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_차세대2차_소설] 밤의 백안

 

[2014년 2차 차세대예술인력육성 문학분야 선정작 ]

 

 

밤의 백안

 

 


차현지

 

 

 

삽화_밤의-백안

 

    PM 7 : 30

 

    한 조는 오늘도 편의점에 들러 종이박스를 얻었다. 아르바이트생인 낙영이 귀찮다는 듯 종이박스를 넘겨줄 때마다 한 조는 바닥에 닿을 것처럼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했다. 날짜 정해서 오세요. 아저씨 기다리느라 못 버리고 쌓아 둔단 말예요. 낙영이 말했다. 한 조는 다시 한 번 머리를 숙였다. 종이박스를 받아든 한 조의 손톱이 까맸다. 낙영은 가능한 한 그의 손과 닿지 않으려 했다. 그러곤 종이박스를 건네주자마자 찝찝한 듯 두 손을 털었다. 공장에서 트럭으로 운반되는 동안 누군가에 의해 짓밟히거나 던져진 종이박스의 표면은 흙먼지나 신발 자국 같은 것이 묻어 있었다. 낙영은 손세척제를 바르고 두 손을 매만졌다. 한 조가 낙영의 창백하리만큼 하얀 두 손을 멀거니 쳐다보았다. 안 가세요? 낙영이 불편한 기색을 비치며 물었다. 한 조는 이내 시선을 거두고 다시 버릇처럼 굽실거리며 편의점을 빠져나왔다. 낙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모습이 편의점의 전면 유리창에 비쳤다.
    편의점에서 나오자 길 건너편에서 박 씨가 손을 흔들었다. 박 씨는 학원 건물에서 폐지를 줍고 나오는 길이었다. 밥 먹읍시다. 박 씨가 말했다. 한 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조를 향해 걸어오는 박 씨의 때꾼한 승복 바지가 거리의 네온사인에 비쳐 더욱 눈에 띄었다. 한 조는 들고 있던 종이박스를 겨드랑이에 낀 채 박 씨와 함께 깊숙한 골목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12층짜리 건물들 사이에 비좁게 난 골목은 에어컨 환풍기에 의한 누수로 물웅덩이가 곳곳에 괴어 있었다. 골목 한쪽에는 폐지와 재활용품들이 한데 쌓여 있었다. 그 옆으로는 음식점들이 배출하는 각종 음식물 쓰레기가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 가로등이 없는 골목은 깜깜했지만 건물 1층의 중국집 주방과 연결된 뒷문을 열어 놓으면 그나마 음영 정도는 구별할 수 있었다. 박 씨가 주방 뒷문을 똑똑 두드리자 문이 열렸다. 누런 난닝구를 입은 주방장이 하품을 하며 문고리에 고무줄을 걸었다. 고정시킨 문 틈새로 주방 불빛이 새어 나왔다. 박 씨는 주방장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며 그 앞에 앉아 검은 봉지 안에 들어 있던 삼각김밥과 막걸리 통을 꺼냈다. 한 조와 박 씨는 음식물 쓰레기 바로 맞은편에 앉아 김밥을 먹기 시작했다. 음식물 쓰레기봉투의 구정물이 그들 주변으로 새어 나와 흘렀다. 그 옆으로 쥐 한 마리가 하수구를 향해 재빠르게 움직였다.
    박 씨가 막걸리를 종이컵에 따르며 한 조에게 은비의 결혼식에 대해 물었다. 한 조는 말없이 종이컵을 입에 가져다댔다. 그러곤 단숨에 막걸리를 비워냈다. 박 씨는 또다시 한 조의 종이컵에 막걸리를 따랐다. 막걸리는 벌써 세 통째 비워졌다. 골목이 마주 보이는 술집 테라스에서 맥주를 마시는 정장 차림의 남자들 몇이 박 씨와 한 조를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한 조는 그들을 응시하며 막걸리를 비웠다. 정장 차림의 남자들은 이미 거나하게 취한 상태였다. 불콰해진 얼굴로 그들은 박 씨와 한 조를 바라보며 무어라 된소리를 지껄였다. 결혼식 때 딸 애 옆에 설 생각하니까 잠도 안 오구 설레지유? 박 씨는 계속해서 은비의 결혼에 대해 물었다. 별안간 한 조가 빈 종이컵을 구겨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형씨, 왜 그래. 박 씨가 한 조의 어깨를 부여잡으며 말했다. 에이 괜히 그러지 말라구. 짭새 뜨면 우리만 곤란하니까. 박 씨가 말을 잇는 도중에 술병이 한 조를 향해 날아들었다. 술병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한 조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러곤 곧장 정장 차림의 남자들이 있는 술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된소리가 오가다간 이윽고 한 조의 주먹에 피가 묻었다. 정장 차림의 남자들 옆 테이블에 있던 여자 둘이 비명을 질러댔다. 얼마 안 있어 멀리서부터 순찰차의 경적소리가 들려왔다.

