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세대 선정작 리뷰] 폐허가 눈뜰 때

 

[2014년도 차세대 예술인력육성 문학분야 선정작 리뷰 ]

 

 

폐허가 눈뜰 때

― 오병량의 시에 부쳐

 

 

양경언

 

 

 

 

 

    오병량의 ‘나’는 탁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는 것 같다. 어떤 일이 성사되지 않았을 때 밀려들 법한 초조함과 망연함이 시에서 새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 더 상상력을 더하자면 오병량의 시에 등장하는 ‘나’는 찍는 사진마다 잿빛의 그을음이 번지는 결과물을 내놓는, 그런 결함 있는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포토그래퍼로 느껴진다. 이를테면 사위가 온통 공황의 기운으로 가득할 때 포토그래퍼의 시선이 곁에 머물든 말든 저 자신이 처한 상황에만 골몰해 있는 사물들 사이에서 그들과 깊숙이 동화되지 못하는 ‘나’ 혹은 그들로부터 소외받는 ‘나’, 감정을 전염시키지 말 것을 강요당하는 ‘나’, 혼자서 애타는 ‘나’…… 그리고 종국에는 망한 사진을 손에 쥔 채 엄혹한 시절에 어떤 ‘시선’을 드러내는 삶이란 대관절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이냐며 자문하는 ‘나’, “갱들의 총소리가 멀지 않은 곳에서 들리는 도시, 그 외곽의 빈민가에”(「대공황」) 운 좋게 살아남는 우연에 기댄 채 또다시 카메라를 집어 드는 ‘나’…… 이 모든 ‘나’가 오병량의 시에서 감지될 때마다 우리는 요컨대 실패의 입장에서 쓰이는 시가 조망하는 세계를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장면이 특히 그렇다.

 

하얀 자작나무 같은 그의 손이 어깨 위에 내리고 있다 페치카 앞에 무릎을 오므리고 앉아 그녀는 잘 타오르는 음악을 듣고 그의 손이 닿은 곳으로 고개를 글썽인다 눈이 내린다 어떤 연주자가 이 무대를 놓칠 수가 있나, 어느 여자가 저처럼 다정한 손길을 마다할 수 있을까? 나는 주택가 구석에 앉아 고양이처럼 턱이나 쓰다듬고 있다 한가한 몸이나 만지면서 탓할 것을 찾는 중이다 빈 술병만이 전 재산인 양 코트 주머니에 담긴 채, 타이도 곱게 다린 셔츠 하나 없이 함부로 이곳에 와버렸다 딱히 설명할 수는 없다 내게 증오한다는 편지를 보낸 사람을, 열쇠를 현관문에 꽂은 채 외출에서 돌아온 앞집 부부와 마주친 저녁을, 남편은 아내를 등 뒤로 감추며 나를 경계했다 그런 남편을 보며 미소 짓는 그의 아내는 추녀였고 지독한 향수 냄새를 풍겼다 어제는 성당 앞에서 얼어 죽은 소녀도 보았다 성냥을 팔던 소녀라고 했다 나는 발치에 떨어진 성냥갑을 하나 주워 주머니에 넣었다 동정은 흔한 죄라서 바구니에는 담지 않았다

– 「대공황」 부분

 

    인용한 부분은 행과 연이 구분되어 있지 않은 「대공황」의 시작 장면이다. “하얀 자작나무 같은 손”을 가진 남자와 “글썽이는” 여자의 표정은 마치 한 세계의 몰락을 앞둔 것만 같아서 이들은 아마 곧 이별을 할 듯싶다. 덩달아 “눈이 내린다”. 이별의 비극성은 이별 바로 직전에 고조되는 법이므로, 남자와 여자의 모습으로 시작한 이 시는 어쩌면 ‘대공황’이란 제목에 기대어 무너지는 세계의 한가운데를 질펀히 담아낼 수도 있었겠다. 그러나 ‘나’는 이들과는 무관하게 있다. 그들을 어찌하지 못한다. “적막 속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을 향했던 시선은 이내 “앞집 부부”와의 신경전, “성당 앞에서 얼어 죽은 소녀”를 향하는데, 이 모든 이미지들은 겹겹이 쌓인 환영처럼 내 시선 앞에 놓일 뿐 이들 역시 어떠한 인과관계도 맺지 않는 것이다. ‘내’가 처한 상황 중에서 확실한 것은 그저 “함부로 이곳에 와버렸다”는 사실. 독자는 시가 진행될수록 ‘나’에게서 포착된 이미지들을 쌓아 두는 일에 급급해서, 몰락해 가는 세계의 기운을 느낌의 층위에서 전해 받기만 할 뿐 무엇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무너져 가는지에 관해서는 확실한 답변을 내놓지 못하게 된다.
    앞서 ‘실패의 입장에서 쓰이는 시’라는 표현은 여기에서 해명이 가능하다. 어찌 되었든 간에, 시에서 ‘나’는 이 모든 상황을 구성하는 논리에서 제외되었다는 소리다. 또는 상황을 적고 있는 “나”의 위치는 ‘상황을 구성하는 그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불쑥 튀어나온 자리에 있기 때문에 완성된 하나의 정합적인 장면이란 끝내 구현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상황에 대한 총체적인 조망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이가 이미지를 몽타주처럼 운용하고 있는 시적 현장을 목도한다. 시에서 ‘내’가 기껏 할 수 있는 일이란 사진의 조각 하나 하나를 접붙이듯이 잇는 일뿐. 그러고 보면 “대공황”은 주체에게 세계에 개입할 수 없는 철저한 수용성만을 안기는 말이 아니던가.
    그런데 겹겹이 쌓이기만 하는 이미지들은 정말 서로 연관이 없는 것일까.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는 듯 보이는 상(像)들이 서로 인접해서 엮이는 이유는 무엇이며 그것은 왜 하필 ‘나’에게 포착되고 있나.

