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이물異物

 

[아르코 창작기금 – 단편소설]

 

 

이물異物

 

 

 

구병모

 

 

 

 

    치밀한 불법 개조로 여섯 가구를 쟁여 놓은 다세대 주택 대문으로 들어가 여느 밤처럼 반지하방 왼쪽 현관을 열었을 때, 양선은 어둠 속에서도 무언가 평소 없던 것이 거실 겸 부엌에 웅크린 모습을 보고, 동세가 없었으나 곁눈질로 포착한 질감과 양감만으로 그것이 가구나 이국의 장식품이 아닌 생물이라는 것을 알았다. 고만고만한 대형견이라기에는 너무 크고, 곰으로 간주하자니 털이 너무 길다. 커다란 청소 도구쯤으로 보이는 흑색 장모(長毛)의 아름드리는 방으로 진입하는 길목을 가로막아 적잖은 방해가 되지만, 부실한 체력으로 산자락 끝 번지까지 하루 새 네 번을 오르내린 양선은 그것의 정체를 확인할 여력이 있기는커녕 등을 밝히기 위해 팔을 들어 올리는 일조차 사치였으므로 그저 등으로 벽을 쓸며 발끝으로 스쳐 지나가선 반년 가까이 세탁은 고사하고 개켜 본 기억도 없는 이부자리에 엎어진다. 온몸이 콘에서 흘러내린 양지바른 곳의 아이스크림 같고 그녀는 이 순간 세상에 궁금한 것이라곤 없다.
    옆 이불에는 방난이 화장대를 거의 끌어안은 자세로 모로 누워 잠에 떨어져 있다. 어쩌면 그것은 평소 과도하거나 엉뚱한 과제를 내주곤 직속 비서가 발탄강아지처럼 뛰어다니며 분투하는 모습을 즐기는 방난의 상사가 맡긴 좀 크고 이상한 애완동물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 가만, 방난은 이미 회사를 여러 차례 옮기지 않았던가, 통근 5개월째인 지금 회사에서는 이런 일이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하긴 그래 봤자 장 자 붙은 것들이 비서 알기를 저들 발닦개 내지 파출부로 알기가 거기서 거기겠지 ― 그렇다면 외래 희귀종이나 고가의 개체일지 모르니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될 테고, 고작 그걸 묻기 위해 방난의 어깨를 잡아 흔들 필요는 없다. 둘의 우정은 새벽의 단잠을 깨워도 좋을 만큼 돈독하지 않고 3년 남짓한 동거 기간을 통해 서로에 대한 호감은 안 그래도 옅어진 참이다. 그 까만 그림자인지 털 뭉치인지 일단 사람은 아닌 게 분명하고, 문득 오랜 옛날 포의 괴기소설에서 보았던 오랑우탄의 발톱에 찢긴 모녀의 비극이 연상되지 않는 것도 아니나, 지금 같아선 뭐가 됐든 간에 사람 아닌 것은 위험하지 않았다.

 

    아침 8시에 양선이 눈을 떴을 때 방난은 보이지 않았다. 상사의 일정과 건강관리 및 최소한의 자기 계발을 위해 늦어도 7시 30분에는 출발한다고, 묻지도 않은 업무 내역까지 풀코스로 읊어서 오히려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비서와 상사의 이른 밀회를 더욱 확신하게 만드는 긁어 부스럼과에 속하는 아이니 당연한 일이지만, 방문을 열었을 때 그 자리에 바위섬 모양으로 버틴 거대 털 뭉치를 보고 양선은 외피에 싸인 밤알처럼 무럭무럭 익어 가던 부아가 툭 터진다. 깜짝이야. 계집애, 저건 왜 두고 갔담. 사장이 며칠을 맡아 두라고 했는지 모르나 밥은 줬는지 똥은 치웠는지, 저거 나더러 어쩌라고. 출근하느라 메모 한 장 남겨 둘 새 없었다 쳐도 호박에 줄그을 여유는 있었겠지. 어쩌면 방난은 그대로 내버려두면 조금이라도 시간 여유 있는 양선이 알아서 대강 거둬 주리라 믿고 내뺐는지도 모른다.
    그전에도 몇 번째 회사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방난은 임원이나 그의 가족이 출장 또는 휴가를 떠났을 때 고양이나 강아지 등 그들의 애완동물들을 며칠 집에 데려다 놓은 적 있었고 그때마다 내세우곤 했다. 이것도 업무의 연장이거든, 비서란 건 그래. 사장의 지시라면 그 어떤 것도 하찮은 일이란 없다는 자세가 첫째지. 비록 그것이 사장네 반려동물을 임시로 맡아 돌보거나 그 자녀의 수행평가 숙제를 대필하는 일이라도 말이야. 기관지가 부실한 양선은 개털이 날릴 때마다 기침을 했지만 아무리 좋게 봐줘도 회사 업무와 손가락 반 마디만큼의 관계도 없는 일을 하면서 애써 자부심을 장착하는 방난이 안쓰러웠던 까닭에 그것들이 머무는 시간을 며칠씩 참아냈다. 그러나 방난이 같은 이유로 뚜껑 달린 어항에 개구리를 담아 왔을 때 양선은 눈살을 찌푸렸고, 어느 날인가는 분명 개구리를 담았던 바로 그 어항인 듯한데 거기 뱀이 똬리를 튼 걸 보고 기겁했으며, 급기야 여덟 개 다리를 꿈틀거리는 팔뚝만 한 타란툴라를 받아왔을 적엔 말다툼 끝에 간단한 짐을 챙겨서 폐업 직전 특가 행사 중인 찜질방에 삼 일간 머물다 그곳 황토방 천장이 무너지는 사고로 쫓기듯 귀가하기도 했다. 언젠가는 이것도 사장 네서 키우는 거라며 목줄 맨 사람을 하나 데리고 와도 놀랍지 않을 것 같았다.
    사람보다야 낫지만 이번엔 종속과목강문계도 모를 털 뭉치라니. 색깔이나 모양이 밤에 보았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다만 가늘고 긴 검정 직모가 조각만 한 빛 아래에서 보니 공단처럼 부드러워 보인다. 어떤 동물인지 알려면 우선 얼굴을 확인해야겠는데 온몸이 털이라 눈 코 입을 어디서 찾아야 할지 알 수 없다. 딱히 눈 코 입의 위치나 생김새 내지는 더 나아가 그것의 존재 여부에 집착하고 싶지는 않지만, 지렁이나 유글레나가 아닌 이상 이 거대한 몸으로 최소한의 생명 활동이나마 유지하려면 반드시 있어야 할 것들이다. 꼬리는 있는지 다리는 몇 개인지 어디까지가 머리이고 어디부터 발인지 역시 육안으로 확인하기 어려우나 섣불리 만져 보기 꺼리는 이 동물은 어쩌면 불가해한 기관의 집합으로 내부가 채워져 있을지도 모른다. 축축한 냄새는 일반적인 동물 옆에서 맡을 수 있는 냄새와는 조금 다른데, 이를테면 공장식 양계장에서 풍기는 불쾌한 냄새 ? 식용으로 길러지는 개체의 공포심이 혼합된 특유의 화장실 가스 비슷한 냄새와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양선은 당장이라도 방난에게 전화하여, 사회복지사란 정체불명의 거대 생물을 전후 설명도 없이 떠맡아 돌보는 역할이 아니라고 말해 주고 싶지만 평소 하는 모양으로 봐서는 어떤 식으로 대꾸할지 짐작이 간다. 그래서 그게 뭐? 응, 맞아. 그런데 그냥 놔두면 되잖아. 내가 언제 너더러 어떻게 해달라고 한 적 없지? 그런 뒤 양선이 어떻게든 낯선 손님들을 대접하거나 수습해 놓은 뒤에는 고맙다는 형식적인 한마디쯤 어디가 덧날까, 이거 네가 원해서 한 거다? 잊지 마. 그것도 일종의 직업병 같은걸. 무얼 봐도 그걸 꼭 네가 돌봐야 할 것만 같은 책임감이 느껴진다면 말이야.
    양선은 긴 한숨 끝에 저것을 이 집에 놔둠으로써 생길 수 있는 일들의 가짓수를 꼽아 본다. 사실 몇 가지 안 될 것 같기는 하다. 옹송그린 자세로도 낮은 천장까지 닿는 키와 몸집을 보아하니 녀석이 조금이라도 움직였다면 싱크대나 건조대를 건드려 그릇과 냄비 두어 개는 나동그라지고도 남았을 테지만 거실 겸 부엌에 다른 흔적이 없는 걸로 보아 털 뭉치는 밤새 발가락 하나 꼼지락하지 않고 그 자리를 지켰던 모양으로, 놈한테서는 살아 있는 동물에게서 뿜어져 나올 법한 기초 반응조차 엿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낯선 장소에 대한 흥분과 두려움으로 헐떡이거나 울부짖기를 바라지는 않았고 오히려 안 그래 줘서 고맙지만, 지나치게 본능이 억제된 것으로 보여 안 좋은 약을 맞힌 게 아닌가 의심도 든다. 할 수만 있다면 내장뿐 아니라 온몸의 표면, 털가죽까지 자신의 내부에 접어 넣을 법한 위축으로 인해 생김새를 파악하기 힘들며, 거미나 뱀에 비하면야 징그럽지 않고 크기에 비해 위협적이거나 폭력적으로 보이지도 않기 때문에, 양선은 깊이 생각하기를 그만두고 까치발로 그 옆을 슬금슬금 지나쳐 욕실 문에 닿는다. 밤새 지금까지 으르렁 소리 한마디를 뽑지 않았지만 ? 어쩐지 이런 크기와 형태의 동물에게는 으르렁 킁킁, 이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실제로 놈이 피리소리를 낼지 초음파를 낼지 모르는 일인데 ? 어깨 또는 등 부위가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니 동물 인형이나 박제는 아닌 모양이고 잠들었는지 또한 알 수 없으나 단 하나 선명한 예감이라면 실수로라도 건드리거나 눈을 마주쳐서 좋을 일이 없으리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걸 이대로 두고 출근한다고? 소유주가 따로 있는 이상 달리 방법이 없으니 그럴 예정이긴 하나 양선은 부연 거울에 비친 팥죽색 잇몸이 뒤집어져라 힘차게 이를 닦으며 한 손으론 방난에게 문자를 보낸다.

