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_차세대1차_소설]배꼽의 기원

 

[2014년 1차 차세대예술인력육성 문학분야 선정작 ]

 

 

배꼽의 기원

 

 


박송아

 

 

삽화-배꼽의-기원

 

 

    너는 누가 더 좋니? 내게 그렇게 물었던 건 누구였을까. ‘커트 리’였던가, 세 번째 아버지였던가, 아니면 바나나 어머니였던가. 어쩌면 내가 거쳐 지나간 여러 명의 아버지들과 어머니들 모두 한 번씩은 물었던 질문이었을 수도 있다. 처음 그 질문을 들었을 때, 나는 여섯 살이었다. 으레 그 나이 또래의 아이가 더 좋아하는 사람은 뻔했다. 엄마가 더 좋아! 하지만 나이를 먹어 갈수록 대답은 어려워졌다. 열한 살 땐 한참을 망설였다. 한쪽을 선택하면 다른 한쪽의 얼굴이 시무룩해질 것을 알던 나이였다. 정말 둘 다 좋아요. 중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짜증이 났다. 세상에서 제일 지긋지긋한 질문이야! 돌이켜보면 그 당시엔 누군가 말을 걸기만 해도 화를 냈던 것 같다. 더 이상 누구도 그 질문을 하지 않게 되었을 때, 어느 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전부 다 싫어. 그러다 문득 십대가 지나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온전한 진심이었던 적은 딱 한 번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운동회에서였다. 흐리다가 가끔씩 비도 내린 날씨였다. 구령대 옆에 설치된 하얀색 천막 아래에 앉아 있던 교장은 꾸벅꾸벅 졸다가도 비만 오면 마이크를 잡았다. 아, 아. 들립니까? 이만 돌아가십시오. 안내방송을 들은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막 교문을 나서려고 하면 거짓말처럼 비가 멈췄다. 그러면 교장은 또 마이크를 잡았다. 아, 아. 들립니까? 이젠 돌아오세요. 변덕스러운 가랑비에도 교장은 매번 안내방송을 했다. 덕분에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운동회 내내 우왕좌왕했다. 혼자서 운동회를 보러 온 세 번째 아버지는 교문을 나섰다가 돌아오길 여덟 번쯤 반복하고 나자 큰 소리로 욕을 했다. 우라질, 이건 뭐 똥개훈련도 아니고! 그는 곧바로 내게 사과하며 초록색 솜사탕을 사줬다. 안 들은 걸로 해줄래? 금세 솜사탕 한 개를 먹어치운 내가 제안했다. 파란색 솜사탕도 사주면 생각해 보죠. 세 번째 아버지가 껄껄 웃었다. 너는 정말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 나는 초록색 솜사탕보다 훨씬 큰 파란색 솜사탕을 먹을 수 있었다.
    운동회의 마지막 행사는 학부모와 함께하는 2인 3각 달리기였다. 각 반마다 대표로 한 팀씩 출전했다. 우리 반 대표는 나와 세 번째 아버지였다. 언젠가 세 번째 아버지가 한 말 때문이었다. 달리기 하면 나지, 왕년에 육상선수였거든. 그는 ‘왕년’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했다. 왕년에 축구선수, 왕년에 일류 요리사, 왕년에 가수. 나는 항상 그의 왕년의 이야기들을 믿었다. 그는 정말로 축구선수처럼 허벅지가 튼튼했고, 끓여주는 라면 맛은 끝내줬으며, 그의 18번인 <물안개>는 동네 어른들의 눈시울을 적셨으니까. 그런데 막상 경기가 시작되자 그와 나는 한 발자국씩 뗄 때마다 넘어지기 일쑤였다. 세 번째 아버지는 내 어깨 위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천천히 해보자, 할 수 있어. 하지만 나는 다급했다. 바로 직전까지 우리 반이 종합 2등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겨야 우승할 수 있어요! 나는 세 번째 아버지가 오른발을 내딛을 때 왼발을 움직이거나, 그가 왼발을 내딛을 때 오른발을 움직였다. 그와 나는 호흡이 전혀 맞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맨 마지막으로 결승선을 밟았다. 너 때문에 졌어! 우리 반 오락부장이 분에 못 이겨 소리쳤던 말이 지금까지도 또렷하다.
    절뚝거리며 집으로 돌아가다가 내가 울먹였다. 죄송해요, 모든 게 나 때문이야. 아버지 혼자서 뛰었으면 분명 이겼을 텐데. 세 번째 아버지는 대답 대신 교문 옆에 서 있던 솜사탕 장수에게로 갔다. 따따블로 주쇼. 내 몸집만큼 커다란 분홍색 솜사탕이 만들어졌다. 내게 그 솜사탕을 안겨 준 세 번째 아버지는 이미 솜사탕 두 개를 먹어 끈적거리는 내 손도 잡아 줬다. 순간 부푼 솜사탕만큼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래서 아무도 듣지 못하게 작은 목소리로 고백했다. 나는 당신이 제일 좋아요, 라고.

 

