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_차세대2차_희곡]태양이 마르지 않는한

 

[2014년 2차 차세대예술인력육성 문학분야 선정작 – 희곡]

 

 

태양이 마르지 않는 한

 

 

 

조진주

 

 

 

    1. 배경

 

      1961~1964년 / 뉴욕

 

 

    2. 등장인물

 

      야고보(K) / 23세 / 거리 화가
      센트럴파크에서 일어난 네 건의 연쇄살인 용의자.
      야고보의 집에서 피해자 네 명의 살해 직후 모습이 담긴 스케치가 발견되면서 수사가 급물살을 타고 범행 장소에서 태연히 그림을 그리고 있던 야고보가 체포된다.
      체포 즉시 네 건의 살인을 인정한 야고보는 추가로 세 건을 더 자백한다. 그러나 세 구의 시신이 묻힌 자리에 대해 함구하고 있어 재판이 무기한 연기되고 있다.

 

      박사 / 35세 / 정신과 의사
      수년 전 당시로선 불치라 여겨졌던 해리성정체장애 환자‘K'를 완치시키며 큰 명성을 떨친다. 준수한 외모와 공격적인 사업 마인드로 단숨에 뉴욕 최고의 정신과 의사라는 명성과 부를 거머쥔다. 그러던 중 진료실 계단에서 구르는 사고를 당해 수개월간 혼수상태를 겪고 깨어난다.
      최소한의 회복 기간을 거쳐 급하게 진료소에 복귀하지만 이미 시들어버린 명성을 회복하기가 너무 어려워 큰 슬럼프를 겪던 찰나 센트럴파크 연쇄살인 사건의 용의자‘야고보’의 정신 감정을 맡게 된다.
      세상의 이목이 집중된 이 사건을 통해 과거의 명성을 되찾을 수 있음을 직감한 그는 사고 후유증으로 최근 수년의 기억을 망각했다는 사실을 숨기고‘야고보’의 주치의가 되어 정신 감정을 진행한다.

 

      윈터 / 30세 / 박사의 조수
      진료소와 박사에게 헌신하며 오직 일뿐이다.
      ‘야고보’의 정신 감정을 맡은 이후로 눈에 띄게 불안을 드러낸다.

 

      프랭크 / 46세 / 형사
      상부의 지시에 철저히 타협하는 생계형 경찰이다.
      사건 사고가 많은 뉴욕시에 이골이 난 탓에 웬만한 흉악 범죄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그러나 ‘야고보’의 사건을 맡은 이후 단단한 그의 내면에도 점점 지각변동이 일어난다.

 

      그 외 역할(멀티 가능)
      여자 : 올가, 줄리아, 속죄녀, 가브리엘, 제인
      남자 : 수도원 원장, 마틴, 샘, 데이비드
      목소리 : 신문팔이, 판사, 검사, 수화통역사, 행인 1, 2

 

 

    3. 무대

 

      1. 무대의 가장 안쪽, 2층 높이의 폭이 넓은 가교가 있다.
      – 가교는 건물의 2층, 무의식 세계 역할을 한다.
      (극장에 따라 단상으로 대체 가능)
      2. 진료실 벽 그림을 붙일 수 있는 액자가 있다.
      액자와 벽 사이 조명 장치가 되어 있어 스탠드처럼 액자를 끄고 켤 수 있다.
      – 액자는 과거와 현재를 구분하는 역할을 한다.

 

 

    4. 줄거리

 

      1959년 영국 케임브리지 출신의 미남 의사가 브로드웨이 한복판에 위치한‘윈터 가든’극장을 인수해 그곳에‘정신상담소’를 오픈한다. 야심과 실력이 넘치는 이 젊은 의사는 순식간에 브로드웨이의 이슈가 되고, 스타 못지않은 인기를 누린다. 그러나 승승장구도 잠시 진료실 지하로 향하는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심하게 구르는 사고가 일어나 수개월간 혼수상태를 겪는다. 조수 ‘윈터’의 헌신적인 간호로 겨우 자리를 털고 일어났지만, 최근 수년간의 기억과 그간의 공백이 좀처럼 회복되지 않아 큰 슬럼프를 겪는다.
      그 무렵 뉴욕은 센트럴파크 연쇄살인 사건으로 떠들썩해진다. 센트럴파크 곳곳에서 동일한 수법으로 살해된 네 구의 시신이 발견됐고, 곧 용의자 ‘야고보’가 검거되었다. ‘야고보’는 즉시 네 건의 살인을 인정한다. 그리고 세 건의 살인을 더 자백한다. 그러나 시신 세 구의 행방에 대해선 굳게 입을 다문다. 진위 여부가 묘연한 세 구의 시신으로 재판이 무기한 연기되고 경찰은 박사에게‘야고보’의 정신 감정을 의뢰한다.
      마침내 상담이 시작되고 야고보가 과거 박사가 임상 치료를 했던 ‘K'와 동일 인물이라는 뜻밖의 사실이 드러난다. 박사는 자신이 망각한 과거를 기억하고 있는 ‘야고보’의 존재에 두려움을 느끼고, 야고보는 박사의 과거에 석연치 않은 무언가가 있었음을 암시하며 박사의 숨통을 조인다. 과거의 사건에 대한 유일한 목격자인 윈터는 3년 전 박사가 사고를 당한 그 무렵 ‘윈터 가든 진료소’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완강히 함구한다. 결국 재판 날짜가 다가오고 각자의 이유로 진실을 밝힐 수 없는 K, 박사, 윈터는 목숨을 건 두뇌싸움을 시작한다.

 

 

    프롤로그

 

      무대 가운데 검은 옷을 입은 K 웅크리고 앉아 있다.
      K 무릎을 모으고 무릎 사이에 고개를 묻고 있다.
      K의 앞쪽으로 석양이 질 무렵 공원 풍경이 펼쳐진다.
      조명 석양빛, 행인을 의미하는 그림자들 빠르게 오간다.
      K가 고개를 든다. K 주머니에서 낡은 개 목걸이 하나를 꺼내 내려놓는다.
      K 행인들을 향해 수화로 ‘도와주세요’라고 한다.
      K 계속 반복해서 ‘도와주세요’라고 수화를 한다.
      자전거가 멈추는 효과음, 무대 위로 가브리엘(여, 15세) 등장.
      가브리엘 K에게 다가간다. 가브리엘 수화로 말을 건다.
      * 이후 인물들과 K는 수화로 대화하고, 그들의 대화는 소리로 흐른다.

 

 

    가브리엘(소리) : 아저씨, 괜찮아요?

 

      K 개 목걸이를 가브리엘에게 보여준다.

 

    K(소리) : 내 개가 덫에 걸렸어.
    가브리엘(소리) : 저런, 어디 있죠?
    K(소리) : 저쪽 숲.

 

      K 멀리 숲 쪽을 가리킨다. 숲 쪽을 바라보는 가브리엘, 그대로 정지화면처럼 멈춘다.
      다시 사람들이 오가는 그림자와 효과음. K 사람들을 향해 수화를 시작한다.
      제인(여, 27세)과 데이비드(남, 27세) 등장한다. 제인 K에게 다가간다.
      제인 K에게 수화로 말을 건다.

 

    K(소리) : 제발, 내 개가 덫에 걸렸어요.
    제인(소리) : 우리가 도와줄게요. 강아지는 어디 있나요?
    K(소리) : 저쪽 숲.

 

      제인과 데이비드, K가 가리키는 방향을 쳐다보는 상태로 정지화면처럼 멈춘다.
      K ‘도와주세요’라는 수화를 계속 반복한다.
      수차례 반복되며 느리게 템포를 갖는 K의 수화, 숨소리 가빠졌다 억눌러지기 반복.

 

    K(소리) :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내 손가락이 말을 듣지 않아!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비틀어버릴 모가지가 필요해!

 

      가브리엘, 제인과 데이비드 위에 핀 조명 들어온다.
      K 일어나 양손으로 개 목걸이의 좌우를 잡고 팽팽하게 당기면, 목이 꺾어지는 효과음과 함께 가브리엘, 제인, 데이비드의 목이 순서대로 꺾인다.
      핏빛 조명과 함께 날카로운 비명소리. 암전.

 

 

    1. 살인 스케치

 

      진료실(1964년 7월 1일)
      무채색 옷을 입은 윈터 작은 화분을 들고 들어온다.
      이곳저곳에 화분을 둬 보며, 유난스럽게 고민한다.
      결국 책상 위에 놓는데, 문 열리고 박사 들어온다.
      박사 고급스러운 캐주얼 차림에 안경을 쓰고 있다.
      윈터 자기도 모르게 화분을 가린다.

 

    박사 : 뒤에 뭔가?
    윈터 : 아무것도 아니에요.
    박사 : 그래?

 

      박사 씩 웃더니, 책 하나를 휙 던진다. 윈터 책을 받느라 움직이고, 박사 화분 본다.

 

    박사 : 화분?
    윈터 : 작아서 별로 눈에 안 띄어요.
    박사 : 그럴 걸 왜 샀나?
    윈터 : 네?
    박사 : 눈에 안 띄게 할 거 왜 샀냐고.
    윈터 : 그게…….
    박사 : 부탁한 건!
    윈터 : 거의 마쳤습니다.

 

      윈터 책상 위 신문 스크랩을 챙긴다.
      박사 커피를 따르는데, 오른손이 약간 불편하다.

 

    윈터 : 제가 드릴게요.
    박사 : 그게 더 급해.

 

      윈터 스크랩을 빠르게 정리해 브리핑을 시작한다.

 

    윈터 : 연쇄살인 사건은 3월에서 5월 사이에 일어났습니다.
        15세 소녀 가브리엘, 23세 여성 수잔, 27세 동갑내기 커플 제인과 데이비드 총 네 명의 피해자가 모두 센트럴파크 내에서 살해당했습니다.
    박사 : 그중 가장 화제가 된 피해자는?
    윈터 : 마지막 피해자인 제인과 데이비드입니다.
    박사 : (신문 본다) 정확히는 제인이군. 주지사의 딸이 청각장애 청년과 연애 중이었다…… 대중들은 러브스토리를 좋아해.
    윈터 : 최근까지 거의 매일 기사화됐습니다.
    박사 : 관심이 최고조에 이른 이 시점에 용의자 등장.
        오늘을 기준으로 제인과 용의자 어느 쪽 얘기가 많나?
    윈터 : 용의자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박사 : 단지 용의자라서?
    윈터 : 아뇨, 용의자의 행적 때문입니다. 센트럴파크 안에서 초상화를 그리던 남자이구요, 주변 상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지난 3개월간 매일 출근해 그림을 그렸답니다.
    박사 : 커피 좀, 더.

 

      윈터 컵을 받아 커피를 따른다.

 

    박사 : (혼잣말) 살인을 한 장소에 앉아, 자신을 찾는 경찰을 바라보며 그림을 그린다…….

 

      윈터 커피를 내려놓고 맞은편에 앉는다.

 

    윈터 : 그런데 이 자료들이 왜 필요하신 거죠?
    박사 : 정신 감정 의뢰를 받았네.
    윈터 : 설마…….
    박사 : 그래, 이 사건의 용의자.
    윈터 : 아직은 무리세요.
    박사 : 이번 달 월세 자네가 냈지. 시내에서 건물주를 만났네. 결국 이런 지경까지 가는군.

 

      박사 망가진 LP플레이어를 만지작거린다.

 

    박사 : 이걸 지하로 옮기다 계단에서 굴렀다…….
        다 망가진 물건을 여기에 둔 이유를 아나?

 

      윈터 고개를 젓는다.

 

    박사 : 스스로에게 주는 경고지, 까딱하면 저렇게 폐물이 된다.
    윈터 : 기회는 또 올 거예요, 환자들도 조금씩 늘고 있어요.
    박사 : 환자가 늘어나는 속도보다 망해 가는 속도가 훨씬 빠르지. 이대로는 역부족이야. (사이) 이 일이 필요해.

 

      노크 소리, 자료 박스를 든 덥수룩한 몰골의 프랭크 등장.

 

    프랭크 : 자,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 뭐부터 듣겠소?
    박사 : 인사부터 하시죠. 사건을 담당하신 프랭크 형사님, 이쪽은 윈터 우드 제 파트넙니다.
    프랭크 : 우리 딸들도 선생님처럼 훌륭히 자랐으면 좋겠군요.
    윈터 :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이번 사건에 도움은 못 드릴 것 같습니다.
    박사 : 나쁜 소식부터 듣죠.
    윈터 : 박사님!
    프랭크 : 자자, 빨리 합시다. 나쁜 소식이 두 가지나 된단 말이지.
        첫 번째 배드(bad) 뉴스, 재판 날짜가 7월 8일로 당겨졌소.
    박사 : 앞으로 일주일이라, 잠을 줄이면 됩니다.
    프랭크 : 두 번째가 좀 복잡한데, 일단 자료부터 봅시다.

 

      프랭크 박스에서 자료를 꺼내고, 세 사람 자리에 앉는다.

 

    프랭크 : 3월과 5월 사이 총 네 명이 살해됐소. 단서는 연필, 증거는 스케치.
    윈터 : 스케치요……?
    프랭크 : 살해 현장 세 곳 중 두 군데에 연필이 떨어져 있었고, 용의자의 집에서 그 연필로 그린 그림이 나왔소. 여기, 사본.

 

      프랭크 상자에서 그림 사본을 꺼낸다.

 

    박사 : 피해자들을 그렸군요.
    프랭크 : 정확히는 시신이지.
    윈터 : 시신을 스케치했다구요?! (그림 확인 후 충격) 오, 하느님.
    박사 : 그림마다 개 목걸이가 그려져 있군요. 이거…… 암시일 수도 있습니다.
    프랭크 : 그건, 그냥 살해 도구요.
    박사 : 살해 도구?
    프랭크 : 스파이크가 박힌 개 목걸이를 뒤집어 목을 졸랐어. 시신 수습하느라 애먹었지, 하나같이 목이 너덜너덜해서는.
    박사 : 그림의 시신들은 목 부위가 깨끗한데요.
    프랭크 : 그렇지……. 뭐랄까 점잖게 그려 놨다고 해야 하나? 목 부분의 상처도 생략됐고, 표정들도 그냥 잠든 것 같지.
    박사 : 시신을 미화해 그려 놨다…… 흥미롭군요.
    윈터 : 용의자 신상에 대한 정보는요? 이를테면 과거 병력이라든지…….
    프랭크 : 보건국에 의뢰해 놨소. 이리로 팩스가 올 겁니다.
        사건 설명은 이쯤 하고 두 번째 배드 뉴스.
    박사 : 말씀하십시오.
    프랭크 : 일곱 명을 죽였다고 진술하고 있소. 현재 확인된 시신은 네 구.
        일주일간 대대적인 병력이 뉴욕 일대를 샅샅이 수색했지만 시신 발굴은 실패.
    박사 : 네 구의 시신, 일곱 건의 자백, 흥미롭군요.
    프랭크 : 흥미 그게 문제야. 언론에서 냄새를 맡기 시작했어.
        자백이 있는데 시신도 못 찾는 무능력한 경찰이라고 개처럼 물어뜯겠지. 나중에 기자들을 대상으로 한 연쇄살인 사건이 일어나면 난 줄 아시게. (박사와 윈터의 시선 느끼고) …… 농담이야.
        자자, 마지막으로 좋은 소식은 고급 정보. (은밀히) 이 사건은 여름이 가기 전에 반드시 종결되어야 하네.
    박사 : (조심스럽게) 다른 이유라도…….
    프랭크 : 우리 애들이 물놀이를 정말 좋아하거든! 휴가가 취소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내일 봅시다.

 

      프랭크 손을 흔들고 나간다.

 

    박사 : 네 구의 시신, 일곱 건의 자백. 자극적이고, 미스터리해. 대중의 기호에 꼭 맞는 사건이야. (혼잣말) 기회가 왔어.
    윈터 : (한숨) 예전 모습을 뵙는 것 같네요.
    박사 : 그래야지! 이 녀석이 그 시절로 돌아가는 열쇠가 될 거야.
    윈터 : 이미 마음을 굳히셨군요. (결심) 저를 공식 협력 의사로 지정해 주세요.
    박사 : 윈터, 상대는 살인마야.
    윈터 : 거절하시는 건가요?
    박사 : 그…… 그럴 리가. (일단 수락) 자넨 유능해. 유감스럽게도 난 아직 불완전하지. 자네의 요구를 거절할 여유가 내겐 없네.
        그래, 자네도 경력을 늘려야지. 적절한 승부수야. 오늘 중으로 경찰서에 협력 의사 신청 서류를 넣겠네. 이제 자네의 가설을 공개해 봐.
    윈터 : 가설이요?
    박사 : (추론을 즐긴다. 리드미컬) 기사 뒤편에 메모해 놓은 거, 그걸 읽으라고.
        뭘 놀라나? 상담하는 직업이니 메모가 습관인 건 당연한 거고, 자네는 불안을 잘 느끼는 타입이니까, 노트를 꺼내는 사이 생각이 흐트러질까 불안했을 거야. 곧장 적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겠지. 손에는 파일과 신문뿐인데 깨끗한 파일 앞뒷면은 불편하고, 활자가 적은 광고 면에 굵은 펜으로 메모했겠지.

 

      윈터 신문을 돌려 박사에게 보여주면, 박사의 말대로 광고 면에 굵은 펜으로 메모되어 있다.

 

    윈터 : 절 연구하고 계신 건 아니죠?
    박사 : 이 정도는 관찰이지.
    윈터 : 기사를 근거로 할 때 몇 가지 공통적인 심리기제가 드러난다.
        한정된 공간 안에서 반복해 범행을 저질렀고, 시체를 숨기려는 시도도 없었다. 매일 범행 장소 한복판에 앉아 있었다. 대부분의 범죄자들이 무의식적으로 은닉에 집착하는 것과 달리, 이번 용의자는 노출에 집착하고 있다. 대중의 관심을 공원으로 몰아 놓고, 그 중심에 섰다.
    박사 : 과시욕.
    윈터 : 또는 SOS일 수도 있다. 누군가 자신을 발견하고, 살육을 통제해 주길 바랐을 수도.
    박사 : (말을 자른다) 자네는 다 좋은데 동정심이 과해.
    윈터 : 양심을 기대하는 것뿐입니다.
    박사 : 양심?
    윈터 : 범인이 범죄를 저지른 지점도 중요하지만, 망설인 지점도 주목해야 한다. 극한의 범죄 중 그를 잠시나마 멈추게 한 힘은 그 안의 양심이다.
    박사 : 난 인간 행동의 동기는‘욕망’이라고 생각하는데. 욕망보다 강력한 유발기제는 없어.
    윈터 : 전 양심이 더 강력하다고 생각합니다.
    박사 : 욕망은 거대한 상승 에너지야, 악셀. 하지만 양심은 브레이크잖아.
    윈터 : 전 이제껏 희생보다 더 큰 에너지를 본 적이 없습니다. 희생의 원동력은 양심! 손해나 위험을 감수하고도 기쁠 수 있게 하는 힘.
        에너지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아요. 에너지의 근본에 욕망이 있느냐 양심이 있느냐에 따라 그 삶이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박사 : 자네가 프로이드보다 유명해지면, 그 정의 참고하지.
        얘기가 너무 멀리 갔군. 각설하고, 이 지점에서 유력한 가설 도출 ‘용의자는 대중의 관심을 의도했다!’