 

    부엌에 있는 털 뭉치는 뭐니

 

    문자를 찍다가 자기도 모르게 손끝에 힘이 실려 칫솔모가 잇몸을 깊이 찌른다. 침과 피를 뱉으며 양선은 다음 월급이 들어오면 결국 치과에 가야 하나 생각하지만, 적빈의 시절을 버틴 학생식당의 이천오백 원짜리 멀건 곰국에 소 뒷다리가 물을 한 번 적시고 지나갔듯이, 언제나 구체적인 형상이나 실감나는 색깔 대신 몇 자리 기장된 숫자로 통장을 스쳤다 갈 뿐인 월급으로 할 수 있는 일의 종류는 많지 않다. 방난과의 다세대 반지하 생활이 편안하지 않으면서도 대뜸 동거를 청산하지 못할 만큼 지갑이 달리는 형편에 목이나 귀나 손도 아닌 입속의 금이라니 그런 사치는 또 없다. 이력서의 공란을 채우기 위해 분투한 오륙 년에 걸쳐 이름 석 자 외에는 모든 것을 구조 변경한 방난 덕에, 입을 벌리는 순간 적게는 수십만 원에서 최대 이백만 원까지 그 입을 통해 빠져나간다는 사실을 익히 알아 온 양선은 충분한 경각심을 가지고 관리하여 얕은 어금니 충치가 두어 개 있을 뿐이라 믿고 긁어내서 아말감으로 때우면 그만이라 생각했는데, 어느 병원에 가서 입을 벌려도 결국은 금은방 알바인지 의료인인지 포지션을 알기 힘든 코디네이터가 따라붙어 밀폐된 상담실을 피해 갈 수 없었고 카드가와 현금가의 할인 폭 차이에 대해 설명을 가장한 설득을 들어야 했다. 치아 개수가 적힌 계약서에 서명하기를 미루는 동안 잇몸은 시큰거리기 시작했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가능한 한 힘주어 칫솔질을 하는 것뿐이었다. 입안에 고인 치약과 침을 뱉어낼 때마다 세면대 구멍으로 흘러 들어가는 핏물의 궤적을 내려다보며, 그런들 방법 있느냐, 고 중얼거리는 일뿐이었다.
    칫솔로 혀를 문지르다 아차 너무 깊이 밀어 넣었지, 싶은 순간 양선은 헛구역질과 함께 눈물 흘린다. 어디 입뿐이겠어, 몸에 있는 그 어떤 구멍이든, 열리는 순간 돈이지. 그런 의미에서 작년 헤어진 남자와의 의도치 않았던 아기에 대해, 그 형체가 막 갖추어졌을 무렵 신속한 결정을 내린 것은 당시 홀로 감당해야 했던 심신의 타격과 후유증에도 불구하고 지금 생각하면 현명한 일이었다.
    양선이 세면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는 내내 털 뭉치는 최소한의 미동도 없이 그 자리에서, 기본 체적을 줄이지는 못하나 가능한 한 당신의 일상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듯 웅크리고 있었고, 양선은 생것에 대한 좋지 않은 습관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문득 양은냄비 같은 자신의 내부에서 식어 가던 동정심의 자투리가 만져진다.
    양 선생, 그러게 반 푼어치 동정심으로 덤비는 거 아니라니까.
    지난주 양선을 위기에서 구해 주고서 지역사회 봉사자가 혀를 차던 모습을 떠올리며 양선은 털 뭉치의 머리라고 생각되는 부분을 향해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던 팔을 내린다. 그것은 알지 못하는 존재에 경솔하게 보탤 뻔했던 여분의 체온을 거두는 행위이자, 손대는 순간 품에 고일 뻔한 자기만족을 떨어내고 냉정한 현실을 인식하게 하는 동작이다.
    몇 번이나 더 위험한 꼴을 당해야 알아먹을까. 이번에야 시비 붙는 정도로 끝났지만 다음번엔 이보다 더한 사달이 나도 양 선생 도와줄 사람 찾기 쉽지 않을 거요. 그 집에 하루가 멀다 하고 풀 방구리 쥐 들락거리듯 드나든 건 양 선생이니까. 봉사자는 도무지 1절로 그치는 법이 없어서, 어쩌면 우려보다는 오지랖이나 원한 내지는 존재 근원을 향한 저주가 아닐까 싶은 어조로 후렴구를 이어 붙이기를 잊지 않았다. 어디 젊은 여자가 이런 세상에 험한 꼴을 보려고. 직업은 직업이고, 안전을 최우선으로 해야지. 장년의 남성 봉사자는 영탄조 내지는 혼잣말인 척하는 방식으로 종종 양선에게 반말지거리를 하며 그걸 친근함과 착각하곤 했다. 봉사자뿐만 아니라 양선의 평소 업무 태도를 탐탁지 않아 하던 선후배들이나, 사업 지원금 신청을 비롯한 행정 관계가 얽혀 있는 공무원들도 비슷한 맥락의 격려인지 충고인지를 하곤 했다.
    선아, 넌 아무래도 진로를 잘못 선택한 것 같다. 저분들이 정말 필요로 하는 건 네 눈물이나 공감이나 따뜻한 손보다는 과감한 영업력으로 실속을 챙겨 주는 데 있어. 애가 왜 이리 배짱이고 넉살이고 쥐똥만큼도 없는지, 그까짓 종합상가 돌면서 가게 주인들한테 목청 높여 인사하는 일조차 어려워하면서 무슨 사업을 하게? 이거 우리 나랏돈 지원 받아 가면서 하는 일인데, 실적 내야 하거든? 이번 사업 잘 안 되면 내년 책정 예산이 깎여요, 이 사람아.
    양 선배, 또 나무에 올라가서 고양이 주워다 줬죠? 지난번엔 누구네 집 똥개 싣고서 동물병원으로 달려가 놓고, 병원비는 결국 혼자 계산 다 하고. 한 번 틈을 주니까 이 사람 저 사람 다 양 선배만 찾잖아요. 복지사가 그런 일 하라고 있는 거 아니죠? 본질 호도, 선후 관계 망각. 자존심을 가지라거나 숭고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까지는 말씀 못 드리겠지만, 복지사의 정체성마저 흐려 놓고 아무든지 쑤셔도 되는 지역 심부름센터 취급이나 당하게 만드는 건 양 선배 같은 사람들이에요. 조금만 더 있으면 집 나간 햄스터 찾아 달란 말만 듣고 전단지 돌릴 기세네.
    양 선생, 그동안 고마웠어. 나 실은 이번 말일까지야. 응, 남편 근무처 따라서 미국에서 지내게 될 것 같아. (목소리를 낮추며) 너한테만 솔직히 고백하는 거지만, 난 신념이 모자라 그런가 도저히 너처럼은 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줄곧 했어. 우리 일이 계속 존재가치가 있으려면 물고기를 잡아다 주는 게 아니라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깨우쳐야 하는 거잖아? 소경을 걷게 하고 앉은뱅이를 일으키지는 못하더라도 그와 웬만큼은 비슷한 결과를 얻어야 하지 않나? 그런데 그들 입에 떠 넣어주는 데만도 나는 허덕거렸어. 내가 고작 물가로 당나귀를 끌고 가기밖에 더하나 싶더라고. 솔직한 심정으론, 부단한 생산과 소비 활동으로 사회를 굴리는 일과 전혀 인연이 없는 이들에게까지, 단지 그들이 살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설 자리를 끊임없이 만들어 바쳐야 한다는 현실에 지쳤어. 너는 전혀 그럴 때가 없어?