    차곡차곡 살아가다 보면 그런 날이 있다. 나 스스로 아무런 쓸모없게 느껴져 초라해지는 날. 그래서 사라져 버려도 괜찮을 것만 같은 날이 예고 없이 찾아들곤 한다. 지난 5년 동안 룸메이트였던 M이 떠난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M은 이삿짐을 싸느라 부산스러웠다. 어디로 가니? 내가 묻자 M이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너랑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이해해? 그녀는 내가 도와주겠다는 말도 못 들은 척했다. 이내 다물어진 내 입안에서 하고 싶은 말들이 모래알처럼 굴러다녔다.
    나는 조용히 내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핸드폰으로 중국집에 전화를 걸었다. 마지막이니까, M이 평소 좋아하던 음식을 먹여 주고 싶었다. 우리 동네 중국집은 24시간 배달을 해주는 것으로 유명했다. 네이, 24시간 배달되는 착한 중국집입니다. 잠이 덜 깬 목소리의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짜장면 두 그릇과 중간 크기의 탕수육 한 접시를 주문했다. 남자는 기뻐했다. 그는 매일 아침마다 달랑 한 그릇만 시키는 주문이 들어올까 봐 조마조마하다고 했다. 중국집을 연 뒤부터 어쩐지 심장이 안 좋아졌다는 말도 덧붙였다. 고마워요, 오늘 무슨 특별한 날인가 봐요? 연거푸 고맙다고 하는 그 덕분에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아마도요. 그는 특별한 날인만큼 음식도 특별히 맛있게 해서 가져다주겠다고 했다. 그 말은 믿기 어려웠다. 한번은 이 중국집 짜장면을 먹던 M이 전화를 걸어 항의한 적이 있었다. 착한 중국집은 개뿔, 이건 정말 나쁜 맛이야! 다음날, 우리 집 문 앞엔 탕수육을 교환할 수 있는 쿠폰 열 장과 함께 ‘앞으론 착해지겠습니다.’라고 적힌 쪽지가 놓여 있었다. 주문을 마친 뒤 방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M은 짐이 든 상자 하나만 들고 현관 앞에 서 있었다. 5년간 자취생활을 한 그녀의 짐이 상자 하나뿐인가 싶어 놀랐다. 나를 노려보고 서 있는 M에게 짜장면을 먹고 가라고 했다. 그러자 M이 코웃음을 쳤다. 그녀는 내게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벌렸지만, 소리를 내진 않았다. 나는 제발 그녀가 한 마디라도 해주고 떠나길 바랐다. 괜찮아, 어떤 말이든 좋아. 이윽고 M이 쏘아붙였다. 네가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그리고 나가버렸다. 응, 알겠어. M이 떠난 자리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M이 집을 나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음식이 배달됐다. 네이, 착한 중국집 배달 왔습니다. 배달원은 주문을 받은 남자의 목소리와 똑같았다. 미처 주문을 취소하지 못했던지라 잠자코 음식을 받았다. 철가방에서 음식을 꺼내던 배달원이 내 등 뒤 너머를 힐끗 보며 물었다. 특별한 날이라고 하시더니 이걸 혼자서 다 드시게요? 한눈에도 불어 보이는 짜장면을 내려다보며 내가 말을 돌렸다. 오늘 날씨가 어때요? 날씨는 왜 물어보느냐고 배달원이 되물었다. 갑자기 그에게 근사한 대답을 해주고 싶어졌다. 고민하다가 오래전에 읽은 소설 제목이 떠올랐다. 왜냐면 오늘 죽기로 결심했으니까요. 그에 배달원이 손뼉을 쳤다. 언젠가 내 대답과 비슷한 제목의 소설책을 본 적이 있다고 했다. 내가 눈을 가늘게 뜨자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래봬도 왕년에 문학청년이었다고요. 이번엔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스물다섯 살이죠? 소설 속 여주인공의 나이가 스물다섯이었다. 나는 그에게 왼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대답했다. 이만큼 더하세요. 그는 짜장면을 비벼 주겠다며 그릇을 싼 랩을 뜯어냈다. 그런데 왜 죽기로 결심했는데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누군가가 죽을 때마다 배꼽이 간지러웠다. 툭 튀어나온 내 참외배꼽 주위로 수많은 손가락들이 꿈틀대는 것 같았다. 어지간해서 참을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깔깔깔! 하고 웃을 때도 있었고, 입 꼬리가 바짝 올라간 미소를 지을 때도 있었다. 유쾌한 버릇은 아니었다. 이 버릇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내 곁을 떠났다. 잘 다니던 회사까지 그만둬야만 했다. 직장 동료의 모친상을 알리는 문자 메시지를 보고 웃어버렸던 것이다. 깔깔깔! 하필 옆에 있던 상사가 어이없어 했다. 자네는 이게 우습나? 그제야 슬픈 일이라며 더듬대며 변명했지만, 얼굴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나에 대한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그러면서 직장 내의 은근한 따돌림이 노골적으로 변하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회사를 나오게 되었다. 이런 나를 위로해 주던 사람은 오직 M뿐이었다. 유일하게 남은 친구였다. 너 진짜 재미있는 애구나. 그녀는 나의 고민을 농담처럼 받아들여 줬다. 그 점이 좋았다. 이런 사람이라면 오래도록 내 곁에 남아 줄 수도 있겠지. 그러나 M 역시 다른 사람들과 같았다. 농담과도 같던 남의 일이 내 일로 다가오면 절대 웃을 수 없는 건 당연했으니까.
    그러니 죽어야 되지 않겠어요? 어느덧 배달원과 나는 마주 보고 앉아서 짜장면을 한 그릇씩 차지하고 먹고 있었다. 배달원은 마지막 남은 단무지를 씹으며 대답했다. 웃을 수도 있죠, 뭐. 이어서 사장인 자신이 주문도 받고, 요리도 하고, 배달까지 하게 된 사연을 늘어놓았다. 원래 주문을 받던 종업원은 배달원의 장남이었다. 장남은 술 취한 손님이 밀치는 바람에 식탁에 머리를 세게 부딪쳐 죽었다. 겁이 난 배달원은 형의 뒤를 이어서 종업원이 되겠다던 둘째 아들을 말렸다. 주문은 내가 받을 테니 너는 배달이나 해라. 그러나 둘째 아들은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을 하던 중 고등학생 폭주족들과 시비가 붙어 교통사고를 당했다. 죽지는 않았지만 아직까지도 깨어나지 못했다. 이러다 전부 끝장나 버리면 어떡하지? 무서워진 그는 요리사에게 3개월 치 월급을 주어 떠나보냈다. 사람 인생 끝나는 게 얼마나 쉬운 일이던지, 나중엔 웃음만 나오더라고요. 말과 달리 배달원은 코를 크게 훌쩍였다. 미안해요, 양파가 매워서요. 하지만 그는 짜장면을 먹는 내내 양파는 손도 대지 않았다. 나는 그가 민망해하지 않도록 남아 있는 양파 조각을 모두 먹어치워 버렸다.
