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려의 잔치 외 6편

 

 

 

행려의 잔치

 

김유섭

 

 

 

화라락, 머리카락이 녹아내린 뒤
가장 먼저 끓어 증발하는 것은
말라버렸다고 믿었던 눈물 몇 방울이었다
유빙으로 떠돌던 피와 골수와 뇌수 같은 것들
눈알이 지글거렸다
움츠려 펴질 줄 몰랐던 근육이 부풀어 올라
장작처럼 터지며 활활 타올랐다
어눌하기만 했던 혓바닥이 오그라들어 돌돌 말렸다가 풀렸다가
외마디 방언 중이었다
뼛속까지 얼어붙는 세상이었다
끝내 어디에도 가 닿을 수 없었던 길
희미한 지문마저 뭉개진 손가락,
발가락으로 쓰러진 여기
어머니 뱃속일까
투둑투둑, 펑, 펑, 겨울 눈보라 내리치는 화장장
불타고 끓고 터지는 소리
음악으로 연주하면서
오랜 그늘에서 수거된 행려(行旅) 하나
최초의 잔치를 벌이고 있다

 

 

 

 

 

 

 

여우 사냥

 

 

 

개들이 여우를 쫓아 꿈속을 달린다
혀가 입 밖으로 밀려 나와 깃발처럼
허공에 펄럭인다
컹컹 길을 막고 여우를 물어뜯을 듯 달려든다
언제나 방아쇠는
막다른 과녁을 향해 당겨진다
으르렁거리며 이빨을 드러내서 개들이 충성을 과시하는 사이
달아오른 총알이 여우의 핏발선 눈빛 속에
탕탕 박힌다
헐떡이는 심장이 멎기를 기다리는 동안
개들이 돌아앉아 제 털을 핥는다
낭자하게 흐르는 피는 수만 년 흘러온 강물이다
여우를 주인에게 바친 개들이 꼬리를 흔든다
나를 죽이지 말라는 다짐이다
콘크리트 산맥과 들판
강과 숲의 나무들 사이로 노을이 찾아온다
죽어 주인의 허리춤에 매달린 여우를 힐끔거리며
아스팔트 검은 길을 따라 휘청휘청
오늘도 개들이 밥과 처자식이 있는
더 깊은 꿈속으로 돌아간다

 

 

 

 

 

 

핏물 흐르는 날들

 

 

 

 

빗물받이 홈통을 타고 골목으로
빗물이 쏟아져 나왔다
며칠째 그치지 않는 장맛비였다
고단한 얼굴이 침묵의 잠에 빠져 있는 옥탑방,
한 평 마당에 빗물은 모여서
빗물받이 홈통으로 빨려 들어갔다
오래된 담배꽁초
바닥에 말라붙었던 가래침 자국
살비듬처럼 일어 나풀거리던 시멘트 가루가
땅 밑 우수관으로 쿨럭쿨럭 쓸려갔다
끊어질 듯 들려오던 목멘 자장가
뒷굽이 없는 싸구려 구두의 가죽 냄새
구부러진 쇠파이프,
깨진 화분, 뜯겨서 빠진 듯한
머리카락이 꼬리를 물고 빗물에 씻겨갔다
누군가 켜놓은 라디오 소리와 함께
빠르게 소용돌이치면서
붉은 핏물이 섞여들기도 했다

 

 

 

 

 

 

버려진 나사

 

 

 

내가 두드리는 자판과
모니터에 떠오르는 글자가 어긋나는 순간이 쌓여 간다
나는 왜 나에게 타전되지 않는지
어디로 실종되는 것인지
손가락이 손가락으로 옮겨지지 않고
발가락이 발가락으로 옮겨지지 않는 일상이
이어지기만 하는지
거리에 서면 나를 겉돌아 떠다니는 풍경들
가슴으로 스캔해 보지만
모니터에 나타나는 것은 내가 아닌 듯하다
무엇이 가로막는 것일까
조각조각 해체하는 것인지
마우스를 움직여 안간힘을 쓸수록
캄캄히 이탈해 가기만 하는 나날,
나의 정체를
기계의 형식으로 실시간 통보하며 경고하는
당신은 누구인지

 

 

 

 

 

 

창밖에 절벽 같은 비가 내리는 날

 

 

 

    잡히지 않는 전파 때문에 치직치직, 고장 난 라디오가 토해 내는 잡음처럼 창밖에 비가 내린다. 벽지에 검게 번진 곰팡이 냄새를 풍기며 시큰거리는 팔목으로 아침이 창문을 두드리고 있다.

 

    잘린 손가락 남은 마디로는 곱게 개지 못하는 축축한 이불 같은 거리로 내모는 것이다.

 

    빗물이 점령해 버린 세계, 관절 두어 개 달아나 버린 자세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는 것은 ‘일당 없는 날’이라는 거다. 경고음을 울리며 신호등이 색깔 바꾸어 등을 밀어도 길은 떠오르지 않는다. 치지치직, 종일 빗물 속을 젖어 맴돌 뿐이다.

 

 

 

 

 

 

먼지와 냄새의 제복들

 

 

 

먼지였으며, 거리를 흘러 다니는 냄새였던
그가 인간이라는
제복 속으로 숨어든 지 오래되었다

 

제복은 안식처였고 식탁이었고
두꺼운 방어막이었다
코를 찌르는 냄새가 뿜어져 나왔지만
무사히 한 시절을 버텨냈던 것이다

 

그가 관 속에 누워 세상을 넘겨다본다
이제 냄새나는 먼지로
다시 떠돌아야 하는
그의 얼굴이 창백하다

 

제복 사이로 빠져나가는 마지막 촉감을 느끼는 것이다,
다른 제복이 슬픔을 뜻하는 검은 리본을 달고
조문의 걸음으로 다가와서 꽃을 올린다

 

향이 타는 동안
그도 숨겼던 자신의 정체를 기억해 내고는
흐느끼는 척,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냄새를 토해 내기 시작한다

 

 

 

 

 

 

고양이 가면

 

 

 

고양이가 쓰레기봉지를 헤집는다
이 행성에서 사라진 푸른 산소라도 발견한 것일까
입을 무중력으로 오물거린다
골목 끝에 나타난 사람 모양의 낯선 은하계에 놀라
담장 밑에 웅크려 자세를
낮출 때도 있다
가로등 불빛에 제 그림자를 비춰 가며
오래전 떠나온 별과의 교신을 시도하기도 한다
혀로 털을 핥는 것은
그곳으로 돌아갈 날을 위한 점검이다
슈슈슉 짧은 소란이 일고
새벽, 어둑한 빛의 파장을 따라 걷던
고양이가 공중으로 떠오른다
질주해 오는 반대편 차선의 경적소리
우주 곳곳에 덫처럼 놓인
소멸의 궤도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미처 가져가지 못하고 도로 위에 떨어뜨리고 간
몸통 잘린 고양이 가면
외계에서 날아왔던 공존의 전언, 그 잔해다

 

 

 

   《문장웹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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