 

 

    PM 09 : 00

 

    낙영은 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재빠르게 짐을 챙겼다. 입출고 내역서와 정산관리까지 순식간에 마친 낙영은 마감 아르바이트생이 오기만 기다리며 물걸레질을 했다. 도중에 손님이 들어와 담배를 주문했고, 생리대가 어디에 있는지 물었을 때도 낙영은 최대한 빠르게 계산을 했고, 무성의하게 대답을 했다. 마감 아르바이트생이 평소보다 조금 늦게 도착하자마자 낙영은 곧장 앞치마를 집어 던지고 직원 휴게실로 들어갔다. 마감 아르바이트생이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이며 사과했지만 낙영은 들은 체도 안 하고 편의점 문을 나섰다. 그러곤 곧장 지하철역으로 뛰었다.
    공릉역에 도착한 낙영은 화장실로 들어가 거울을 확인했다. 입고된 세제 박스를 옮기다가 땀을 많이 흘렸는지 머리가 엉망이었다. 낙영은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묶었다. 역사 밖으로 나와서는 꽤 오랫동안 역 주변을 돌아다녔다. 모텔의 위치를 확인했다. 낙영은 역 근처 카페로 들어갔다. 돈은 달랑 4천 원이 전부였다. 낙영은 포도주스를 시키고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카페 창 너머에는 많은 사람들이 종종걸음으로 바삐 움직였다. 창 너머 사람들을 곁눈질해 가며 쳐다보는 낙영의 어깨가 평소보다 더 굽어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더 있었을까. 낙영은 시간을 확인한 후 카페를 나와 모텔 쪽으로 걸었다. 오후 10시 15분. 모텔 앞에 다다르자 세차를 한 지 얼마 안 된 은색 세단이 모텔 주차장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의 차였다. 낙영은 모른 척 올라가려다가 말고 문 앞에서 그를 기다렸다. 이윽고 주차장에서부터 건물 쪽으로 오는 그가 보였다. 또 나와 있네. 먼저 들어가라니까. 그는 낙영을 본체만체하며 계단을 올랐다. 낙영이 조심스레 그의 뒤를 따랐다.
    무인 모텔 205호는 약간의 소음을 제외하곤 대체로 조용했다. 얼마간 먼지들이 너풀거리며 방 안을 유영했다. 전원을 켰다 끈 것처럼 두 사람의 몸에는 열이 통과한 흔적이 곳곳에 배어 있었다. 그가 욕실에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자 낙영이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는 낙영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말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찝찝해도 좀만 이렇게 있어요. 낙영이 속삭였다. 그의 핸드폰 벨소리가 울린 것은 그때였다. 그는 침대 옆에 아무렇게나 벗어 둔 바지 뒷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발신자를 확인했다. 낙영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낙영은 시트 자락을 정수리까지 뒤집어쓰고는 벽을 향해 몸을 돌렸다. 통화를 마친 그가 욕실로 들어가자 낙영은 그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녀였다. 욕실에서는 샤워기를 틀었는지 물소리가 들렸다. 그의 마른기침 소리를 들으며 낙영은 핸드폰의 발신 버튼을 눌렀다.

 

 

    AM 01 : 00

 