    짜장면과 탕수육을 남김없이 먹고 나서야 배달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식 값을 물었지만 그가 고개를 저었다. 곧 죽을 사람에게 돈 받으면 찝찝해서 못 살아요. 그는 우리 집을 나서기 전에 조언 아닌 조언도 남겼다.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대요. 부디 많이 먹어 둬요, 이왕이면 때깔 좋은 귀신이 더 좋지 않겠어요? 일리 있는 말이라 그러겠다고 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자마자 이혼을 했다. 나를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은 날은 치매를 앓던 외할머니가 가출한 날이기도 했다. 몇 년 동안 기다려 온 소식을 들은 어머니가 곧장 병원 공중전화로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목소리 둘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경사예요! 큰일 났어! 두 사람은 서로의 말을 한 번에 알아듣지 못했다. 두 사람은 다시 소리쳤다. 경사라고요! 큰일 났다고! 자꾸만 ‘경사’라는 단어와 ‘큰일’이라는 단어가 겹쳐져 알 수 없는 단어로 들려왔다. 어긋나던 대화는 아버지가 재빨리 틈을 타 말하면서 끝이 났다. 장모님 말이야, 가출하셨대! 어머니가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야, 왜 그걸 이제야 말해요? 전화를 끊은 아버지가 투덜댔다. 기다리지 않고 먼저 달려든 게 누군데? 진이 빠져버린 아버지는 깜빡 낮잠이 들었다. 헐레벌떡 집에 돌아온 어머니는 낮잠을 자는 아버지의 코를 비틀어버렸다. 당신 지금 잠이 와요? 허겁지겁 일어난 아버지가 서둘러 말을 돌렸다. 도대체 말도 없이 어딜 갔었어? 그제야 어머니는 잠시 잊고 있던 임신 소식을 알렸다. 환호성을 지르기 위해 아버지가 양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나도 이제 아빠가 된다! 그러나 외할머니가 가출 중임을 깨닫고 슬그머니 팔을 내렸다. 이것 참, 어쩌지? 두 사람은 마냥 기뻐할 수도, 그렇다고 슬퍼할 수도 없었다고 했다.
    유독 세상이 짓궂게 굴고 있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하필이면 어머니 뱃속에서 내가 무럭무럭 자라던 열 달이 바로 그런 때였다. 그때 몇 명이나 죽었더라? 아버지는 임신 열 달 동안 죽은 사람들의 숫자를 꼽아 보곤 했다. 딱 열 명이구나, 한 달에 한 명 꼴이네. 듣고 있던 나는 아버지의 말이 거짓말이기를 바랐다. 혹은 한껏 과장된 추억이거나. 말도 안 돼, 거짓말이죠? 하지만 아버지는 쓸데없이 단호했다. 그딴 재미없는 거짓말을 왜 하냐? 그러면서 말을 이었다. 하기야 그런 거짓말 같은 사실은 누구도 반가워하지 않겠지.
    죽은 열 명은 모두 친인척이었다. 그중 반은 이렇게 설명되었다. 그래, 그럴 때도 되었지. 나머지 반은 달랐다. 쯧쯧, 아깝게 되었네. 어머니는 배가 불러오는 가운데 열 번의 장례식장에 꼬박꼬박 참석했다. 임신 6개월 땐 시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렀다. 아이고, 아버님! 손수건으로 연신 눈물을 찍어내던 어머니는 별안간 걱정이 되었다. 이러다 애가 울상으로 태어나면 어떡하지? 딸이든 아들이든 우는 얼굴로 태어나면 평생 복이 달아날까 봐 염려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알고 지내던 사람들의 장례식장을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울지 않을 수도 없었다. 주변의 눈치도 있었고 무엇보다 눈물이 많은 여자였기 때문이다. 별수 없이 그녀는 장례식에 갈 때마다 남들 몰래 자신의 배꼽 주변을 손가락으로 간질여댔다. 깔깔깔! 눈물만큼 웃음이 많은 어머니가 숨을 죽여 웃었다. 그녀는 자신의 웃음이 탯줄을 타고 뱃속의 내게로 전해지길 바랐다. 신통하게도 그때마다 나는 응답이라도 하듯이 어머니의 배를 찼다고 했다. 훗날 나는 따져 물었다. 그럼 이 버릇은 다 어머니 때문이었군요? 그러나 어머니는 울상이 아닌 걸 다행으로 알라며 딱 잘랐다.
    열 번째 장례식은 바로 외할머니의 장례식이었다. 외할머니는 내가 태어나던 날에 바닷가 근처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그날 어머니는 출산예정일이 지났는데도 기미가 없어서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그러다 외할머니 소식을 들었다. 아이고, 우리 엄마! 동시에 기다리던 양수가 터졌다. 어머니는 진통 내내 외할머니의 이름을 부르다가 나를 낳았다. 간호사가 내 등을 두드리는 걸 보면서 어머니는 울었다. 가여운 엄마, 혼자서 얼마나 무서웠을까? 그러던 그녀가 울음을 멈춘 것은 나 때문이었다. 희한하게도 나는 이물질을 토하자마자 여느 아기들처럼 울지 않고 웃었던 것이다. 지금 아기가 웃는 거예요? 어머니의 물음에 간호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여전히 웃음소리를 내는 나를 어머니에게 안겨 줬다. 아이고, 속없는 것! 어머니는 나를 끌어안으며 그렇게 말했지만, 정말 속이 없었던 건 곁에 선 아버지였다. 이제는 웃을 일만 남았어, 그렇지? 하지만 열 번의 장례를 치르면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너무 지쳐버렸다. 부부에겐 지난 열 달이 십 년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두 사람은 아기를 키우며 살아갈 기력이 그리고 자신이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이것 참, 어쩌지? 그들은 이마를 맞대고 고민하다가 결국 이혼을 결정했다.

