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_차세대1차_시]활과 무사 외 3편

 

[2014년 1차 차세대예술인력육성 문학분야 선정작 ]

 

 

활과 무사

 

 


이소연

 

 

 

무사는 촉과 오늬를 생각하며 생 죽(竹)을 깎는다,
활시위를 팽팽히 당기는 손맛은 직선의 힘이다
화살은 물고기 영법인데,
겨누고 있는 찰나가 둥근 과녁을 펼쳐낸다

 

죽는 순간까지 명궁을 꿈꾸는 무사,
화살을 쏠 순간부터 과녁은 무사의 피안에 서 있다
복숭아나무로 에워싼 무사의 집,
불멸의 무명활이 있고 태양을 삼켜버린 촉이 있다

 

활은 팽팽함이다 날숨과 들숨 사이에서 약간의 결의가 필요하다
무사는 복사꽃잎을 과녁삼아 또 한나절동안 활시위를 당긴다

 

활은 무사의 운명을 다스리는 힘을 지녔다
활을 떠난 촉은 운명이 정한 길도 마다 않고 과녁의 명중만을 생각한다
무사에게 쉽게 길들지 않는 활은 짐승이었으리라
그러나 어느 먼 산 중턱에서 무사는
제 몸에 깃든 활의 원주율을 생각하듯이
곡선으로 휘어져나갈 직선의 힘을 화살의 깃털로 가늠해본다

 

오늘도 무사는 복사꽃 그늘에 박혀 활의 생각에 젖었고
그때 활이 내면을 길들이는 짐승이라고 걸 믿게 되었다

 

 

 

 

 

 

쿠마리의 역사

 

 

 

    검은 강, 검은 거울, 검은 귀신이 파 놓은 무덤이
    예를 다해 나를 마신다
    붉은 피는 흐르면서 몸을 씻어주지만
    검은 피는 내 몸에 고여서 어느 눈 먼 귀신의 바깥으로 살아간다

 

    나는 오래된 신들에게 반쯤 먹힌 샤카족의 여자아이,
    이마에 티카의 눈동자를 눈부시게 그려놓고
    타레주의 언어를 모두 이해하는 시간이 올 때까지
    나는 이 생에 없는 것들의 안부를 묻거나 그 누구도 만질 수 없는 여신의 생각을 평서문의 일기로 기록했다 그 덕에 나는 쓸모없는 것들과 친해지는 법을 배웠고, 아주 가끔 우물 밑에 두고 온 백골의 영(靈)으로 쿠마리의 역사를 기록했다

 

    오후 4시, 나는 오 분간 열리는 세상의 창문 앞에 서서 궁리한다
    얼마나 많은 귀신들의 밀어를 검은 눈동자 속에 담아낼 수 있을지
    먼 후일 동안 내 작은 몸이 비눗방울같이 떠올라 날아갈 수 있을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연기의 불꽃으로 저녁의 묘비가 빛날 수 있을지

 

    내 죄를 대신 저지른 여자 아이들이 하나씩 별똥별로 건너가는 밤, 나는 비명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아랫입술을 깨물고, 차가운 신의 말을 몸 위로 눕히는 쿠마리가 되었다 소와 돼지와 양과 닭의 머리냄새에 취해, 죽은 이들의 환멸을 담는 검은 항아리가 되는 꿈을 꾸었다

 

    * 쿠마리(Kumari)는 지상에 환생한 살아 있는 여신을 뜻한다. 네팔에는 특정 소녀에게 쿠마리의 지위를 부여하는 문화가 있다. 쿠마리로 뽑힌 여자아이는 초경을 하기 전까지 카트만두의 궁전에서 지낸다.

 

 

 

 

 

 

코뿔소의 조용한 날들2

 

 

 

마침내 코뿔의 상처가 아물어갈 무렵
생과 사의 시간을 가끔 생각한다

 

힘껏 발목을 구부리면서
나는 둥그렇게 뒷걸음치는 공포와 악몽이
내 실핏줄을 타고 희끗하게 흐르고 있음을

 

그러나 불면의 밤은 번개를 긋는 구름빛이다
순장된 별이 고여 있듯이 아름답다.
다시 아문 데가 벌어지고
그 상처 검게 마르기 전까지
나는 한 번 더 날렵하게 악몽 속을 달려보기도 했다

 

난 분명 조약돌같이 죽어 있었는데
죽어 초원 한가운데서 새들의 저녁을 좆아 달리고 있었는데
어둑어둑 피 흘린 달이 내 코를 에워싸고만 있었는데
바싹 마른 지옥이
눈두덩 근처에 구더기만한 눈곱을 만들고 있었는데

 

마취 총에 죽었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아직도 눈물이 남아 있었는지, 미끄러운 것이 조용히 불탄다

 

역삼각형의 검은 해골이 뻥 뚫린 좌우를 마주볼 때

 

비통한 동공이 눈꺼풀을 잠그고 나는 이제 더 어두워진다

 

 

 

 

 

 

포개진 빈 화분

 

 

 

화분은 잠시 벗어둔 것들을 생각한다

 

동그란 구멍을 휘감던 뿌리의 힘이
지나간 물의 허기를 빨아올린다
유리창을 데우고 들어오는 햇살의 각도에 대해
밤과 낮을 빚어 잎그늘을 넓히고 있는 고무나무에 대해

 

그러나 너무 낮은 천장과
더 이상 자라지 않는 분재들의 불행에 대해
자꾸만 비 그친 햇살 쪽으로 발목을 접지르던 뿌리에 대해

 

