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현지 운다의 전기 - 차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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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다의 전기

 

차현지

 

 


 

 

운다의-전기-삽화

 

    파도에 휩쓸린 채 운다는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졌을 때, 나는 비로소 우리의 게임이 종결됐다는 걸 받아들였다. 그녀는 온전히 사라졌다. 우리는 언제나 속삭였다. 죽는다는 건 잠시 눈에 보이지 않는 것뿐이야. 사라지는 건 없어, 그저 보이지 않을 뿐이지. 누빔 이불을 정수리까지 덮고 우리는 속삭였다. 미세하게 열린 방문 밖에선 어머니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문틈 새로 비친 붉은 불빛. 어머니의 붉은 목소리. 목소리에서는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한 소절도 채 부르지 못하고 어머니는 기침을 해댔다. 붉은 기침. 문틈 밖에서는 붉은 것들이 진동했다. 우리는 누빔 이불을 정수리까지 덮어야 잠을 잘 수 있었다. 노래를 부르다 말고 누런 가래침을 뱉을 듯이 기침을 해대던 어머니는 나중에 가서는 비명을 질렀다. 공포에 눌린 비명이 아닌, 붉은 외침. 당신의 예전 목소리를 애타게 찾는 비명. 돌아와 달라는 비명. 어머니는 매일 밤 부엌 찬장을 열어 작은 철제함을 꺼냈다. 그러곤 식탁에 그것을 슬며시 두고서는 우리가 자고 있는지 확인했다. 어머니가 방으로 걸어오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운다는 말했다. 눈 감아. 숨죽인 우리를 확인한 어머니는 우리의 정수리를 몇 번 쓰다듬곤 했다. 감은 눈 안에서 눈동자는 계속해서 움직였다. 우리는 서로의 눈동자가 움직이고 있는 것을 알았다.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알고 있었다. 운다와 나는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운다는 비명을 지르는 어머니에게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어머니가 하는 말은 모두 다 거짓이야. 모세혈관처럼 갈라질 대로 갈라진 성대로 지껄여대는 게 말이라고 생각하니? 저건 다 거짓이고 가짜야. 우리는 누빔 이불 안에서 매일 밤 계획을 짰다. 어떻게든 어머니에게서 달아나야 해. 어머니는 점점 괴물이 되어 갈 거야. 마녀가 되거나. 어머니가 매일 밤 찬장에서 꺼내는 철제함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아니? 그건 누군가의 뼛가루야. 뼛가루가 뭔지 아니? 사람을 태우면 남는 재야. 그 재를 어머니는 매일 밤 와인에 타 마시고 있는 거야. 그러곤 다시 노래를 부르지. 빌어먹을 같지도 않은 노래를 말이야.