 

      팩스 신호음, 팩스가 들어온다.

 

    박사 : 야고보 K, 1961년 다중인격으로 윈터 가든에서 진료, 3개월 만에 완치.
        자네, 이런 얘길 왜 안 했나? 봐, 여기 당시 기사들도 첨부됐어. 추신이 있군. 치료 당시 용의자가 그린 유화 소장 여부 바람. 미술 치료를 했나?
    윈터 : 아니오,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환자였어요. 그중 하나를 박사님께 선물했는데, 그걸 찾는 모양이에요.
    박사 : (다시 팩스에 집중) 엄청난 화제였군. 전부 내 얘기야. 하지만 정작 나는 기억을 못 하니. (답답)

 

      윈터 박사의 시선을 피해 가장 아래 서랍에서 차트 묶음을 꺼내 옷에 감춘다.

 

    박사 : 사고 이전의 진료 기록들은 어디 있지? 차트 말이야.
    윈터 : 사고 전 자료들…… 지하요. 지하에 있어요.
    박사 : (멈칫한다) 지하?
    윈터 : 제가 다녀올게요.
    박사 : 피곤해 보이는데 그만 들어가게.

 

      박사 지하실로 내려가려고 한다. 윈터 막아선다.

 

    윈터 : 사고 후 한 번도 안 내려가셨잖아요. 또 미끄러지시기라도 하면, 정확히 두 바퀴 반을 굴렀고, 마지막 반 바퀴째에 뒤통수가 계단 모서리에 직각으로 찍히면서! 얼마나 피를 흘리셨는지 뒤따라 내려가던 제가 그 피에 미끄러졌으니, 후 끔찍해…….
    박사 : (울렁거린다) 그만! 그만 하고 차트 부탁해.

 

      윈터 지하로 내려간다. 박사 윈터의 서랍이 열린 걸 본다. 서랍을 닫는데 책상 아래 떨어진 편지 봉투가 보인다.

 

    박사 : (편지 읽는다) 보내주신 연구 논문의 검토를 마쳤습니다. ‘무양심자’의 사례 기록이 보강된다면, 출판도 가능하리라 판단하고 있습니다. (봉투 확인) 발신 매코이 출판사 수신…… 윈터 우드?
        무양심자 연구와 살인마라…… 내 환자를 가로채 연구 실적을 쌓겠다. (애써 여유) 윈터 우드…… 이제야 오클라호마 시골뜨기 티를 벗는군.

 

      윈터가 올라오는 소리 난다. 박사 편지를 제자리에 떨어트려 놓는다.
      윈터 차트 꾸러미와 포장된 캔버스(가로세로 각 1미터) 하나를 들고 등장한다.
      윈터 차트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포장된 캔버스를 책장 앞에 괴어 놓는다.
      윈터 바닥에 떨어진 편지 봉투를 발견하고 재빨리 가방에 넣는다.

 

    박사 : 나가지, 머리도 시킬 겸 바래다줄게.
    윈터 : 약속이! 있어요.
    박사 : 약속?
    윈터 : 아…… 건너편 화방에 제인, 제인이랑요.
    박사 : 윈터…….
    윈터 : 일주일 전부터 계속 보자고 해서.
    박사 : 그만 해. 화방 오늘 문 닫았어, 그 집 식구들 다 같이 휴가 간다고 써놨던데, 이런! 휴가 얘긴 안 하는 편이 덜 구차했겠군. 거슬리네 정말! (화분을 구석에 밀어버린다) 미안, 자네한테 화내는 거 아니야.
    윈터 : ……전에도 싫어하셨어요.
    박사 : 그래?
    윈터 : 진료실에 화분 같은 거 못 두게 하셨어요.
    박사 : 기억이 돌아오는 건가? 좀 더 자세히 얘기해 봐, 어떤 사고의 패턴이 그런 취향을 만들어냈는지 궁금하군.
    윈터 : 식물은 인간을 길들인다.
    박사 : 식물이 인간을 길들인다?
    윈터 : 말은 채찍으로 다룰 수 있다. 하지만 식물은 무엇에도 겁을 먹지 않는다. 빠르게 할 수도 없고, 늦출 방법도 없으니,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그건 곧 길들여짐을 의미한다. 세상에 모든 야수를 길들여 우리에 넣은 인간이 고작 식물에 길들여지는 게 싫다.
    박사 : 그때 난 꽤나 호전적이었던 모양이군. 좋아! 그때의 정신을 되살려 차트를 통째로 외워 주지. 그만 들어가게.
    윈터 : 네.

 

      윈터 가방을 챙겨 나간다. 박사 차트에 집중한다.

 

    박사 : 1961년 7월 1일 환자명 야고보 일주일간의 관찰 상담 종료. 금일 오후 보호자와 진료 일정 협의 예정.

 

      *LP플레이어 저절로 재생되며 과거로 시점이 바뀐다.
      (음악 : EriK Satie의 Gnossienne No.1)

 

 

    2. 야고보-K

 

      진료실(1961년 7월 1일)
      과거의 박사는 안경을 쓰지 않는다.
      성공가도를 달리는 스타 의사 시기, 젠틀하지만 냉혹하다.
      윈터와의 상하 관계도 더 확실하다.
      박사 메모를 하다 일어나 LP플레이어를 중지시킨다.
      박사 책장에 괴어 있는 포장된 캔버스를 발견한다.

 

    박사 : 뭐지? 윈터! 윈터!
    윈터 : 네! 박사님.

 

      윈터 지하실 문을 열고 들어온다.
      윈터 화려한 민소매 원피스, 가슴 부분에 선글라스까지 꽂고 있다.

 

    박사 : 차림이 그게 뭔가?
    윈터 : 새로 맞춘 옷이 배달 와서요, 잠깐 걸쳐만 보려고…….
    박사 : (캔버스) 저건.
    윈터 : 야고보가 선생님 드린다고 갖고 왔어요.
    박사 : 적당한 데 걸어 놔. 오늘 오후에 인터뷰 스케줄 있으니 환자 예약 확인하고.
    윈터 : 그림을 제법 잘 그린다는데 뭘 그렸을까?

 

      윈터 캔버스 포장지를 뜯는다. 윈터 그림을 보더니 주섬주섬 다시 싼다.

 

    박사 : 뭔데 그래.

 

      박사 캔버스를 확인한다. 캔버스에 기묘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메두사의 머리가 그려져 있다.
      *아놀드 뵈클린의 〈메두사〉와 유사하나 얼굴과, 머리에 달린 뱀 모두 웃는 표정이다.
      1층 문이 살며시 열린다. 1층 문 앞 야고보(K) 겁먹은 표정으로 서 있다.
      윈터와 박사, 야고보를 보지 못한다.

 

    박사 : 본 적이 있는데.
    윈터 : 아놀드 뵈클린 그림 같아요.
    박사 : 아! 〈메두사〉.

 

      야고보(K) 여전히 문간에 주뼛주뼛 서 있다.
      K의 무의식을 의미하는 2층 가교로 마틴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온다.
      2층에 등장하는 인격들 K에게만 인지된다.

 

    마틴(K) : (윈터와 박사에게 껄렁하게 인사) 어이, 선생들.
        (K에게) 자, 봤지? 이렇게 세게 나가야 널 깔보지 않는다고, 해봐!

 

      야고보(K) 쑥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젓는다.

 

    마틴(K) : (K에게) 자꾸 김빠진 맥주처럼 굴래! 강렬하게, 어이 선생들!
        빨리 해, 궁둥짝을 차주기 전에 당장!

 

      야고보(K) 엉덩이를 걷어차인 듯 안으로 밀려들어온다.

 

    윈터 : 야고보! 괜찮니?
    마틴(K) : 덜 떨어진 자식, 지옥에나 가버려!

 

      마틴 들어온 길로 나가버린다.

 

    야고보(K) : 그림! 마음에 드세요?
박사 : 독특하구나.
윈터 : 박사님은 독특한 걸 좋아하셔, 마음에 드신다는 뜻이야.

 

      줄리아 2층 가교로 들어온다.

 

    줄리아(K) : 애교를 부려. 봐, 제일 잘 보이는 데 걸어 주세요~ 혹시 알아? 부자 환자가 그림을 사갈지?
    야고보(K) : (줄리아에게, 크게) 선물이야!
    박사 : (깜짝 놀란다) 그…… 그래, 선물 고맙다.
    야고보(K) : (기쁘다) 어디에 거실 거예요?
    박사 : 글쎄다.
    윈터 : 여기가 좋겠다.

 

      윈터 벽에 그림을 건다. *그림 아래 조명 ON. 그림 기묘하게 빛난다.

 

    윈터 : 진료실 분위기가 한결 기품 있어졌네.
    박사 : 윈터.
    윈터 : 네?
    박사 : 기품을 원하면, 그 옷부터 갈아입지.
    윈터 : 네.
    줄리아(K) : 어머, 저 선글라스!
    야고보, 줄리아 : 재클린 스타일!
    윈터 : 그래~ 재키 스타일이야! 이제 케네디 같은 남자만 만나면 돼.
    줄리아(K) : 어머 언니, 케네디는 내가 찍었어.
    박사 : 윈터 우드!
    윈터 : 네에.

 

      윈터 지하실로 다시 내려간다.

 

    박사 : 앉거라.

 

      야고보(K) 자리에 앉는다.

 

    박사 : 원장님은.
    야고보(K) : 식사 가셨어요.
    줄리아(K) : 돼지 같은 영감탱이 또 혼자만 먹으러 갔지.
    박사 : 식사는?
    줄리아(K) : 배고프다고 해.

 

      야고보(K) 줄리아를 향해 고개를 가로젓는다.

 

    박사 : 왜 생각이 없어?
    줄리아(K) : 생각이 없긴! 아침부터 여태 굶었잖아. 배고프다고 해!

 

      야고보(K) 줄리아의 말소리에 귀를 막는다.

 

    박사 : 알았다. 억지로 권하진 않으마.
    줄리아(K) : 속 터져, 굶어 죽든 말든 마음대로 해!

 

      줄리아 들어온 길로 나가버린다.
      박사 책장에서 『아놀드 뵈클린』 화집을 꺼낸다.

 

    박사 : 아놀드 뵈클린, 훌륭한 화가지. 이 화집 본 적 있니?
    야고보(K) : 수도원 서재에 있어요.
    박사 : 그래, 그랬구나.

 

      박사 화집에서 〈메두사〉를 찾아 그림을 보여준다.

 

    박사 : 이걸 따라하고 싶었니?
    야고보(K) : 아니오, 바르게 그리고 싶었어요.
    박사 : 바르게 그리고 싶었다.
    야고보(K) : 이 화가는 메두사의 마음을 모르는 것 같아요.
    박사 : 메두사의 마음이라.
    야고보(K) : 너무 슬픈 표정이잖아요. 슬플 이유가 없는데…….
    박사 : 슬플 이유가 없다?
    야고보(K) : 강해졌잖아요.

 

      문 두드리는 소리, 수도원장 급하게 들어온다.

 

    원장 : 망할 녀석, 병원 앞에 서 있으라니까! 한참을 찾았잖아!
    야고보(K) : 외로울 틈도 없고.
    원장 : 고작 삼십 분 서 있어 놓고 외롭답니다. 허, 이 물건이 이래요. 이걸 누가 정상이라고 해. 안 그렇소?
    박사 : (동조하지 않는다) 윈터!

 

      옷을 갈아입은 윈터 지하실 문을 열고 나온다.

 

    박사 : 길 건너에 화방이 생겼던데, (돈을 준다) 같이 좀 다녀오지.
    윈터 : (야고보에게) 가자.

 

      윈터와 야고보, 나간다.

 

    원장 : (메두사 그림을 본다) 손끝도 못 대게 하기에 대단한 건가 했더니, 결국 뱀 대가리 그려 놨군. 다들 귀신이 들렸다고 하는 통에 수도원 문을 닫게 생겼습니다.
    박사 : 다중인격 증상입니다.
    원장 : 그런 병이 확실히 있습니까?
    박사 : 드물긴 하지만 사례들이 있습니다.
    원장 : (박사에게) 영수증을 발행해 주십시오.
    박사 : 치료 후에 지불하셔도 됩니다.
    원장 : 치료는 됐습니다.
    박사 : ?
    원장 : 귀신이 들린 게 아니라 미쳤다는 증명이면 충분합니다. 이제부터 기도의 몫이죠.
    박사 : 총 여덟 군데의 자상이 있더군요.
    원장 : 묶어 두지 않으면 자해를 하는 통에 우리도 골치랍니다.
    박사 : 주로 등에 있더군요.
    원장 : …….
    박사 : 항문성교의 흔적도 보이구요.
    원장 : (한숨) ……앉읍시다.
    박사 : 대부분의 정신질환에는 모두 계기가 있습니다. 그냥 가만히 혼자 앉아 있다가 미쳐버리는 사람은 없다는 얘깁니다.
    원장 : 공책에다 저를 놀린 애들을 시체로 그려 놨소, 발뺌할 수도 없었지. 어쩜 그렇게 사진처럼 그려 놨는지, 공책을 본 애들이 화가 나서 밀어뜨리고, 엎어트리고…… 또래끼리 그게 뭐 대수요, 다 저 물건이 약해 빠진 탓이지.
    박사 : 공책이 아니고 일기장. 그냥 밀어트린 게 아니라 성폭행. 성폭행은 상습적으로 일어났습니다.
        넷 중 둘은 실제로 즐겼고, 나머지 둘은 그 광경을 보며 자위를 했더군요. 그 넷도 치료가 필요할 듯합니다.
    원장 : 하나같이 이름을 대면 알 만한 명문가 자제들입니다. 쾌락이 필요했다면 여자를 샀겠죠. 스테이크를 살 돈이 넘쳐나는데 굳이 풀을 뜯어 먹을 필요가 있나?
    박사 : 여자와의 섹스가 질이 더 높다고 확신하시는군요?
    원장 : 지금 나를 모욕하는 거요? ……그 애들은 무결해요. 저 녀석이 유혹했습니다.
    박사 : 그런 억지, 그만 하시죠.
    원장 : 나도 원하는 바요. 제발 그만 하고 싶소. 길에 버려진 아이를 주웠고, 여태 먹이고 입혔습니다. 여기서 치료비를 더 내지 않는다고 성모님이 나를 벌할 것 같진 않군요.
    박사 : 치료비는 저희가 부담하겠습니다.
    원장 : 정말이요?
    박사 : 정신분석학에 진일보를 가져올 치료법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야고보가 첫 번째 수혜자가 될 겁니다.
    원장 : 그렇지, 저렇게 괴상하게 정신 나간 놈을 어디서 또 찾겠어. 그래, 박사는 치료비를 내시오, 나는 저 녀석을 제공할 테니.
        (박사의 표정에서 경멸을 본다) 어쨌든 난 찬성이란 뜻이오. 자,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박사 : 동의서를 작성해야 합니다.
    원장 : 동의서? 써야지, 써야지.

 

      원장 책상에서 볼펜 하나를 집는다.

 

    원장 : (볼펜에 새겨진 글귀를 읽는다) 오줌싸개 빌리? 짓궂은 별명이군.

 

      원장 백지 하단에 서명해 박사에게 준다.

 

    원장 : 자, 동의서. 그 위에 뭐라고 쓰든 다 박사님 마음이오. 백지 위임장씩이나 드렸는데, 표정이 너무하네.
        (빈정) 바퀴에 위아래가 어딨소, 구르다 보면 다 닳아지는 거지. 사람도 그래요, 지금 꼿꼿하시지만 또 아나? 내 도움이 필요할 때가 올지.
    박사 : 안녕히 돌아가십시오.

 

      윈터와 야고보(K), 들어온다. 야고보(K) 미술용품을 한 아름 들고 잔뜩 상기되어 있다.

 

    야고보 : 스케치 연필이 따로 있어요!
    원장 : (야고보에게) 이 물건! 엉뚱한 짓 하면 3개월 치 매를 몰아서 맞을 줄 알아. (박사에게) 성모님께서 선생의 선행을 기뻐하실 겁니다.

 

      원장 성호를 긋더니 키스까지 날리고 나가버린다.

 

    박사 : 입원 치료를 결정했네.
    윈터 : (야고보를 본다) 잘 됐다.
    박사 : 임상 차트 꾸리고 입원실에 연락해요.
    윈터 : 임상이요? 그럼 전액 (작게) 무료?
    박사 : 3개월 안에 끝내야지.
    윈터 : (걱정스럽다) 다중인격이 단기간에 완치된 예는 없어요. 과거 사례들을 봐도 보통 원인 파악 기간만 수년이에요. 3개월은 무리예요.
    박사 : 반드시 그 안에 완치시켜야 돼. 학회에서 온 공문 가져와.

 

      윈터 우편물을 찾아다 준다. 박사 윈터에게 내용을 보여준다.

 

    박사 : 연말에 독일에서 세계 규모의 학술대회가 열려‘해리성정체장애 진단’, 다들 진단법을 논하는 수준일 거야. 그 사이에서 완치사례를 발표. 역사가 되겠지! 준비해.

 

      야고보(K)와 박사,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는다. 윈터 기록을 시작한다.

 

    박사 : 1961년 7월 1일 (윈터에게) 환자 넘버.
    윈터 : K입니다.
    K-야고보 : K?
    윈터 : 프라이버시를 위한 장치야. 환자 순서대로 A부터 Z까지 이니셜을 부여해. 방송이나 논문에 너의 사례가 언급될 경우 이름 대신 ‘K’라는 이니셜이 사용될 거야.
    K-야고보 : K. 마음에 들어요. 그냥 그 이름으로 불러 주세요.
    박사 : 야고보라는 이름도 근사한데?
    K-야고보 : 싫어요. 이제껏 그 이름으로 날 부른 사람들 중 나에게 좋았던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어요.
    박사 : 그랬구나. 그 이름은 누가 붙여 줬지?
    K-야고보 : 원장님이요.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에게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하셨어요.
        원래 야고보는 그림, 술, 춤을 좋아하는 보통 사람이었대요. 그런데 어느 날, 성당을 구경하다 쓰러져요. 쓰러지기 직전에 이상한 농담을 했대요.‘신보다 내가 위대하다.’ 어쨌든 잠시 후 깨어나는데, 그때부터 갑자기 독실해져서는 죽을 때까지 종교화만 그렸대요. 그 덕에 성인이 되었다는데, 난 성인 같은 건 되고 싶지도 않아요. 괜히 그 이름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된 것 같고…….
    박사 : 이렇게 되다니?
    K-야고보 : 잠깐 사이에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거요.
    박사 : 어떻게 알았지?
    K-야고보 : 그냥 알아요……. 가끔 내 안에서 그들끼리 하는 얘기가 들리기도 하고.