    카운터의 깜뽀가 무전을 쳤다. 형준은 호프집에서 나와 비틀거리는 여자에게 자신의 별명이 새겨진 명함을 건네주던 차였다. 여자는 대충 명함을 받아들고는 건물 계단에 반쯤 드러누웠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여자의 치마 속이 훤히 드러났다. 형준은 여자의 어깨를 연신 두드렸다. 누나 혼자야? 정신 차려, 이러다 클나. 여자를 흔들어 깨워 보았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별안간 여자가 몸을 일으키며 토를 하기 시작했다. 토사물이 형준의 양복바지 밑단에 묻었다. 형준이 큰 소리로 욕지거리를 했다. 무전기에서는 깜뽀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뺑이 치는 새끼들 다 가게로 오라고요. 미희 떴습니다. 형준은 토사물 범벅인 여자를 뒤로 하고 가게로 향했다.
    가게 앞에는 아니나 다를까 미희가 있었다. 그녀는 담배를 물고 해맑게 웃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금발머리의 마론 인형이 들려 있었다. 미희는 멀리서 걸어오는 형준을 보고는 오빠아!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곤 형준을 향해 뛰어왔다. 형준이 힘없이 손을 들어 알은체했다. 미희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오늘 박살이야. 아무리 평일이래도 그렇지 너무 하잖냐.
    깜뽀가 으스스한지 몸을 떨며 말했다.
    올 생각들을 안 하네, 시벌.
    형준이 담배를 빼어 물고 인상을 찡그렸다. 계속해서 그를 지켜보던 미희의 표정이 금세 어두워졌다.
    오빠아. 오빠는 미희 안 보고 싶었어? 왜 또 인상 써어.
    미희가 형준의 목 뒷덜미를 만지며 물었다. 그녀의 손이 무척이나 찼다.
    언제부터 나와 있었어. 오지게 차갑네.
    나 오늘 하루 종일 밖에 나와 있었어어. 근데 오빠, 나 오늘 두 명하고밖에 안 싸웠다? 봐봐. 그리고 나 매니큐어 오늘 예쁜 것두 칠했다?
    저년은 너만 오면 입이 귀에 걸려. 우리랑 있을 땐 인형만 들여다보더니. 야, 미희야. 넌 형준이가 그렇게 좋냐?
    웅웅. 이담에 나 형준 오빠랑 결혼할 거야. 실장 아저씨가 결혼시켜 준다고 했잖아아. 구치 오빠아?
    미희가 형준의 등을 껴안았다. 깜뽀가 형준에게 눈짓을 보냈다. 형준이 담배를 땅바닥으로 던져 껐다. 사내들이 하나 둘 가게로 모여들었다. 미희 왔어? 하며 형준과 깜뽀를 보며 웃었다. 그렇게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대여섯쯤 도착하자 깜뽀는 문 앞에서 보안을 맡고 있던 남자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했다. 실장한테 꼰지르지 말구, 잘 지키고 서 있어. 미희야, 우리 동네 순찰 좀 하고 올까? 깜뽀가 말했다. 미희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평일 새벽 거리는 한산했다. 거리에서 방황하는 자들은 대부분 만취 상태였다. 거리는 전단지와 명함, 토사물과 술병, 술에 취해 비틀거리던 여자가 버리고 간 구두 굽 같은 것들 진창이었다. 검은 무리의 사내들은 미희와 함께 학원 골목으로 향했다. 학원들이 운집해 있는 골목은 상대적으로 조용했다. 메인 스트리트에서 흐르는 음악소리가 미약하게 들려왔다. 사내들은 가장 외지고 적막한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골목 한쪽에는 폐지와 재활용품, 음식물 쓰레기가 잔뜩 쌓여 있었다.
    미희야, 옷 벗어 봐. 깜뽀가 말했다. 사내들은 시시덕거리며 미희를 에워쌌다. 그녀가 아랑곳 않고 니트 단추를 끌렀다. 쭈쭈 보여줘. 이윽고 미희의 젖가슴이 드러났다. 냉기 탓인지 유두가 딱딱하게 융기되어 있었다. 하얀 살결 위로 연청색 핏줄이 젖을 싸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우리 미희 쭈쭈 예쁘네. 함 주물러 볼래?
    미희는 매우 오래된 습관인 양 자신의 가슴을 매만졌다. 형준이 무리 뒤에 떨어져 서 있었다. 형준은 연신 담배를 펴대며 인상을 썼다. 미희를 에워싸던 무리의 폭이 점점 좁아졌다. 미희야, 오빠들이 쭈쭈 한번만 만져도 돼? 사내들이 이루고 있던 원의 둘레가 점차 직선으로 바뀌어 갔다. 첫 타자는 깜뽀였다. 사내들의 손이 닿자 미희의 가슴이 더 희어 보였다. 사내들은 기어코 그녀를 눕히고야 말았다. 미희는 가랑이를 벌린 채 앉아 사내들을 한 명씩 쳐다보았다.
    기분 완전 좋지? 오빠들이 미희 재밌으라고 수고하는 거야, 알지? 미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친년이 또 젖어 있잖아. 진짜 웃긴다니까. 뭘 안다구. 사내들은 저들끼리 낄낄거리며 미희의 치마 속으로 손을 가져다 넣었다. 미희가 간지럽다고 까무러치듯 웃었다. 사내들이 하나 둘 허리띠의 버클을 풀었다. 미희의 머리칼이 구정물에 젖어들었다. 깜뽀가 허벅지까지 바지를 내리고 미희의 사타구니 가까이로 자신의 몸을 들이밀었다. 미희가 입김을 내며 작게 신음했다. 사내들은 몸소 바리케이드가 되어 깜뽀와 미희를 가려 주었다. 인마 어디 가? 사내 중 한 명이 형준에게 물었다. 나는 안 꼴린다. 니들끼리 해. 형준은 사내들을 뒤로 하고 황급히 골목을 빠져나갔다.

 

 

    AM 02 : 30

 