 

    낡은 중고차는 속도를 낼 때마다 이상한 소리를 냈다. 함께 죽기에 안성맞춤이네. 면허를 따고 나서 처음 해보는 운전은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평소에 부지런히 해둘걸. 아쉬운 마음이 들어 입맛을 다시다가 동네 속옷가게가 보여 그 앞에 주차를 했다. 가게로 들어서자 점원이 나를 위아래로 몇 번 훑어보더니 자신 있게 외쳤다. 브라는 75A, 팬티는 85! 정확한 눈썰미에 나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짝짝짝. 대단해요! 브라랑 팬티를 팔아서 밥을 먹은 지 20년이 넘는다는 그녀에게 가게에서 가장 좋은 속옷을 달라고 했다. 그러자 점원이 눈을 찡긋해 보였다. 아하, 남자 친구? 나도 눈을 찡긋해 보였다. 구조대원을 위해서 준비하려고요. 점원은 내 말을 남자 친구의 직업으로 알아들었다. 그녀가 포장해 준 속옷 세트를 들고 가게를 나서자 등 뒤에서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즐거운 시간 보내요!
    차 안으로 들어와 속옷 포장을 뜯었다. 레이스가 달린 주홍색 속옷 세트. 세련되지 않은 디자인에 후회가 되었다. 그냥 원래 있던 것들 중 깨끗한 걸로 골라 입을걸. 아까 배달원을 배웅하고 나서 인터넷을 검색했다. 어떤 방법으로 죽는 게 좋을까? 자살을 할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였다. 나는 검색창에 문장을 쳐서 검색해 봤다. 아프지 않고 쉽게 죽을 수 있는 방법은 뭐가 있나요? 2009년에 나와 똑같은 질문을 한 사람의 글을 발견했다. 그 글에 달린 댓글은 2년 후인 2011년도에 작성된 것이었다. 이 병신아, 그런 게 어디 있냐? 검색을 하다가 우연히 시 한 구절도 읽게 되었다. 죽고 난 뒤에 팬티가 깨끗한지 아닌지에 왜 신경이 쓰이는지. 새삼 죽고 난 뒤의 팬티가 중요하게 다가왔다. 이건 죽어도 신경 쓰일 거야! 반드시 새로 산 속옷을 입고 죽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자살의 연관 검색어를 보다가 ‘하직’이란 단어가 있어서 국어사전으로 의미를 찾아봤다. 먼 길을 떠날 때 웃어른께 작별을 고하는 것. 예의바르게 자살을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서 중고차를 헐값에 구입했다. 고향에 가봐야겠어. 그곳엔 아직 나의 아버지들이나 어머니들이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출발하면 오늘이 가기 전에 그들에게 인사를 한 뒤 죽을 수 있을 것이다.
    목을 매는 방법과 차를 몰고 바다로 돌진하는 방법 중 후자를 선택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후자의 방법으로 죽은 사람의 기사를 읽었는데 거기서 밝힌 유서 내용이 마음에 들었다. 미안해,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어. 만약 유서를 쓴다면 꼭 쓰고 싶은 문장이었다. 또 다른 이유는 M 때문이었다. 2주일 전과 같은 일을 두 번이나 겪게 할 순 없었다. 그날은 M의 생일이었다. M과 그녀의 남자 친구와 나 셋이 모여 생일파티를 하기로 했었다. 그런데 약속시간이 지나도 M의 남자 친구는 오지 않았다. 나와 M이 번갈아가며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아무래도 나가 봐야겠다며 옷을 입는 M에게 전화가 왔다. 경찰서였다. M의 남자 친구는 유서도 없이 목을 맸다고 했다. 전화를 끊고 난 M이 내게 말했다. 죽어버렸대. 나는 그녀를 힘껏 안아 주고 싶었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웃고 말았다. 변함없이. 깔깔깔! M은 믿을 수 없어 했다. 너, 이런 게 우습니? 그녀에게 이렇게 대답하고 싶었다. 아니야, 우습지 않다는 걸 너도 잘 알잖아. 하지만 소용없는 변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주홍색 속옷 세트를 조수석에 던져뒀다. 여기서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모든 것은 오늘이 지나기 전에 끝내야만 했다. 지금부터 부지런히 달리면 늦은 오후에는 고향에 도착할 수 있겠지. 중고차는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동네를 벗어나기 위해 국도로 나아갔다.

