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 주제별모음 > 시가 내게로 왔다
스스로 재래식무기(在來式武器)가 된 사나이 조인호 [0]
 

스킨헤드 소년이 빨간 마스크를 쓴 채 N서울타워 꼭대기 위에 서 있다 철탑 밑으로 케이블카가 멈춰 있다 지상에서, 불발탄을 어깨에 짊어진 사나이가 우뚝 선 철근콘크리트 구조물을 향하여 육탄돌격한다 2010.09.01

청진(聽診)의 효능 이은규 [0]
 

누가, 두 귀를 잘라 걸어 놓았을까 유리창 너머 금속성의 귀 노을을 흘리며 허공을 듣고 있는 것은 청진기였다 의료에 쓰이기보다 헤드셋에 가까운, 혹은 서랍 당신을 듣기 위해 항상 열어두었던 내 귀 채집된 음을 기억의 서랍 속에 숨겨놓은 날이 길다 귀는 깊어 가장 슬픈 기관일거라는 문장 2010.08.27

트럭 임성용 [0]
 

밤 깊은 고속도로휴게소, 나는 5톤 트럭을 몰고 네 시간 반을 달려왔다 아마 2톤 이상은 과적이었을 게다 과적보다 무거운 것은 갑자기, 눈발처럼 쏟아지는 잠의 중량 잠은 얼마나 위험하게 적재된 낙하물인가 달랑 내 몸 하나 들어가 누울 운전석 뒷자리에 밧줄에서 풀린 잠을 잠시 편안하게 눕혀놓았다 2010.08.24

사랑은 백년 최명란 [0]
 

당신을 만나본지 백년 가끔 간격 없는 숲 속에서 만나 까무러친 적이 있고 나무의 젖을 빨며 고분고분 했다 그리웠어요 당신은 어차피 숲 속에 있는 사람 풍경이 빠른 속도로 지워지고 있다 어느 구멍으로 들왔다 어느 구멍으로 나가나 그리운 쪽으로 팔을 뻗는 나무의 숨구멍으로 번개같이 다녀가시나 2010.08.21

엑스트라 최호일 [0]
 

이 한 여름에 두꺼운 옷을 껴입고 우리는 웃는다 여름 날 당신의 입술과 내 손가락 사이로 내리는 눈송이들 혀가 혀를 빨아 먹으며 바위 사이에서 커다란 뱀과 여자와 허벅지가 튀어나올 때 주인공은 홀로 용감하다 대기 속에는 진짜 총알이 들어있고 2010.08.20

선인장 연구소 이문숙 [0]
 

세상의 끝에는 어김없이 연성각이 서 있다 백미인이라는 가루로 만든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면을 사해파라는 검은 소스에 비벼 먹으면 마음이 편해진다는 소문이 악어아가배의 세상에도 전해진다 뜨거운 태양이 서향의 연성각을 단련하는데도 창문에 거취옥으로 지은 주렴이 꼼짝하지 않는데도 그곳에는 대통령, 장군, 보초들이 반야의 나무를 쪼개 만든 젓가락으로 세설금이라는 차디찬 눈 속에 냉장시킨 면을 악기의 현처럼 쭈루륵 빨아올린다 북두각금의 탄주라고나 할까 2010.08.20

진주가 있는 잠 곽은영 [0]
 

당신들이 나를 보며 돈을 벌 수 있는 자와 없는 자로 구분했듯이 나는 당신들을 딱 두 개로 구분했다 죽은 자와 죽을 자 당신과 마음 편하게 누울 수 있는 자리를 찾는 것이 불가능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줄곧 찾아왔다 생각보다 가까운 곳 내 팔 안쪽 그래서 조금 시시했다 하지만 그곳의 당신은 내가 처음 보는 당신 당신을 감싸고 있었던 것은 당신의 죽음 2010.08.20

바다를 최원준 [0]
 

다만 네가 출렁이는 내 삶의 단 하나의 부표이기를 지쳐 멍하니 수면만 바라보고 있을 때 잔물결 일으키며 그 곳에 네가 있어 주기를 이렇듯 끊임없이 흔들리는 게 살아가는 일 아니겠느냐며 내 삶의 맞은편에서 너 또한 흔들리고 있어 주기를 그래 어느 날 2010.08.20

읽자마자 잊혀져 버려도 성미정 [0]
 

쓰자마자 지워져 버려도 사이에 무명의 슬랩스틱 코미디 콤비 시인과 고통이 존재하느니 시인에겐 오래된 변비의 고통 이 고통에겐 배배꼬인 시인 이 시인에겐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기의 고통 이 고통에겐 이런 뻔뻔한 시 한 편조차 혼자서는 완성하지 못하는 시인이 2010.08.20

오래된 새장 박시하 [0]
 

한쪽이 무거워진 새장은 기울어 있다 문은 닫혀 있고 열쇠는 반짝이지 않는다 낡은 철창에 푸른 번개가 치면 숨은 장소들이 삐걱삐걱 나타난다 뼛조각을 희미하게 드러내며 별들이 어둠을 이어 붙인다 부유한 어제는 죽었다 가난한 내일이 홰를 친다 우리는 낮에만 태양이 타오른다고 말한다 우리는 밤에만 별이 빛난다고 믿는다 2010.08.20

  1  2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