 

      박사 윈터에게 눈짓하고 차트를 기록한다.
박사가 차트에 기록하는 내용 현재 박사의 목소리로 흐른다.

 

    박사(소리) : 1961년 7월 1일 K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인격 분열 증상을 인지하고 있다. 7월 3일 첫 번째 인격이 모습을 드러냈다.
    박사 : 이름이.
    K-줄리아 : (여성의 목소리) 줄리아.
    박사 : 나이는.
    K-줄리아 : 어머! 숙녀한테 나이를 묻는 건 실례죠.
    박사 : 사과드리죠. 자, 그럼 다음 질문을 하겠습니다.
    K-줄리아 : 시시해라. 여자가 한 번 튕겼다고 곧장 포기하는 법이 어딨어~

 

      K의 앙탈에 윈터가 픽 웃는다.

 

    K-줄리아 : 거기 언니 아까부터 정말 거슬리거든? (박사에게) 단 둘만 남게 되면, 우리가 서로를 훨씬 더 빨리 알 수 있을 텐데. 그것도 아주 속속들이.
    박사 : (윈터에게) 찬물 좀 부탁해.
    K-줄리아 : 아주 시원해야 할 거야. 이제부터 몹시 뜨거워질 참이거든.

 

      박사 윈터가 가져온 냉수를 K-줄리아에게 준다.
2층 가교에서 마틴의 웃음소리 들린다. 마틴 나타난다.

 

    마틴(K) : 야, 저런 인텔리가 너 따위 천박한 계집에 혹할 것 같아?

 

      K-줄리아 토라져 벽 보고 앉는다. 박사 차트를 기록한다. 박사가 차트에 기록하는 내용 현재 박사의 목소리로 흐른다.

 

    박사(소리) : 줄리아, 35세. 야고보가 성폭행의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원장은 반복해서 ‘네가 유혹한 것이다’라고 야고보를 윽박지른다.
        결국 그 모순을 납득하기 위해 유혹하는 인격‘줄리아’가 생성된 것으로 보인다. 수다스럽고 천박하며, 상대를 가리지 않고 교태를 부린다.
마틴(K) : 망할 계집 또 삐쳤네. K가 쪼다 소리를 듣는 건 순전히 너 때문이야. 당장 비켜.

 

      마틴 가교에서 걸어 나간다. 벽을 보고 있던 K 어깨를 곧게 펴고 건들건들한 표정이 된다.
박사와 윈터가 차트를 정리하는 틈을 타 주변을 슬쩍슬쩍 뒤지고 다닌다.
책상 위에 걸터앉은 K가 휘파람을 분다. K 방금 훔쳐낸 윈터의 지갑을 흔든다.

 

    박사(소리) : 7월 8일 두 번째 인격이 등장했다.
    윈터 : 마틴! 내 물건에 손대면 가만있지 않겠다고 했을 텐데!

 

      K 요리조리 피하며 윈터를 놀린다. 윈터 미끄러진다. 박사와 K, 동시에 윈터에게 손을 내민다.

 

    K-마틴 : 샌님은 저리 비키시지. 이 여자는 내가 접수했다고.
    박사 : (놀린다) 어디 한번 뺏어 보시지.

 

      윈터 박사와 K 둘 다 뿌리치고 혼자 일어난다.

 

    윈터 : (박사에게) 환자 좀 자극하지 마세요.
    박사(소리) : 마틴, 27세. 불손하고 거칠다. 수도원 지하에 감금 당시 생성된 인격.
        구속이나 제약을 몹시 싫어하며 소매치기에도 능하다. 원장의 진술에 의하면, 창고 자물쇠를 따고 탈출한 전력이 있으며, 성도들의 귀중품이 야고보의 방에서 발견된 적이 있다고 한다.
    K-마틴 : 방금 박사한테 앙탈? 역시!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
        좋아! 박사 후리려고 환자인 척하는 여자들 내가 덮쳐 준다!
        일단은 편집증 ‘나탈리’, 그 여자 매번 원피스에 속옷을 안 입고 오는데 아주 미치겠더라.
    윈터 : (K에게) 진료실 엿보는 거 안 된다고 했지!
    K-마틴 : (윈터를 가리키며) 저 여자는 신음소리가 요란할 것 같은 타입인데, 어때? 이 의자에서도 했나? 분명히 저 여자가 올라탔을 거야.

 

      윈터 마틴을 붙든다. 마틴이 반항하자 주사기를 보여주며 겁을 준다.
마틴을 끌어다 의자에 묶는다.

 

    윈터 : 제발 진료실에선 점잖게 좀 굴어. (작게) 박사님 화나시면 K만 힘들단 말이야.
    K-마틴 : (작은 소리로 2층을 향해) 샘! 대답해, 듣고 있는 거 다 알아.
    샘(소리) : (작게) 없어.
    K-마틴 : 걸렸다. 빨리 자리 바꿔.
    샘(소리) : 싫어.
    K-마틴 : 그래, 좋을 대로 해. (거칠게 손목을 들썩인다) 부러져라! 부러져라!
    샘(소리) : 그만 해, 아프잖아.
    윈터 : 이제 그런 협박 안 통해.
    K-마틴 : 다시는 그림도 못 그리게 부러져라!
    샘(소리) : 알았어, 자리 바꿔.
    윈터 : (박사에게) 다른 환자도 보셔야죠. 종일 K만 상담하시면, K도 너무 지치고.
    박사 : 또 저 녀석 걱정인가.
    윈터 : (변명) 진료소 운영을 걱정하는 거죠, 다른 환자도 보셔야 수입이 생기니까요.

 

      K 조용해진다. 겁먹은 표정으로 박사와 윈터를 살핀다.

 

    박사 : 공격적 투자라고 생각해!
    윈터 : 투자가 아니라 도박이죠.
    박사 : 브로드웨이 한복판에 정신병원을 오픈할 때 다들 내게 미쳤다고 했지. 하지만 봐!‘윈터 가든 극장’보다‘윈터 가든 진료소’가 더 잘나가지.
    윈터 : 제가 꿈꿨던 윈터 가든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어요. ……면접을 기다리면서 몇 번을 기도했는지 몰라요. 꼭 붙게 해주세요, 이곳이야말로 제가 꿈꾸던 병원이에요.
    박사 : 자, 그 기도는 이루어졌으니까 다음 기도를 해야지! 반드시 3개월 안에 완치되게 해주세요, 라고 기도해.

 

      박사 윈터의 어깨를 툭툭 치고 자리로 가버린다.

 

    윈터 : (혼잣말) 어떤 꿈인지는 안 궁금하세요?
    K-샘 : 윈터 가든은 ‘정신상담소’에 꼭 어울리는 이름이야. 마음의 병을 가진 사람을 보면, 겨울 정원이 떠올라. 지금은 황…… 황…….
    윈터 : 황량하지만, 스산한 땅 아래 어떤 씨앗이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 정원사도 좋고 농부도 좋아, 사랑하는 마음으로 땀을 듬뿍 흘려주면.
    K-샘 : 마음에 반드시 새싹이 돋을 거야!
    K-샘, 윈터 : 봄 같은 병원을 만들자! 너는 예쁜 꽃이 될 거야!
    윈터 : 샘! 용케도 외웠구나. ……박사님도 그런 마음으로 병원 이름을 지으셨구나, 생각했었어. 그래서 꼭 여기서 일하고 싶었는데…….
    K-샘 : 팔이 아파요
    윈터 : (끈을 풀어 준다) 미안, 마틴은 정말 비겁해. 왜 매번 너에게 고통을 떠넘기는지.
    박사(소리) : 7월 13일 마침내 마지막 인격 ‘샘’이 등장했다.
    K-샘 : 내 테디 어디 있어요?

 

      박사 지하로 향하는 문 앞에 떨어진 곰 인형을 주워준다.
K-샘 인형을 받지 않고 윈터 뒤로 숨는다. 박사 윈터에게 곰 인형을 준다.
박사 물러나 둘을 관찰한다. 샘 곰 인형과 귓속말을 주고받는다.

 

    K-샘 : 저기…… 테디가 궁금한 게 있대요.
    윈터 : 샘 말고 테디가?
    K-샘 : (곰 인형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팔을 움직인다. 마치 인형이 얘기하듯) 샘은 나을 수 있나요?
    윈터 : 그럼.
    K-샘 : (얼굴을 내민다) 정말? 샘 때문에 K까지 울보 소리를 들어서 미안하대.
    윈터 : 사람은 누구나 울어. 나도 박사님도.
    K-샘 : 박사님도?
    윈터 : 눈물은 마음에 쌓인 먼지를 밖으로 내보내 준단다. 조금 어려운 말로 ‘해소’라고 해.
    K-샘 : 마음의 먼지가 없어져? 청소 같은 거네?
    윈터 : 그럼, 샘이 잘 울어 준 덕분에 K의 마음이 반짝반짝해지는 거야.

 

      K-샘 책상 위에 스케치북을 펼친다. K-샘과 윈터, 그림을 그린다.
박사 차트를 기록한다. 박사가 차트에 기록하는 내용 현재 박사의 목소리로 흐른다.

 

    박사(소리) : 마지막 인격 ‘샘’ 일곱 살. 곰 인형에 집착하는 구석아이.
        위협을 받거나 감당할 수 없는 순간이 오면 곰 인형을 껴안고 웅크린 채 눈물을 흘린다. 저항이 불가한 순간, 그 무력감을 회피하기 위해 생성된 인격. 세 인격 중 가장 순종적이고 정체성이 약하므로 첫 번째 융합 대상자로 정한다.
    박사 : (윈터에게) 준비하지.
    윈터 : 네.

 

      윈터 칠판과 이름카드를 준비한다. 박사 샘이 그리는 그림을 넘겨다본다.

 

    K-샘 : (부끄럽다) 야고보보다 못 그려요.

 

      박사 샘에게 연필 잡는 법을 가르쳐준다.

 

    박사 : 스케치할 땐 (연필을) 이렇게 잡아야지. 그렇지, 잘하는구나.

 

      K-샘 박사의 칭찬에 쑥스럽게 웃는다.

 

    윈터 : 자~ 이사 갈 준비를 해볼까?

 

      박사 차트 작성을 시작하고, 윈터 K-샘에게 칠판을 보여준다.
 

왼편 오른편
네 개의 방이 있는 집이 그려져 있다.
각 방 안에는 인격들의 이름표가 붙어 있다. (K, 샘, 마틴, 줄리아)
집 모양과 같은 크기의 사람 실루엣이 있다.
가슴 부분에 커다란 하트가 그려져 있다.

 
      윈터 왼쪽에서‘K’의 이름을 떼서 오른편 사람 실루엣 위에 붙인다.
      왼편에서 샘의 이름을 떼어 오른편 사람 실루엣 안에 그려진 하트에 붙인다.
      윈터 동작과 함께 설명 이어진다.

 

    윈터 : 샘은 앞으로도 K와 함께 살게 될 거야. 전에는 K의 옆방에 살았지만, 이제는 K의 마음 안에 사는 거야.
    K-샘 : 마음으로 이사 가는 거, 이것도 어려운 말이 있어?
    윈터 : 어려운 말? 아! 융합.
    K-샘 : 융합? 어떻게 쓰는 거야?
    윈터 : 아이고 요 욕심꾸러기. 읽기부터 배우고 그다음에 쓰기 하자~ 오늘 읽을 책 골라 봐.

 

      박사 LP플레이어를 작동시킨다. – 음악 EriK Satie ‘Gnossienne No.1’
      K-샘 LP플레이어 쪽으로 살며시 다가온다.

 

    K-샘 : 누구 노래예요?
    박사 : 에릭 사티.
    윈터 : 에릭 사티……? 들어 본 것 같은데…….
    박사 : 19세기 말에 활동했던 작곡간데, 최근에야 주목받고 있어.
    윈터 : 사후에야 인정받는군요.
    박사 : 파격적이었으니까. 사티의 악보엔 마디 구분이 없어. 도입도 없고 종결도 없지. 단순한 멜로디와 화성이 끊임없이 되풀이되면서 몽환을 자아내지.
    윈터 : 에릭 사티……! 학회지에서 봤어요. 당대에 인정받지 못해 27년간 은둔한 비운의 작곡가. 단순한 전개와 정적인 리듬이 뇌파를 유도해 명상이나 최면 시술에 적합한 곡으로 주목받고 있다.

 

      박사와 윈터, 대화 나누는 사이 K-샘 책을 찾아온다.

 

    윈터 : 또 『삼총사』? 이 책이 그렇게 좋아? 아토스! 아라미스! 포르도스!
    K-샘 : 달타냥과 삼총사 만세!
    윈터 : 만세! 방에 가서 읽자. (박사에게) 들어가 보겠습니다.
    박사 : (샘에게) 내일 보자.

 

      K-샘 들어가다 다시 LP플레이어에 시선을 준다. 윈터와 K, 나간다.
      박사 칠판을 안쪽으로 밀어 넣는다. LP플레이어 저절로 멈추고, 그림 조명 OFF.
 
      박사 돌아서면 안경을 쓰고, 차트를 들고 있는 현재(1964년 7월 1일)다.

 

    박사 : (박사 차트를 넘긴다.) 7월 16일. ‘샘’에 대한 인격융합 시도 실패. 2차 시도 실패. 구석자리에 집착이 강해 ‘이사’라는 표현에 강한 거부감을 보인다. 3차 시도 실패, 4차 시도 실패. (박사 차트를 넘기는 손놀림이 빨라진다)
        7월 29일 마지막 기회다. 내게는 더 이상의 선택이 없다. K는 내게 열한 번째 기적이 되거나, 첫 번째 지옥이 될 것이다. 자정을 치는 시계소리가 들린다. 수 시간 후면 모든 것이 명확해진다. 내게 더 이상의 선택은 없다.

 

      박사 떨리는 손으로 다음 장을 넘긴다. 31일 기록이 뜯겨져 있다. 박사 일지를 앞뒤로 넘겨본다.

 

    박사 : 8월 1일, 환자 넘버 K. 전날 진행된 ‘샘’ 처치는 성공으로 판단된다. 이제 ‘줄리아’, ’마틴’두 개의 인격이 남았다.
       (박사 일지를 다시 뒤적인다.) 7월 30일…… 8월 1일.
        (박사 일지를 한 뭉치 넘긴다) 9월 29일, 10월 1일…….

 

      박사 진료 차트를 책상 위에 내려놓는다. 생각에 골몰해 서성거리다 전화를 건다.

 

    박사 : 윈터? 늦게 미안해. 문제가 좀 생긴 것 같아. 7월 31일, 8월 31일, 9월 30일. 3일간의 기록이 사라졌어.

 

      박사 차트를 챙겨 나가며 퇴장.

 

 

    3. 분열

 

      경찰서(1964년 7월 3일)
      책상에 앉아 있는 프랭크, 창밖 신문팔이 소년의 목소리 듣는다.

 

    신문팔이(소리) : 호외요! 호외! 네 구의 시신 일곱 건의 자백. 사라진 시신의 행방은?
    프랭크 : (창밖을 향해) 그 신문 전부 불 싸질러버리기 전에 꺼져.
        (전화 건다) 편집장 바꿔, 니들 무슨 근거로 그딴 기사를 쓴 거야. 당장 갈 테니까 다음 호 발행 보류해!

 

      프랭크 전화를 끊고 씩씩거리며 나간다.

 

      진료실(1964년 7월 3일)
      박사 신문 여러 개를 들고 급하게 들어온다.

 

    박사 : (윈터에게) 신문 왔나?

 

      윈터 신문을 찾아 준다.

 

    박사 : (신문 읽는다) 뉴욕 경찰 이대로 괜찮은가.
        연쇄살인 용의자 K가 추가로 세 건의 살인을 자백했다. 경찰은 의도적으로 사실을 은폐한 후, 비밀리에 시신 발굴에 착수했다. 그러나 오늘까지 아무런 증거도 확보하지 못했으며, 자신들의 무능력을 감추기 위해 무고한 언론을 탄압했다. (윈터에게) 경찰서 좀 연결해.

 

      윈터 전화를 건다. 박사 라디오를 켜고, 주파수를 맞춘다.

 

    라디오 : 과거 용의자의 정신 병력을 밝혀낸 경찰은, 용의자의 진술 자체에 신빙성이 있는지 철저히 재조사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윈터 : 연결됐습니다.
    박사 : (라디오 끄고, 전화 받는다) 네 형사님, 저도 방금 신문 봤습니다.
        경찰서에는 출입기자들도 많고, 취조실 분위기도 상담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진료실에서 진행하는 편이 훨씬 나을 것 같습니다. 네, 기다리겠습니다. (끊고, 혼잣말) 용의자가 정신병을 앓았다는 게 공개됐다……. 후유증 쪽으로 몰아가면 곤란해지는데.
    윈터 : 아직 늦지 않았어요. 지금이라도 그만둔다고 하세요.
    박사 : (차트 확인한다) 7월 31일, 8월 31일, 9월 30일 정확히 3일간의 기록이 사라졌다. 8월 1일, 9월 1일, 10월 1일 샘, 줄리아, 마틴 순서로 치료했다는 기록은 남아 있다.

 

      문 두드리는 소리, 프랭크다.

 

    윈터 : (박사를 향해) 거절하세요. (작게) 제발!

 

      윈터 문을 연다.

 

    윈터 : 사건에서 제외시켜 주세요.
    프랭크 : 저돌적인 매력이 있으십니다.
    윈터 : 재작년 사고로 혼수상태까지 겪으셨어요.
    박사 : 윈터!
    윈터 : 아직 몇 가지 후유증을 겪고 계세요.
    박사 : 환자 취급 하지 말라니까!
    윈터 : 제외시켜 주세요.
    박사 : (윈터에게) 주제넘게 굴지 마.
    프랭크 : 왜들 이러시나.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파트너 합이 틀어지면 안 되지.
    박사 : 파트너? 누가.
    프랭크 : 윈터 우드 씨가.
    박사 : (윈터에게) 자네가 그랬나?
    프랭크 : 지난번에 박사가 그랬잖소, 윈터 우드 씨가 박사의 파트너라고.
    박사 : 착오가 있었나 봅니다. 윈터 우드 양은 제 조숩니다.
    프랭크 : 파트너든 조수든 지금은 일단 합을 맞추는 게 좋을 거요. 승인이 났거든.