 

    학형의 서 푼짜리 동정심을 가리켜 우리는 싸구려라고 일컫지요.
    대학 시절 과에서 외부 봉사활동 때마다 양선이 들었던 소리다. 어느 활동을 나가도 그런 핀잔 내지는 비난이 돌림노래처럼 집요하게 따라다녔다. 양선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 앞에서 보이는 반응이 심장 있는 보통 사람의 그것과 다르지 않은 것 같았는데, 제일 연장자인 선배 하나가 그리 말하기 시작하자 다른 이들이 덩달아서 그 뒤로 아예 찍어 놓고 입을 모았다. 양선은 그 까닭을 알 것 같았지만 누구에게도 말하지는 않았는데, 이를테면 무언가를 사랑한다며 온몸과 마음을 다해 그것을 돕겠다는 이들이 기대하는 것은 어쩌면 갈라진 입술이나 고랑이 팬 이마 같은, 지극히 비극과 어울리는 어떤 표정이라는 생각이었다.
    입학하고 첫 엠티 때 사회복지학과 지원 동기를 밝히는 자리에서 양선을 비롯한 모든 새내기는 입학 면접관에게 들려주던 당위성 가득한 모범 답안과는 다른 솔직한 사연을 털어놓을 것을 주문받았고, 그걸 그대로 믿은 양선은 씻김굿처럼 자신의 가정환경과 내력을 털어놓은 바 있었다. 그녀는 그만한 이력은 어지간한 이들이 입 밖으로 내놓지만 않을 뿐 조금씩들 보유한 낡디 낡은 클리셰나 마찬가지인 줄 알았다. 아버지는 만취 상태로 개천에 코를 박고 죽을 때까지 15년간 십 원 한 장 벌어오지 못하고 늘 한쪽 다리를 저는 엄마를 때렸고, 본인은 여성과 신체 불편한 이들로 대표되는 약자를 위해 일하기로 했다는, 세부를 걷어내고 요약하자면 대강 이 정도였으니 이보다 더 간명하면서 소상할 뿐만 아니라 흔해 빠진 동기란 있기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문제는 그 말을 하는 양선의 모습이 막 데뷔하여 상기된 얼굴로 첫 무대에 오른 아이돌 가수 같았다는 데 있었다. 거추장스러운 육체 활동이 따라붙기 마련인 엠티에 하고 나타난 차림부터가 이미 낡은 청바지와 학과 맞춤 티셔츠가 아니라 반짝이는 블라우스와 미니 플레어드레스에 레깅스, 자색 앵클부츠였고 금빛에 가까운 밝은 고동색의 풍성한 머리카락은 조금 전까지 고데기로 말다 나온 것처럼 굵은 웨이브가 졌다. 이미 만취 상태였던 한 남자 선배가, 실은 오티 때부터 그녀를 점찍었으나 경쟁자가 많아 미처 집적대진 못하고 놀던 고무줄 끊는 심정으로 일갈하기를, 뭔가 앞뒤가 안 맞잖아 그 머리는 얼마 주고 했냐? 곧 이어 너도나도 그 말에 공감하며 불신 가득한 어조로 그녀의 외모에서 트집을 잡기 시작했으므로, 시장에서 산 염색약으로 집에서 직접 머리를 말았으며 옷도 구두도 모두 남대문에서 발품을 팔았다는 그녀의 항변은 그대로 묻히거나 잊혔고, 염색 문제가 해결된다 치면 다음으론 그녀의 깊은 스모키 화장에 쓰인 아이라이너를 살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더 유익하고도 절실한 민생고와 관련된 기회비용이 언급되었기 때문에 항목별로 설명하기를 포기하는 쪽이 빨랐다. 오래지 않아 그녀는 작은 숄더백에 전공서적은 옆구리에 끼고 한 손에는 스타벅스의 캐러멜 마키아토가 담긴 종이컵을 든 채 교정을 거니는 이미지로 정착되었는데 실제로 그녀가 꼭 그와 같은 차림으로 다닌 적은 없었다. 불행은 줄곧 부당하게 수면 아래 가라앉았다가 어떤 극단적 상황에서 피치 못할 방식으로 타의에 의해 공개될 때 비로소 가치와 무게를 획득하는 모양으로, 양선의 밝고 명랑하며 때론 화려하기까지 한 표정은 그녀가 겪은 과거의 고생을 생각보다 아프지 않은 가격으로 책정하는 데 일조했다.
    어쨌거나 객관적으로 외모가 좀 되는 그녀는 봉사 관련 행사 및 전시용 사진 기록을 남길 때마다 등이 떠밀려 계속 맨 앞줄로 보내졌고, 그럴수록 사람들은 그녀에게서 부잣집 아가씨의 동정심 흘리기 놀이나 아프리카에 봉사를 나간 연예인들의 전시행정을 보았다. 양선이 누군가를 위해 눈물 비칠 때마다 선배들은 그녀가 부적절한 투사 증세를 보인다고 간주했고, 활동하는 사람이라면 타인에게 자신을 대입하거나 그 역의 경우가 있어선 안 된다고 준엄하게 그녀를 내려다보며 주입했다. 그러다 어느 날은 결국 뒤풀이 자리에서 한 선배가 ― 딴에는 너무 쉽게 타인에게 공감하고 간 쓸개 다 빼줄 것처럼 보여서 나중에는 있는 살 한 점까지 다 발라버리고 뼈만 남을 것 같은 그녀를 위한다며, 뭔가 정신이 번쩍 날 만한 얘기가 없을까 궁리하다 꺼낸 극단적 예라지만 어쨌거나 화자의 인식 수준만큼은 아낌없이 드러냈는데 ― 엄마 없는 남자 보면 불쌍하다고 몸이라도 대줄 테냐, 했다가 피처 잔이 날아다니고 호프 안은 난장판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나중 가서는 그 선배의 폭언이 영 틀린 것도 아니게 되어버린 것이, 그녀가 지금껏 사귀다 한 번은 돈을 뜯기고 한 번은 자궁 속 태아를 뜯는 데 일조한 두 명의 남자 모두 지역 행사를 통해 만난 이들이었으며 그들은 무언가가 결핍되었다고 할 적에 흔히 동원되는 대유인, 엄마가 없는 게 기본이거나 있어도 도움이 안 되거나 없는 게 차라리 나은 이들이었다. 선배들의 저주에 걸려 그런 남자들만 만나게 된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그녀의 촉이 그런 이들에게만 반응하는 것인지 양선은 선후관계를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유일한 사실이라면, 적어도 지금 눈앞의 동물은 누군가에게 상처나 피해를 주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신체 활동인 소리와 움직임이 전무하다는 점에서 사람보단 낫다는 것이다. 사람을 상대하고 사람을 구하는 직업인으로서 바람직한 사고 구조는 아니지만, 오물 투척과 고성방가 및 시비로 하루가 멀다 하고 민원이 들어오는 독거 정신질환자의 자활을 돕기 위해 지역 주민들과 소통의 다리를 놓으려던 3개월간의 노력 끝에 얻은 결론이다. 노력은 물거품이 됐고, 무언가가 수포로 돌아간 적이 복지사 생활 5년에 이번이 결코 처음은 아니며 오히려 일상이 실패의 연속으로 보아도 무방할뿐더러 비협조적인 지역 주민들이나 어깨들로부터의 상해 위협도 열 손가락 가까이 있었지만, 실제로 열 손가락 자국이 목에 선명히 찍힐 만큼 직접적 위험에 노출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다만 그뿐이었다. 부푼 희망이나 다짐이 소각로에 던져져 티끌과 재로 사그라지고 심장과 머리가 냉각되는 계기란 이처럼 단순하다. 블록의 누적이 한계에 도달하고 균형을 상실한 채로 버티고 있을 때 그것을 직접 쓰러뜨리는 것은 어디선가 급습하는 대단한 토네이도 같은 게 아니라 부주의한 어린애의 한 손가락이다. 그녀는 이제 가능한 한 월급이 표시하는 만큼을 객관적 절차에 따라서만 일할 것이고 사명감 따위는 개나 줘버린 다음 더 이상 아무도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한 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내밀한 지향보다는 표면적 당위로 변질되어 부질없기만 했던 선언 ― 누군가를 구제한다는 착각에 매몰되지 말아야 하며 봉사는 나의 모자람을 타인으로 인해 채워 가는 행위라는 ― 도 남몰래 코를 푼 휴지처럼 변기에 던질 것이다.
    “너는 뭐라고 부르는 애니?”
    그러므로 그녀는 결국 행위도 언성도 없는 이름 모를 동물을 그 자리에 가만히 내버려두고 출근 시간에 대기 위해 집을 나설 것이며, 굳이 손대어 털을 쓸어 보거나 심사숙고라도 하는 듯한 녀석의 자세를 흩뜨리지 않을 것이다. 그것의 온기와 감촉을 아는 순간 또다시 그것의 권리와 자격을 숙고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보살핌을 받을, 옆에 살아 있어도 될. 이어서 그것을 방기한 이들에 대한 분노를 감추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 나는 화장하고 나갈 준비를 할 거야. 그게 끝날 때까진 여기 있어도 좋아, 어디까지나 내 옆에서 가만히 아무 소리만 안 한다면.”

 