    아무리 두드려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누군가 화장실 안에서 변기를 부여잡은 채 잠들어 있는 것 같았다. 한 칸밖에 없는 화장실을 원망하며 은비는 개수대 수도꼭지를 돌려 물을 틀었다. 호프집 화장실은 담배꽁초와 가래침, 물에 젖은 휴지들로 얼룩져 있었다. 은비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마스카라가 번져 눈 밑이 거무스름했다. 2주 연속 근무를 한 것이 원인이었다. 은비는 거울 가까이 얼굴을 갖다 댔다.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 탓에 입가에는 버짐이 피어 있었다. 은비는 버짐이 핀 부위를 손으로 매만졌다. 손끝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실핏줄이 터진 눈과 부은 눈두덩을 얼마간 바라보던 은비는 별안간 화장실 문을 발로 찼다. 문 안 열어? 은비가 소리쳤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문 안에서 약간의 기척이 느껴졌다. 표정이 금세 일그러진 은비는 세차게 문을 차대기 시작했다. 그러는 새에 직원으로 보이는 여자가 들어왔다. 상기된 은비를 보던 직원이 당황한 기색으로 은비를 저지했다. 그 뒤로 짧은 스커트를 입은 여자 둘이 따라 들어왔다. 죄송해요. 친구가 많이 취했나 봐요. 여기 있는지도 모르고 밖에서 한참 찾았는데……. 은비가 잔뜩 인상을 찡그리며 나왔다. 테이블에 두런두런 앉아 있던 사람들 모두가 은비를 쳐다보았다. 선생님, 무슨 일 있었어요? 함께 온 어시스턴트 중 한 명이 물었다. 쿵쾅거리는 소리 다 들렸어요. 은비는 아무 말 없이 테이블에 앉아 남은 맥주를 마저 마셨다. 나 먼저 간다. 맥주잔을 깨끗하게 비운 은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프집에서 내려오자마자 은비는 택시를 타기 위해 정류장으로 향했다. 거리 곳곳 술에 취한 사람들이 보도블록에 주저앉아 있거나 대자로 누워 있었다. 모두가 인사불성이거나, 인사불성인 사람 곁에서 등을 토닥이며 바삐 택시를 잡고 있었다. 로데오거리에서 팔차선 대로변으로 나오는 길목에는 택시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승차거부를 당한 사람들은 한바탕 욕설을 퍼부었고, 같은 동네를 부르짖던 사람들은 합승을 하기 위해 팀을 꾸렸다. 택시를 먼저 타겠다고 옥신각신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은비는 잠깐 멈춰 대로변 가득한 사람들을 쳐다보다가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러곤 가방 안에 있던 카디건을 꺼내어 어깨를 감쌌다. 얼마쯤 걸었을까. 은비는 누군가가 자신을 따라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수상한 기운에 어깨에 걸친 카디건의 소매를 단단히 매어 잡았다. 이내 무언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한 은비가 홱 뒤를 돌았다. 그녀 뒤로 검은 양복을 입은 형준이 멈칫하며 서 있었다.
    로데오에서부터 따라왔어. 잠깐 기다려.
    형준이 편의점에서 캔 커피를 사들고 나왔다. 이거 마셔. 뜨뜻한 캔 표면이 은비의 버짐 핀 볼에 닿았다. 따줄까? 됐어. 은비가 형준의 손에 들려 있던 캔 커피를 제 손으로 집어 들었다. 집까지 데려다줄까? 형준이 물었다. 은비는 형준의 말을 무시한 채 걸었다. 어차피 가게 코앞인데 뭐. 택시 절대 안 잡혀. 그러나 은비는 계속 묵묵부답이었다. 그러지 말구, 누나. 응? 나란히 걷던 형준이 은비를 가로막고 섰다. 됐으니까 일이나 해. 은비가 마지못해 대꾸하곤 형준을 비껴 다시 걸었다.
    진짜 그러는 거 아냐.
    은비의 등 뒤로 나지막이 형준이 말했다. 은비는 침묵했다.
    정말루. 정말 그러는 거 아냐.
    은비는 계속 묵묵부답이었다. 형준이 은비를 향해 뛰어가 다시 은비를 붙잡았다.
    삐끼질 한다고 무시하는 거야? 때려 칠게, 그럼.
    …….
    그 새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결혼은 왜 해? 그렇게 돈 많은 새끼가 좋냐? 나도 돈 많이 벌 수 있어. 그깟 취직 나도 할 수 있으니까 하지 마. 남들 보기에 번듯한 직장 같은 거 구하기 쉬워. 그딴 게 뭐 대수라고 득달같이 결혼이야? 병신같이.
    그만 까불어라. 머리 많이 길렀다. 낼 샵으로 와, 머리 잘라 줄게.
    끽해봐야 거기서 거기인 사람들끼리 하는 게 결혼이랬어. 그러다 가랑이 찢어진다.
    형준이 말을 마치자마자 그의 머리 위로 캔 커피가 날아들었다. 캔 안에 들어 있던 커피가 그의 얼굴과 셔츠에 튀었다. 치사한 기지배. 형준이 이마에 묻은 커피를 닦으며 말했다. 은비가 형준을 무시한 채 갑자기 뛰기 시작했다. 어깨에 걸치고 있던 카디건의 소매를 애써 붙잡으며 은비는 매우 빠른 속도로 뛰었다. 그러다가는 얼마 안 가 발목을 삐끗해 넘어졌다. 형준이 엎어진 은비를 앉혀 세웠다. 은비가 왼쪽 발목을 감싸 쥔 채 울었다.
    네 발 사이즈도 모르는 새끼가 사준 구두가 편해?
    은비의 발목을 주무르는 형준의 손길이 부드러웠다. 은비는 형준의 어깨에 기대어 얼마간 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세컨드 있더라, 그 개새끼.
    은비가 형준의 품에 기대어 속삭였다.