 

      프랭크 다시 나가 수갑을 찬 K를 데리고 들어온다.

 

    윈터 : K……!

 

      K 윈터의 시선을 피한다. 프랭크 진료 의자에 K를 앉히고 줄을 꺼내 다리를 묶는다.

 

    윈터 : 그냥 두세요.
    프랭크 : 연쇄살인범이오.
    윈터 : 환자 자격으로 왔어요.
    프랭크 : (줄을 풀어 준다) 정신 나간 게 벼슬이구만. 입구와 창문, 건물 사방 총 여덟 명 배치시켰으니까, 문제가 생기면 그냥 소리만 지르슈.
    K : 실내에도 한 명 배치해 줘요.
    프랭크 : 미친놈.
    K : 박사가 날 죽일 거야. 날 죽이려고 이리로 끌고 온 거야.
    프랭크 : 미친놈.
    K : 내가 아니라 박사가 미쳤다고.
    프랭크 : 에라, 이 미친놈아.
    K : 억울해서 미치겠네.

 

      프랭크 나가다 다시 온다.

 

    프랭크 : 억울하냐?
    K : 억울하지. 억울해 미치겠다.
    프랭크 : (신문을 말아 K의 머리통을 내려친다) 네가 죽인 여자애! 그 애 엄마는 벙어리야. 그 딸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벙어리라고! 네가 그 여자보다 억울해? 억울하다는 말뜻이나 알고 떠드는 거냐, 이 미친 자식아!

 

      프랭크 K에게 달려든다. 윈터 막는다.

 

    윈터 : 멈추세요, 여기는 진료실입니다.
    프랭크 : (박사에게) 내가 저 또라이 새끼 땜에 있지도 않은 시체를 찾는다고 뉴욕 하수구란 하수구를 다 뒤진 걸 생각하면, 저걸 그냥!
        비싼 세금 들여서 정신 감정을 왜 하냐고, 딱 보면 냄새가 나잖아. 안 맡아져? 또라이 스멜? 저 새끼한테서 지금 펑펑 나잖아.
    윈터 : 여기는 진료실이고, 환자 자격으로 입실했어요. 제 환잡니다. 제가 알아서 해요.

 

      윈터 K 앞에 서서 꿈쩍도 안 한다. 프랭크 더는 어쩌지 못하고 씩씩거리며 나간다.
윈터 소독약과 솜을 챙겨 K의 얼굴을 살핀다.

 

    박사 : (소독약을 뺏는다) 내 환자야. 자리나 비켜 주게.

 

      윈터 K를 본다. K 윈터의 시선 외면한다.

 

    박사 : 환자도 원하잖아.

 

      윈터 마지못해 나간다. 박사와 K 마주 앉는다.

 

    K : 내가 사람을 죽였대요.
    박사 : 그 순간 기억나나?
    K : 잘 모르겠어요.
    박사 : 시신을 스케치했지.
    K : 아뇨.

 

      박사 시신 스케치 사본을 보여준다.

 

    박사 : 시체를 그린 거잖아.
    K : 죽음의 천사를 그린 거예요.
    박사 : 시신이야.
    K : 서둘러 죽음의 천사가 날아가 버리기 전에. 아주 작게 속삭였지. 아주 작아서 머리 어딘가에 콕 박혀버렸어. (물 빼듯 귀를 툭툭 친다) 빠지지를 않아.
    박사 : 일곱 번의 살인 순간마다 그런 소리가 들렸나?
    K : 공원에서의 네 건만 생각나요.
    박사 : 네 건만 생각난다, 경찰에게는 그렇게 얘기하지 않았는데. 공원에서 살해된 네 명 외에 셋을 추가로 죽였다고 진술했어.
    K : 아…… 그 셋! (손가락을 꼽는다) 꼬마 하나.
    박사 : 아동을 죽였나.
    K : (계속 손가락 꼽는다) 두 꼬마, 세 꼬마 거울에,
        (잔뜩 집중한 박사를 빤히 보다 노래 시작)
        한 꼬마, 두 꼬마, 세 꼬마 거울에, 네 꼬마, 다섯 꼬마, 여섯 꼬마 거울에.
    박사 : 시끄러워.
    K : 일곱 꼬마, 여덟 꼬마, 아홉 꼬마 거울에, 거기서 죽었다.
        한 꼬마, 두 꼬마.
    박사 : 좀 닥치라고!

 

      박사 K의 멱살을 잡는다.

 

    K : ……생각났다!

 

      K 박사를 살핀다. 박사 멱살을 놓는다.

 

    박사 : 그래, 생각났으면 얘기해 봐.
    K : 난 박사님이 생각해 낸 줄 알았는데.
    박사 : (한숨) 요즘도 그림을 그리나?
    K : 연필을 뺏겼어요.
    박사 : (달랜다) 슬펐겠구나.
    K : 박사님만 하겠어요?
    박사 : 내가 슬퍼 보이니?
    K : 나보다 인기가 없잖아요. 우리끼리 얘기지만, 한물갔잖아. 내 인기 좀 주워 먹어 볼까 하고 들러붙은 거지 (작게) 부러워, 부러워 죽겠지.

 

      박사 K를 쏘아본다.

 

    K : 화난 거 보니까 진짜 맞네. 내가 부러운 거네, 세 명이 어떻게 죽었는지보다 기사가 어떻게 날지 그게 더 궁금하지. ……당신은 악마야.
    박사 : (갑자기 날이 선다) 살인마는 너야.
    K : 당신은 악마잖아. 턱시도를 입은 뱀, 점잖고 교활해. 경찰한테 다 얘기할 거야.
    박사 : 떠들어, 너 따위가 뭐라고 지껄이든 아무도 관심 없어.
    K : 올가라면 이렇게 말했을 거야. 얼쩡대지 말고 썩 꺼져.
    박사 : 나를 두려워하는군. 직접 욕을 할 용기가 없는 거지.
    K : 올가가 올 거야, 발길질을 하고, 그 잘난 낯짝에 침을 뱉어 줄 거야. 올가! 올가!!!

 

      K 책상을 두들기고 발을 구른다. 프랭크와 윈터, 들어온다.

 

    윈터 : K! 진정해! K!

 

      윈터 K와 눈을 마주치려 하는데 K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린다.
박사 주사기에 약을 담는다. 윈터 박사의 팔을 잡는다.

 

    윈터 : 이건 명백한 과잉 처치예요.
    박사 : 비켜!

 

      윈터 악착같이 박사의 주사기를 뺏는다.

 

    박사 : 대체 뭐가 잘못된 거야!
    윈터 : 분열 징후라면 약물은 상태를 악화시켜요.
    박사 : 약물 말고 당신! 저게 나타난 뒤론 온통 저 자식 생각뿐이잖아!

 

      박사 윈터를 밀치고 다른 주사기로 K에게 진정제를 투여한다. K 몸을 부르르 떨더니 그대로 축 늘어진다.

 

    프랭크 : (얼굴을 두드린다) K, 정신 차려! 뭐 잘못된 거 아니오?

 

      박사와 윈터, 대답이 없다.

 

    프랭크 : (민망하다) 뭐, 사람이니까 감정도 있고, 그럼! 사랑싸움도 해야지. 근데, 일에는 지장 주지 말아야지. 관둡시다. 나도 내 마누라랑 싸울 때 누가 참견하면 아주 싫어……. 어떻게 새로운 것 좀 건졌소?
    박사 : 올가가 누굽니까?
    프랭크 : 같이 살던 여자.
    윈터 : 연락처를 알 수 있을까요?
    프랭크 : 자살했소.
    박사 : 사건 기록을 보고 싶습니다.
    프랭크 : 대외비요.
    박사 : 용의자의 심리 상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이라고 판단됩니다.
    프랭크 : 필요합니다. 꼭! 이 간단한 말을 굳이~ 복잡하게 해.

 

      프랭크 경찰서로 전화 건다.

 

    프랭크 : 나야, 사망 사건 기록 조회, 2월 14일 올가 알렉산드로브나. (윈터에게) 팩스번호 좀.

 

      윈터가 전화를 받는다.

 

    프랭크 : (창문 밖의 경찰에게) 어이, 좀 들어와.
    박사 : 아닙니다. 제가 머리 쪽을 맡죠. 쇼크 상태라 조심하는 게 좋습니다.
    프랭크 : 그럽시다.

 

      박사와 프랭크, 축 늘어진 K를 옮겨 나간다. 전화벨이 울린다.

 

    윈터 : 네, 병원입니다. 전데요? 매코이 씨요? 아! 매코이 출판사!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오, 절대 포기할 생각 없습니다. 지금 내담자가 재판을 앞둔 상태라 상담이 원활하지 않아서 지체되었을 뿐입니다. 네, 믿어 주세요. 반드시 완성하겠습니다. 네.

 

      팩스 신호음, 팩스가 들어온다. 윈터 팩스를 확인한다.

 

    윈터 : 1964년 2월 14일 올가 알렉산드로브나 자살, 저녁 7시경, 동거남이 경찰서로 찾아와 재수사를 요청하며 소란을 일으켰다.

 

      화구통을 멘 K 뛰어 들어와 빈 책상에 매달리면, 1964년 2월 14일 경찰서가 된다.

 

    K : 올가, 올가가 죽었어요.

 

      겨울 잠바를 입은 프랭크, K를 뒤쫓아 들어온다.

 

    프랭크 : 잡았다! 여긴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데가 아니랬지.
    K : 올가, 올가가 죽었어요.
    프랭크 : 올가? 아…… 자살한 스트리퍼. 남편이야?
    K : 결혼하려고 했어요, 여름쯤에 해변에서.
    프랭크 : 돌아가. 가족이 아니면 시신을 내줄 수가 없어.
    K : 뭔가 잘못됐어요. 올가는 죽을 이유가 없어요. 봄이 되면 초상화를 그리는 사람도 많아질 거고, 우리는 여러모로 나아질 거라 믿고 있었어요.
    프랭크 : 달리는 차도에 제 발로 뛰어들었어.
    K : 온몸에 멍이 들어 있었어요.
    프랭크 : 스트립클럽엔 과격한 손님들이 많지.
    K : 속옷도 입고 있지 않았다구요.
    프랭크 : 주머니에 달러가 두둑하더군. 손님 중 누군가 그녀의 속옷을 원했겠지.
    K : (화가 나지만 덤비지 못한다) 올가는 그런 여자가 아닙니다.
    프랭크 : 성가시게 굴면 공무집행방해죄로 처넣어버리는 수가 있어.
    K : 누군가 올가를 겁탈하려고 한 게 분명해요. 올가는 쫓기고 있었던 거예요. (울먹인다) 다시 수사해 주세요.
    프랭크 : 올가가 쫓기는 걸 본 사람, 또는 올가의 찢어진 팬티. 뭐든 좋으니 증거를 가져와, 얼마든지 재수사해 주지.

 

      프랭크 K의 뒷덜미를 잡아 밀어버린다. K 구석 의자로 가 흐느낀다.

 

    프랭크 : (윈터에게) 뻔한 사건이었어요.

 

      윈터 프랭크를 쫓아 나간다. 두 사람 진료실 문 앞에서 얘기한다.

 

    윈터 : (프랭크에게) 의구심이 날 만한 정황들이었어요. 유족으로서 재수사 요청을 한 거구요. 이렇게까지 하셔야 했나요?
    프랭크 : (변명하듯) 울고불고 하는 심정이야 사람인데 왜 몰라. 근데 우리 입장도 생각해 보슈. 일주일에 둘, 셋은 시신이 실려와. 병원이 아니고 경찰서로 실려 오는 시신 뻔하잖수. 점잖아야 교통사고고, 맞아 죽은 사람, 찔려 죽은 사람, 독살에 성폭행까지. 그런 시체들 한 구당, 못해도 가족이 서넛. 그 서넛이 동시에 멱살을 흔들고 살려내라 잡아내라.
    윈터 : K는 혼자였어요.
    프랭크 : 혼자였지. 혼자서 서넛이 울어대는 만큼 곡소릴 냈지.
        가까이 가서 보니 괴상하게 눈물은 한 방울도 없어. 작정하고 성가시게 구나 싶어 좀 쥐어박긴 했수다. ……그런데 충격 받은 상태에서 머리통을 맞으면 곧장 이상해지기도 하고 그러나? (윈터 눈치 본다) 또 그렇게 본다. 나, 집에 가면 딸내미만 둘이야, 아주 무자비하게 굴진 않았다고!
    윈터 : 세상의 어떤 말도 무시보다 잔인하지 않아요.

 

      진료실로 들어가던 박사 프랭크와 대화 중인 윈터를 못마땅하게 본다.
      윈터의 손에 들린 팩스를 채서 K에게 간다.
      진료실 안에서 박사와 K 대화하고, 진료실 밖에서 윈터와 프랭크가 대화한다.

 

    박사 : (K에게) 자, 이 부분 (팩스를 보여준다) ‘여러 날 올가의 이름을 부르며 흐느끼다 돌아갔다. 그런데 그날은 프랭크를 들이받는 등 매우 폭력적으로 굴었다.’2월 17일이군.
    프랭크 : (윈터에게) 사고 당일부터 한 삼일은 저녁쯤 찾아와 재수사해 달라며 징징거렸지. 셋째 날도 비슷한 때 왔는데 찍 소리 없이 앉아만 있어. 뭔 수작이 있지 싶어서 끌어내는데, 별안간 내 등에 들러붙는 거야. 얼마나 세게 엉겼는지 장정 서넛이 겨우 떼어 놨지. ‘화가 났네, 눈이 뒤집혔다’그런 정도가 아니었어. 잠깐 뭐에 씐 건지, 전혀 다른 놈이었네.
    윈터 : (프랭크에게) 주변에 다른 사람들도 그걸 느꼈나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프랭크 : 그랬겠지.
    윈터 : 중요한 얘기예요. 확실히 해주세요.
    프랭크 : 정 궁금하면 직접 물어보시게.

 

      프랭크 앞장 서고, 윈터 뒤따라 퇴장.

 

 

    4. 균열

 

      진료실(1964년 7월 6일)
      K 망연하게 앉아 있다. 박사 K에게 차트를 들이민다.

 

    박사 : 정말 보는 사람까지 맥 빠지게 하는 표정이군. 이틀째야, 오늘은 네 역성을 들어줄 윈터도 없지. 자! 여기, 다.른. 사.람. 같았다. 분명히 적혀 있지. 마지막 치료 후 인격분열을 경험한 적이 있나?
    K : (시무룩) 내가 뭐라고 지껄이든 아무도 관심 없어
    박사 : 사과하마. 어젠 내가 지나쳤어. 그래…… 나부터 솔직해지지. 너와의 상담에 큰 기대를 걸었다. 2년 전 사고가 있었어, 지하실 계단에서 굴렀지, 머리를 다쳤고 수개월간 혼수상태. 깨어나 보니 얼마간의 기억, 그간의 명성 전부 사라졌더구나.
    K : 신이 실수로 축복을 줬군.
    박사 : 네가 비뚤어져 있는 건 알지만, 남의 불행을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비열한 일이다.
    K :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상대의 동정을 자극하는 건 더 비열해.
        (박사 흉내) 사고가 있었다. 지하실 계단에서 굴렀지, 머리통이 깨졌고 나는 오래 아팠어, 그러니 날 좀 불쌍히 여기고 협조하지 그래.
    박사 : 내가 너 따위에게 동정을 구할 거라고 생각하나? 길거리에서 시민들 동전이나 긁어모으고, 집에 돌아가면 창녀가 반겨 주는 인생.
    K : 화가 나면 화를 내, 계집애같이 비꼬지 말고.

 

      박사 화를 참는다.

 

    K : 내가 자꾸 진실을 얘기하니까 불안한 거지. 마음을 들키는 건 무서운 일이거든.
    박사 : 적어도 너는 내게 고마워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넌 줄곧 적대적이야.
    K : 나 때문에 화가 난 게 아니야.
    박사 : 아니 맞아, 너의 배은망덕한 태도가 불쾌해.
    K : 당신의 실수가 당신을 불쾌하게 하는 거야. 당신은 지독한 완벽주의자니까. 눈앞의 실패, 괴롭겠지.
    박사 : 분열이 일어났나?
    K : 지금 얘기하면 재미없지. (유순하게) 신문 보고 싶어요.

 

      박사 K를 유심히 살핀다.

 

    K : (박사를 흉내 낸다) 분열이 일어났나?
    박사 : 네가 얼마나 유명해졌는지 알고 싶어?
    K : 유명해졌구나! 신문에 내 사진도 나왔어?
    박사 : 아니 사람들은 너 따위에 관심 없어. 사람들이 열광하는 건 시체야, 사라진 세 구의 시신.
    K : 관심이 필요해 모두의 관심.
    박사 : 인기를 원하나?

 

      K 고개를 끄덕인다.

 

    박사 : 그럼 세 구의 시신에 대해 얘기해. 어디에 어떻게 숨겼지?
    K : 사람들이 열광하는 건 미스터리야. 그렇게 쉽게 말해버리면 금방 싫증 내. 박사라면서 그것도 몰라?
    박사 : (기분 상하지만 참는다) 처음 만나던 날 얘기를 해볼까? 네가 그랬지? 전부 기억하고 있다고.
    K : 물론이죠, 그때의 박사님, 우리 얘기.
    박사 : 어떤 얘긴지 궁금하군.
    K : 에이, 너무 날로 드시려고 그런다. 내가 다 말해버리면 재미가 없지.
    박사 :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나?
    K : 맞아, 전부 당신 때문이야.
    박사 : 그때 치료를 하지 않았더라면.
    K : 미치광이인 채로 살았다면.
    박사 : 올가를 만나지 못했겠지.
    K : 올가…….

 

      K의 시선 허공으로 붕 뜬다. 박사 기대에 찬 눈길로 K를 주시한다.

 

    K : (K 엷게 미소 짓는다. 브람스의 자장가를 흥얼거린다)
        올가는 노래를 잘했어요. 오래된 자장가를 부를 때면, 기도가 이루어진 듯했어요. 마침내 모든 게 끝났구나……. 천사가 나를 데리러 오다니.