    팔짱을 낀 채 숙면 중이던 남자 대학생이 환승구간에서 내리자 방난은 출근시간의 흔치 않은 행운에 감사하며 빈자리를 차지한 다음 오늘 일정을 확인한다. 물론 사장 내연녀의 생일 선물을 교환하기 위해 백화점 명품관에 방문하는 일 말고는 특이 사항이 없지만 그래도 혹시 기입을 잊은 것은 없나 숙고한다. 지지난주 사장 부인의 생일 때는 백화점과 마트 사이 연결 통로에 위치한 시즌오프 행사장에 갔고, 지난달 사장의 어린 딸 생일에는 토이저러스에 갔다. 이 일상이 그려내는 리듬은 변하지 않을 것이고 그녀는 추석 시즌이 돌아와야 비로소 보통의 비서 매뉴얼에 정식으로 나와 있는 ‘거래처 접대용 상품권 대량 주문’ 같은 본연의 일로 바빠질 것이다.
    5년간 네 차례 이직하며 마지막 회사를 선택했을 때의 조건은 칼퇴근에 적게나마 밀리지 않는 월급, 가능한 한 일이 적고 내방객이 많지 않아 MBA 과정 교육 동영상을 틈나는 대로 볼 수 있을 법한 근무 환경으로 잡았다. 비서학과 출신이 아닌 여성이라는 점에서 출발부터 불리했음은 차치하고라도, 그동안 박봉과 시간을 쪼개 준비한 세무회계 시험에는 번번이 떨어졌고 써먹지 못한 지식이 머리나 가슴도 아닌 복부 어디쯤에 소화되지 않은 사과 씨처럼 맴도는 나이에 접어들었으며, 이제는 경영학을 공부해 두지 않으면 어슴푸레한 이직 가능성마저 없는 나이가 되어 가고 있었다. 사실 지금도 가능성의 윤곽을 확인하기가 힘들었던 게, 그전에 익히 겪어 온 바대로 면접을 보는 회사마다 이미 수십 번은 확인하고도 남았을 이력서 상단 이름에 대해 인신공격성 농을 주고받는 게 첫 번째라면 이즈음 추가된 속성에는 스물아홉이라니, 조금만 있으면 서른이네 혹시 결혼 예정이 있는 건 아닌가 ― 하고 난색을 보였기 때문이다. 졸업반,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지 못하고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동안 속수무책으로 살이 타들어가서 뼈를 드러낼 것만 같았던 시절, 청년 여러분이 눈만 낮추면 취업은 그리 바늘구멍만은 아니라는 요지로 대학에 강연을 나온 정치인들이나 멘토팔이들이 강조하곤 했는데, 그들의 충고를 받아들여 눈을 낮추자 모든 것이 낮아지거나 멀어지거나 사라졌다. 사장의 일정과 기밀을 공유하고 밀착 관리하며 운전 수행은 기본, 때론 중요 행사에 동행하는 비서를 필요로 하는 큰 회사에서는 토익 925점이 찍힌 방난의 서류가 통과된 적이 없었다. 토익 925점은 해외 교환학생이나 오지탐사대 참가처럼 개인 비용을 크게 들이지 않고 국내에서 자력으로 쌓을 수 있었던 방난의 거의 유일한 스펙이었다. 유명 기업에서 실시하는 청년 인턴제나 참가비 전액이 지원되는 봉사 활동 행사는 언제나 경쟁률이 높았고 접수 심사에 통과해 본 적 없었다. 강연자들의 조언을 참고해서 이 정도 규모라면 비록 작지만 비교적 내실 있고 안정적으로 보이며 서류 통과도 될 것 같다는 자신감과 함께 원서를 넣은 회사가 여럿 있었는데 그곳들은 마인드가 형편없었고 사장들마다 열에 아홉이 비서란 커피 잘 타고 청소 잘하면 되는 걸로 알았다. 커피와 청소와 화분에 물주기는 기본이라고 방난도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전부라곤 생각해 본 적 없었기 때문에, 그때까지는 콧대가 아직 살아 있기도 했고 애써 합격한 곳에 입사 지원 취소 의사를 밝히기도 수차례였다. 나는 그런 걸 하려고 전공과도 무관한 지망을 한 게 아니야.
    그러나 사람이 서류와 면접 통틀어 연속 오십 차례쯤 떨어지다 보면 일없이 앉아 멍하니 거울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늘게 마련이고 그때마다 방난은 자신의 얼굴에서 수많은 하자를 비롯하여 조금만 보수하면 대강 맞을 듯한 균형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몇 차례의 수술과 구조 조정이 이루어지는 동안 방난의 기초 자본은 바닥을 드러냈고 원룸 전세 보증금마저 털어 마이너스가 되었을 때는 더 이상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라는 위기감이 들었으며, 그 무렵 고교 동창 가운데 연락이 닿으면서 혼자 사는 애가 양선밖에 없었기 때문에 보증금 없이 월세 반분 부담을 조건으로 그 반지하방에 이르렀다. 양선의 반지하방은 방난에게 있어서 이 세상의 막장이었고, 얼굴을 완벽하게 개조한 자신은 애당초 여기 머무를 사람이 아니며 좋은 자리만 얻으면 언제든 박차고 나갈 수 있을 터인데도 꼬박꼬박 월세를 부담하고 있었으므로 방난은 어느 때고 당당하며 모든 것이 당연했다. 그 뒤 오히려 처음 퇴짜를 놓았던 회사들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는 곳에서 첫 출발을 맞이하면서 희망사항은 가파른 속도로 소멸하고 현실이 음주운전 차량처럼 그녀를 들이받기 전까지.