    어머니는 은퇴한 오페라 가수였다. 한 번도 프리마돈나가 되어 본 적 없는 배우. 프리마돈나 곁에서 함께 흥분하고, 다독여 주며, 기뻐하고, 샘을 내는 역할만 전전하며 살아온 가수였다. 어머니는 무대 위에서 한 번도 「카르멘」의 「하바네라(HABANERA)」를 불러 본 적이 없었다. 온전히 그녀가 프리마돈나로 설 무대는 부엌뿐이었다. 천장에 매단 붉고 둥근 등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부엌. 그녀는 부엌에서 카르멘의 2악장 중 「하바네라」를 불렀다. 돈 호세를 유혹하기 위해 ‘사랑은 길들여지지 않는 새’라는 문장을 연이어 부르짖었다. 오른팔이 잘린 퇴역 장군처럼 어머니의 목소리는 더 이상 아름답지 않았으나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실 그녀의 목소리가 매혹적이었던 적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내겐 기억이 없다. 과연 그녀가 오페라 가수였던 것이 진실이긴 한 것일까 싶을 정도로 나와 운다에게 그녀의 목소리는 공포였다. 어머니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 우리는 서로의 귓구멍에 손가락을 넣었다. 운다의 검지가 가득 내 귓구멍을 채웠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물속에서 잠영을 할 때 고막에 닿는 편안한 물의 감촉이 느껴졌다. 어쩌면 우리가 어머니의 뱃속에 있었을 때 서로의 귓구멍에 손가락을 채워 넣으면서부터 게임을 시작하지 않았을까, 하고 말하며 우리는 이불 속에서 킥킥거리곤 했다. 근데 말이야, 정말 우리가 저 여자의 뱃속에 있었긴 한 걸까? 운다는 마지막에 가선 꼭 이렇게 질문하곤 했다. 저 사람이 정말 우리의 어머니라는 걸 어찌 알 수 있단 말이야? 어머니가 늘 말하듯 아버지는 죽고 없다고 하는 것처럼 거짓일 수 있잖겠어?
    어머니는 발성연습을 할 때마다 운다를 불렀다. 그리고 높은 음이 올라가지 않을 때면 괜한 트집을 내며 그녀를 할퀴고 때렸다. 운다는 이가 문드러질 정도로 그녀의 구타를 꾹꾹 참아야만 했다. 더 높은 음에 오를 수 있을 때까지, 오르지 않는 날이면 운다는 더욱더 맞아야 했다. 성에 찰 때까지 때리고 나면 그녀는 부엌으로 들어가 수프를 만들었다. 수프 분말이 채 녹기도 전에 그릇에 담고 우리들에게 던져 주었다. 운다와 나는 수프 분말이 쩍쩍 앞니에 감기는 것을 느끼면서도 꾸역꾸역 그릇을 다 비워냈다. 여린 손가락으로 운다는 빈 그릇을 닦고, 우리가 입을 티셔츠를 빨고, 방바닥에 붙은, 굳어 딱딱해진 밥풀을 손톱으로 떼어내며 잠이 들었다. 운다가 그러는 동안 나는 누빔 이불 안에 숨어 오줌을 지렸다.
    저 여자는 끝끝내 마녀가 될 거야. 악귀가 씐 거야.
    운다는 끅끅거리며 속닥였다. 정말이지 어머니는 종종 마녀처럼 보이기도 했다. 운다의 얼굴보다 큰 손바닥과, 빨간색 매니큐어가 발린 긴 손톱과, 저가에 팔리는 레토르트 수프 분말과, 수프를 휘저을 때 쓰인 국자와, 이가 나간 그릇. 권태로운 움직임과 부러질 듯한 발목, 너무 말라 파란 혈관이 나뭇가지처럼 뻗어 있는 허벅지와 칠흑의 머리카락. 어머니의 눈에 운다는 싫증난 일상의 환기 내지는 순간의 욕정을 거둘 수 있는 먹잇감처럼 보이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종일 청소를 하고 난 후 때꾼해진 운다의 왼쪽 눈 밑이 심하게 거무스름해 보였다. 이리 와봐. 나는 운다의 눈 밑을 까보였다. 다래끼가 났어. 너와 다른 흉터가 생겨버렸어. 운다는 참고 있던 울음을 터트렸다.