 

 

    AM 03 : 40

 

    그는 아직 잠에서 깨지 않았다. 그는 간헐적으로 이를 갈았고 몸을 뒤척였다. 낙영은 그가 자는 것인지 아니면 자는 척을 하는 것인지 궁금했지만 참기로 했다. 계속해서 울리는 그의 핸드폰은 방전이 됐는지 언제부턴가 잠잠했다. 낙영은 자신이 들었던 그녀의 목소리를 계속해서 떠올렸다. 술집이었는지 주변이 조금 시끄러웠으나 그녀의 목소리는 매우 침착했고 정갈했다. 낙영은 침착했던 그녀의 저음을 듣자마자 자신의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학교에서 시간을 보내고,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을 시간에, 그녀는 그와 함께 차를 마시고, 영화를 보며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는 것이 패색의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낙영은 생각했다. 낙영은 그녀가 입은 정장 투피스를 상상했다. 실크로 된 황갈색 스커트와 그에 알맞은 명품백으로 치장한 그녀를 떠올렸다. 그러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그는 몸을 뒤척이며 눈을 떴다. 아직 안 잤네. 그는 눈을 비비며 낙영에게 말했다. 낙영은 자신의 알몸을 가리고 있던 시트를 걷어내며 그의 위에 올라탔다.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낙영을 쳐다보았다. 귀찮아요? 낙영이 물었다. 조금 피곤해. 그는 무감하게 대답했다. 낙영이 그의 몸을 애무하며 차츰차츰 배꼽 아래까지 도달하자 그는 낙영의 입술을 손으로 막았다. 그러나 낙영은 그가 저지하면 할수록 더욱더 가열차게 그의 피부 곳곳을 더듬었다. 그가 그만, 이라고 수차례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붉게 상기된 낙영의 얼굴은 좀체 가라앉지 않았다. 그는 결국 자세를 틀어 새우처럼 동그랗게 몸을 말았다. 낙영이 끅끅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낙영이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서럽게 우는 동안에도 그는 일언반구 없이 두 눈을 감았다.
    아저씨 이러는 거, 나 되게 상처 받아요.
    …….
    근데 끊을 수가 없어요. 난 조절 같은 거 못 해요. 그런 건 어른인 아저씨가 해야 될 일이잖아요.
    …….
    저번에 아저씨가 말했었잖아요. 김밥집에서 밥 먹었을 때. 거기 아줌마가 먹다 남은 단무지를 다시 단무지 통에 집어넣는 거 보면서. 아저씨가 나 만나는 건 그 아줌마가 먹다 남은 단무지를 재활용하는 것처럼, 아주 사소한 잘못일 뿐이라고. 사람들은 모두 다 그런 사소한 잘못쯤 하고 사는 거라고. 딱 그만큼의 죄책감만 있을 뿐이라고. 실은 죄책감 같은 건 그렇게 사소한 거래서, 그래서 자꾸 무뎌지는 거라고.
    …….
    난 이런 거 견딜 재간 없어요. 아저씨 연락을 무참히 씹기에는 나 생각보다 많이 어려요. 아무것도 못 하겠으니까 그냥 저 버리세요, 부탁이에요.
    그의 몸이 더욱 움츠러들었다. 간헐적인 숨소리만 들렸다. 낙영은 그가 거푸 숨을 내쉴 때마다 미세하게 떨리는 그의 눈꺼풀을 바라보았다. 만지고 싶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낙영은 한참을 그렇게 멍하게 앉아 있다가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띄웠다.
    언니 목소리 예쁘더라고요. 어른 같았어요. 근데 왜 아저씨가 답답해하는지 알 것도 같았어요.
    그의 눈꺼풀이 그제야 움직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샤워기 물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낙영은 바닥에 있던 속옷을 주워 입었다. 원피스의 지퍼를 다 채우고 나자 욕실에서 나던 물소리가 멈추었다. 낙영은 침대 위에 있던 그의 핸드폰을 자신의 가방 속에 집어넣고는 방을 나섰다.

 

 

    AM 04 : 55

 