    최초로 몸담은 회사 사옥은 시장통 끝자락의 가정집으로 창문을 열기만 하면 튀김 냄새와 수산물 냄새가 침투하여 환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고 때는 마침 여름이기까지 했지만, 그래도 명함만은 번듯하고 뭔가 있어 보이게 건축회사였다. 입사가 확정되고 고향집에 전화했을 때 아버지의 축하 인사는 대뜸 이랬다. 그래 비서라고? 뭐 그거, 사장 책상 닦아 주고 커피 타주고 가끔 사장이 엉덩이나 두드려 주는 그런 거 말이냐. 너 대학 공부 시키려고 소를 몇 마리를 팔았는데 그런 뒤치다꺼리는 꼭 대학 안 나와도 할 수 있지 않냐. 시집가면 으레 남편한테 할 일을 회사까지 가서 한다고, 그냥 시집이나 가라. 그건 아버지 세대만의 고정관념이 아니라 같은 학과에서 언론고시나 공무원고시 등 다양한 시험을 준비하는 예비역 선배들의 논평도 크게 다르지 않았으므로 ― 거기에 한 술 더 떠 그들은 결국 나중 가면 사무실에서 사장의 이거나 되는 게 수순 아니겠냐고 보태며 새끼손가락을 들어 보이기도 했다 ― 방난은 그 정도의 편견에는 이미 면역이 생겨 매뉴얼대로 쏘아댔다. 아빠 시절의 사환인지 급사하곤 다르거든요, 사장의 중요한 자리에 따라다니면서 업무 효율성을 제고하고 사장이 좀 더 좋은 사장이 되도록 돕는 사업상의 파트너라고요. 아빠는 잘 모르시겠지만 국내 굴지의 기업에서 상무나 전무 같은 임원들은 다 회장 비서 출신이었어요. 왜 그랬겠어요? 옆에서 밀착 마크하면서 회사 기밀 정보를 쥐고 있는 사람은 언젠가 그렇게 돼요. 아버지에게 기세 좋게 했던 말과는 달리 실제로 방난이 7개월간 한 일은, 애당초 그리 기대에 부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아버지의 독설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딱 3개월간은 사장의 별도 지시가 없는 일도 찾아 하면서 자기 안에 명멸하는 치열한 빛을 쏘삭여 보기도 했지만 사장은 그녀에게 회사의 정보를 거의 공유하지 않았고 실제로 공유하거나 지킬 만한 수준의 정보가 존재하는지도 의문이었으며, 그녀의 서랍은 업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자료 대신 필요한 사람들에게 아무 때고 내밀기 위해 갖춰 둔 잡동사니(구급약, 미니 우산, 경조사용 빈 봉투, 구강청결제, 인주, 로션)로만 가득했다. 그녀가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나마 있던 대부분의 직원이 퇴사하고 사실상 회사 자체가 문을 닫기 일보 직전임을 알았을 때, 입사 4개월째부터는 자신이 직원들에게 월급봉투를 나눠주는 경리 및 총무 겸직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조차 돌아올 월급이 없는 잔고 몇 만 원의 회사 통장과 마주했을 때, 무엇보다 사장이 저녁 무렵 취한 채로 이제 나한테 남은 건 너밖에 없으니 가지 말라며(당최 언제 관계 형성을 할 시간이 있기나 했다고) 팔을 붙들어 울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마음을 굳혔다.
    지금의 회사는 방난이, 이걸로 인생에서 비서로는 마지막이며 더는 물러날 데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지원서를 넣은 곳이었는데 중국과 태국 및 필리핀 등지에서 고정적으로 젤리와 푸딩을 수입하여 백화점과 마트에 공급하는 식품 유통 업체였다. 이직할 때마다 사무실 건물은 점점 작아졌는데 이번에는 대로변 아닌 골목 깊숙이 자리한, 지은 지 4반세기쯤 되어 보이는 4층 건물에서 2층 오른쪽 사무실로, 건물 입구에 들어서자 계단참에 위치한 남녀 공용 화장실에서 오물보다는 세월과 부실 보수 및 배관의 근본 하자 문제로 짐작되는 악취가 풍겼다. 철문을 닫자 냄새는 반쯤 차단되었지만 이 정도라면 사무실에 하루 종일 냄새가 기어 들어올 법했고 이 화장실을 청소하는 건 결국 자기가 되리라는 예상도 그렇거니와 무엇보다 명색이 식품 유통 업체라는 곳에 딸린 화장실의 상태가 이렇게 심란해서야 방난은 차라리 면접을 보지 말고 그대로 돌아갈까 싶었으며, 그때 마침 큰일을 보기 위한 준비인 듯 신문과 담배와 종이컵을 갖고 내려온 다른 직원이 면접자를 알아보고 사장 앞에 데려가지 않았다면 정말 그랬을지도 모른다. 밑져야 본전인 셈치고 사무실에 끌려 들어가기는 했지만, 실은 이제 엎어지면 코 닿을 데 놓인 서른이라는 나이로 대부분의 취업 준비생이 겸비한 영어 외에 이렇다 할 특기라곤 없는 자신의 서류 통과 빈도가 점점 줄어든다는 것도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40대 중반의 사장은 지금껏 그녀가 만난 대부분의 면접관처럼 그녀 이름에 대해 조심스럽게 또는 뻔뻔하게 트집을 잡지 않았기 때문에, 그 점이 오히려 의아해서 그녀는 언제쯤 그 폭탄이 투하될까 점치느라 사장의 질문을 주의 깊게 들을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그 어느 때보다 성실하고 알찬 답변을 내놓았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미루어 이름이 특이하시네요/이름이 재미있어요/누가 지어 주셨죠 같은 경우는 극도로 예의 바른 시비에 해당했고 대다수는 요즘도 이런 이름 짓는 부모가 다 있나? 정도로 툭 던지기 일쑤였다. 취업 준비 초기, 비교적 규모 있는 중견기업에서 지원자들을 다섯 명씩 한꺼번에 입장시킨 압박면접 때는 머리가 희끗한 면접관의 첫 마디가 이름이랑 얼굴이랑 어떻게 이리 잘 어울려-였고, 얼굴 구조 조정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이었던 그녀는 나머지 네 명의 지원자가 터지는 웃음을 참고 있으리라는 짐작만으로도 가뿐히 15층 창밖으로 몸을 던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날 그녀에게는 이름을 누가 지어 주셨으며 한자 뜻이 무엇이라는 것 외에는 다른 질문이 주어지지 않았다. 수십 차례 면접 끝에 단단히 적응이 되고 얼굴에도 자신이 붙긴 했으나 그 뒤로도 으레 그런 자리에서는 진지하게 개명해 볼 생각 없느냐는 질문부터, 어린 시절 교실에서 고생 좀 했을 텐데 여태 그냥 두었느냐는 감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반응이 나왔다.