 

      자장가를 흥얼거리는 올가의 목소리 흐른다.
      올가의 환영 등장한다. (올가 뷔스티에, 가터벨트, 얇은 가운 차림이다.)
      과거 K와 올가가 함께한 날 중 평온했던 하루 재현된다.

 

    K : 그 차림으로 집에 온 거야? (밖을 본다) 언제부터 눈이 온 거야?
    올가 : 자정쯤?
    K : 벌써 네 시네, 미안해. 오래간만에 물감 작업이라 시간가는 줄 몰랐어.
    올가 : 괜찮아, 난.
    K : 괜찮긴, 온몸이 꽁꽁 얼었잖아.
    올가 : 무슨 걱정이야. 이제 곧 봄이 올 텐데.

 

      올가 K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가슴에 머리를 기댄다.

 

    K : 올가…….
    올가 : 봄이다…… 봄.
    K : 안 되겠어.

 

      K 자신의 코트를 꺼내온다.

 

    K : 내일부터 올가가 입고 나가.
    올가 : 나는 종일 클럽 안에만 있는걸. 뜨거운 조명에, 조명보다 이글대는 늑대들의 눈빛까지 아주 타버릴 지경이야.

 

      올가 가운을 벗고 등을 보인다.

 

    올가 : 어딘가 타버린 곳이 있을지도 몰라.

 

      K 가운으로 올가의 등을 덮어 준다.

 

    올가 : 미안, 내가 너무 천박했지.
    K : (올가를 돌려 세운다) 그런 말 하지 마, 올가는 언제나 숭고해.
    올가 : 좋아! 숭고한 이 여왕의 말을 들을지어다. 이 외투는 왕자님이 입도록! (다정하게) 추운 공원에 종일 앉아 있잖아.
    K : 내일은 꼭 제시간에 데리러 갈게.
    올가 : 아니, 대신 그림을 그려 줘.
    K : 그림?
    올가 : 이제 물감이 있으니까, 색깔을 칠할 수 있잖아. 붉은색을 듬뿍 달라고 했는데?
    K : (물감을 가방에 넣는다) 그래, 이것들부터 무르자. 그 돈으로 코트를 사자.
    올가 : 절대 무르지 마. 대신 벽난로를 그려 줘.
    K : 벽난로?
    올가 : 내 고향엔 집집마다 페치카가 있어. (벽을 가리킨다) 저기쯤…… 페치카 그림이 있음 좋겠어.
    K : 바보 같은 짓이야.
    올가 : 당신이 그렇게 말하면 슬퍼져. 난 그런 여자야. 무모하고 어리석지만, 내가 뭘 원하는지 확실히 알아.

 

      올가 K를 바라본다. 올가 K에게 입을 맞춘다. 그러나 K는 무감하다. 올가 입술을 뗀다.

 

    K : 미안해.
    올가 : 괜찮아, 내가 두 배로 느꼈으니까. 당신 못 하는 거, 전부 대신 해줄게. 당신은 아무 걱정 하지 말고 그림만 잘하면 돼. 욕하고 싶으면!
    K : 올가를 불러.
    올가 : 울고 싶으면.
    K : 올가를 불러.
    올가 : 두 배로 울어 주고, 두 배로 웃어 줄게. 돈도 두 배로 벌어서 당신 꼭 낫게 해준다! 나만 믿어!
    K : ……미안해.
    올가 : 틀렸어, 내가 원하는 말은 ‘사랑해’야.

 

      올가 K를 꼭 안아 준다. 올가의 환영 사라진다.

 

    K : 페치카를 그리고 있었어요. 올가가 날 부르며 죽어갔을 그 순간에…… 아…… 그 차가운 바닥 위를 흐르는 붉은 피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부디 우리들의 붉은 물감을 떠올렸기를 바라요.
        그 물감으로 벽난로에 불을 그리고 있을 나를 떠올렸기를……
        정말 그랬더라면, 그녀는 춥지 않았을까요?
        올가가 정말 여왕이었다면, 그렇게 쉽게 자살로 종결짓지 않았겠죠.
    박사 : (냉정하다) 사람들은 러브스토리를 좋아하지. 배심원들 중 몇몇은 고상하게 울먹이며 무죄 표를 던졌겠네. (일지를 찢는다) 하지만 난 의사야. 네 말들을 근거로 네 심리, 생각을 재구성하지. (일지를 적는다) 상담일지가 판사에게 전해질 걸 감안하여 면죄부가 될 만한 스토리를 가공한다.
    K : 내가 사람들의 동정을 독차지할까 봐 질투나? 하긴 누가 당신 같은 인간을 사랑하겠어. 어쩌면 숭배는 받겠네, 악마잖아.
    박사 : 그렇지, 그렇게 발톱을 드러내야 배심원들이 경각심을 갖지.
    K : 소설 쓰고 있네.
    박사 : (박사 K의 손을 붙들어 손바닥을 본다) 저런, 손바닥이 다 해졌네. 날 할퀴자니 심증을 들키겠고, 주먹을 꼭 쥐고 부들부들.
        분노의 원인. 게으른 경찰? 자괴감? 아무래도 경찰이겠군, (기록한다) 올가 사건을 적극적으로 수사하지 않은 경찰에, 분노했다.
    K : (절제) 그렇게 적어야 내가 재판부의 미움을 살 거라고 생각한 거지. 이것도 적어. 난 경찰이 좋아, 브로드웨이의 말 탄 경찰은 더 멋지지.
    박사 : 영악하고 교활해.
    K : 점잖고 교활해. 교활한 건 다 배운 것 같다. 자, 이제 점잖은 걸 배워 보자. (점잔을 빼고) 나를 화나게 하는 건 멋대로 속단하는 당신 같은 인간들이지. 주머니가 가벼운 것들은 목숨도 하찮을 것이다.
        아무거나 걸치고 다니는 것들은 내키면 아무 때나 뒈져버릴 것이다.
        스트리퍼는 누가 덮치든 몸을 내줄 것이다.
        계단 꼭대기에 서서는 우리 같은 것들이 기어 올라올까 봐 수시로
        발길질을 하는 당신들! 당신들 그 무리들이 나를 화나게 하지.
    박사 : (K를 본다) 놀라운 자제력이야. 웬만한 정상인보다 감정 절제를 더 잘하고 있어. 넌! 정상이야. 곧 전기의자로 가게 될 거야.
    K : (싱긋 웃는다) 아…… 그 말은 내가 미치는 편이 나한테 유리하단 얘기네?

 

      K 책상 위 책들을 수갑을 찬 손으로 하나하나 밀어 떨어트린다.
이어 보란 듯 책상이며 의자를 마구 치고 밀어버린다.
문이 열리고 프랭크 들어와 K를 포박한다.

 

    프랭크 : 발작이군. (손가락을 튕긴다) 역시 정신 상태에 문제가 있어!
    박사 : 아직 확실하지 않습니다.
    프랭크 : 그럼 방법이 없군. 다 같이 죽읍시다. 시신 세 구가 필요해.
    K : 봐, 내가 미치는 편이 낫다니까.
    박사 : 조만간 확실한 감정이 이루어질 겁니다.
    프랭크 : 제발 바라는 바요.

 

      프랭크 K를 끌고 나간다.
윈터 들어온다. 윈터 엉망이 된 진료실을 치운다.
박사 병째로 술을 마신다. 보다 못한 윈터 박사의 술병을 붙든다.

 

    윈터 : 그만 하세요.
    박사 : 오늘이 며칠이지?
    윈터 : 7월 6일입니다.
    박사 : 재판까지 이틀…… 2월 14일 올가 사망, 3월에서 5월 사이 네 번의 살인. 6월 말에 검거. 올가의 죽음이 유발기제가 된 것 같아. 충격을 계기로 다시 인격 분열이 일어난 걸까.
    윈터 : (혼잣말) 인격 분열은 불가능해요.
    박사 : 불가능하다!?
    윈터 : ……박사님의 치료는 완벽했단 뜻입니다.
    박사 : 매번 상담 때마다 분노가 터져 나와. K의 한마디 한마디에 날이 서. 내가 저한테 동정을 구했다며 비웃는데, 그다음부턴 전혀 집중이 안 됐어. 빌어먹을! 기억력이 아니라 뇌 전체에 손상이 일어난 건가.
    윈터 : ‘올가의 죽음이 유발기제가 된 것 같다’ 이 가설 외엔 아무것도 없는 건가요?
    박사 : 얼음 좀…… 속에다 불을 놓은 것 같군. 인정하기 싫지만, 그래! 아무것도 밝히지 못했네.
    윈터 : 경찰은요?
    박사 : 망상 진단을 원해. 아니, 그들끼린 망상으로 결론 내렸어, 난 허수아비지. 세 건에 대해서는 망상으로 처리하고, 네 건으로 기소하겠지. 그럼 결국 치료감호 처리가 될 거야. 경찰은 K가 죗값을 치르든 말든 관심 없어. 무능력하다는 비난만 피하면 그만이지. 비열한 것들!
    윈터 : 정상이란 진단이 내려지면 어떻게 되나요?
    박사 : K와 경찰 둘 다 죽지. 세 건의 시신을 찾지 못한 경찰은 여론에 맞아 죽고, 제정신으로 사람을 넷이나 죽인 K는 무조건 사형.
    윈터 : 망상 진단을 하세요.
    박사 : 무슨 소리야!
    윈터 : 지금으로선 그게 최선 아닌가요. K의 상태에 대해 확신이 없으시잖아요.
    박사 : 그 자식은 살인마야.
    윈터 : 그 전에 사람이죠! 병리적인 상태라면 지각을 찾고 그다음 뉘우칠 기회를 줘야죠. 법이 내리는 형벌은 피할 수 없겠지만 지은 죄에 대해 회개할 기회는 신이 허락한 권리 아닌가요. 대체 무슨 권리로 그런 기회를 뺏으려는 건가요? 그 애가 살아 있으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요?

 

      박사 술을 단숨에 마신다.

 

    박사 : 실패작이야.
    윈터 : K는 물건이 아니에요.
    박사 : 그게 아니라면, 인두겁을 쓰고 나타난 암초겠지. 결국 날 좌초시킬 거야. 치료감호를 선고받게 되면 국립병원으로 가겠지, 그다음은 뻔하잖아. 완쾌시킨다면 저희들이 날 이겼다고 떠들어댈 테고, 완치되지 않는다면 3년 전 성급한 치료가 후유증을 가져왔다고 주장하겠지.
    윈터 : 박사님의 명예에 방해가 될 확률이 있으니, 지금 K를 없애는 편이 낫다.
    박사 : 사형을 언도받을 뿐이야. 모두에게 공평한 법을 거쳐서. 정당하게.
    윈터 : 어떻게…… 어떻게 하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죠?
    박사 : 이 나라의 법도, K도 모두 정상이야. 당신이 괴로운 건 필요 이상의 동정심 때문이지.

 

      박사 자리에서 일어난다. 가방과 옷을 챙겨 먼저 나간다.

 

    윈터 : K는 환자예요.
    박사 : 유감스럽게도 내 소견은 다르네. K는 정상이야.

 

      박사 대답 없이 나간다. 윈터 전화를 건다.

 

    윈터 : 정보를 드릴게요. 아뇨, 원하는 건 없어요. 네, 한 시간 후 좋아요.

 

      윈터 나간다.

 

 

    5. 무죄의식

 

      진료실(1964년 7월 7일)
      박사 신문을 읽고 있다

 

    신문팔이(소리) : 네 구의 시신 일곱 건의 자백. 그중 세 건은 용의자의 망상. 정신과 의사의 진단 내용이요~!
    박사 : 지난 일주일간 용의자의 정신 감정을 맡은 주치의는 용의자가 현재 극심한 망상장애를 겪고 있다고 진단했다.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세 건의 살인 진술은 모두 허위일 확률이 높으며 큰 이변이 없는 한 법정 소견도 동일하게 진술될 것이라 밝혔다.

 

      박사 서랍에서 성냥통을 꺼낸다. 성냥을 켜 신문에 불을 붙여 쓰레기통에 넣는다.
윈터 신문을 들고 급하게 진료실로 들어온다.

 

    윈터 : 신문사에 들러 확인하고 오는 길이에요. 경찰 쪽에서 일부러 터트린 것 같아요.
    박사 : 언론과 경찰 모두 고발하겠어.
    윈터 : 아뇨, 이건 선전포고에 불과해요. 어차피 저들 뜻대로 될 거예요. 우린 힘이 없어요.
    박사 : 우리……? (박사 조소)

 

      박사 윈터 앞에 서류 봉투를 툭 던진다.

 

    박사 : 매코이 출판사에서 속달이 왔어. 윈터 우드 씨의 연구를 아주 잘 읽었다는군.

 

      윈터 서류 봉투를 집으려고 하면 박사 바로 채간다. 봉투 안에서 파일을 꺼낸다.

 

    박사 : ‘무죄의식’ 연구.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이라…… 참신한 주제야. 읽어 보게.

 

      박사 윈터에게 파일을 준다.

 

    윈터 : 이 연구는 양심이 없는 상태의 인간을 관찰한 기록이다. 전 인류 중 무려 4퍼센트가 이러한 상태라 추정되며, 이 부류를 대표하는 인물로는 히틀러와 스탈린이 있다.
    박사 : 경각심을 일으키는 도입부 좋군, 계속 읽게.
    윈터 : ‘무죄의식’ 상태의 인간들은 보통 사람이라면 차마 양심에 걸려 포기하는 각종 편법과 악행을 태연히 자행하고, 그 과정에서 타인이 피해를 입거나 상처를 호소해도 전혀 가책을 느끼지 못한다. 도리어 상대의 지나친 동정심이나 우유부단함이 일으킨 문제임을 주장, 자책을 유도, 끝내는 상대를 자괴하게 한다.
    박사 : 스톱! 치명적인 오류 발견, 애초에 전제를 잘못 정하고 갔군.
    윈터 : 전제라뇨?
    박사 : 선은 옳고 악은 그르다. 이게 참일 때만 성립되는 주장 아닌가. 이해를 못 하는 표정이군. 좋아 쉽게 설명해 주지. 받아 적어. 보통 사람이라면 차마 양심에 걸려 포기하는 각종 편법과 악행을 태연히 자행하고, 전혀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그들은, 동세대보다 월등히 앞서 진화를 겪고 있는 초인류다.
    윈터 : 말도 안 돼!
    박사 : 감정적인 반론이니 무시하고 계속 가지. 앵글로색슨어에서 ‘악’은 초월한다는 의미를 갖네. 악한은 곧 ‘초월한 자’. 그들이 무엇을 초월했느냐! 당대의 사회에서 용인되는 기준. 즉 악한은 당신들이 안주하며 늘어져 있을 때, 당신들로선 상상도 못 한 방법으로 당대를 넘어선 사람들이야. 구약시대에 정혼자가 없는 여자를 강간했을 경우, 그 남자는 여자의 아버지에게 50셰켈, 지금으로 치면 일반 노동자의 4개월 치 월급, 그 정도만 보상하고 그 여자와 결혼하면 그뿐이었네. 당시는 부족사회, 자손으로 부족을 늘려야 살아남았지. 즉, 생존을 위해 그 정도 악행은 감수되었단 얘기야.
        자, 그럼 현대의 생존력은 뭘까? 돈과 성공. 초인류는 이 두 가지를 누리기 위해 양심을 극복한 거야. 생존을 위해 50셰켈을 받고 딸을 내준 아버지와 양심을 내준 초인류, 둘 중 누가 악한가?
    윈터 : 궤변은 논리가 아니라 무기예요.‘열등한 종족을 말살하면 위대한 세상이 건설된다.’ 유대인을 학살한 건 가스실이 아니라 이런 식의 궤변이에요.
    박사 : 내 가설이 궤변이라는 근거가 있나?
    윈터 : 그 논리가 아무리 완벽해도 공동체에게 유익하지 않으면 가치가 없다. 기여할 수 없으므로! 그 논리는 단 한 명 당신만을 위한 논리예요.
        어쩌면 지금 이 체제, 이 세기에는 통할지도 모르죠. 하지만 수세기를 걸쳐 변하지 않아, 결국 진리가 된 정의는 한결같이 모두에게 유익했어요. 조금 더 악랄해진다면 히틀러의 계보에 이름을 올리겠죠. 하지만 결코 신인류라는 칭호를 받진 못할 거야. 당신은 다수의 인간을 대표하기에 너무나 인간답지 않아.
    박사 : 내가 왜? 이 잘난 연구에 엄청난 기여를 하고 있잖아!
    윈터 : 연구…….

 

      박사 서랍에서 검은 노트를 꺼낸다.

 

    박사 : (검은 노트를 읽는다) 무죄의식 임상 사례 환자 넘버 ‘K’.
        그의 안에는 인간다운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안에서 그를 지배하는 것은 오직 욕망이다.
    윈터 : 현재 박사님께서 연구하시는 것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환자를 임상하는 거라 혹시 폐가 될까 봐…….
    박사 : 제법 영리해. 만의 하나 발각되더라도 ‘K’라고 둘러댈 수 있다고 계산했지. 하지만 여기 날짜들…… 경미하지만 강박이 있는 너로서는 날짜를 바꿀 수 없었지. K는 이 날짜에 진료소를 찾지 않았어. 그렇다면 여기 있는 K는…… 누굴까. 내가 혼수상태였던 동안 내 곁을 지킨 이유, 월세까지 감당하며 병원을 지켜낸 이유가 늘…… 궁금했는데, 잠시 동안 혹시 애정이란 게 아닐까 기대하기도 했지……. 그게 아니라 나를 연구하고 계셨다. 너 따위가…… 감히 내 정신을 감정해!

 

      박사 화분을 집어 던진다. 화분 박살이 난다. 윈터 뒷걸음질 친다.

 

    박사 : 한여름인데 입술이 파래졌네, 내가 좋아하는 눈인데…… 어디서 봤더라…… 생각났다! 빌리…… 학창 시절 내내 단짝이었지, 말을 아주 잘 들었거든. 사실은 내가 녀석의 비밀을 알고 있었어. 약골이라 열 살 무렵까지 종종 이불에 지도를 그렸지. 살아 있었으면, 그 녀석과 개업했을 수도 있었는데. 자살해 버렸어. ……대학 입학 첫날 비장한 표정이 떠오르는군, 더 이상 오줌싸개라고 부르지 마. 어쩌면 죽여 버릴지도 몰라. 손에는 매스를 턱 들고, 무서워라. 절대 안 부르기로 약속을 했지. 맹세컨대, 그 뒤로 오줌싸개란 말 입 밖에도 안 냈지. 그런데도 자살을 해버린 거야. ……왜 그랬을까?

 

      박사 주머니에 꽂혀 있던 볼펜을 꺼내 윈터 앞에 툭 떨어트린다.