 

    나는 ‘커트 리’를 친아버지로 여기고 자랐다. 그는 어머니의 첫 번째 재혼 상대이자 두 번째 남편이었다. 내게는 두 번째 아버지였다. 어머니는 알려줄 필요성을 못 느꼈다고 했다. 그야 자기는 늘 널 친자식처럼 아껴 줬었으니까.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어머니는 커트 리를 ‘자기’라고 불렀다. 잘 다듬어진 영화배우처럼 생긴 커트 리가 수많은 여자들 중에 자신을 택해 준 것이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특별했던 일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커트 리’는 어머니가 기억하는 ‘자기’와 거리가 있었다. 그 자식은 천하의 멍청이였어요.
    보기 좋은 외모만큼 그가 가지고 있던 꿈은 남달랐다. 남다른 꿈을 가졌으면서도 정작 하는 일 없이 인생을 허비했다. 그는 스스로를 ‘커트 리’라고 불렀다. 당시 유행했던 그룹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에서 따온 별명이었다. 커트 리는 날마다 기타를 치다가 울면서 담배를 피워댔다. 아, 세상이 나를 너무 몰라줘. 어머니는 울고 있는 그에게 종종 젖가슴을 물려줬다. 착하다, 우리 자기. 동네에서는 어머니가 자식만 둘을 키운다며 수군댔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들과 놀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바닥에 쓰러져 울고 있는 커트 리를 봤다. 그는 땅을 치며 통곡했다. 어떻게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날 수가 있어! 그의 영웅이었던 커트 코베인이 죽었다고 했다. 그의 말을 듣고 나는 자연스럽게 웃었다. 깔깔깔! 그러자 커트 리가 펄쩍펄쩍 뛰며 내 뺨을 때렸다. 이런 괴물, 그게 우습냐? 내 씨가 아니라서 망정이지! 그렇게 내 출생의 비밀은 시시하게 밝혀졌다.
    어머니는 친아버지에게로 나를 잠시 보냈다. 내 얼굴만 보면 미치려고 했던 커트 리를 안정시키기 위해선 어쩔 수가 없었다. 그 사이 아버지는 필리핀 여자와 재혼했다. 그는 난생처음 만난 딸보다도 커트 리에게만 관심을 가졌다. 어떤 놈팡이든? 커트 리에게 쌓인 게 많았던 터라 기분이 안 좋은 나는 신이 나서 흉을 봤다. 그렇게 멍청한 녀석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걸요? 기껏 대답해 주었는데 느닷없이 아버지가 엄격해졌다. 어른을 그런 식으로 욕하면 못 써. 그제야 나는 아버지가 굉장히 치사한 사람임을 알았다.
    아버지의 아내인 필리핀 여자를 나는 바나나 어머니라고 부르곤 했다. 다정한 사람이었지만 이유도 없이 그녀를 싫어했다. 같은 동네 아이들이 원숭이 흉내를 내거나 바나나를 까먹는 시늉을 하면서 놀렸기 때문이었다. 끼끼끼, 너는 원숭이 여자랑 살지! 하루는 바나나 어머니가 시장에서 산 필리핀산 바나나를 간식으로 준 적이 있었다. 맛있어, 많이많이 먹어. 나는 그녀 앞에서 바나나 한 송이를 발로 밟고 소리쳤다. 끼끼끼! 그 벌로 아버지는 필리핀산 바나나를 세 송이 사서 무릎을 꿇고 앉은 내 앞에 늘어놓았다. 먹어라, 다 먹지 않으면 때릴 거다. 오기가 난 나는 기어코 그 바나나들을 물 한 잔 없이 꾸역꾸역 삼켰다. 결국 급체를 해서 응급실에 실려 가는 내 곁을 지킨 건 아버지가 아니라 바나나 어머니였다. 그녀는 응급실 침대 위에 누워 끅끅대며 우는 나의 가슴을 토닥여 줬다. 죽어, 죽어. 사실 그녀가 말하고 싶은 것은 죽지 마, 죽지 마였다. 서툰 한국말에도 그녀의 진심을 알았지만, 나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해서 그 진심을 쏙 빼놓고 일러바쳤다.
    다음날 어머니가 한걸음에 달려왔다. 그녀 곁에는 커트 리가 아닌 세 번째 아버지가 서 있었다. 내가 커트 리는 어떻게 되었냐고 묻자 어머니는 몸서리쳤다. 자아인지 뭔지 찾으러 세계 여행을 떠나야겠다고 하더라. 그녀는 이게 다 커트 코베인 때문이라며 툴툴거렸다. 망할 놈이 왜 그렇게 일찍 죽어서는! 그러자 내 입술 사이로 풋! 하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내 얼른 세 번째 아버지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그는 마냥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다시 어머니와 살게 되었다. 돌아오기 전에 아버지에게 인사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와 바나나 어머니는 안방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았다. 세 번째 아버지의 가족은 아흔 살이 넘은 증조할머니가 전부였다. 쪼글쪼글한 증조할머니가 신기해서 가끔씩 그녀의 팔을 손가락으로 쿡 찔러 보곤 했다. 그러면 증조할머니는 화들짝 놀라는 바람에 반쯤 빠져나온 틀니를 집어넣곤 했다. 아이고, 난 또 저승사잔 줄 알았네! 그녀의 소원은 세계에서 가장 장수한 사람으로 기네스북에 기록되는 것이었다. 얼마나 멋진 업적이니? 하루 종일 그녀가 하는 일은 저승사자가 자신을 데리러 오는지 감시하는 것이었다. 오면 두들겨 패서 내쫓아야지. 앙상한 주먹을 불끈 쥐는 증조할머니를 위해 세 번째 아버지가 가벼운 지팡이를 마련해 줬다. 올 거 같으면 이걸로 패버리세요. 그러다 도리어 증조할머니가 다칠까 봐 어머니가 걱정했다. 하지만 세 번째 아버지는 손을 내저었다. 지금까지 사실 수 있었던 이유인데, 뭐. 그는 일찌감치 죽어버린 부모를 대신하여 그를 돌봐준 증조할머니를 누구보다도 아꼈다.
    공동묘지 관리인인 세 번째 아버지는 야근을 할 때마다 나를 데리고 갔다. 어른이라도 한밤중의 묘지는 무섭다고 했다. 그러나 나와 함께라면 전혀 무섭지 않다고 했다. 너는 죽음 앞에서도 웃을 수 있는 애니까. 나는 훔쳐갈 것도 없어 보이는 무덤들을 지키는 이유가 궁금했다. 세 번째 아버지는 음산하게 대답해 줬다. 사람들은 우리가 감히 상상하지 못했던 것들을 훔치기도 하거든. 그는 밤새 무덤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어린아이의 신장만 한 잡초들을 뽑았다. 그러면서 무덤 하나하나마다 담긴 사연들을 이야기해 줬다. 깔깔깔! 나는 즐겁게 웃다가도, 급하게 눈치를 살피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한번은 그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이런 내가 무섭지 않아요? 무덤의 잡초를 세게 뽑는 바람에 망가져 버린 무덤 위에 흙을 덮으며 그가 말했다. 그저 단지 웃을 뿐이잖아? 그는 누구나 꼭 울어야 하는 법은 없다는 말도 덧붙이면서, 흙이 묻은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예상대로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고향에 다다랐다. 다들 살아 있으려나. 나는 내가 기억하는 주소가 맞는가보다는 다들 죽진 않았는지 그게 더 걱정되었다. 확실하게 알고 있는 건 십대의 마지막까지 함께했던 아버지의 행방이었다. 몇 년 전 아버지는 심장마비로 살아남지 못했다. 바나나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잠을 자던 도중에 벌어졌다.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에 놀란 바나나 어머니는 황급히 재산을 챙겨 자기 나라로 돌아가 버렸다. 아버지 소식을 알려준 고모가 했던 하소연을 기억한다. 어쩜 너무하지 않니? 그러나 내가 아는 바나나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지극했다. 그녀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서 조금은 기뻐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는 못했다.
    고향으로 들어가는 톨게이트를 얼마 지나지 않아 오래된 휴게소가 보였다. 오전에 먹은 짜장면이 짰던 모양인지 갈증이 나서 잠시 들르기로 했다. 휴게소 주차장에 주차되어 있는 차는 한 대도 없었다. 차에서 내리고 보니, 주차장 한 귀퉁이에 누렇게 묵은 천막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천막 아래에선 몇몇 사람들이 중얼대고 있었다. 그 옆을 지나는데 어디선가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세상은 왜 이렇게 나를 몰라주는지! 들려오는 저 문장 역시 낯설지가 않았다. 설마 그 남자일까? 살짝 몸을 숙여 천막 안을 들여다보니 아니나 다를까 커트 리가 보였다.
    커트 리는 천 같은 것을 몸에 두른 채 양팔을 벌리고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서 있었다. 그의 앞에는 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앉은 노인들이 두 손을 모으며 몸을 앞뒤로 흔들어댔다. 커트 리는 눈을 뜨더니 사람들 사이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을 불쑥 들이댔다. 난 여러분들의 눈을 통해 영혼을 볼 수 있습니다. 차례차례 얼굴을 들이대던 그가 이내 천막 입구에 서 있는 내게로 다가왔다. 바로 이렇게 상처 받은 영혼을 말입니다! 나는 그에게 활짝 웃어 보였다. 살아 있었네요, 커트 리? 그는 바짝 움츠러들어 되물었다. 누구세요? 그러다 아하! 하고 감탄하며 양손을 내 어깨 위에 올렸다.
    그와 나는 휴게소 슈퍼마켓 옆에 있는 파라솔 아래 앉았다. 그는 입고 있는 옷만큼이나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을 넘기면서 담뱃갑을 내밀었다. 한 대 피울래? 별 말 없이 담배 한 대를 꺼내서 입에 물었다. 죽기 전에 담배 한 대를 피워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생각보다 담배 연기는 쉽게 빨아졌다. 나는 거드름을 피우면서 담배를 피웠다. 그 모습을 빤히 지켜보던 커트 리가 피식 웃었다. 너 담배 처음 피우지? 우리는 마주 본 채 웃음을 터뜨렸다.
    나이가 들었어도 여전하시네요? 커트 리는 중후한 영화배우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얼굴이 먹고 사는 비결이라고 말했다. 이런 얼굴을 하면 믿고 따라 주는 사람이 많은 법이거든. 그는 자아를 찾아 세계 여행을 떠났다가 인도에서 큰 깨달음을 얻고 돌아왔다고 했다. 어째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람들은 죄다 인도를 들먹거리는 걸까. 여행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전국을 떠돌면서 설교를 하고 다닌다고도 했다. 설교가 아니라 선교겠죠. 비슷해 보여도 의미가 다르다고 지적하자 그가 담배 연기를 내 쪽으로 뿜었다. 너 여전히 재수 없구나. 콜록콜록! 나는 사정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마찬가지거든요! 평생을 알고 지내도 결코 가까워질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내겐 분명 커트 리가 그런 사람이다.
    담배 한 대를 피우고 나서 다시 차에 올라탔다. 열려 있는 운전석 쪽 창문을 통해 나를 보던 커트 리가 뒤늦게 물었다. 그런데 여긴 왜 온 거냐? 나는 죽기로 한 결심과 그 이유를 간단히 밝혔다. 묵묵히 듣고만 있던 그가 볼을 긁적였다. 그때는 미안했어, 커트 코베인이 죽은 건 내 인생에서 가장 끔찍한 일이었으니깐 말이지.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다가 말했다. 내게 누군가의 죽음은 절대 끔찍한 일이 아니에요, 그저 우스운 일일 뿐이죠. 커트 리가 담배를 또 한 대 물었다. 하지만 너의 죽음은 또 다른 누군가에게 끔찍한 일이 되겠지. 그러나 그런 사람은 내게 그리고 이 세상에 없다고 대답했다.
커트 리는 시야에서 내 차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 줬다.