    운다는 아버지가 살아 있다고 믿었다. 꼭 아버지를 찾아야만 한다고 말했다. 어떻게든 어머니의 목소리에게서 벗어나야 한다고 했다. 저 목소리를 계속 듣다간 우리는 귀머거리가 될 거야. 우리의 귓구멍도 자라나고, 네 손마디도 점점 두꺼워져 갈 텐데, 언제까지고 이불 속에 숨어 있을 순 없지 않겠어? 단 한 군데라도 저 여자와 닮은 구석을 찾아봐. 저 여자의 움푹 팬 눈꺼풀과 처진 엉덩이와 까맣게 곪은 새끼발톱을 봐. 우리가 늙는다 하더라도 저 여자처럼 되지는 않을 거야. 얇은 입술 위에 부러 두툼하게 덧바른 적갈색 립스틱마저도 추하기 이를 데 없어. 내가 저 여자처럼 늙는다면 나는 늙지 않을 거야. 늙지 않는다니? 내가 되묻자 운다는 얼마간 입을 다물다가 이렇게 말했다. 늙지 않으려면 방법은 하나지. 이 세상에서 잠시 보이지 않으면 돼. 아주 잠시 동안 말이야.
    누빔 이불은 우리의 연막작전을 계획하는 아주 주요한 도구이며 공간이었다. 어머니에게서 잠시 동안 우리의 모습을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 운다의 첫 번째 계획이었다. 그 여자에게 우리는 지금 죽은 상태인 거지. 마치 아버지처럼 말이야. 운다의 계획은 너무나 터무니없고 단순했다. 심각한 불면증이었던 어머니의 틈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았다. 밤을 새고 「하바네라」를 부르다가 지쳐 소파에 누운 어머니의 눈꺼풀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다시 접혔으니까. 그때까지 단 한 번도 집 밖을 나가 본 적이 없는 우리는 운다의 독서를 통해 세상을 접했다. 학교란 곳이 있고, 그곳에는 무언가를 가르쳐주는 사람이 있으며, 그 사람의 지시에 따라 배움을 습득하고, 또래 친구들과의 교류를 통해 사회성을 기르며 세계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 운다는 어머니가 가져온 교과서와 그 나이 대에 읽을 수 있을 만한 자연과학 서적과 사춘기 소녀들이 읽는 로맨스 소설을 통해 세상을 가늠했고 상상으로 만져 보았다. 하늘엔 비행기라는 물체가 떠다니고,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했으며, 사람이 죽고 난 이후에도 머리카락과 손톱은 계속해서 자란다는 것까지 운다는 내게 가르쳐주었다. 글자를 읽고 쓰는 것도 그녀는 나보다 빨랐다. 눈 감아. 그녀는 자주 내게 명령하듯 말했다. 손바닥을 눈꺼풀에 대고 빠르게 돌려 봐. 감은 눈 안에서 뭔가가 반짝이며 움직이지? 희한한 곡선을 띠며 하얗게 뭔가가 생기지? 그게 은막銀幕이야. 어머니에게서 벗어나면 우리가 맨 처음으로 갈 곳인 영화관에 바로 은막이 있어.
    운다는 언제나 영화관을 가보고 싶어 했다. 운다는 영화관 은막에 비춰진 영상에 나오는 장면들을 더없이 기대했다. 우주선과 타국의 도심, 말하는 돼지나 사람 얼굴을 지닌 달의 형상 등이 은막 위에 펼쳐진다는 것을. 마치 우리처럼. 눈을 뜬 것보다 감을 때, 더 많은 것이 보이고 그려지고 이뤄졌듯이. 어머니는 은막의 뒤편에 있던 사람이었다면 우리는 아예 은막 안으로 스며들어가고 싶어 했다. 우리는 철저하게 어머니의 척隻이었다. 운다의 말에 의하면 어머니는 아버지에게서 우릴 뺏은 늙고 추한 마녀일 뿐이었다. 우리는 아버지를 찾아나서야 했다.
    아버지는 말야. 은막 속에 있어. 바로 이 사람이지.
    운다가 꺼내든 사진에는 베이지색 중절모를 삐딱하게 쓰고 있는 매우 잘생긴 프랑스 배우가 웃고 있었다.