    그의 핸드폰은 꺼져 있었다. 은비는 자는 형준을 뒤로 하고 방 밖으로 나와 부엌 식탁에 앉았다. 식탁에는 그저께 인쇄된 청첩장이 수북하게 놓여 있었다. 청첩장에는 그의 이름과 은비 자신의 이름, 그리고 어느 청첩장에서나 볼 수 있는 식상한 문구와 더불어 예식 시간과 식장 약도가 적혀 있었다. 한 조의 장녀 한 은 비. 은비는 문득 한 조에게 제대로 된 겨울용 파카가 있는지 궁금해졌다. 얼마 전에 본 한 조는 여직 반팔 티셔츠에 등산용 바지 차림이었다. 결혼식 날짜가 잡혔다는 일방적인 통보를 하면서 그녀는 덧붙였다. 오지 않으시는 게 좋은 거, 아시죠? 그러면서도 그녀는 내일 한 조의 겨울용 코트를 장만하러 쇼핑몰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은비는 어젯밤에 그의 전화번호로 걸려온 전화 속 여자애를 떠올렸다. 앳된 목소리의 주인공은 아마도 자신보다 한참 어린 것이 분명했다. 나름대로 침착하게 대응했다고 생각했지만 은비 또한 무척이나 긴장하고 있었다. 다만 상대방 역시 매우 떨고 있다는 것이 감지됐기 때문에 그녀는 좀 더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앳된 목소리의 주인공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지만 매우 당차게 말했다. 공릉동에 있는 모텔 310호에요. 오시려거든 미리 알아 두시라고 말씀 드리는 거예요……. 그리고, 저 미성년자예요. 신고해 주세요. 제발요, 언니.
    2주간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했기 때문에 은비의 피로감은 극에 달한 상태였다. 갑작스럽게 관둔 선배 디자이너의 단골고객을 은비가 죄 맡게 되어 고객들의 불만에 스트레스도 매우 극심해졌다. 게다가 보름밖에 남지 않은 예식 준비에 정신없이 발품을 팔며 가전제품을 고르고, 드레스를 빌리고, 여행지 항공편을 예약해야만 했다. 하필이면 결혼식이 보름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그는 지방 출장을 가야 한다고 했다. 원래도 그리 다감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서운하지는 않았다. 다만 결혼식 준비를 함께할 사람이 없다는 게 조금 문제였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엄마가 꿈에 나타나곤 했다. 엄마라도 있었더라면 이토록 힘에 부치지는 않았을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도대체 엄마라는 사람은 언제 존재했고, 또 언제 사라진 걸까. 엄마가 집만 나가지 않았더라면. 은비는 이 모든 것이 한 조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한참 동안 식탁에 앉아 있었다. 형준이 방에서 나왔다. 그러곤 자연스레 은비에게 입을 맞추었다. 은비는 까치집이 진 형준의 머리카락을 보았다. 막을 새 없이 미소가 번졌다. 형준이 은비를 따라 웃었다. 이렇게 좋은데. 은비는 생각했다. 삼 년 전부터 은비는 형준을 종종 집으로 들였다. 지금 마주 앉아 있는 식탁 역시 형준과 함께 사러 갔었다. 은비의 집 안 곳곳에는 형준과 함께 사러 가거나, 형준이 사온 물건들이 있었다. 형준은 은비의 발 사이즈까지 알고 있었다. 생각보다 발이 크네, 하면서 함께 샀던 스트랩 슈즈와 러닝화가 그녀의 신발장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청첩장에 나란히 이름을 올린 그는 그녀의 발 사이즈를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그가 선물로 준, 오 밀리미터가 작은 사이즈의 구두를 신고 나갈 때면 은비는 항상 발목을 삐끗하곤 했다. 은비에게 필요한 것은 오 밀리미터만큼의 여유였다. 그러나 그녀는 당신이 사준 구두가 얼마나 불편한지 아느냐며 그에게 따져 물을 수도 없었다.
    미용실 고객으로 만난 그는 반듯한 사람이었다. 반듯하게 나고 자라 평생 반듯하게만 사는 것이 정답인 줄 아는 사람. 가장 마음에 들었던 점이 있다면 그의 직업이 공무원이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를 지극히 안온하게 살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은비가 여태껏 살아 본 적이 없던 삶을 살아왔을 사람이리라고. 은비는 그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 후론 일사천리였다. 반듯하게 자식농사를 지은 그의 부모는 재빨리 결혼을 진행했다. 임산부는 수십 가지 유산의 원인에 아주 쉽게 노출돼 있다는 것을 은비는 알고 있었다. 어릴 적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었다고 말하며 그의 앞에서 눈물을 보였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주 약간의, 정말 사소한 거짓말들이라 생각했다. 그것이 그녀의 인생을 조금 더 매끈하게 만들어줄 것이라고 여겼다. 하나 매끈하기만 할 뿐 헐겁기만 한 기분은 좀체 감출 수 없었다. 눈앞에 까치집 머리의 형준이 보였다. 그녀는 들고 있던 핸드폰을 내려두고 그의 곁에 앉아 머리를 기대었다.

 

 

    AM 06 : 20

 