 

    저마다의 서글픈 인생 속에서 절대로 잃고 싶지 않은 한 가지들은 있다. 내게는 세 번째 아버지가 그 한 가지였다. 누군가가 죽었을 때 웃는 나를 무섭지 않다고 해줬던 최초이자 마지막 사람. 그래서 나는 완벽한 딸이 되고 싶었다. 무엇이든지 열심히 했다. 덕분에 반에서 상을 가장 많이 타는 학생이 되었다. 시상식 땐 항상 그를 초대했다. 이 모든 영광을 나의 유일한 아버지에게로 돌립니다! 그렇게 수상소감을 말하고 나면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기립박수를 쳐줬다. 그의 박수는 사람들이 일어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네가 최고다! 그때마다 나는 필사적으로 기도를 하곤 했다. 제발,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그렇게만 된다면 마냥 비웃음거리로 여겨질 것만 같은 내 삶도 그럭저럭 견뎌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머니와 세 번째 아버지의 다툼이 눈에 띄게 잦아진 것은 내가 중학교 1학년이 되고 나서였다. 두 사람이 그렇게 싸운 이유를 아직도 모르겠다. 부부간의 일은 부부만 안다고들 하니까. 어쨌거나 안방에서 들려오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나는 안절부절못했다. 저러다 두 사람이 헤어지면 어떡하지?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면 증조할머니가 투덜댔다. 아, 겨우 잠들었는데. 그녀는 나와 같은 방을 썼다. 딱 백 살이 된 증조할머니는 동네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다. 동네 이장은 여기저기에 증조할머니를 마을의 자랑거리로 소문내고 다녔다. 우리 마을이 국내 최고의 장수마을이지! 놀랍게도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찾아들었다. 오래 사는 거보다 좋은 거 있음 나와 보라고 해! 이장은 몰려든 타지 사람들에게 각종 채소와 심지어는 동네 개울물까지 퍼서 팔아댔다.
    태평하게 드르렁거리며 잠을 자고 있는 증조할머니를 노려보다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당시 나는 세계 가정의 날을 기념하여 만들어진 학교 대회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참이었다. 각 반의 대표가 학교로 가족 중 한 사람을 데리고 와서 소개한 뒤 이야기를 발표하는 대회였다. 우리 반 담임은 항상 일등만 하는 나를 대표로 추천했다. 일등이면 큰 트로피를 준대. 담임은 다음 인사발령 때 가산점이 붙는다는 설명은 굳이 하지 않았다. 몇 날을 궁리해 온 나는 그 행사에 증조할머니를 데려가기로 마음먹었다. 어머니나 세 번째 아버지에게 부탁하기에는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게다가 백 살이 된 증조할머니라니. 이보다 더 훌륭할 순 없을 거라며 자신만만했다.
    대회 전 날에도 어머니와 세 번째 아버지는 싸웠다. 그러나 나는 단잠을 잘 수 있었다. 대회에서 일등을 한 내가 싸우는 두 사람에게 트로피를 내밀자 서로 얼싸안고 좋아하는 꿈도 꿨다. 나는 새벽에 일어나 살금살금 학교 갈 준비를 했다. 어머니와 세 번째 아버지가 알면 반대할지도 몰라 몰래 집을 빠져나가야 했다. 나는 대문 옆에 놓인 구루마를 끌어다 방문 앞에 세워 뒀다. 구루마는 세 번째 아버지가 묘지 관리를 할 때 쓰던 것이었다. 거동이 불편한 증조할머니를 걷게 할 수도, 그렇다고 업을 수도 없어서 생각해 낸 방법이었다.
    준비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간 나는 조심스럽게 증조할머니를 깨웠다. 할머니, 일어나요. 갈 데가 있어요. 그때 눈도 못 뜬 증조할머니가 곁에 두고 자는 지팡이로 내 머리를 때렸다. 이놈아, 드디어 데리러 온 거냐? 죽어도 못 간다, 이놈! 나를 저승사자로 안 증조할머니가 지팡이를 거칠게 흔들어댔다.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전 천사예요, 잠깐 세상 구경 좀 시켜 드릴게요. 비로소 증조할머니는 안심했다. 암, 천사면 괜찮아. 겨우 그녀를 부축해 구루마에 태웠다. 춥지 않도록 담요도 둘러 줬다. 이른 시간부터 서둘렀지만 아침의 밝기가 찾아들기 시작해서야 집을 나설 수 있었다.
    행사가 열리는 강당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구루마에 증조할머니를 태운 나를 보고 여기저기서 쑥덕댔다. 하지만 나는 의기양양했다. 증조할머니는 줄곧 졸기만 했다. 내가 발표하기 바로 전 순서는 11남매를 둔 남학생이었다. 형제가 많아서 행복합니다! 남학생과 11남매가 우르르 무대 위에서 내려오자 내 차례가 되었다. 무대 중앙으로 구루마를 끌고 발표를 시작한 나의 첫 마디는 이랬다. 증조할머니의 소원은 세계에서 가장 장수한 사람으로 기록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문장을 말할 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저는 증조할머니의 기네스 기록에 이렇게도 기록되길 바랍니다. 세계에서 가장 장수한 사람이자 가장 행복했던 사람으로도 말이에요! 그날은 세 번째 아버지 없이도 기립박수를 받을 수 있었다.
    나는 일등을 차지해서 커다란 트로피를 받았다. 그 트로피는 증조할머니에게 줬다. 앞으론 지팡이 대신 이걸 쓰세요. 그녀는 반짝거리는 트로피를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아이, 예쁘다.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제법 무게가 나가는 구루마를 끌면서도 힘이 들지 않았다. 중간 중간 증조할머니에게 묻기도 했다. 모두들 좋아하겠죠? 증조할머니에게선 대답이 없었지만, 나는 계속해서 종알댔다. 세 번째 아버지에게 아버지 없이도 기립박수를 받은 것도 말해야지! 그런데 집 대문 앞에 도착해서 초인종을 누르려던 순간, 증조할머니의 품에서 트로피가 힘없이 떨어졌다. 땅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던 트로피는 내 발 근처에서 멈췄다. 할머니? 이상하고 불길한 기분이 들어 구루마 앞쪽으로 달려갔다. 설마, 설마. 할머니? 그러나 증조할머니의 몸은 푹 고꾸라져 있었다. 재빨리 그녀의 몸을 세워 코끝에 손가락을 대봤다. 잠깐 잠이 든 거라고, 그런 거라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증조할머니는 숨을 쉬지 않았다. 하필이면 죽어버린 것이다. 나 때문에 그렇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당황해하던 중에 어김없이 배꼽이 간질거렸다. 닥쳐, 닥치란 말이야! 나는 주먹으로 사정없이 배를 때렸다. 퍽퍽퍽퍽퍽퍽! 하지만 역시나 웃음이 났다. 깔깔깔깔깔깔! 대문 안쪽에서 내 웃음소리를 들은 세 번째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녀왔구나? 아, 혹시 네가 내 구루마를 가지고 갔니? 철컥철컥. 대문이 열리려고 했다. 세 번째 아버지 곁에는 어머니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종일 어머님이 보이지 않네요? 열리려는 대문과 구루마 위에 늘어져 있는 증조할머니. 번갈아 보던 나는 이윽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세 번째 아버지는 나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세상에 그보다 더 무서운 건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달리고 또 달렸다. 그 와중에도 웃음은 계속되었다.
나는 그렇게 아버지 집으로 갔다. 그리고 다시는 어머니와 세 번째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들도 나를 찾지 않았다.

 