    그랬는데 그동안 적응해 온 패턴과는 사뭇 달랐으므로 사장이 끝까지 이름에 대한 언급 없이 다음 주말까지 연락드리겠습니다, 라는 말로 면접 종료를 선언했을 때 방난은 입안에 가시가 돋치기 직전이었다. 저기, 이름 얘기는 안 하시나요? 이름이 뭐 이러냐든지, 웃긴다든지, 방귀나 난방 같다든지. 아니면 왜 바꾸지 않았느냐든지, 개명 신청 그거 정부 수입 인지랑 송달료 포함 몇 만 원이나 한다고. 방난의 물음에 사장은 새삼스럽게 이력서를 다시 들여다보곤 고개를 기우뚱했다. 초등학교 교실도 아니고, 이름이 문제가 되나요? 방난은 그 앞에 기도하는 자세로 응접탁자를 내려다보았다. 왜 이름을 안 바꾸었느냐면요, 막 특별히 이름에 애착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무지 그럴 리가 없는 이름이잖아요, 그런데 제가, 이, 이…… 그러니까 보시면 대충 아시겠지만 이 얼굴을 다 뒤집었거든요. 어느 날 거울을 봤는데 옛날 사진하곤 1밀리만큼도 닮지 않은 모습이었거든요. 그러고 나니까, 이름마저 갈아엎으면 그전까지 존재했던 저라는 사람이 완전히 없어져버릴 것 같았어요. 그래서 이름만은 바꿀 수 없었어요. 그럴 것 같으면 애당초 이름을 바꾸고 얼굴은 그대로 내버려뒀어야 할까? 생각도 했지만,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의 얼굴을 먼저 보잖아요, 이름은 명함을 내밀기 전까지는 모르고 그러니 웃음을 참을 일도 없잖아요, 비서는 회사의 문 앞에서 낯모르는 이들과 얼굴을 먼저 대할 뿐 이름부터 눈앞에 들이대지는 않으니까…… 그러니까요.
    누가 시키지도 않은 고해성사를 마치고 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때 사장은 호기심인지 동정인지 모를 모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말을 바꾸죠. 다음 주까지 연락드리지 않겠습니다. 대신 다음 주부터 출근하세요. 괜찮습니까?
    그 뒤로도 비록 하는 일 자체는 그전에 거쳐 온 회사들과 대동소이하게 사장의 업무 외적 뒤치다꺼리에 머물렀지만 방난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밝고 힘 있게 출근했다. 경비 지출이 아닌 사비로 야근 이튿날의 출근 서비스를 제공할 경우 그전 사장들의 책상에 박카스 한 병을 올려놓았다면, 이번에는 마늘인지 홍삼 엑기스가 들었다고 주장하며 가격 레이블에도 영이 한 개 더 붙은 에너지 드링크를 올렸다. 만약 사장 딸이 취학 연령대로 그 수행평가 과제를 대행해야 했다면 예전처럼 인터넷 검색 결과를 짜깁기해서 대충 갖다 안기는 게 아니라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정기간행물을 열람하거나 취재를 나갈 것이었다. 비록 일시적이며 감상적인 기분이더라도 자신에게 이름을 묻는 사람들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해준 상사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사소한 답례였다. 관성은 낡았으나 몸에 잘 맞는 옷처럼 편안했고 그녀는 몇 달 지나지 않아 일껏 신청한 온라인 MBA 강좌에도 열의가 떨어졌다. 숫자와 서류를 확인해 본 바 납품은 영원히 지속될 것 같았고 구태여 수입 품목을 늘리는 모험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으며, 사세 확장까지는 언감생심이고 회사가 이 정도의 현상유지만 해준다면 층계참 화장실의 구조적 악취도 그런대로 견딜 수 있을지 몰랐다.
어디까지나 수입산 젤리에서 검출된 공업용 색소와 발암물질 파동이 시사 고발 프로그램에 보도되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내가 원래 이런 미안한 일은 안 시키기로 했는데, 기자랑 피디랑 어디 저 높으신 분들 좀 만나느라고 자리를 오래 비울 거야. 그러니까 잘 좀 부탁해. 이번 고비만 넘기면 월급 인상도 검토해 볼게.
    사생활을 맡기는 방식마저 이토록 예의 바른 사장이라니, 방난은 자기만 믿으라는 듯한 브이 사인과 미소로 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사장이 사전에 귀띔한 몇 가지 브랜드 중에서 골랐음에도 불구하고 내연녀 앞으로 보낸 생일 선물은 이튿날 바로 퀵서비스, 그것도 사무실 착불로 반송되어 왔다. 어찌 된 일인지 궁금했지만 사장 내연녀에게 굳이 유선으로 묻기가 무엇하여 어영부영 사무실에 보관해 두었는데 사장은 오늘 새벽에야 모음 일부를 누락하거나 덧댄 취기 도는 문자로 보내오기를, 제품의 색깔이 그녀 마음에 안 든다는 거였다. 사장을 통해 걸러져 완곡한 표현으로 도착했으나 방난은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는 그의 내연녀가 어떤 식으로 말했을지 묘하게 짐작이 갔다. 자기, 이건 어떤 년의 안목이야?
    어쩌면 그 내연녀는 물건이 마음에 안 들어서라기보다는 사장이 직접 골라다 와인 잔을 사이에 두고 건네는 대신 비서 대행으로 건조하게 발송한 과정 자체를 문제 삼는 듯했고 끝까지 원하는 모델명과 색상을 알려주지 않는 데서 그 점은 확실했지만, 그러시다면야 바꿔 드리고말고요. 그날 밤 방난은 마음속 어디선가 바스락거리는 마찰음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그저 내일 출근 즉시 가방만 던져 놓고 명품관으로 직행하면 그만이라 곱씹었다. 비서란 그런 것이다. 사장 내연녀는 어디까지나 사장의 내연녀일 뿐 자신의 상사가 아니며, 고된 마트 알바 시절의 진상객 정도로 간주하고 잊으면 그만이었다.
    막말로 내가 진정 사장의 오피스 와이프나 된다면 또 몰라.
    그러면서 반지하방 문을 연 순간, 방난은 밀도 높고 충만하며 궁극적인 어둠과 마주쳤다.