 

 

    *

 

    잠든 어머니를 주시하며 방문을 천천히 열어젖히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다만 붉고 둥근 등이 계속 빙글빙글 돌며 우리의 그림자를 사방으로 분산시켰기 때문에 그녀가 깰까 두려웠다. 희붐하고 산란한 그림자가 계속해서 그녀의 눈두덩 위로 왔다 갔다 한다면……. 운다와 나는 누빔 이불 속에서 며칠 밤이나 그녀에게 들킬 상상을 하며 두려움에 떨었다. 하지만 용기를 내야만 했다. 어머니의 발소리가 들릴 즈음 우리는 언제나처럼 눈을 감았다. 감은 눈 안에서 우리는 왼쪽으로 눈동자를 세 번 굴렸다. 운다는 그것이 우리의 주문이라고 말했다. 어김없이 어머니는 우리에게 다가와 정수리를 몇 번이고 쓰다듬다가는 운다의 귓불에 대고 속삭였다.
    그 망할 개 같은 새끼는 내 모든 걸 앗아갔지. 너희도 알다시피 나는 밤을 이길 수 없지 않니. 내 옆구리에 새겨진 길고 흉측한 흉터를 알고 있니. 그 망할 개 같은 새끼는 불을 끈 방에 나를 가두고 사정없이 칼을 휘둘렀지. 사과나 치즈를 자를 때 쓰는 칼 말이야. 너희들은 알고 있니. 너희들 피부 저 깊숙한 곳에 아주 미지근한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본 적이 있니? 나는 너희가 평생 동안 그것을 보지 않기를 바란단다. 그래서 그렇게…… 책을 읽다 종이에 손을 벤 너를 때렸던 거란다. 나는 너희를 보호하고 있단다. 아버지는 죽었어. 그 망할 개 같은 새끼는 이미 죽었다. 그러니 너희가 살고 있는 거란다. 그리고 나도 살고 있는 거고…… 그러니 빌어먹을 못된 상상은 집어치워. 밤마다 속닥이며 이상한 소릴 지껄이는 것도 관두란 말이다. 그지 않으면 나는 더 이상 너희를 지켜줄 수가 없어. 너희가 날 못 믿는다면 우리가 같이 사는 이유가 없지 않겠니? 부디 불쌍한 어미를 이해해 다오.
    어머니는 운다의 머리카락을 아주 잠시, 그러나 세게 끄집어 당겼다. 그녀의 미간이 찌푸려졌으나 운다는 결코 눈을 뜨지 않았다. 오히려 더 질끈 감았다. 나는 실눈을 뜨며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머니의 팔찌 금속장식이 내는 마찰음이 점점 멀어지고 나서야 나는 운다를 바라보았다. 네가 눈을 뜬 죗값이 시작된 거야. 운다가 말했다. 눈물이 가득 고인 눈동자가 뚫어지게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발신자: 운다(Unda)

 