    세 번째 아버지와 어머니 집에 도착했을 땐 날이 어둑어둑해졌다. 밤이 오기 전에 서둘러야 했다. 너무 어두우면 부두와 바다 사이의 간격을 파악하지 못해 차가 어중간하게 걸쳐질 수 있다고 들었다. 한 번에 죽지 못하면 다음번엔 죽을 용기를 내지 못할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또다시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막막한 삶 속으로 돌아가야 된다. 그건 절대 싫어. 나는 중얼거리면서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집 근처를 둘러봤다.
    집은 버려진 느낌이 들지 않았다. 화단이 정돈되어 있었고, 집 옆에 자리 잡은 텃밭엔 옥수수가 자라나고 있었다. 지금 이곳에 사는 건 누구일까. 여전히 세 번째 아버지일까. 녹 슨 대문이 열려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구루마였다. 이게 아직도 있다니! 구루마를 보자 코끝이 찡했다. 아버지 집으로 돌아간 뒤부터는 이 집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때 내가 급작스럽게 들이닥쳤을 때 아버지는 별로 놀란 기색 없이 한 마디 했다. 네 어머니와 통화했다. 단지 그뿐이었다. 그 후론 죽 아버지와 바나나 어머니와 살았었다.
    구루마를 어루만지다가 이 위에서 죽어버린 증조할머니를 떠올렸다. 죄송해요. 제가 나빴어요. 싱글벙글 웃으면서 때 지난 사과를 했다. 그 때문에 등 뒤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당신 누구야? 새침한 목소리가 묻자 뒤를 돌아봤다. 그곳엔 나보다 한 뼘 정도 작은 여학생이 교복을 입고 서 있었다. 이 집에 사는 아이구나 싶었다. 불쑥 들어와서 미안하다고 하려는데, 여학생이 자신의 왼손 검지로 나를 가리켰다. 나 당신 누군지 알아요! 그러나 나는 여학생을 알지 못했다.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얼굴이었다. 언니잖아, 당신? 여학생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 나는 너보다 훨씬 언니지. 내가 감을 못 잡고 있자 여학생이 답답해했다. 나는 언니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언니는 내 이야기를 전혀 듣지 못했어요? 이제 답답해진 쪽은 나였다. 도대체 넌 누구니? 여학생은 나의 어머니와 세 번째 아버지의 이름을 또박또박 발음했다. 그리고 자신의 부모님이라고 했다.
    나도 모르게 입이 조금 벌어졌다. 피가 반만 섞였다고는 하지만 나랑 닮은 구석이 보이지 않는데 느닷없이 동생이라니. 하기야 그 뒤로 시간이 많이 흘렀다. 내게 동생이 한두 명 정도는 있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왜 하지 못했던 걸까. 그렇지만 어머니와 세 번째 아버지의 자식이라니. 내가 정말로 되고 싶었던 자리에 들어서 있는 여학생이 순간 묘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아, 더 이상은 모르겠어. 머리가 아파진 나는 처마 아래의 마루로 비틀비틀 걸어가 앉았다. 잠자코 보고 있던 여학생이 쪼르르 달려와 내 곁에 앉았다.
    우리는 서로 잠시 동안 침묵했다. 곁에서 발을 구르며 나를 힐끔힐끔 살피던 여학생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라면 먹을 건데, 같이 먹을래요? 먹고 싶지 않다고 대답하고 싶었다. 그러나 진작 짜장면을 소화시킨 배가 꼬르륵 하고 소리를 냈다. 창피해 죽겠네. 나는 총총거리며 부엌으로 향하는 여학생을 차마 바라보지 못하고 마루를 굴러다녔다.
    여학생이 끓인 라면은 끝내주게 맛있었다. 이런 라면은 오랜만에 먹어 봐. 후루룩 면발을 삼키는 내게 여학생이 씩 웃어 보였다. 아버지한테 배운 솜씨예요. 그러고 보니 어렸을 때 먹었던 세 번째 아버지의 라면 맛과 흡사했다. 왼손으로 젓가락을 쥐고 라면을 먹는 여학생의 모습에 세 번째 아버지의 모습이 겹쳐지는 것 같았다. 나는 라면 국물을 후후 불어 마셔 가며 물었다. 내가 언닌 줄은 어떻게 알았어? 여학생은 냄비 안에 식은 밥을 말며 말했다. 아버지가 그랬어요, 언젠가 어떤 여자가 찾아와 구루마를 보고 웃으면 그건 제 언니라고요. 그건 너무 막연하잖아. 하지만 세 번째 아버지다운 말이라 어쩐지 조금 웃음이 났다.
    여학생의 땀이 밴 이마를 보면서 나는 털어놨다. 들었을지 모르겠지만, 증조할머니는 중학교 때 내가 죽였어. 여학생은 눈을 껌뻑였다. 증조할머닌 한 달 전에 돌아가셨는데? 내가 도망간 날, 증조할머니는 구루마 위에서 막 자고 일어난 사람처럼 기지개를 켜며 깨어났다고 했다. 에구, 깜빡 잠들었네. 그녀는 내가 버리고 간 트로피를 소중히 품에 안고 자랑을 했다. 이거 천사가 준 거야, 오늘 나 세상 구경 시켜 준. 여학생의 말을 듣고 나는 황당하고 허무해졌다. 이럴 수가, 분명 숨을 쉬지 않았는데? 여학생이 설명해 줬다. 무호흡증 같은 게 있으셨어요. 그와 비슷한 일들이 반복되다가 한 달 전에는 완전히 숨이 멎어버렸다는 말도. 그럼 나는 괜히 도망갔네? 얼 빠진 목소리로 말을 내뱉자 여학생이 웃었다.
    깨끗하게 라면 냄비를 비우고 나자 여학생은 삶은 옥수수를 바구니째 내왔다. 내가 키운 거예요. 옥수수를 씹으며 여학생은 그동안 몰랐던 소식을 전해 줬다. 5년 전부터 세 번째 아버지는 아팠다고 했다. 간병을 하던 어머니마저 뇌출혈로 죽자, 그는 여학생과 계속적으로 살아남은 증조할머니를 걱정했다. 너 혼자 살아야겠구나. 방 안에 누운 채 그는 여학생에게 채소 심는 법과 세금과 통장을 관리하는 법, 증조할머니가 죽으면 도와줄 사람들의 연락처 등을 가르쳐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해줬다. 그래도 네 언니니까 말이다. 그래서 여학생은 나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고 했다. 내 배꼽에 대한 버릇까지도.
    옥수수에서 달콤한 향이 났다. 입안 한가득 베어 물면 스르륵 녹는 것 같았다. 문득 세 번째 아버지가 운동회 때 사준 솜사탕 맛이 떠올랐다. 여학생의 운동회 때도 세 번째 아버지는 솜사탕을 사줬겠지. 띠 동갑도 훌쩍 넘는 나이 차이에도 질투심이 피어오르는 것 같아 부끄러워졌다. 하지만 심통이 났다. 그래서 혼자 살고 있니? 여학생은 증조할머니가 죽은 후부터는 혼자서 밥을 먹고 학교에 다닌다고 했다. 괜찮니? 묻고 싶었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묻는 건 어쩐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니는 여기 왜 왔어요? 왠지 기대감에 차 있는 여학생의 목소리에 아차 싶었다. 혹시라도 헛된 마음을 가질지 몰라 일부러 확고하게 이야기했다. 나는 오늘 죽기로 결심했어. 왜냐고 묻는 여학생의 물음에 성실히 대답해 줬다. 손가락으로 옥수수 알갱이를 뜯어내던 여학생이 퉁퉁거리며 알갱이들을 마당으로 던졌다. 고작 그런 이유로요? 나에 대해 빤히 안다는 듯이 구는 여학생의 태도에 울컥 화가 났다. 고작이라니, 네가 고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거든? 내 반응에 여학생이 당황했다. 잘못했어요, 언니. 언니라는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도대체 내가 왜 너의 언니니? 네가 뭐든 나 너 오늘 처음 봤어. 풀이 죽은 여학생에게 미안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배웅을 하겠다며 여학생이 대문 밖에 나와 섰다. 여학생은 차로 돌진하기에 안성맞춤인 부두까지 가르쳐줬다. 적당한 때가 되면 신고할게요. 담담하게 말을 잇는 여학생이 기가 막혔다. 얘, 나 죽으러 가.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거 아니니? 여학생이 똑 부러지게 대답했다. 쉽게 생각하는 건 언니 아니에요? 왠지 흐뭇한 마음이 들어 운전석에서 손을 뻗어 여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너는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 나는 지갑을 뒤져 가지고 있던 현금을 몽땅 꺼냈다. 그리고 필요 없다고 하는 여학생에게 쥐어줬다.
    시동을 걸고 막 출발하려고 할 때, 여학생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조금은 기다리고 있었는데, 언니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거든요. 나는 고마워 대신 혼자서도 괜찮을 거야, 라고 했다. 눈꼬리가 바짝 올라간 여학생이 쏘아붙였다. 이제껏 잘해 왔거든요? 앞으로도 괜찮을 거예요! 그럴 수 있을 거라며 내가 고개를 끄덕여 줬다. 그리고 차를 출발시켰다.

 