 

동지, 동지가 배달한 게 무엇이지?
신문이지요, 신문은 고용주의 것이고 배달은 어르신에게
돈은 아내의 것이고 계약을 준수하는 집배원은……
얼굴을 덮은 천은 검고
그들 중 하나가 다시 묻는다
친애하는 배달원 동지, 조국을 위한 질문이오
내가 생각하던 어르신의 말투
도대체 고용주는 어디 가고 어르신만 남아
나를 심문하는 것일까,
누가 대체 이들 모두의 고용주란 말인가,

– 「레닌그라드의 집배원」 부분(밑줄은 인용자)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 것처럼 나는 병실을 나왔어. 죽어, 다 가져도 좋으니 차라리 죽어버려, 바라는 것이 다 받아 적힐 만큼 새하얀 복도여서 나는 놀랐어. 손이 뚱뚱한 아이가 초코바를 먹고 있는 병원 복도에서 누군가 나를 밀쳤는데, 돌아보니 바람이었어. 초콜릿 냄새가 진하고 역겨웠지. 그 애가 보고 싶었어.

– 「모조로 피는 장미」 부분(밑줄은 인용자)

 

    인용한 첫 번째 시에서 “나”는 어떤 내용이 담긴 “신문”을 배달하는지도 모르고 ‘심문’을 당하고 있다. ‘나’는 어쩐지 중요한 핵심을 건드리지도 못한 채 그 주변을 배회하면서 살고 있는 듯한데, 이러한 ‘나’에게 “조국을 위한 질문”을 던지는 이들 역시도 도대체 “조국을 위한”다는 것이 무언지 뚜렷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그들에게 반문한다. “누가 대체 이들 모두의 고용주란 말인가.”
    두 번째 시에서도 마찬가지다. 두 번째 시에 등장하는 이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는 말을 하고 있지만 그것이 몸의 상해로 드러나진 않는다. 정작 물리적으로 “나”를 건드리는 것은 “바람”이다. 아무런 상황도 바뀌지 않고, “오후가 아무래도 진정되지” 않는 관계에서 결국 핵심적인 말은 ‘나’의 심정으로부터 비롯된다. “그 애가 보고 싶었어.”
    오병량은 상황으로부터 삐죽 벗어난 자리에서 이죽거리듯 늘어놓는 말을 통해 조각난 모두가 건드리지 않으려 했던 폐부를 찌른다. 아도르노가 벤야민의 사유를 설명하기 위해 활용한 표현을 빌리자면 “변증법의 눈먼 지점”(테오도르 아도르노, 김유동 역, 『미니마 모랄리아』, 길, 2005, 203쪽)에 그의 시가 있다. 때문에 그의 시는 버려진 위치에서 눈을 뜬 자가 은밀히 전하는 보고와 같다. 찍어내는 장면마다 잿빛의 그을음이 번져 있다 해도, ‘오병량’이라는 포토그래퍼가 카메라를 버릴 수 없는 이유다.
    그리고 독자인 우리는, 각각의 이미지들이 애쓰며 구성한 상황이 은폐하는 지점을 건드리는 오병량의 ‘나’를 보며, 절망으로 가득한 시대에 필요한 시선은 무엇인가에 관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사소하다고 지나쳐 버린 저기, 폐허 속에서, 오병량의 ‘나’는 눈을 꿈벅 뜨고 있지 않은가.

 

 

 

   《문장웹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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