    공의 아버지가 죽은 연유가 자살이었단 얘길 들은 그날, 나는 러시아 구 레닌그라드 지역의 높은 성당 첨탑에 앉아 고야의 그림을 그리던 누군가를 떠올렸어. 그것은 아마도 꿈에 나온 아버지였을 거야. 공은 아무렇지도 않게 아버지의 죽음을 말해 주었지. 그때 기억은 별게 아니란 듯이. 아버지가 죽으면 기분이 어때? 공은 팔베개를 해주던 팔을 빼고는 자세를 고쳐 모로 누웠지. 그러고는 여느 인상파 화가의 그림을 성의 없이 모사한 천장의 인테리어를 응시하며 말했지. 우리는 원래 죽어. 것도 모르나. 나는 덤덤하게 내 질문을 수용한 공의 눈을 쳐다보았어. 너의 별명은 공空으로 하자. 우리, 흉터를 만들지 않을래? 나는 말했지. 공은 그러자고 답했다. 르누아르의 모사화를 한동안 쳐다보던 공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스읍, 후, 스읍, 후, 스읍, 후, 이렇게 세 번을 반복한 뒤에, 내 옆구리에 사정없이 담배를 짓이겨 껐지. 너희 아버지는 자살했고, 우리 아버지는 태초부터 없었대. 네 아버지는 왜 자살을 했을까? 그러자 공은 말했지. 글쎄, 사는 게 공허하셨나 보지. 모사화 밑에 누워 아무 감정 없는 성교를 한 우리처럼 말이지. 공은 그렇게 말하곤 돌아누워 빠르게 잠이 들었지. 나는 그 순간 거짓들이 가득한 음지에서 숨을 쉬고 있다는 걸 깨달았어. 기억나? 어두컴컴한 방, 누빔 이불 안에서 눈동자를 굴리며 주문을 외던 시절을. 벌써 십여 년도 더 된 그때를 말이야.
    모텔에 간 그날 나는 차에 치일 뻔했지. 공이 날 도와주었어. 그때 내가 뭐라고 말했는지 아니?
    우리는 모두 각자의 지옥, 각자의 천국에서 살고 있어. 난 거지고, 부랑자야. 상대적으로 넌 나보다 돈이 많겠지. 네 수중에 있는 돈이 얼마건 아마 나보다는 많을 거야. 난 한 푼도 없으니까. 게다가 난 여자고, 넌 남자지. 너는 돌아갈 집이 있지만 나는 없어. 나는 거리에서 자. 네가 만약 차에 치이려는 나를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너의 오늘 하루는 매우 평안했을 거야. 너는 차에 뛰어드는 나를 막아 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착한 일을 했다고 너 스스로에게 생색을 내며 베개에 머리를 누였겠지. 나는 협박을 하고 있는 거야. 자, 넌 내게 얼마나 줄 수 있지? 난 오늘 갈 곳이 없어. 네가 돈을 주지 않는다면 이렇게 눈이 펑펑 쏟아지는데도 나는 거리에서 밤을 지새우게 될 거야. 이제 어떡할 셈이지?
    공은 나를 모텔로 인도했고 나는 자연스레 옷을 벗었어. 그럴싸하지? 공은 신기하게도 처음 보는 사람에게 중얼중얼 자기 인생에 대해 말하더라. 어차피 다신 안 볼 테니까, 하면서. 영화 속에서 남자들이 으레 그러듯 말이야. 그래서 나도 네 얘길 했지. 내겐 서로의 체액을 담은 용기가 있어. 애인의 체액이 담겨 있지. 복숭아빛 멀건 액체가 담긴 미니어처 향수병 크기의 용기를 공에게 보여주면서 말이야. 침과 정액과 피의 조합인가? 공은 물었지.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우리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를 했지.