    부두는 조용했다. 인적도 없었다. 나는 내 자신이 죽어도 웃게 될까. 저 바다에서 건져 올렸을 때 과연 나는 웃고 있을까. 부디 나의 죽음에도 웃을 수 있는 얼굴이길 바랐다. 치사하게 남의 죽음에만 웃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나를 아는 모두가 알게 되었으면 좋겠다. 아, 걘 원래 그랬구나. 그 정도의 반응만 보여도 더없이 기쁠 것 같다.
    아까 휴게소에서 갈아입지 못한 속옷을 갈아입었다. 원래 입고 있던 속옷은 꽁꽁 싸서 가방 안에 넣어두었다. 오늘 죽기 전에 해야만 했던 일들을 잘 마쳤는지 확인했다. 속옷 사기. 살짝 촌스러운 게 아쉬웠어. 작별 인사하기. 커트 리만 살아남아 있었네. 마지막으로 M에게 사과하기. 다른 누구보다도 M에게만은 거듭 용서를 구하고 싶었다. 나는 음성 메시지를 남겨 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전화를 걸어도 M은 받지 않을 테니까. 가방 안을 뒤져서 핸드폰을 찾았다. 그런데 부재 중 메시지가 여러 통 있었다. M이었다.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고 믿었던 M이 음성 메시지를 남겼다.
    첫 번째 메시지. 있잖아……. 그다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걸로 첫 번째 메시지가 끝났다. 두 번째 메시지. 정말로 말이야……. 이번 메시지도 마찬가지로 끝이 났다. 아, 뭐 하는 거야? 괜스레 신경질을 냈지만 메시지를 차근차근 확인할 때마다 가슴이 무겁게 뛰어댔다. M은 여섯 번째 메시지에서야 제대로 된 한 문장을 완성해 냈다. 너 정말로 죽어버린 건 아니지? 일곱 번째 메시지. 이미 죽어버렸으면 너, 내가 죽여 버릴 거야……. 나는 피식 웃었다. 나더러 어쩌라는 걸까. 여덟 번째 메시지. 너의 진심을 이해하지 못해서 미안해……. 아홉 번째 메시지. 결국 이해할 수는, 이해해 주지는 못하겠지……. 열 번째 메시지. 하지만 너는 내 진심을 알아주길. 죽으라는 말이 어떻게 내 진심이 될 수 있겠어. 이해해? 메시지는 거기서 끝이 났다.
    진심이 아니었구나. 핸드폰을 놓고 운전대를 잡았다. 분명 진심처럼 들렸는데, 진심이 아니라고 하다니. 어느새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나쁜 계집애. 어쩐지 철저하게 속아 넘어간 기분이 들었다. 그렇구나. 사실 어느 게 진심이고 어느 게 진심이 아닌지 남들은 관심이 없다. 진심은 그때그때 바뀌어버리는 치사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나는 고작 그 진심 때문에 오늘 죽기로 결심했던 것일까.
잠시 고민을 하던 나는 운전대를 힘껏 돌렸다.

 

    대문은 여전히 열려 있었다. 여학생은 내가 간 뒤로 바로 잠이 들었을까. 집은 불이 모두 꺼진 채였다. 어디 친구 집에라도 놀러갔나? 집 안을 살피며 기웃거리다가 어디선가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코를 팽 하고 푸는 소리도 들렸다. 집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뭐야, 혼자서도 괜찮다더니. 역시 어린애는 어린애야. 하지만 나도 코를 훌쩍였다. 날이 좀 쌀쌀한가. 멋쩍게 양팔을 감싸는 시늉을 해보였다.
    조심조심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마당 구석에 같은 모습으로 놓여 있는 구루마를 향해 다가갔다. 최대한 부드럽게 앉았는데도 불구하고 구루마 바퀴가 끼긱거리며 소음을 냈다. 그러자 어두운 집 안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더 커졌다. 그만 울어.
    내가 말하자 집 안에서 잔뜩 경직되어 날이 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나는 구루마에서 몸을 일으켜서 마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언니야. 언니가 왔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집 안의 불이 모두 켜졌다. 창호지를 바른 방문에 여학생의 그림자가 따뜻하게 비쳤다.

 

   * 오규원의 시, 「죽고 난 뒤의 팬티」의 한 구절이 인용되었음을 밝혀 둔다.

 

 

 

[작품 심사평]

< (선정평) [소설] 배꼽의 기원 >
 
    농담으로 슬픔을 감추려는 사람들이 있다. 이때의 농담을 자신의 고통을 정면으로 바라보기 힘들어서 취하는 태도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배꼽의 기원의 주인공은 누군가 죽을 때마다 배꼽이 간지러워진다. ‘나’는 어머니의 뱃속에 있던 열 달 동안 가까운 사람이 열 명이나 죽었고, 아버지는 세 명이나 되었고, 그리고 실수로 증조할머니를 죽였다고 생각한다. 나는 시종일관 농담을 한다. 자살을 하기 위해 예쁜 속옷으로 갈아입는 것까지 농담으로 들린다.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자살을 하겠다는 ‘나’를 대하는 주변 사람들의 태도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잘 가라고 따뜻하게 배웅을 한다. 나의 농담과 타인의 농담이 만났는데 이상하게 슬픔이 만들어진다. 눈물이 만들어진다. 누군가 죽을 때 배꼽이 간지러워지는 것처럼 자신이 죽을 때도 똑같이 웃음이 나길 바라는 주인공을 만난다면 나도 아마 잘 가라고, 자장면 한 그릇 사주고는 따뜻하게 배웅을 해줄 것만 같다.
    (윤성희)

 

===== 작가와 6문6답 =====
 

1. 우선 선정된 소감을 간단히 밝혀주세요. ^_^

  작년에 처음 이 소설을 썼습니다. 그런데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어요. 그래서 1년간 손대지 않고 있다가 올해 초에 새로운 내용으로 써서 합평을 받았었는데, 두 번째 작품 역시 혹평이었습니다. 막막한 기분 속에서 다시 마음을 잡아 새롭게 쓰게 되었고, 다행히도 이번엔 이렇게 좋은 소식을 듣게 되었네요. 정말 기쁩니다. 심사위원 선생님들, 기회를 주신 많은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 이 작품을 처음 떠올렸을 때 어디서 무얼 하고 계셨나요?

  어린 사촌동생들과 놀아주다가 우연히 그 아이들의 배꼽을 보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배꼽의 의미에 대해서 되돌아보게 되었고요. 그러다 보니까 문득 소설로 써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3. 글을 쓸 때 특별히 듣는 음악이 있다든가, 자기만의 습관이 있다면요?

  저는 글을 쓸 때 커피를 자주, 많이 마시는 편입니다. 아마 많이들 그러실 거예요. 마시는 양이 좀 많아져서 요즘엔 좀 줄여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4. 작품을 발표하기 전(혹은 퇴고를 하신 후)에 가장 먼저 보여주는 사람이 있나요?

  십년지기 친구와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언니에게 보여줍니다. 늘 그래왔어요. 이번엔 친하게 지내는 대학원 언니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했고요.
 

5. 평생 또는 두고두고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주제 같은 게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일반적이거나 전형적인 가족 형태부터 비전형적이지만 ‘가족’이라는 개념으로 아우를 수 있는 사람 간의 관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이야기해보고 싶어요. 대부분 누구에게나 가족(혹은 가족이라고 불릴 수 있는 성질의 관계)은 있으니까요. 결국 이 말은 한 개인과 다른 한 개인 사이에서 이루어진 관계와 그 관계의 사연에 대해 꾸준히 시선을 두겠다는 말과 같겠지요. 제 시선은 언제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을 거예요. 그 사이에서 어떤 것을 발견할지, 개인적 차원의 관계를 통해 어떻게 사회와 세계의 이면들을 이야기할 수 있을지 그리고 이미 익숙해진 이야기들을 어떻게 새롭고 흥미롭게 전달할 수 있을지는 전적으로 제게 달려 있겠죠. 많은 공부와 노력이 필요할 거예요.

 

6. 막 쓰고 있는 (또는 품고 있는) 작품의 예고편을 들려주실 수 있나요?

  코끼리에 대한 이야기와 상자에 대한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어요. 아직은 구상만 하고 있는 상태지만, 열심히 써볼 생각입니다.

 

 

 

   《문장웹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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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설「배꼽의 기원」, 박송아 […]

파괴한다

삽화는 섬뜩한데, 막상 읽어보니 위트가 있네요ㅋㅋ 이 작가님 유독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쓰시는 것 같은데 어떤 분인지 궁금하네요. 잘 읽었습니다.

블랑코랑

웃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웃을 수 있게 전달한 점이 좋네요 ㅋ 저번과 같으면서 또다른 모습이구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