 

    누가 그녀보다 먼저 출근했는지 세콤이 모두 해제되어 있어서, 몇 안 되는 직원 가운데 그럴 만한 사람이 없는데 이상하다고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방난은 문 안쪽에서 튀어나온 우악스러운 손에 머리채를 꺼들린다.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이 초 남짓한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는 도둑이나 강간범이 어째서 이런 출근시간에 활동하는지, 부터 시작해서 온갖 경우의 수가 스쳐 지나가는데, 고개를 들자 사장 부인이 팔짱을 낀 채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게 바로 네년이지, 라는 전후사정 잘라먹은 말을 던지며 사장 부인이 방난의 눈앞에 흔들어 보이는 것은 사장의 결재용 파일에 넣어 두었던 명품관 영수증이다.
    방난은 물론 비서답게 눈치가 빠르고 사장 부인이 무엇을 의심하고 억측하는지 기민하게 알아차린다. 비서란 어떤 때에도 사장의 비밀을 지키며 설령 가족이 쳐들어왔어도 그 원칙은 동일하게 적용하지만 무고하게 간통죄로 고소당하게 생겼으니 적어도 그 영수증에 적힌 물건이 자신과 무관하다는 선까지는 밝혀도 되지 않을까 방난이 계산할 틈을 주지 않고 사장 부인이 던진 주전자가 날아온다. 닷새 전에 끓여 둔 채로 회사가 초상집 분위기가 되는 바람에 깜박 잊고 방치했던 보리차가 머리 위로 쏟아지는데 방난이 이 순간 떠올리는 것은, 암만 회사 분위기가 말이 아니어도 그렇지 보리차가 이렇게 시큼한 냄새를 풍길 때까지 내버려두는 건 제대로 된 비서가 아니라는 자괴감이다.
    사장 부인은 방난의 서랍을 차례로 열어젖히며 안에 들어 있던 스탬프, 스테이플러, 집게, 칫솔, 물티슈, 휴대전화 충전 코드 등의 잡동사니들을 책상 위나 바닥에 흩뿌리고 그중 몇몇은 방난의 숙인 머리를 향해 던지다가 각각의 물건에 붙어 있는 네임 스티커를 보곤 히스테리성 폭소를 터뜨린다. 세상에, 이름 보게. 미스 방! 미스 바앙? 방방난 씨! 우리 할머니 친군가 봐. 상판은 죄다 깎고 찢고 붙인 주제에 이름은 왜 손 안 보고 놔뒀대. 때마침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출근한 영업부장은 즉시 상황을 파악하고, 난처하면서도 사모님의 심정을 다 이해한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사장 부인 앞을 가로막더니 입으론 임기응변용 접대 매뉴얼을 읊어서 상대의 흥분을 가라앉히는 한편 방난을 흘낏 돌아보곤 당신이 사라져야 사태가 수습된다는 신호를 보낸다. 방난은 벗겨진 구두를 꿸 새도 없이 손가락에 걸고 흐느적거리며 화장실로 들어간다. 철문을 안쪽에서 잠그자 그전까지 혼수상태로 허파 어디쯤을 떠다니던 한숨이 비로소 입술을 찾아 새어나온다. 거의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분명 전날 저녁에 락스로 물청소를 한 화장실은 그 어느 아침보다 악취가 진동한다.
    쉰내 나는 머리카락을 비틀어 짠 다음 무심코 주머니를 찔러 확인해 본 휴대전화에는 이른 아침부터 근면 성실의 극치를 보여주는 몇 개의 광고 문자와 사장의 문자 그리고 양선의 문자가 와 있다. 제일 상단의 사장 문자는 눈물 이모티콘과 함께, 지난밤 통화한 마누라가 뭐에 뒤틀렸는지 갑자기 회사로 쳐들어가겠다고 길길이 뛰는데 계속 중요한 외부 미팅 중이라 어떻게 뜯어말릴 방법이 없으니 오늘은 출근하지 말고 집에서 쉬라는 내용이다.
    방난의 명치에 차가운 어스름이 깔린다. 발효되다 말아버리고 거품만 부글거리는 감정들이 시큼한 냄새를 풍기며 급습해 온다. 일시에 부서진 신기루의 조각들이 날을 세우고 방난의 뺨을 때리며 비웃는다. 사장의 문자를 지우고 방난은 양선의 문자를 연다.