    가끔 나는 꿈과 현실을 혼동할 때가 있어. 꿈속의 내가 진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사후세계가 있다면 그것은 꿈이고, 꿈은 곧 현실의 내가 아닌 다른 세계 속의 나라는 생각도 해봤어. 어릴 적 나는 늘 같은 꿈을 여러 번 반복해서 꾸곤 했거든. 그중 하나는 아버지와 함께 내가 레닌그라드 지역의 어느 성당 첨탑 꼭대기에 앉아 고야의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장면이었는데, 나는 고야가 누구인지도 몰랐던 때부터 그 그림을 그리겠다고 붓을 쥐고 있었어. 그래서 나는 미술학원 원장님께 찾아가서 물었지. 선생님, 제 꿈에 자꾸 이상한 그림이 나오는데요. 사람 두 명이 나무에 매달려 있고, 그 둘 중 하나는 목이 댕강 잘려 있어요. 이 그림을 혹시 아시나요? 원장은 말했지. 너 고야의 그림 본 적이 있니? 아니요. 고야가 누군지도 몰라요. 다만 계속 제 꿈에 그 그림이 나와요. 제가 그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아빠와 함께. 원장은 다시 물었지. 그래, 네 꿈에서 그 그림은 완성이 되어 가고 있니? 완성은 늘 되어 있어요, 선생님. 나랑 아빠는 다 그려진 그림 위에 녹슨 붓으로 그림을 그리는 척만 하는 것 같아요. 게다가 왜 그렇게 높은 첨탑에 앉아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도 사실 잘 모르겠어요, 라고. 그랬더니 원장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 레닌그라드는 이제 쓰지 않는 지역명이래. 지금 그곳은 상트페테르부르크라고 부른대. 그러니 그 꿈은 개꿈이래.
    그럴싸하지? 물론 그 꿈을 꾼 것은 사실인 거, 너도 알잖아. 어머니가 자기 직전마다 보여주던 그 그림 . 공은 관심을 갖고 진지하게 얘기를 들어주다가는 우리의 체액이 담긴 용기를 만져 보더라. 그러곤 이렇게 말했지.
    이런 건 말이야. 사실 깨트려야 유의미해지는 거야. 모든 무언가를 담는 용도의 것들은 모두 깨져야지만 힘이 생겨. 깨지고 흩어지고 부서지고 사라져야만 엄청난 무력을 지니게 되거든.
    그리고 공은 우리의 체액이 담긴 용기를 벽에 집어던졌지 뭐야. 그러곤 물었지.
    자, 이제 그 용기 안에 담긴 게 뭔지 다시 말해 봐.
    애인의 몸에서 발설된 모든 액체의 에센스라고는 하지만, 인간의 몸에서 배출되는 것들은 가장 유약한 부분에서 흘리는 울음들이라고 생각해. 눈과 질과 항문은 가장 두껍고도 얇은 피부로 이루어져 있지. 대체적으로 그들이 흘리는 건 인간이 이성과 일부러 거리를 두려고 애쓸 때 나오는 체액이지. 사실 음독자살할 셈으로 갖고 다니던 액체였어, 그건. 우리는 언제나 동반자살을 하려고 했거든.
    이제야 고백하건대, 미안해. 공이 목걸이를 깨트린 건 사실이야. 나는 그날 담뱃불로 지져서 생긴 흉터를 계속 만지면서 네 귓구멍 속에 손가락을 넣고 있다고 상상했어. 감은 눈 안에서, 우리는 마지막으로 그 마녀 같은 여자를 본 날을 떠올렸어. 너는 어때? 잘 지내고 있어? 우리가 헤어진 지 벌써 십오 년이 흘렀다는 게, 납득이 되니?