    짙은 안개가 온 거리를 에워쌌다. 훈방 조치를 받고 풀려난 한 조와 박 씨가 천변 길을 따라 말없이 걸었다. 한 조와 박 씨의 키보다 낮게 깔린 안개가 마치 봉우리를 감싼 구름처럼 보였다. 또 그러면 인제 징말 안 돼. 우리처럼 대놓고 넘의 피 빨아 먹고 사는 넘들은 잠자코 있는 게 상책이여. 처때리면 처맞구. 그래야 되는 거야. 형씨는 점잖다가두 사내놈들만 보이면 그냥 사단을 내니 원. 고 노려보는 눈깔만 보면 돌 것 같아? 박 씨가 무어라 잔소리를 해댔다. 한 조는 말없이 그저 듣고만 있었다. 로터리를 지나 골목 쪽으로 들어오는 틈새 길에서 박 씨가 멈추어 섰다. 그러곤 입고 있던 조끼 주머니에서 지폐 몇 장을 꺼내 한 조에게 건넸다. 이거 축의금. 내 사정이 원체 이러니까 가면 민폐기만 하겠고, 이걸로 매끈한 거 하나 걸치고 가시구랴. 박 씨는 자신의 때꾼한 승복 바지와 해진 운동화를 살피며 말했다. 꾸깃꾸깃한 초록색 지폐가 열 장이나 됐다. 박 씨는 자신이 건넨 쌈짓돈을 쳐다보지도 않고 내처 걷는 한 조의 바지주머니에 지폐를 대충 찔러 넣었다. 다음 주에 봅시다. 박 씨가 한 조와는 반대편으로 걸어가며 소리쳤다. 한 조의 바지주머니가 깨나 묵직해졌다.
    한 조가 틈새길 안쪽에서 학원 골목 방향으로 들어와 얼마쯤 걸었을까. 그 로터리에서 가장 외지고, 가장 고요하고, 쓰레기들로 가득 차서 아무도 쉬이 지나다니지 않는 골목에 어떤 여자가 누워 있었다. 여자는 날씨와는 맞지 않게 민소매 원피스만 걸치고 있었다. 한 조는 곧 여자를 알아보았다. 미희였다. 블록 전체를 헤집고 다니며 골목마다 싸움판 아니면 춤판을 열어대는 정신 나간 여자였다. 미희는 지나다니는 남자들마다 붙잡고 담배를 구걸하곤 했다. 그러나 여자들이 자신을 쳐다보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들었다. 그저 미희를 쳐다보았단 이유만으로 여자들은 쌍욕을 듣거나 맞았다. 순찰을 돌던 순경이 몇 번인가 그녀를 보호소로 보내겠다며 데려갔으나, 밤이 되면 미희는 어김없이 거리로 돌아왔다. 이제는 그녀 때문에 신고가 들어와도 순경들은 출동하지 않았다. 대신 순경들은 나이트클럽에서 일하는 웨이터들에게 단속을 부탁했다. 그 미친년이 또 지랄하면 알아서 좀 해줘. 걔가 남자 말은 잘 알아 듣잖냐. 특히 니네 삐끼 새끼들 말은 껌뻑 죽잖아. 미희는 나이트클럽 웨이터들에게만큼은 친절했다. 미희의 눈에는 한쪽 귀에 반짝이는 귀걸이를 하고, 밝은 색으로 머리를 탈색한 웨이터들이 가장 멋져 보였다. 그들이 껌을 질겅이며 삼삼오오 모여 있을 때면 미희는 그들 곁에 다가가 해죽거리곤 했다. 이년 좀 보게. 꼬리를 치네, 치기를. 언제부턴가 미희는 밤마다 나이트클럽 앞을 전전했다. 검은 양복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그들을 졸졸 따라다녔다.
    한 조는 그런 미희를 잘 알고 있었다. 어젯밤도 갈 곳 없이 배회하다가 남자들이 주는 술을 받아먹고 곯아떨어져 잠이 든 것일 터였다. 한 조는 입고 있던 점퍼를 벗어 그녀에게 덮어 주었다. 한 조의 점퍼는 여기저기 솔기가 뜯어져 있었다. 이년아. 찬데서 자면 애 못 낳아. 한 조가 자는 미희를 일으켜 세우려 하자 미희가 거세게 반항하며 한 조를 밀쳐냈다. 한 조는 미희를 발로 쳤다. 이년아. 얼른 안 일어나? 한 조의 목소리에 놀란 미희가 눈을 떴다. 미희의 입술이 파랬다. 그제야 추위를 감지한 듯 그녀의 온몸이 덜덜 떨렸다. 따라와. 한 조가 종이박스를 몇 개 챙겨든 채 앞장섰다. 그러나 온몸을 덜덜 떨면서도 미희는 부동자세였다. 이년이. 얼어 뒤지기 전에 얼른 따라오라니까는. 한 조는 거칠게 미희의 팔목을 붙잡았다. 미희가 마지못해 그의 뒤를 따랐다.
    한 조의 집은 철거되기 보름도 채 남지 않은 아파트였다. 산자락이 감싸고 있는 오래된 아파트의 주변은 폐허처럼 녹슬어 갔다. 아파트에 남아 있는 실거주자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 철거 지역으로 선정이 되자마자 집을 팔았고 살던 곳을 떠났다. 한 조 역시 조만간 집을 빼고 나가야 했다. 정부지원금과 민간단체에서 주는 복지금, 그리고 매주 폐지와 고철용품을 판 삯으로는 작은 사글세방 정도는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 조는 보름을 다 채우고 나갈 예정이었다. 보름 후에는 여관방을 얻어 장기투숙객으로 지내거나, 아니면 함께 일하는 박 씨나 다른 블록의 파지꾼들이 사는 집으로 들어갈 참이었다. 그는 지금껏 보조금으로 지원받은 돈은 통장에 그대로 모아 두고 폐지와 고철용품을 판 삯은 현금으로 모았다. 한 조는 현금으로 모아 둔 돈을 흰 봉투에 넣어 들고 다녔다. 봉투의 표면에는 딸의 이름이 비뚤하게 적혀 있었다.
    한 조가 현관문을 열고 미희를 집 안으로 들여보냈다. 집 안 가득 퀴퀴한 냄새에 미희가 코를 찡긋했다. 한 조는 신발을 신은 채 저벅저벅 거실로 들어갔다. 거실에는 이렇다 할 가전제품이 없었다. 누군가가 놓고 간 듯 보이는 수납용 서랍장 하나만 덜렁 있었다. 거실에 들어선 미희가 휘둥그레한 눈으로 벽을 바라보며 탄성을 질렀다. 벽면에는 도면대로 해체한 종이박스가 가득했다. 우둘투둘한 종이박스의 질감 위에 그려진 그림은 색연필과 크레파스로 색칠되어 있었다.
    종이박스는 베란다로 난 창문을 제외하고는 벽 삼면에 빽빽하게 붙어 있었다. 집 안에서 풍기던 퀴퀴한 냄새는 누군가에 의해 짓밟히거나, 아무렇게나 던져진 채로 신발 자국이나 흙먼지가 묻어 있는 종이박스에서부터 기인한 것이었다. 황갈색 종이박스는 색색의 물감에 뒤덮여 본래의 색을 찾을 수 없었다. 미희는 거실 중앙에 서서 삼면 가득한 그림들을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그림은 제각기 쓰인 재료도 다르고 색감도 달랐지만 소재만은 똑같았다. 그림의 좌측에는 언덕이 자리하고 있었고, 우측으로는 작은 시골집들이 옹기종기 그려져 있었다. 언덕 위에는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었다. 긴 치마 차림을 한 여자와 바지를 입은 남자가 언덕 아래 마을을 쳐다보고 있었다. 모든 그림이 죄다 이런 식이었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두 남녀 곁에 있는 동물의 종류였다. 어떤 그림에는 큰 들쥐가 그려져 있었고, 다른 그림에는 꼬리가 긴 고양이가, 그리고 또 다른 그림에는 비둘기가 그려져 있었다. 들쥐, 고양이, 비둘기 모두 우중충한 검회색을 띠고 있었다. 그것들은 마치 두 남녀가 기르는 애완동물처럼 다소곳하게 그들 곁을 맴돌고 있었다.
    어, 여기엔 여자애다. 쪼끄만 여자애.
    미희가 차례차례 그림들을 살피다가는 중앙에 있는 그림을 보며 말했다. 그 그림에는 남자의 정강이만큼 오는 여자애가 노란색 원피스를 입은 채 꽃을 들고 서 있었다.
    딸인가 봐, 딸.
    한 조는 검은 비닐봉지에서 부스럭거리며 삼각김밥과 바나나우유를 꺼내어 말없이 미희에게 건넸다. 이거 먹고 정신 차려. 기집년이 밖에서 그러고 돌아다니면 못 써. 배가 고팠는지 미희가 바나나우유를 거침없이 들이마시곤 삼각김밥을 우걱우걱 집어 삼켰다. 한 조는 가져온 종이박스를 도면대로 해체하여 잘라냈다. 그러곤 베란다 창문에 세워 두었다. 서리에 젖어 종이박스는 눅눅해져 있었다. 베란다 창으로 햇살이 조금씩 비추기 시작했다. 동이 트고 있었다.