 

    윈터 : (볼펜을 든다) 오…… 오줌싸개 빌리.
    박사 : 주소를 잘못 찾은 산타클로스가 전교생에게 그 볼펜을 공짜로 나눠 줬지. 물론 난 친구를 생각해서 그 볼펜을 쓰지 않았어. 하지만 나를 제외한 전교생은 그 볼펜을 썼지. 난 정말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지금 이 볼펜은 그리운 친구를 기념하기 위해 갖고 있는 거지…….

 

      박사 노트 중 한 페이지를 찾아 읽는다.

 

    박사 : (노트) 그의 안에는 인간다운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안에서 그를 지배하는 것은 오직 욕망이다. 자, 여기서 질문 하나, 관찰 결과 나는 지금 무엇을 욕망하고 있나.
    윈터 : …….

 

      박사 서류 봉투 위에 검은 노트를 놓는다. 그리고 그 위에 성냥통을 놓는다.

 

    박사 : 다시 묻겠네, 나는 지금 무엇을 욕망하고 있나.
    윈터 : 경…… 경력.

 

      박사 성냥통을 흔든다.

 

    박사 : 마지막으로 묻겠네, 나는 지금 무엇을 욕망하고 있나.
    윈터 : K. ……K의 죽음.
    박사 : 겁나나?

 

      윈터 비명을 삼킨다.

 

    박사 : 그래, 그래야지. 난 이래서 사람이 좋아. 비명을 지르고, 겁을 먹지. 그다음부터 다루는 건 일도 아니지. 손님이 올 시간이 됐군. 준비해. 노트는 당분간 내가 보관하지.

 

      윈터 화분을 치우고 박사 태연하게 진료 준비를 한다. 문 두드리는 소리, 프랭크다.

 

    박사 : (위협) 자네 하기에 달렸어.

 

      문 열면 프랭크 K를 데리고 들어온다. 프랭크 K를 의자에 앉힌다.

 

    프랭크 : 이 사건에 여럿 모가지가 달렸소.
    박사 : 맞는 말씀입니다. (윈터 본다) 아주 맞는 말씀이에요.

 

      박사 킬킬거리고 웃는다. 프랭크 그 웃음이 기분 나쁘다.

 

    프랭크 : 정신병도 옮는 모양이군. 난 생각 없으니 나가겠소. (담배를 문다) 저 화상 때문에 또 못 끊었어! 에으.

 

      프랭크 나간다. 박사 K와 마주 앉는다. 윈터 타이핑을 준비하고 상담 시작된다.

 

    박사 : 올가의 죽음이 동기가 됐지?
    K : 오! 이제야 내가 아는 박사님 같아요. 잡아먹을 것 같은 그 눈빛!
    박사 : 겁먹었군, 다시 존대를 하는 걸 보니.
    K : 마지막 상담이니 예의를 지키고 싶어졌어요.
    박사 : 올가의 죽음이 동기가 됐는지 물었어.
    K : 그런 셈이죠.
    박사 : 네 타깃은 경찰, 혹은 다수의 시민.
    K : 에이 그랬다면 경찰을 죽였겠죠.
    박사 : 아니, 넌 영리해. 경찰을 죽이는 건 쉽지 않다고 판단했을 거야.
    K : 흥미진진한데요?
    박사 : 올가의 죽음을 방관한 시민들을 혼내 주고 싶었나?
    K :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떻게 해요?
    박사 : 그럼 누구에게 묻지?
    K : 난 박사님한테 묻고 싶었는데, 궁금해요, 내가 왜 이렇게 됐는지. 나는 박사님이 알 거라고 생각했어요.
    박사 : 자, 마지막 기회야, 세 구의 시신 어디 묻었어?
    K : 집이요.
    박사 : 집?
    K : 네, 그 셋이 함께 살던 집.
    박사 : 일가족을 살해했단 말이야?
    K : 죽어도 쌌어요. 먼저 하나를 죽였는데 나머지 둘이 도망도 안 가고 사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를 더 죽였죠. 근데 끝까지 이사를 안 가는 거예요. 그래서 죽여 버렸어요. ……에이 뭘 그렇게 놀라요. 박사님도 다 아는 얘기면서 거기 있었잖아요. 전부 봤으면서?
    박사 : 내가 진료를 끝내면 넌 나와 대화할 기회 자체를 잃어. 이 말은 즉! 결정권은 내가 갖고 있다는 뜻이야. 묻는 말에 똑바로 대답해.
    K : 결정은 당신이 해요. 난 심판을 할 테니까. 난 충분히 기회를 줬어. 당신이 속죄할 기회를 줬다고. 왜냐하면 나는 당신이 마음에 들었으니까. 나한테 멋진 새 이름을 줬고, 유일하게 연필을 사준 사람이니까. 하지만 다 끝났어. 당신도 똑같아. 날 이렇게 만들어 놓고 책임을 지지 않아. 당신 존재가 흩어지는 고통을 맛보게 해줄 거야.
    박사 : 똑똑히 들어. 네가 살인을 일으켰던 3월에서 5월 나는 매일 알리바이가 있어.
    K : 그래, 누가 뭐래? 당신은 올해의 살인과 무관해.
    박사 : 올해의 살인!?
    K : 세 명은…… 훨씬 전의 이야기야.
    박사 : 네 명 이전에 셋을 먼저 죽였다?
    K : 빙고! 예행연습이라고 해두지.
    박사 : (윈터에게) 프랭크를 불러, 아니 아니지, 부르지 마. 타이핑부터 해! 망상이 아니라 과거의 살인이라 시신 발굴에 차질이 빚어졌을 것이다. 정신 감정 과정에서 최초로 밝혀졌다. 오케이! 방금 그 내용은 경찰서에 넘기지 마. 내가 갖고 있지.
        (K에게) 시신이 어디 있지? 그 집에 묻었다고? 그 집의 위치가 어디야?
    K : 뉴욕.
    박사 : 더 구체적으로.
    K : (느리고 작게 시작해 점점 커진다) 한 꼬마, 두 꼬마, 세 꼬마 거울에, 네 꼬마, 다섯 꼬마, 여섯 꼬마 거울에, 일곱 꼬마, 여덟 꼬마, 아홉 꼬마 거울에, 거기서 죽었다.

 

      K의 노래 소리 점점 커진다. 프랭크 소리를 듣고 들어온다.

 

    프랭크 : 두 번째 발작이군. (손가락을 튕긴다) 확실히 정신 상태에 문제가 있어. 박사 : 진단서는 내일 법정에서 드리죠. 잘 끝났습니다.
        신의 가호가 함께했습니다.
    프랭크 : 신은 너무 멀리 있어서 모르겠고. 주지사님이 굽어보시고, 기자새끼들 바글바글하니 허튼수작 않는 게 좋을 거요.
    박사 : 여부가 있겠습니까.

 

      프랭크 K를 끌고 나간다. 박사 거울을 본다.

 

    박사 : 머리가 엉망으로 자랐군, 이발소에 들러야겠어. 테일러 양복점에서 새 슈트를 갖고 올 거야, 잘 받아 놔.
    윈터 : 네.

 

      박사 윈터 보란 듯 검은 노트를 자신의 가방에 넣는다. 박사 나간다.
      윈터 박사가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마룻바닥을 더듬는다.
      마룻바닥 중 하나가 열린다. 윈터 약병을 꺼낸다. 윈터 전화를 건다.

 

    윈터 : 지난번에 사간 약이요, 24시간 정도 잠들려면 얼마나. 50밀리…….

 

      문 두드리는 소리.

 

    윈터 : 잠시만요.

 

      문을 열면 박사다.

 

    박사 : 이발소가 문을 닫았네. 이 블록에 다른 이발소는 없나?
    윈터 : 찾아볼게요.
    박사 : (전화기를 본다) 통화 중이었어?
    윈터 : 아뇨, 잘못 걸린 전화예요.

 

      문 두드리는 소리.

 

    윈터 : 슈트가 왔나 봐요.
    박사 : 그런가 보네.

 

      둘 다 선뜻 옷을 받으러 가지 않는다. 두 사람 서로를 경계한다.

 

    박사 : 옷 좀 받아 주지. 난 다른 이발소를 찾아야 해서.
    윈터 : 네.

 

      윈터 옷을 받으러 나간다.
      박사 재빨리 전화기 옆 약병을 확인한다.
      윈터 들어온다. 박사 슈트케이스를 받는다.

 

    박사 : 커피 반잔만, 진하게.
    윈터 : 반잔이요?
    박사 : 대신 진하게.

 

      윈터 약병을 챙겨 티 테이블로 간다. 윈터 커피에 약을 탄다.

 

    윈터 : 드세요.
    박사 : (슈트케이스를 연다) 옷이 잘 나왔나? 더워라, 냉수도 한 컵 부탁해.

 

      박사 윈터가 물을 따르는 사이, 열린 슈트케이스에 커피를 부어버린다.

 

    윈터 : 여기 물.

 

      박사 슈트케이스를 바로 닫는다.

 

    윈터 : 왜요?
    박사 : 색깔이 잘못 나왔어. 아, 이게 아닌데.

 

      박사 눈을 몇 번 부비더니, 슈트케이스를 안고 엎어진다.
      윈터 박사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가방을 챙겨 나간다.
      윈터가 나가면 박사 일어난다.
      슈트케이스를 열어 본다. 엉망이 된 양복.
      박사 못마땅한 표정으로 슈트케이스와 가방을 챙겨 나간다.
      박사 불을 끄면 암전.

 

 

    6. 세 구의 시신

 

      법정(1964년 7월 8일)
      무대에는 피고인석과 증인석만 존재한다. 조명 피고인석에 서 있는 죄수복 차림의 K를 비춘다.

 

    판사(소리) : 사건번호 191013 센트럴파크 연쇄살인 사건 용의자 K에 대한 공판을 시작합니다.

 

      재판봉 두드리는 소리.

 

    검사(소리) : 용의자가 수화통역사를 신청했습니다. 진술 과정에서도 수화를 번갈아가며 사용했습니다. 수화통역사 입회를 허가해 주십시오.
    판사(소리) : 수락합니다. 검사 기소사유 밝혀 주세요.
    검사(소리) : 피고 K는 지난 3월부터 5월 사이 일어난 네 건의 살인 일체를 자백했습니다. 그러나 곧이어 저지르지도 않은 세 건의 살인을 허위 자백해 경찰 인력의 소모를 야기하고, 무고한 시민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등 뉴욕 시 전체를 기만했습니다.
    판사(소리) : 세 건의 자백이 허위라는 증거가 있습니까?
    검사(소리) : 물론입니다. 지난 일주일간 정신 감정이 진행됐습니다. 담당 주치의가 개인사정으로 출두하지 못해, 협력 의사가 대리 참석했습니다. 정신과 전문의 윈터 우드 씨를 증인으로 신청합니다.
    판사(소리) : 증인, 증인석에 자리해 주세요.
    윈터 : 제출 드린 바와 같이 K는 현재 극심한 망상증을 앓고 있습니다.

 

      박사 법정으로 들어온다.

 

    박사 : 주치의 도착했습니다!
    판사(소리) : 대리인 신문 진행 중입니다.
    박사 : 제출된 서류엔 전날의 상담 기록이 누락되어 있습니다.
    판사(소리) : 검사 확인하세요.
    검사(소리) : 7월 7일 상담 기록은 없습니다.
    박사 : (서류를 보인다) 여기 있습니다.
    검사 : 증인 변경 신청하겠습니다.
    판사(소리) : 받아들이겠습니다. 자리해 주세요.

 

      윈터 증인석에서 내려온다. 박사 올라간다.

 

    판사 : 시간이 지체되었습니다. 속히 진행해 주세요.
    박사 : 지난 7월 1일부터 7월 7일까지 K의 정신 감정을 진행한 결과 K는 현재 정상인 것으로 판단됩니다. 3년 전 한 차례 해리장애가 발병하였으나, 당시 치료로 완치되었고, 현재까지 재발 징후 또한 없습니다.
    판사(소리) : 피고가 자백한 세 건의 살인 진술이 실재라고 판단하십니까?
    박사 : 네, 실재라고 판단합니다. 마지막 상담 중 밝혀진 바에 의하면, 네 건의 살인보다 앞서 실행된 것 같습니다.

 

      카메라 셔터 소리, 플래시 터지는 효과.

 

    판사(소리) : 구체적인 시기나 장소도 언급됐나요?
    박사 : 뉴욕 소재 2층 규모의 주택에서 일어났습니다. 보다 상세한 취조는 경찰에서 진행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K는 정상입니다. 더 이상 정신과 상담을 요하지 않으며, 모든 재판과 심문에 적합한 상태입니다.
    판사(소리) : 진단을 확신하십니까?
    박사 : 네, 확신합니다.

 

      K 갑자기 폭소를 터트린다. K 수화를 시작한다.

 

    판사(소리) : K? 진정하세요. K? 교도관!
통역사(소리) : 수화 통역을 시작하겠습니다.

 

      K의 수화 시작된다. K의 수화에 따라 통역사의 목소리 흐르다 H의 목소리로 바뀐다.
      *K 안에 숨어 있던 새로운 인격 H의 목소리 차갑고 냉정하다.

 

    통역사(소리) : 세 번의 살인은 3년 전 뉴욕에서 일어났습니다.
    판사(소리) : 구체적인 장소를 언급해 주세요.
    K-H(소리) : 윈터 가든 정신병원의 지하에서 일어났습니다.

 

      법정이 술렁인다. 청중의 탄식.

 

    판사(소리) : (재판봉 두드린다) 정숙, 정숙하세요.
    K-H(소리) : 살인은 매월 말일 진료실의 지하에서 은밀하게 진행되었습니다.

 

      EriK Satie의 Gnossienne No.1 흐른다. – *그림 조명 ON(1961년 7월 31일)
 
      K 의자로 가 앉는다.
      박사 의자에 걸쳐 있는 가운을 입는다. 가운 주머니에서 최면용 추를 꺼내 흔든다.

 

    박사 : 지금도 샘의 울음소리가 들리나요?
    K : (눈을 감고 있다) 네.
    박사 : 울음소리를 따라가 보세요.

 

      윈터 들어와 LP플레이어를 정지시킨다.

 

    윈터 : 환자 스스로 인격들은 아우르고 통제할 수 있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자기 의지가 배제된 최면 상태에서는 불가능해요!
    박사 : 자신 없으면 나가.
    윈터 : 치료 전보다 지금이 더 고통스럽다고 했어요. 조금의 가책도 없으신가요?
    박사 : 가책! 끝까지 갈 용기는 없고, 그걸 인정하긴 싫을 때 대는 핑계.
        장미 한 송일 원해도 가시를 감수해야 돼, 이 자본의 전쟁터에서 부와 명예를 거머쥐고 싶다. 대가? 치러야지!
    윈터 : 그 대가를 왜 이 아이가 치러야 하는 건데요!
    박사 : ……이래서 출신이 중요한 거야, 땅 파먹는 정원사의 딸.
    윈터 : 전 아버지를 항상 자랑스러워했어요.
    박사 : 그래, 매번 그렇게 변명을 하며 살았겠지. 내 아버지는 영국에서 가장 큰 병원의 원장이었어. 집에 오는 손님들은 한결같이‘훌륭한 아버님이 계셔서 정말 자랑스럽겠구나.’라고 말을 걸었지, 난 그냥 네, 물론이죠.
        같은 가운을 걸쳤으니 이제 동등하다? 천만에, 정원사의 딸 눈엔 여기가 망루 같지, 다 이룬 것 같으니 선심 쓸 여유도 생기고. 병원장의 아들 눈엔 고작 도약대야. 하나쯤 부러진다고 그게 대순가. 내 다리만 멀쩡하면 열 개를 갈아치운들 어때, 나한테 중요한 건 도약대가 아니라 기록 갱신이야! 역사!
    윈터 : 평정을 찾으세요. 그런 상태로는 누구도 치료할 수 없어요.
    박사 : 가서 진정제나 가져와.
    윈터 : 약물은 안 돼요
    박사 : (약병을 든다) 그럼 이걸 써야 하나, 쇼크가 오던데.
    윈터 : 기다리세요.

 

      윈터 하는 수 없이 나간다. 박사 음악을 플레이시키고, 추를 흔든다.

 

    박사 : 자, 조금 더 집중해 보자. 샘을 찾았나요?
    K : 구석에 있어요.
    박사 : 샘에게 다가가세요.
    K : ……바로 앞에 있어요.
    박사 : 곰 인형을 뺏으세요.
    K : 샘이 울어요.
    박사 : 인형을 다시 보여주세요.
    K : 하하하, 하지 마. 샘이 인형에 뽀뽀하려고 해요.
    박사 : 좋아요! (빠르게) 지금, 곰 인형으로 샘의 얼굴을 눌러요.
    K : 네?!
    박사 : 다시 울음을 터트리기 전에, 당장.
    K : (놀라 눈을 뜬다) 안 돼!
    박사 : 저런, 놀란 모양이구나.
    K : 무서운 꿈을 꿨어요,
    박사 : 꿈?
    K : 박사님을 닮은…….
    박사 : 나를 닮은?
    K : 아니에요.
    박사 : 얘기하지 않고 잠들면, 그 꿈을 다시 꾸게 될걸. (작게) 몇 배는 더 끔찍하게.
    K : 악마, 박사님을 닮은 악마가 샘을 공격했어요. 너무 무서워요, 잠이 안 올 것 같아요.
    박사 : 걱정하지 마, 나쁜 꿈이 아니야. 그건…… 현.실.이.야.

 

      박사 2층 가교 위로 올라간다. 박사 마리오네트 스틱을 들고 있다.
      K 박사가 조종하는 대로 움직인다.

 

    박사 : 샘을 찾아.
    K : 싫어…….
    박사 : 샘을 찾아.
    K : 샘 도망쳐.

 

      1층 무대 안쪽 이리저리 도망 다니는 샘의 그림자.

 

    박사 : 울보 샘을 찾아라.
    K : 울보 샘…….
    박사 : 울보 샘을 찾아라.
    K : 울보 샘을 찾아라.

 

      K 샘의 곰 인형을 줍는다. K 박사가 조종하는 대로 끌려가면 구석에 울고 있는 샘의 그림자 보인다.
      K 구석으로 들어가면, K와 샘의 그림자 보인다.

 

    박사 : 좋아! (빠르게) 지금, 곰 인형으로 샘의 얼굴을 눌러!

 

      곰 인형으로 샘의 얼굴을 누르는 K의 그림자 보인다.
      샘 발버둥을 치다 축 늘어진다. K 뒷걸음질 쳐 나온다.

