. 자기 이름을 밝히고 진심을 담아 쓴 글로 돈을 버는 건 과연 어떤 느낌일까. 남자는 조용히 모나미 볼펜과 종이를 집어 들었다. 친구는 어린애처럼 울다 잠이 들었다.

 

 

    *

 

    다음날 남자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친구는 가고 없었다. 많이 마시더니만 친구가 누워 있던 이불에는 한반도 대신 13억 인구를 자랑하는 중국 대륙이 축축한 노란빛으로 그려져 있었다. 민망했던 건지 미안했던 건지 친구는 그 위에 만 원 두 장을 다소곳이 올려놓고 갔다.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들창을 내다봤다. 이불 빨래하기에 더없이 좋은 날씨였다.
    남자는 주인집에서 커다란 고무 다라이를 빌려 그 안에 이불을 넣고 자근자근 밟았다. 친구가 싸놓고 간 오줌, 삼 년 묵은 찌든 때, 지층처럼 쌓여 있던 밤의 고독과 그리움들이 거품을 일으키며 남자의 발아래서 탁하게 출렁였다. 개운한 마음으로 빨랫줄에 이불을 털어 널고 방으로 들어왔을 때 문자메시지 수신음이 울렸다. 경수가 보내온 것이었다. 그녀와 곧 결혼하게 될 것 같다는 소식이었다. 그녀의 역할은 데이지였다. 개츠비가 위대할 수 있었던 건 데이지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던가.
    남자는 메시지를 삭제하고 방바닥에 드러누웠다. 해피가 다가와 남자 옆에 바짝 누웠다. 해피를 버리지 않기로 한 건 잘한 일이었다. 해피는 모두 잠든 새벽에 글을 쓸 때,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남자가 구겨서 던지는 실패한 종이를 일일이 받아 줄 것이다. 해피를 심심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남자는 무엇이든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해피는 불평하지 않고 함께 라면까지 먹어 줄 것이다.
    해피가 추운지 남자의 품을 벗어나 종이 뭉치 속으로 파고들어갔다. 방구석에는 어느새 치우지 못한 종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것은 마치 무덤 같았다. 남자는 무덤처럼 쌓인 실패한 편지를 보며, 그 수만큼 자신의 인생이 극복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덮을 이불이 없어 춥다고 느낀 남자는 해피를 따라 종이 속으로 들어가 누웠다. 그곳은 공기도 잘 통하고 아늑했으며 조금 따뜻했다. 남자는 지금, 그동안 자신이 사랑했던 수많은 여자들에게 원 없이 파묻히고 또 둘러싸여 있었다. 남자는 그 수많은 여인들에게 마지막으로 4와 4분의 3의 키스를 보내고 눈을 감았다. 곧 스르르, 깊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문장웹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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