 

 

 

< 선정평 >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앓는 사람들이다. 딸에게 버림받은 아버지가 그렇고, 애인에게 상처받은 남녀가 그러하다. 그들은 서로를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사소한 잘못’들을 사소하지 않은 상태로 만들어간다.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세하게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밤이나 낮이나 서로를 ‘백안시’한 채 살아가는 우리들의 자화상, 그것이 바로 이 소설이다.
    (이기호 / 소설가)

 

===== 작가와 6문6답 =====

 

1. 우선 선정된 소감을 간단히 밝혀주세요. ^_^

  몸에 좋은 긴장감이 다시 도는 기분이에요. 좋은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2. 이 작품을 처음 떠올렸을 때 어디서 무얼 하고 계셨나요?

  종로에 있었어요. 거리 바닥에 흩뿌려진 온갖 전단지들이 물에 젖어드는 걸 한참 보고 있었어요.

 

3. 글을 쓸 때 특별히 듣는 음악이 있다든가, 자기만의 습관이 있다면요?

  소재를 떠올리기 위해 탈것을 이용해요. 지하철이나 버스, 자전거 등을 타고 목적지 없는 이동을 합니다.

 

4. 작품을 발표하기 전(혹은 퇴고를 하신 후)에 가장 먼저 보여주는 사람이 있나요?

  요즘엔 혼자 보고 있어요. 완성 후 두어 달쯤 묵혀 두었다가 읽는 연습을 하는 중입니다.

 

5. 평생 또는 두고두고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주제가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현상보다는 감정에 집중해서 쓰고 싶어요. 사람들의 감정을 깊게 들여다보면서.

 

6. 지금 막 쓰고 있는 (또는 품고 있는) 작품의 예고편을 들려주실 수 있나요?

  밤마다 학교 운동장 트랙을 도는 여성에 대해 쓰고 있어요.

 

 

 

   《문장웹진 8월호》

 

kakao

댓글남기기

  Subscribe  
Notify o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