 

    박사 : 죽었나요?
    K : 모…… 모르겠어요. 곰 인형이 얼굴을 덮고 있어요.
    박사 : 자~ 인형을 치워요.
    K : 싫어. 못 하겠어.
    박사 : 해야 해요. 내가 아주 좋은 연필과 캔버스를 줄 거예요. 샘의 얼굴을 그려 보고 싶지 않아요?
    K : 죽었잖아요.
    박사 : 그렇죠. 그것도 방금. 아직 그 얼굴에 죽음의 천사가 남아 있을 때 그걸 그리는 거야. 정말 멋진 작품이 될 텐데……. 아무에게나 오는 기회가 아니죠, 심장은 멈췄지만 아직 입술은 빨갛고, 다신 울 수 없지만 아직 눈물이 맺혀 있는 눈. 그걸 그리는 거야. (속삭인다) 죽음의 천사가 날아가 버리기 전에.

 

      K 자리에서 스르르 일어나 의자로 가 앉는다.

 

    박사 :     다시 깊은 잠으로 들어갑니다.

 

      박사 가교 위에서 추를 흔든다.

 

    박사(소리) : 7월 31일, 환자 넘버 K. ‘샘’처치 성공.
    윈터 : (날카롭게) 아니오! K가 이상해요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진료 가운 차림의 윈터(과거) 차트를 들고 급하게 들어온다.
      윈터 K를 깨운다. K 멍한 눈으로 윈터를 본다.

 

    윈터 : K, 무서우면 울어도 돼. 괜찮아 울어도 돼.

 

      윈터 K의 등을 쓰다듬어 주지만 K 울지 못한다.

 

    윈터 : 울고 싶은 게 아냐? 지루해서 그래? 그래! 『삼총사』. 이 책 좋아했잖아. 예전에 샘이랑 우리 다 같이 아주 신났었잖아. 응?

 

      K 퀭하니 보기만 한다.

 

    윈터 : 감정을 해소하지 못해요. 샘에게 우리가 몰랐던 긍정적인 기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박사 : (무시) 7월 31일, 환자 넘버 K. ‘샘’ 처치 성공.
    윈터 : 박사님!
    박사 : 일어나! 일어나 K!

 

      2층의 박사가 조종하는 대로 마리오네트가 되어 움직이는 1층의 K.

 

    박사 : 자, 줄리아.
    K : 줄리아!
    박사 : 시끄럽고 음탕해
    K : 줄리아는 자장가를 잘 불러
    박사 :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어
    K : 줄리아가 없으면, 난 잠을 잘 수가 없어.
    박사 : 칼이 어딨지?
    K : …….
    박사 : 천천히 다가가자.

 

      박사 K가 2층으로 올라가도록 조종한다. K 올라가지 않으려고 버틴다.

 

    박사 : 멍청한 자식.

 

      박사 2층 가교에서 내려온다. 박사 가운을 벗어던지고, K의 윗옷을 벗겨 입는다.

 

    박사 : (K에게) 똑똑히 봐.

 

      박사 K의 옷을 입고 2층으로 올라간다. 2층 오른편 열린 문에서 불빛 새나온다.
      박사 문 앞으로 다가간다.

 

    박사 : 먼저 문틈으로 살짝 엿봐.

 

      방 안에서 음악(Elvis Presley – Can't help falling in love) 흘러나온다.

 

    줄리아 : (박사를 K로 안다) K구나, 또 잠이 안 와? 이리 와, 노래 불러 줄게.

 

      줄리아 방에서 나온다. 박사 줄리아의 머리채를 휘어잡는다.
      박사 2층에서 인격들을 공격하면, 1층에 서 있는 K, 인격들과 같은 동작으로 움직인다.

 

    박사 : 천박한 취향! 끈적한 머리칼 잘라 줄까? (K에게) 따라해! 끈적한 머리칼 잘라 줄까! 멍청한 자식! 다음은 니 차례야.

 

      박사 줄리아의 머리카락을 칼로 자른다. 1층의 K도 머리채를 잡힌 듯 버둥거린다.

 

    K : 안 돼!

 

      줄리아 1층의 K를 본다.

 

    줄리아 : (K를 본다) 도망쳐, K!
    K : (줄리아에게) 도망쳐, 줄리아!
    박사 : (K에게 살의) 괘씸한 것, 지금 누구 편을 드는 거야!

 

      박사 줄리아를 놓고 K를 향해 내려가려고 한다. 줄리아 박사를 붙든다.

 

    줄리아 : 도망쳐, K!
    박사 : 생존을 핑계로 몰염치를 가르친 죄.

 

      박사 줄리아의 목을 칼로 긋는다. 1층의 K, 같은 순간에 자신의 목을 긋는 시늉을 한다.
      박사 줄리아가 죽은 것을 확인하고 1층으로 내려온다.

 

    박사(소리) : 8월 31일, 환자 넘버 K. ‘줄리아’처치 성공.

 

      윈터 트렁크를 들고 들어온다.

 

    윈터 : 경찰과 학회에 고발하겠어요.
    박사(소리) : 무슨 근거로?
    윈터 : K가 근거야. 당신의 실험으로 괴물이 되어 가는 K!
    박사(소리) : K의 무의식을 무슨 수로 보여줄 건가? 사람들이 K 따위에 관심이나 둘 것 같아? 그보단 미모의 여의사가 열등감으로 미쳐버렸다, 거짓 주장으로 파트너의 명예를 훼손하려 했다, 이편이 훨씬 잘 팔릴 뉴스 같은데. 좋을 대로 해.

 

      박사 K를 일으킨다. K 손에 칼을 쥐어 준다.
      K 떨어뜨리고 더미(dummy)처럼 주저앉는다. 윈터 K 곁으로 간다.

 

    K : 줄리아…….
    윈터 : 일주일째 불면 상태예요, 혈압이 빠르게 떨어지고 있어요.
    박사 : (박사 최면 추를 흔든다) 손가락들이 춤을 추면, 멋진 그림을 갖게 될 거야. 비틀어버릴 모가지가 생기면, 멋진 그림을 갖게 될 거야.
    K : 두근두근 (손을 본다) 심장이 손으로 왔나.
    박사 : 겨우 그 정도로 놀라긴, 진짜 손맛은 이제부터야.
    K : 손맛?

 

      박사 K에게 낚싯대를 던져 준다. K 낚싯대를 들고 가만히 서 있는다.

 

    박사 : 마틴을 낚으러 가자.
    K : 마틴.
    박사 : 욕쟁이 불한당.
    K : 신나게 퍼부어!
    박사 : 도둑질한 손을 꺾어버리고, 더러운 입을 다물게 해!
    K : 신나게 퍼부어!
    박사 : 쓸모없는 녀석, 똑바로 봐.

 

      박사 2층으로 올라가 마틴의 방을 두드린다. K 1층에 서서 박사의 말만 겨우 따라한다.

 

    마틴 : 밖에 뭐야!
    박사 : 나야, K.
    마틴 : (박사를 K로 안다) 어이 귀염둥이.
    박사 : 낚시하러 가자.
    K : (멀찍이 서서 말만 따라한다) 낚시하러 가자.
    마틴 : 그런 건 샌님들이나 하는 거야. 남자라면 사냥을 해야지, 엽총 들고 빵! 피가 촥!
    박사 : 걱정 마, 낚시도 끔찍해.
    K : 걱정 마, 낚시도 끔찍해.

 

      박사 마틴에게 달려든다. 박사 마틴의 목에 낚싯줄을 감는다.
      박사 낚싯대 핸들을 돌리면, 마틴과 K, 동시에 고꾸라진다.
      마틴과 K, 한 몸처럼 같은 동작, 목을 붙들고 고통스러워한다.

 

    K : 마…… 마틴.
    박사 : 더러운 욕을 가르친 죄. 술을 가르치고 타락을 부추긴 죄!

 

      박사 마틴의 목을 칼로 긋는다. 1층의 K, 같은 순간에 자신의 목을 긋는 시늉을 한다.
      박사 마틴이 죽은 것을 확인한다.

 

    박사 : 9월 30일, 환자 넘버 K. ‘마틴’처치 성공.

 

      박사 1층으로 내려온다. K 박사에게 달려든다. 박사 K를 간단하게 제압해 내동댕이친다.
      K 그대로 엎어져 클클 웃는다.
      K 자신의 어깨, 다리 등을 더듬어 본다. 세게 두드려 봐도 감각이 없다.
      K 벽돌을 들어 자신의 무릎을 내려친다. 윈터 달려가 K를 붙든다.

 

    윈터 : 온몸의 통점이 마비됐습니다. 고통을 느끼지 못해요.

 

      박사 K를 데려다 자리에 앉히고, 탁상 거울을 보여준다.

 

    박사 : 누구지?
    K : K…….
    박사 : 그리고.
    K : K뿐이야.
    박사 : 그렇지! 자, 마지막으로 다시 질문, K 안엔 누가 있지?
    K : K 안엔, K가 있지. K 안엔, K가 있지.
    박사 : 9월 30일, 환자 넘버 K. 다중인격 완치!
    K : 친구들은 거울에 빠져 죽었어.

 

      K 거울을 마주하고 노래한다.

 

    K : 한 꼬마, 두 꼬마, 세 꼬마 거울에, 네 꼬마, 다섯 꼬마, 여섯 꼬마 거울에, 일곱 꼬마, 여덟 꼬마, 아홉 꼬마 거울에, 전부 다 죽었다.
    윈터 : 망상 증상이에요.
    박사 : 그게 문제가 될까? 전혀. 이 진료의 목적이 저 앨 정상으로 만드는 거였나? 아니, 다중인격 치료였어. K 내면엔 K만 있다. 성공이야.

 

      윈터 박사의 옷깃을 붙잡는다.

 

    윈터 : 이, 이렇게는 안 돼요. 차라리 처음으로 돌이켜, 돌이켜 줘요.
    박사 : 각 신문사와 방송국에 치료 성공 팩스 넣어. ‘3개월 만에 완치’ 이 카피 꼭 포함시키고.
    윈터 : 치료는 실패했어! (차트 뭉치를 치켜든다) 전부 얘기할 거야!
    박사 : 그 차트 소각하고 새로 써. K는 첫차를 타고 수도원으로 간다. 잘 들어, 이 과정에 대해 입을 여는 순간 K를 찾아서 반드시 폐기한다. (위협) 명심해, 자네 하기에 달렸어.

 

      박사 벽에 걸린 메두사 그림을 유심히 본다.

 

    야고보(K)(소리) : 이 화가는 메두사의 마음을 모르는 것 같아요.
    박사(소리) : 메두사의 마음이라.
    야고보(K)(소리) : 너무 슬픈 표정이잖아요. 슬플 이유가 없는데…….
    박사(소리) : 슬플 이유가 없다!?
    야고보(K)(소리) : 강해졌잖아요, 외로울 틈도 없고.
    윈터 : (K를 품에 안은 채) 자화상이었어요. 다 함께 있어야 행복한, K의 자화상.
    박사 : 유감이군.

 

      박사 윈터를 붙들어 일으킨다. 박사 윈터를 앞세운다.
      윈터 박사에게 떠밀려 들어가고, 박사 그 뒤를 따라 퇴장.
      병원에서 내쳐진 K 무대 중앙으로 비틀비틀 걸어 나온다.

 

    K : 마틴, 나 무서워. 줄리아, 노래 좀 불러 줄래?

 

      수도원장 K의 목에 개 목걸이를 감는다.
      수도원장 의자를 놓고 앉는다. K 그 옆에 무릎을 꿇고 앉는다.

 

    수도원장 : 속죄양, 고해를 대행해 드립니다. 속죄양, 고해를 대행해 드립니다.

 

      미사포를 쓴 속죄녀 걸어 나온다.

 

    속죄녀 : 지난 밤 쾌락에 유혹을 당했습니다. 성모님의 용서를 구합니다.
    수도원장 : 스무 대 정도면 되겠습니다. 백 달러!

 

      동전 떨어지는 효과음, 수도원장 막대를 휘두르면 채찍소리 효과음, K 묵묵히 매를 맞는다.

 

    수도원장 : 성도님의 죗값이 치러졌습니다.

 

      속죄녀와 수도원장, 미사 종소리에 맞춰 퇴장한다. K 자리에 엎드린다.

 

    K : 샘, 어딨니, 내 대신 좀 울어 줄래? 샘……. (목에 걸린 줄을 붙들고) 마틴, 이것 좀 풀어 줘, 마틴.
    행인 1(소리) : 수도원의 개다.
    K : (웅크린다) 살려 주세요.
    행인 2(소리) : 너 돈 받고 매 맞는다며?
    행인 1(소리) : 그래? 그럼 지금 우리 돈 버는 거야?

 

      K를 발로 차는 둔탁한 효과음, K 몸을 웅크리고 발길질을 당한다.
      외출복 차림의 윈터 달려와 행인들을 쫓는다.

 

    윈터 : 뭐 하는 짓들이야! 저리들 비켜! 오, 하느님. K, 나야.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해. 어제 박사가 지하 계단을 구르는 사고를 당했어. 머리를 다쳤고 당분간 혼수상태일 거래.
        이건 하늘이 준 기회야 (트렁크를 K에게 쥐어 준다) 도망쳐. 사고 직전까지, 널 데려다 다시 실험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어. 더는 안 돼, 어떻게든 막을 거야.
    K : 도망쳐요. 당신도 도망쳐.
    윈터 : 아니, 그럼 우리 둘 다 죽어. 약속해. 널 고칠 방법을 찾을게, 제발 그때까지만 살아 있어 줘.

 

      윈터와 K, 포옹하고 각각 반대편 자신의 자리로 걸어가 선다. 그림 조명 OFF 된다.

 

    법정
    피고인석에 선 K, 박사를 곧장 보고 있다. K 수화를 한다.

 

    K-H(소리) : 세 구의 시신은 K 안 어딘가에 있습니다. K 더 이상 사람이 아닙니다. 그냥 무덤입니다. 살아 있는 무덤입니다.

 

      K 박사를 바라본다. 그를 향한 증오 폭주하지만, 눈물도 말도 나오지 않는다.
      해소되지 않은 채 증폭되기만 하는 괴로움에 기묘하게 울부짖는 K.

 

    박사 : 지금 K는 근거 없는 이야기로 배심원단과 청중을 교란시키고 있습니다.
    윈터 : K의 진술은 모두 사실입니다. 당시의 치료 기록을 제출하겠습니다. 살인의 원인은 최면 과정에서 주입된 ‘살인 쾌감’입니다. 살해 후 그림을 그리는 패턴 역시 박사가 주입한 것입니다. 과거 K가 박사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K는 결코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이전의 정서 상태로 회복할 기회를 주십시오.
    박사 : 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마틴과 같은 폭력적인 인격이 또 다른 문제를 일으켰을 것입니다.
    윈터 : 마틴이 살인을 일으킬 만한 인격이란 증명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것은 명백히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교사로 박사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박사 : 최면 시술에 대해서는 인정합니다. 최면 치료는 이미 유럽에선 보편화된 치료 방법 중 하나입니다. 3년 전 저의 시도는 다중인격 치료의 진일보를 위한, 패기 어린 도전이었습니다. 다, 다만, 치료 과정에서 생성된 암시가 이 살인에 영향을 끼쳤는지는 조금 더 연구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시간을 주신다면 의사로서 양심을 걸고 진실에 최대한 접근하겠습니다.
    판사 : 박사가 치료 과정에서 일으킨 과실은 본 재판과 무관합니다. 위법 여부는 별도의 적법한 절차를 걸쳐 추후 통보할 것입니다. 재판에 관해 추가 질문을 하겠습니다. 닥터 우드, 현재 K의 증상을 해리장애로 볼 수 있습니까?
    윈터 : 사라진 인격들을 대신해 K를 지켜주던 올가가 죽자, 자기방어 기제에 의해 폭력적인 인격이 생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과거의 인격들 중 수화를 사용하는 인격이 없었다는 점을 의학적 근거로 제시합니다.
    박사 : 이의 있습니다. 단 한 번의 징후로 다중인격 진단은 무리가 있다고 판단됩니다. 정신 감정을 다시 진행할 것을 요청합니다.
    판사(소리) : 검사, 동의하십니까?
    검사(소리) : 동의합니다. 과거 재판 중 치료감호 판정을 노린 피고가 허위로 정신분열을 연기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판사(소리) : 다중인격을 연기하고 있다, 일리가 있군요. 좋습니다. 공판을 이 주 연기하겠습니다. 검사는 새 의사를 선정해 정신 감정을 진행해 주세요.
    검사(소리) : 알겠습니다.
    판사(소리) : 사건번호 191013 공판을 마칩니다.

 

      판사봉 효과음. 암전.

 

 

    에필로그

 

      진료실 – 한 달 후
      진료실 창문마다 커튼이 쳐져 어둡다.
      황폐한 모습의 박사 테이블 위에 쌓인 차트를 갈가리 찢어 박스에 넣는 걸 마쳤다.

 

    박사 : 좋아! 이걸로 K에 대한 기록은 전부 사라졌어. 이제 곧 K도 사라질 거고 마침내 내 경력은 완벽해졌어. 안 그래? (불안) 아니야, 아직 K의 신변이 확실하지 않아. 재판부의 최종 결론은 한 달간의 정신 감정 후 사형집행.
        정신 감정 절차라 봤자 여론을 의식한 액션일 뿐 K의 사형은 기정사실이야. 그렇지? 아니야, 프랭크에게 확인해 봐야겠어. (전화 건다) 프랭크 형사 부탁드립니다. 돌아오시는 대로 윈터 가든 진료소로 전화 부탁드립니다.

 

      박사 초조하다. 술을 병째 들이켠다.
      검은 옷을 입은 윈터 트렁크에 짐을 싸고 있다.
      창밖에서 신문 파는 소리 들린다.

 

    신문팔이(소리) : 호외요. 호외 살인용의자 K는 사형. 인격을 살해한 주치의는 관련법 미 제정으로 무죄.
    박사 : (창밖을 향해) 어이, 우리 진료소엔 왜 신문을 안 넣는 거야! 야! 어딜 도망쳐! (화색) 결국 사형집행이 됐군. 라디오를 켜봐. 아니야, 신문사로 직접 가지.

 

      박사 급하게 외투를 챙겨 입고 나간다.
      윈터 정리를 마친 트렁크와 화분을 챙겨 테이블 앞에 놓는다. 모자를 쓰고 외투를 걸친 후 작별 인사하듯 진료소 구석구석에 시선을 주는데, 노크 소리 나고 우체부 들어온다. 우체부 가로세로 1미터 크기의 소포 포장된 액자를 들고 있다.