명랑한 잎사귀와 줄기가 그늘의 눈초리를 피해
소파 뒤에 걸린 풀밭 위의 점심 식사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꽃밭에 갇힌 사내들의 마음속으로 미끄러지고 싶어
꽃이 지고 향기가 날린다

 

갇혀 있는 뿌리가 둥글게 망가지는 소리가 들린다

 

 

 

[작품 심사평]

< (선정평) 「활과 무사」 외 3편 >
 
    서사와 단단한 서정의 문법이 결합된 방식으로 명상의 힘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고 있는 시편들이다. 또 전반적으로 시의 어조에 확신이 있다. 과거와 내면의 힘을 믿으며, 그 힘으로 미래의 운명을 다스리려 한다는 점에서 ‘나는 언제나 나다’라는 신화의 원형성을 보여주고 있다. 「활과 무사」는 무사가 명궁을 꿈꾸며 활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통해 과녁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으며, 따라서 과녁은 외적인 데에서 찾기보다는 내적인 근원이나 명상에 있음을 탄탄한 서정의 문법으로 드러낸다. 또 「쿠마리의 역사」는 어린 나이에 궁전에서 갇혀 살아야 하는 소녀이면서 환생한 살아 있는 여신이기도 한 네팔의 쿠마리를 통해 인간이 지닌 한계와 불멸성을 성찰한다. 「코뿔소의 조용한 날들2」도 마취총에 죽었다가 깨어난 코뿔소의 “생과 사의 시간” 속에서 초월적 시간이 움트는 과정을 탄탄한 시적 구조로 형상화한다. “동그란 구멍을 휘감던 뿌리의 힘”을 말하고 있는 「포개진 빈 화분」 역시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의 관계성을 성찰한다.
    (박형준)

 

===== 작가와 6문6답 =====
 

1. 우선 선정된 소감을 간단히 밝혀주세요. ^_^

  위장약을 먹고 난 뒤, 아주 풍덩한 마 소재의 풀색 상의를 입고 이케아 2인용 소파에 누워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햇살이 구멍이 숭숭 뚫린 그림자 한 다발을 내게 안겨 주네요. 기분이 아주 좋습니다. 그 풍경 속으로 좀처럼 볼 수 없던 박새 한 마리가 날아와 창밖 난간에 버려두다시피 했던 화분의 죽은 나뭇가지를 꺾어 후다닥 달아났지요. 저 박새가 어느 싱싱한 나무 위에다 집을 짓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까 나도 힘을 내서 집을 지어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힘을 내서 집을 지어야지 하는 마음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2. 이 시는 언제, 어디서 영감을 얻어서 쓰게 되셨는지 간단한 시작 메모를 좀 부탁드릴게요.

  TV 화면을 통해 나무 숲 사이에 숨어 화살을 겨누는 무사의 모습을 본 적이 있어요. 너무 흔하고 상투적이고 빤한 장면이라 드라마인지 영화인지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시라는 게 그렇게 빤하고 흔하고 상투적인 장면으로 와서 느닷없이 제 마음을 건드리는 것 같아요. 물론 화면 속의 나무가 복숭아나무는 아니었습니다. 다만 무사의 정신은 귀신마저 꺾어버리는, 눈앞의 피를 보고도 꿈쩍하지 않은 초월적인 강인함을 지닌, 누구도 쉽게 범접할 수 없는 무엇이 아닐까? 그렇다면 무사의 정신을 둘러싼 것은 귀신을 쫓는다는 복숭아나무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이고 그것을 이미지로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3. 글을 쓸 때 특별히 듣는 음악이 있다든가, 자기만의 습관이 있다면요?

  아이가 어린이집에 등원하는 10시부터 하원하는 4시까지 저는 노트북을 챙겨서 어린이집 근처 작은 카페로 갑니다. 거기서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죽치고 앉아 있습니다. 시를 받으려고요. 그러니 별 수 없이 카페 주인이 틀어주는 노래를 들어야지요. 그리고 저는 소음에 강한 편이어서 뭔가에 집중하면 아무 것도 들리지 않습니다. 카페에서 쓴 것이 시가 아닌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시를 쓰기 위한 워밍업이죠.

 

4. 글을 막 완성했을 때 가장 먼저 읽어주는 1차 독자가 있으신가요?

  동인이라고는 할 수 없고요. 대학원에서 만난 언니가 있는데 그 언니랑 자주 시 얘길 하는 편이에요. 정기적 모임은 아니지만 동인을 만들어보자고 ‘잃,버,네’라는 이름을 만들어 놓았죠. 인원은 둘뿐인데 늘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제 시를 가장 먼저 읽어주는 1차 독자는 예전엔 남편이었는데 결혼하고 나서는 부부싸움 예방 차원에서 1차 독자를 잘랐습니다. 꼭 필요하면 ‘잃,버,네’ 언니에게 읽어달라고 합니다.
 

5. 지금 막 발을 뗀 신인이지만, 일평생 작가로 살면서 이것만은 꼭 쓰겠다, 라고 다짐한 주제나 소재가 있나요?

  주변 사람에 대한 시를 꼭 쓰고 싶네요. 선배 시인들이 같이 글 쓰는 동료문인과의 에피소드로 쓴 시들을 굉장히 흥미롭게 읽었거든요. 나중에 시인이 되면 나도 한 번 꼭 써봐야지 하는 생각했었습니다.

 

6. 향후 작품 활동 계획을 좀 부탁드립니다.

  그냥 이것저것 할 겁니다. 시키는 것도 하고, 하고 싶은 것도 할 겁니다.

 

 

 

   《문장웹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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