 

    털 뭉치의 고요와 침묵은 이제 엄숙하고 신성해 보이기까지 한다. 지금 출발해도 지각을 면하기는 힘들 것이다. 아직 방난에게서는 답장이 없고 양선은 털 뭉치 곁을 선뜻 떠나지 못한다. 지난밤 그릇을 엎거나 용변을 보지도 않았을 정도니 양선이 근무하고 돌아올 때까지 이 다세대 주택에 소란이 벌어지리라는 법은 없다. 다만 걱정이라면 장시간 식사를 급여하지 않는 것이 동물에 대한 명백한 학대라는 점과 아직 남아 있는 직업 본능으로 그것만은 두고 볼 수 없다는 점인데, 무엇을 먹여도 무방하고 무엇을 먹이면 탈이 나는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아무거나 앞에 뿌려 놓고 갈 수는 없다. 자신이 준 음식 때문에 잘못하여 고가의 외래 희귀종이 죽기라도 한다면 양선은 자기 가죽을 벗겨 팔아도 갚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낙타처럼 몸속 지방을 소비하면서 살아가는 종류의 생물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맹물 정도는 두고 가도 괜찮지 않을까? 생수를 마시고 죽는 동물이 있다는 소리는 여태 들어 본 적 없긴 한데 높은 분네 저택에서 살아왔을 생물이 삼다수 준다고 마실까, 어디서 에비앙이나 볼빅이라도 구해 와야 하는 거 아닐까.
    양선은 언제 올지 모를 방난의 메시지를 기다리며 출근 가방을 둘러멘 채 털 뭉치 옆에 망연히 주저앉는다. 털 뭉치의 일관성 있는 함묵에서 그녀는 바로 어제까지 찾아갔던 산동네 끝자락 거주자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떠올린다. 주민 신고를 받고 찾아간 판잣집에서 발견한 열 살 초반의 소녀. 무엇을 물어도 대답하지 않고 그 자리에 버려진 지 오래된 쓰레기처럼 못 박혀 있었지. 무엇을 물어도 고개를 끄덕이거나 젓는 시늉조차 하지 않고 발치에 밀어준 샤니빵과 살구 맛 피크닉에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주민들의 제보에 따르면 동네로 흘러 들어온 지 1년쯤 되는 아이로 그전에는 아빠 엄마로 추정되는 비슷한 행색의 동거인이 있었으며 남자 쪽은 나이로 보아 아이 아빠라기보다는 젊은 애인 같았는데 모녀 가운데 정확히 어느 쪽 애인인지 알 길은 없으나 이런 상황에서 흔히 발견되는 사례로 대놓고 모녀 양쪽을 번갈아 착취하는 것이 분명해 보였고 그들 살던 집에선 날마다 비명과 통곡이 끊이지 않았다는, 양선이 주 1회 꼴로 접하는 패턴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한바탕 난리가 있은 뒤 무려 닷새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서 주민들은 좋든 싫든 늘 들려오던 음악이 멎은 것만큼이나 의아했는데, 어느새 악취가 산바람을 타고 내려와서 제일 수상한 그 집 문을 열어 보니 말라붙은 지 오래되어 보이는 대량의 피 위에 아이만 우두커니 앉아 있을 뿐 보호자인 남녀는 모습을 감추었다는 것으로, 아이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오느냐에 따라 형사 사건이 될 수 있었으므로 양선은 그 아이를 집에서 끌어내는 역할을 맡아야 했는데, 어제 산자락을 수차례 오르내리고도 해내지 못한 일이 그거였다. 이미 몇몇 복지사가 비협조적인 아이를 깨끗한 시설로 옮기려고 강제 집행을 시도하다가 뼈가 드러나게 팔뚝만 물리고 나가떨어졌고, 젊은 여자들끼리 아무래도 통하는 점이 있을 테니 잘해 보라며 너도나도 양선의 등을 떠다민 상황으로, 언제는 달걀 한 판이라고 한물간 미스 양이라더니 저들 필요할 때는 또 젊은 여자란다.
    너도, 손을 덥석 붙잡으면 물어뜯을 테냐. 양선은 털 뭉치의 옆모습(도무지 어디가 옆인지 놈은 어디를 바라보고 앉았는지 알 수 없지만)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한다. 누군가가 악의 없이 내민, 섣부른 호감을 돌출시키기보다는 비의도적이며 어떤 가치 판단도 배제한 객관적인 손이라도 일단 적으로 간주하고 보겠니. 난이는 무슨 생각으로 너를 데려왔을까. 이 비좁은 문을 모로 통과해 들어왔을 적엔 얼마나 불편했을까. 세상에 널린 좋은 집 큰 집 놔두고 너도 하필이면 이런 곳에.
    문자 도착 알림 벨을 듣고 드디어 방난의 답인가 싶었는데 회사로부터의 연락이다. 양 선생 어딨어 지금 센터 난리 났어. 2주 전 양선에게 해코지하려 했던 정신질환자가 이번에는 센터로 직접 나타나 난동을 부린다는 것으로, 기물파손이나 사소한 시비에서 그쳤으면 괜찮았을 것을 말리던 남자 복지사의 팔이 부러져 센터 앞에 구급차와 경찰차가 도착은 했는데 정신질환자는 자해 소동을 벌이며 양 선생이 오지 않으면 아무하고도 얘기하지 않겠다고 울부짖는 중이라 한다. 이쯤 되면 양선도 한없이 무해해 보이는 털 뭉치보다 그쪽이 더 실존의 위협과 직결된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고, 어느 때고 마찬가지였으나 오늘은 특히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무관한 것들이 서로에게 친절하지 않으며 특히 자신에게는 적의를 품고 있다고 느낀다.
그래도 1리터들이 삼다수 한 병 정도 앞에 부어 주고 갈까 싶은 갈등으로 마지막으로 한 번 털 뭉치를 돌아볼 때 방난의 답 문자가 도착한다.

 

    무슨 소리니 난 네 건 줄 알았는데

 

    비로소 두 사람은 뭔가 일이 잘못되었음을, 단지 침묵을 유지하고 손해를 일으키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그 존재를 서로가 서로에게 떠넘기며 어디의 무엇인지조차 알아보지 않으려 했던 털 뭉치의 정체가 실은 지극히 조용한 침입자임을 알아차린다. 그러나 아무래도 상관은 없을 것인데, 이렇게 목전에 구체화되는 경우가 흔치 않다 뿐 내 밖에 있는 나 아닌 모든 것은 나에 대한 침입자이기 때문이며 그것의 내면에 무엇이 들었거나 말았거나 어떤 사연이 얽혀 있는지는 물론 어떤 경로를 통해 여기 도달했는지도 관심 가질 까닭은 없었고, 문제라면 그것이 그 자리에 조용히 머물러 주면서 가능한 한 내게 고통과 불편을 덜 줄 것인지의 여부일 뿐이다. 놈은 어느 공간에 축적되어 있었을지 모를 어둠이라도 먹었는지 아니면 창문 반 장만큼 기어 들어온 아침빛이 주는 시각의 단순 혼선인지 간밤에 봤을 적보다 체적이 조금 더 커진 것만 같은 느낌이 들며, 더구나 방난의 것도 아닌 이상 그리 조심스레 거리를 두거나 손대면 깨질 유리처럼 대해야 할 까닭은 없으므로 긴장이 풀린 양선은 무심코 놈의 털을 쓸어 넘기고,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드러난 놈의 눈꺼풀이 꿈틀거리며 열리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그 눈동자는 평화로운 숙면을 건드리는 자를 확인하려는 듯 양선을 정확히 응시하더니?

 

 

 

 

   《문장웹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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