 

    우체부 : 윈터 우드 씨?
    윈터 : 네.
    우체부 : (액자를 내려놓고 편지 봉투를 준다) 속달입니다.
    윈터 : (편지 봉투 발신인 확인) 프랭크 씨가?

 

      윈터 사인을 한다. 윈터 봉투를 열고 잠시 아무 말도 못 한다.

 

    윈터 : (절절한 탄식) K!
    K : (소리) Dear 윈터.

 

      무대 다른 편에 죄수복을 입은 K의 환영 등장한다.

 

    K : 안녕 선생님. 오늘 마지막 진료가 끝났어요. 이제 내일이면 난 죽는다는 얘기겠죠. 마음이 편해요 언제나 대가를 치르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당신을 생각하면 너무 마음이 아파. 그렇게 열심히 노력해 주었지만 나는 끝내 꽃이 되지 못했죠. 하지만 윈터, 우리 이렇게 생각해요. 나는 썩어버렸지만 그래서 거름이 되었다고. 이제 당신은 빛을 소망하면 돼요. 태양이 마르지 않는 한 끝은 없으니까.
        프랭크 형사님이 이제 그만 써야 한대요. 간수가 올 시간이 됐대요. 당신을 위해 선물을 꼭 하나 하고 싶었는데 프랭크 형사님이 정말 많이 도와줬어요. 미안하게도 이 선물은 모두 불법으로 만들어졌죠. 간수의 눈을 피해서. 마지막까지 성결할 수 없어서 미안해요. 하지만 이제는 이 사실을 믿게 되었어요. 세상 위에 신이 있어요. 그래야만 눈을 감을 수 있어요. 당신을 신께 맡깁니다. 사랑해요 윈터, ‘신’ 외에는 무엇에도 지지 말아요.

 

      윈터 그림의 포장을 벗겨낸다. 그림 – 한겨울 눈 쌓인 정원 위에 꽃이 만발하다.
      윈터 벽에 걸린 〈메두사〉 그림을 떼고 그 자리에 그 그림을 벽에 건다.
      윈터 전화를 건다.

 

    윈터 : 여행사죠. 티켓 취소하려구요. 윈터 우드 뉴욕발 오클라호마행 편도 오늘 저녁 출발. 아니오. 당분간은 여행 계획이 없어요. 감사합니다.

 

      윈터 전화를 끊는다. 모자와 외투를 벗어 벽에 건다. 의사 가운을 입은 윈터 화분을 제자리에 놓는다. 진료실 커튼을 모두 연다. 환한 빛 들어온다.
      박사 들어온다. 차분하고 여유 있는 모습으로 돌변한다.

 

    박사 : (진료 가운을 입은 윈터를 본다) 그래, 그래야지. 거지꼴로 고향에 돌아가는 것보다 이편이 훨씬 낫지. 자,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당신이 법정에서 발표했던 소견서를 정정하는 성명을 내는 거야. 진료 과정에서 K의 협박을 받았고 순간 공포를 느낀 당신이 K의 편에 서서 날 모함하는 실수를 한 거지. 어차피 K는 죽었어. 당신이 어떤 진술을 하든 반박할 사람이 없단 뜻이지. 자, 서둘러야 해, 대중의 관심이 아직 이 사건에 남아 있을 때 모든 걸 바로잡아야 해. (K의 차트가 담긴 박스를 가리킨다) 자넨 이걸 소각하고. 나는 신문사에 줄을 대줄 만한 사람을 찾아야겠어.
    윈터 : 소각은 직접 해요. 난 법원에 들렀다 매코이 출판사로 갑니다. (가방에서 K라고 적힌 차트를 꺼낸다) 내가 연구하는 K는 아직 살아 있으니 연구는 계속됩니다. 당신이 저지른 인격살인에 대한 증빙은 법원에 고스란히 남아 있고, 그 기록이 소시오패스 발병 사례의 첫 번째 공식 기록이 될 거야.
    박사 : (차갑게 본다) 표정이 비장하군. 이게 정의라고 스스로를 설득하고 있지. 아니 현실은 이래. 맨 처음 진료소를 기웃거리던 오클라호마 시골뜨기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있어. 진부한 동정심이 네 인생을 망치고 있는 게 안 보이나? 거지꼴로 고향에 돌아가면 사람들이 뭐라고 할까? 아, 그 정원사의 딸 주제도 모르고 날뛰다 결국 쫓겨났다지?
    윈터 : 그래, 난 정원사의 딸이야. 당신의 그 말엔 많은 암시가 담겨 있지.
        가난한 정원사의 딸, 약하디 약한 식물 같은 인간, 배경도 없고, 힘도 없는 너는 나를 이길 수 없다. 하지만 당신이 모르는 게 있어. 당신은 절대 날 꺾을 수 없어. 나는 꽃이 아니라 잔디니까.
        밟을수록 나는 더 깊이 뿌리를 내리지. 나를 지배했다고 생각했나? 천만에, 내가 당신을 감시한 거야. 수도원에서 K가 탈출한 걸 확인한 후 내 목표는 하나였어. 두 번 다시 K를 해치지 못하도록 여기에 당신을 가둔다.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았어.
    박사 : 나를 감시했다. 연구한다고 날뛰는 것도 모자라, 감시를 했다.

 

      박사 윈터를 붙들어 벽에다 몰아세운다.

 

    박사 : 넌 말이지 빌리를 참 많이 닮았어. 특히 주제를 모른다는 점에서.

 

      박사 윈터의 목을 조른다. 문이 열리고 프랭크 들어온다.

 

    프랭크 : 멈춰.

 

      프랭크 박사를 제압해 수갑을 채운다.

 

    박사 : 오해를 하신 모양이군요, 잠시 다툰 겁니다.
    프랭크 : 특수폭행 및 감금교사죄로 체포한다. 당신은 당신에게 불리한 진술을 하지 않을 수 있고, 변호사 선임이 가능하다.
    박사 : 뭔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프랭크 : 시민단체에서 수도원장과 당신을 고발했다. K가 돈을 받고 매를 맞는 일에 동원된 걸 목격한 사람들이 나섰어.
    박사 : 그게 나랑 무슨 상관입니까.
    프랭크 : 수도원 원장이 전부 당신 사주라고 진술했다.
    박사 : 참 답답하십니다. 그런 쓰레기의 진술을 믿다니.
    프랭크 : K를 수도원 밖으로 내보내지 말라는 박사의 편지, 치료 과정이 상세히 기록된 K의 일기장 확보.
    박사 : 편지는 해석하기 나름입니다. 일기장이 증거로 채택되려면, 일기장의 내용을 토대로 당시 K가 정상이었는지 먼저 감정해야 합니다. (윈터에게) 의사협회와 정신분석학회에 연락하게. 두고 봅시다. K의 일기장을 감정하겠다고 나서는 의사가 있을지.
    프랭크 : 말 참 많네, 가서 따지자고. 가!
    박사 : (윈터에게) 반나절, 길어야 하루 이틀이면 무혐의로 풀려날 거니까, 그동안 내 제안 생각해 보고 있어.

 

      프랭크 박사를 끌고 문 앞의 경찰에게 인계한다.

 

    프랭크 : (경찰에게) 끌고 가. (윈터에게) 다친 데는 없소?
    윈터 : 그림 감사합니다.
    프랭크 : ……양심이란 게 그런 거 아니겠소. K는…… 평안을 찾았어요.
    윈터 : 감사합니다.

 

      윈터 〈메두사〉 그림을 본다. K의 환영 걸어 들어온다.

 

    윈터 : (K를 향해) 힘들면 거울을 봐, 거울 속 너에게 윈터 가든을 얘기해 주는 거야.

 

      K 고개를 끄덕인다.

 

    윈터 : 너를 보면 겨울 정원이 떠올라.
    K : 너를 보면 겨울 정원이 떠올라.

 

      줄리아 걸어 들어와 K의 왼편에 선다.

 

    줄리아 : 지금은 황량하지만, 스산한 땅 아래 어떤 씨앗이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

 

      마틴 걸어 들어와 K의 오른편에 선다.

 

    마틴 : 정원사도 좋고 농부도 좋아, 사랑하는 마음으로 땀을 듬뿍 흘려주면 마음에 반드시 새싹이 돋을 거야!
    샘(소리) : 네 마음의 슬픔이 녹아, 봄이 되면 너는 예쁜 꽃이 될 거야!
    윈터 : 그래…… 그곳에선 누구도 너를 꺾지 못할 거야.
    K : 그래…… 나는 꽃이 될 거야.

 

      인격들 K의 어깨를 다정히 감싼다. 윈터 K를 바라본다. K 윈터를 바라본다.
     윈터와 K, 서로를 애틋하게 바라본다. 둘의 시선처럼 따뜻한 음악 흐른다, 암전.

 

 

 

< 선정평 >

 
   공연과 문학 사이에 걸쳐 있는 것이 희곡의 운명이기에 두 영역에서 모두 가능성을 품고 있는 작품을 고르기는 쉽지 않았다. 희곡 분야 응모작 편수는 5편으로 단출했으나 읽고 논의하는 시간은 길었다. 구어의 구사 속에서 우리 모국어와의 싸움을 저버리지 않을 만한 작가가 있는가?
   선정된 「태양이 마르지 않는 한」은 미국을 배경으로 서스펜스 스릴러 장르의 외형 속에서 인간 내면의 악을 다룬다. (어법에 맞춰 다시 써보자면) ‘태양 빛이 바래지 않는 한 악은 계속된다.’라는 의미를 담아내고 있는 작품이다.
   선정작은 우리 극문학에 새로움을 보태기에는 아쉬운 점들이 많다. 장르 문법에 따라 전개 되는 스토리텔링과 인물 창조, 공연을 통해 전달되기에는 힘이 약한 문학적 알레고리의 활용, 심리학 서적에서 다룰 법한 악의 유형성 등. 그러나 대중 서사 장르의 모티브를 무대화하는 데 기울인 성실과 그 구현 능력만큼은 높이 사고 싶다. 이야기꾼의 재능을 장르물의 익숙한 틀 안에서만 쓰지 말고 극예술로서의 새로운 형식 미학의 창안에 도전하며, 국적과 시대 불명의 시선에서 내려와 동시대 삶의 문제에 대한 탐구까지 이어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장성희 / 극작가)

 

===== 작가와 6문6답 =====

 

1. 우선 선정된 소감을 간단히 밝혀주세요. ^_^

  눈앞에 새로운 징검다리가 하나 보이는 기분이었습니다. ‘아! 다음 걸음은 저기로 내딛어야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 생각을 객관적인 어휘로 표현한다면 안도감과 기쁨 정도 될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극’을 쓰며 살아가는 삶에 대해 정의하려 노력했던 적이 있는데 그때 내린 결론이 ‘징검다리를 건너가는 삶’이었습니다. ‘극’ 한 편을 끝내고 사방을 보면 깊은 물처럼 적막하고 공허한 듯하지만 결국 다른 색깔, 다른 구조의 돌 하나가 눈앞에 새롭게 나타납니다. 그렇게 한 작품, 한 작품 운명처럼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올해 초 연극 한 편을 올렸고, 올 12월에 올라갈 뮤지컬 대본 작업이 거의 끝나 갈 무렵 작품이 선정되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지금으로선 이 한 개의 돌, 새로운 기회에 만족합니다. 이 ‘극’에 전념하는 동안엔 홀로 물 위에 서 있다는 두려움을 이길 수 있으니. 고맙고 기쁩니다.

 

2. 이 작품을 처음 떠올렸을 때 어디서 무얼 하고 계셨나요?

  집에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흔히들 작품이 ‘온다’라고 표현하는 케이스가 있는데, 이번 작품이 그런 케이스였던 것 같습니다. 모티브가 된 장면을 꿈에서 목격하는 형태로, 일종의 악몽 같은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창백한 청년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그 목소리가 처음엔 남자, 잠시 후엔 어린아이, 여자, 노인의 목소리로 바뀌었습니다. 꿈을 꾸는 와중에도 호기심을 느꼈습니다. 저 청년은 광대인가? 복화술사인가? 궁금해 하던 찰나에 그의 뒤편에 서 있는 세 개의 환영이 보였습니다. 어린아이, 여자, 노인 그리고 그들이 일제히 누군가를 향해 ‘살인자’라고 외치는 모습에 놀라 사방을 보니 법정이었습니다. 그 부분에서 잠을 깼고 그날부터 여러 날 그것이 무슨 상황인지 상상하게 됐습니다.
 하나의 남자, 세 개의 목소리. 그리고 ‘살인자’라는 외침.
  ‘그들은 환영이나, 죽임을 당했다.’라는 문장이 떠올랐고, 육체를 표적으로 한 살인이 아닌 인격과 영혼을 향한 살인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자신의 성공을 위해 타인의 영혼에 대한 가혹 행위를 망설이지 않는 소시오패스에 대해 고민을 하던 시기였다는 게 떠올랐고, 한 몸에 여러 개의 인격이 있는 다중인격이라는 소재로 질문을 풀어내 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꿈속에서 만난 다중인격 청년에 대해 추적하고 상상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구축되었고, 꿈속에서 너무 창백하고 피폐했던 청년의 모습이 안타까워 위로가 되는 결말을 쓸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하게 됐습니다.

 

3. 글을 쓸 때 특별히 듣는 음악이 있다든가, 자기만의 습관이 있다면요?

  음악을 굉장히 좋아하는 편이라 일상 중에도 거의 항상 이어폰을 끼고 있는 편이고, 작품을 진행 중일 때는 그때그때 상황이나 모티브에 어울리는 음악 한 곡을 여러 시간 반복해서 듣는 편입니다. 그러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 잔잔한 클래식을 듣거나, 정적을 선호하는 패턴이 반복됩니다. 작품을 만들어 가는 과정 중 생각이 모이고 소재가 쌓이는 동안, 음악의 힘을 많이 받는 편입니다. 3분이라는 짧은 시간에 다른 세계와 시공간, 정서에 흡수되게 하는 놀라운 마력이 음악에 있다고 늘 생각하고, 그 상상들을 즐겁게 누리는 편입니다.
 그 밖에 습관은…… 습관이라기보다는 작업 스타일인데 작품을 쓰는 동안에는 굉장히 규칙적인 생활을 합니다. 하루에 한 시간씩 꼭 운동을 하고, 식사도 세 번 규칙적으로 합니다. 그래서 작품을 쓰는 기간에는 컨디션이 굉장히 좋은 편입니다. 그러다 탈고하면 그때부터 밤낮이 바뀌고, 밀린 책을 읽고 영화 등을 보느라 끼니를 거르기도 합니다. 이때엔 딱히 배가 고프지도 않은데 다시 작품을 시작하면 아침 7시에 눈이 떠지고, 정말 신기할 만큼 하루 세 번 규칙적으로 배가 고픕니다.

 

4. 작품을 발표하기 전(혹은 퇴고를 하신 후)에 가장 먼저 보여주는 사람이 있나요?

  음…… 단답형으로 대답하자면 ‘없다’가 대답이구요. 부연 설명을 드리자면 작품을 발표하는 계기가 공모전에 응모하는 형태이든, 계약을 맺고 공연을 위해 프로덕션에 제출하는 형태이든 기한이 있기 마련인데, 그 기간 안에 파고들 수 있는 한 작품에 파고드는 편이라 중간에 원고를 공개하지 않습니다. 그 후 공모전인 경우에는 심사평을 듣게 되고, 공연을 위해 프로덕션에 대본을 공개한 경우에는 초고를 가지고 작품 회의를 하는데 그때에 제시되는 의견과 아이디어에 대해서 최대한 능동적으로 반응합니다. 판을 뒤집을 수도 있고, 전혀 다른 시점도 고려하는 등 100프로 저 자신을 열고 작업을 합니다.
  ‘극’은 다수에게 공개되는 형태의 텍스트이고 늘 많은 시선 속에 서게 되는 특징을 갖는 것 같습니다. 어차피 ‘이야기’는 하나의 유기체와 같은 것이고 그것을 ‘극’이라는 형태를 가진 텍스트로 만들어 가는 집필 과정 역시 작품을 향한 수많은 시선 중 하나의 시선을 쌓아 가는 과정에 해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후 대본이 제 손을 떠나면 독립된 개체로 존재하며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통해 굴절되고, 납득되고, 흡수되며 결국 모든 각도의 시선에 서게 됩니다. 그러므로 초고 과정까지는 제 시선을 견고하게 만드는 편이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초고를 만드는 과정에서 색을 선명히 해야 반대 지점도 보이고, 유사점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초고를 완성하는 과정은 하나의 이야기를 진술하는 첫 번째 시선을 선명하게 하는 과정으로 정하고 작가로서 첫 번째 시선을 우선 명확히 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 그 후 협업하는 단계에서 제시되는 의견과 아이디어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절차에 충실한 편입니다.

 

5. 평생 또는 두고두고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주제가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사랑’, 아주 진부하지만 너무나 절대적인 화두. 사람을 살게도 하고 죽게도 하는 이 거대한 에너지에 대해 호기심을, 두려움을, 경외를, 질투를 거의 항상 느끼며 살아갑니다. 단지 감정이거나, 어쩌면 호르몬일지도 모르는 이것이 일으켜 낸 드라마와 이야기, 전설과 기적은 정말 무궁무진한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사랑’ 지상주의자이기도 하구요, 사랑에 참 약합니다. 언제나 제 인생의 근간을 흔드는 이 거대한 힘의 실체에 대해 늘 고민하고, 정의해 보고, 가끔은 비틀어 보려 애씁니다.

 

6. 지금 막 쓰고 있는 (또는 품고 있는) 작품의 예고편을 들려주실 수 있나요?

  일단 품고 있는 작품은 ‘모든 곳에 있는 히말라야에게’라는 희곡이구요, 20대 중반에 히말라야를 완등하며 동방의 검은 태양이라 칭송받았던 이력을 가진 등반가가 불의의 사고로 시력을 잃고 잠적 후 10년 만에 다시 히말라야 등반을 준비하는 이야기입니다. 트리트먼트까지 정리된 단계인데 약속된 작업들이 끝나면 네팔을 한번 다녀와야겠다는 소망이 있어 그 후에 작업하려고 아직 품고 있는 상태구요. 이 작품이 여행의 동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히말라야의 정경을 무대 위에 잘 풀어 보고 싶다는 욕심이 차곡차곡 축적되고 있는 상태입니다. 꽉 차면…… 떠나겠죠?
  최근 쓰기 시작한 작품은 ‘코리아 서울걸즈’라는 제목의 작품인데, 1960년대에 결성된 한국 최초의 걸 그룹을 소재로 외국 가수들의 노래를 번안해 부르던 ‘카피 가수’들이 진짜 뮤지션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기획안과 스크립트를 정리한 상태이고 이번 여름부터 대본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문장웹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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