 

    1) Goya, 【Great dead against the Dead】, ‘Los Desastres’(1810-15) Etching and wash, 157x207mm.

 

 

 

    *

 

    어머니는 날이 갈수록 비쩍 곯아 갔고, 정신병 중증 환자처럼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고 돌아다녔다. 잠을 거의 자지 않는 어머니는 눈을 뜨고 있어도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았고, 자는 중에도 몽유병 환자처럼 부엌으로 걸어가 찬장을 열곤 했다. 태어나 단 한 번도 바깥 구경을 해본 적이 없는 운다와 나는 당연히 허약 체질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팔뚝을 꾹 누르며 멍을 짓는 놀이를 했다. 뼈가 약한 터라 얼마간 힘을 주어 누르기만 해도 보랏빛 멍이 피다 진 꽃잎처럼 피부에 새겨졌다. 이게 우리의 흉터야, 라고 운다는 웃으며 말했다. 운다는 흉터를 좋아했다. 흉터라는 단어의 어감도 좋아했고, 흉터의 의미도 좋아했다. 어느덧 누빔 이불보다 한 뼘쯤 더 발이 드러나 보일 정도로 나의 키는 자랐고, 운다의 젖가슴도 커졌으며, 우리의 성기에는 음부가 자라났다. 운다는 발기된 나의 성기를 손마디로 재는 것을 즐겼다. 우리는 우리의 체액을 섞어 작은 유리병에 담아 목걸이를 만들었다. 이건 너와 나의 흉터야. 살아 있는 흉터. 죽지 않은 피부.
    그때부턴가 어머니는 더 이상 밤마다 우리 방에 찾아오지 않았다. 천장에 달린 붉고 둥근 등이 빙글빙글 돌아가면, 산란하는 어머니의 그림자가 문틈으로 새어 들어왔다. 어머니는 실제로 빙글빙글 돌면서 「카르멘」의 「하바네라(HABANERA)」를 부르고 있었다. Si tu ne m'aimes pas, je t'aime! Mais si je t'aime, prends garde à toi! 금속 재질로 된 얇은 고리들 수백여 개가 부딪히면 날까 싶은 소리는 밤마다 이어졌다. 어머니는 언젠가부터 단 두 소절만 지겹도록 불러댔다. Si tu ne m'aimes pas, je t'aime! Mais si je t'aime, prends garde à toi! 어머니는 통유리창 가득 볕이 쬐면 노래 부르는 것을 멈추곤 했는데, 그때마다 어머니의 손수건에는 흥건하게 피가 묻어 있었다. 때때로 어머니는 식탁 의자에 앉아 나를 부르곤 했는데, 찬장에 있는 철제함을 꺼낼 기력조차 없을 때였다. 약을 먹은 사람처럼 동공이 커진 어머니가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 틈을 타 나는 몰래 철제함을 열어 보려고도 했다. 운다가 말했던 것처럼 사람의 재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싶었다. 최대한 적은 마찰음이 생기도록 힘을 들여 철제함을 열었을 때, 어머니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나는 죽어가고 있다. 죽는다는 게 뭔지 알지? 그 망할 개 같은 새끼, 그래, 너의 아버지, 그 작자처럼 말이야. 너희는 그 자를 본 적이 없지. 아버지가 무슨 의미의 단어인지도 모르게 하고 싶었어…… 하지만 그렇게는 할 수 없었지. 어미도 여자란다. 그 망할 개 같은 새끼도 처음부터 망할 개 같은 새끼라 불리진 않았을 거 아니겠니. 남은 사람은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어 있어. 그리고 그 뒤에는…… 너희가 있지. 내 눈매와 밥그릇처럼 오목하게 튀어나온 젖가슴을 닮은 네 누나와, 그리고 네가. ……네가 있어. 언제나 있지. 방구석에 가둬 두고 없는 것처럼 지내 왔지만, 미련한 짓이었어. 봐라, 너를. 거울에 있는 너를 봐라. 나는 언제나 뒤를 돌아보게 되어 있어. 그 빌어먹을 망할 개 같은 새끼의 흔적이 고스란히 네가 되어 돌아다니잖니. ……바로 내 앞에서 이렇게.
    그러곤 어머니는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나는 들고 있던 철제함을 다시 찬장에 올려 두었다. 어머니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앙상해진 팔뚝 위로 주사 자국이 수두처럼 부어올라 있었다.
    죽으면 즉시 태워. 이 집까지 전부 다. 이 불쌍한 어미를 이해해 다오.
    나는 어머니가 잠들어 있는 동안 전신 거울 앞에 서서 한참 동안 나를 쳐다보았다. 아주 오랫동안을. 시계바늘을 부러트리면서까지.
    봤어? 정말 봤단 말이야? 그건 정말 뼛가루였지? 아주 곱고 흰 모래처럼 생겼지?
    내가 철제함을 열어 보았다고 말한 날 밤, 운다는 내 성기의 피부를 아래위로 움직이며 물었다. 하나 성기는 커지지 않았다. 나는 말하지 않았다. 철제함에 든 것이 무엇인지.

 

    오페라 【카르멘】2악장 하바네라(HABANERA)의 노래 가사.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내가 당신을 사랑하게 되죠. 내가 당신을 사랑하게 되면, 그때는 날 조심하세요.”

 

 

 

    너와 나는 하나야. 우리는 샴쌍둥이야. 비밀을 만들려거든 집어치워. 우리 사이에 틈이 생긴다면 그건 단 하나야. 너와 내가 죽는 것. 잠시 보이지 않는 것.

 

    그리고 운다는 돌아누웠다. 그녀는 밤새도록 울었다. 눈 밑에 진물이 생길 때까지.
    그리고 운다는 집을 나갔다. 방문을 열어젖히고, 빙글빙글 도는 붉고 둥근 등을 뜯어 깨트린 후, 동공이 반쯤 풀린 어머니 옆구리에 힘겹게 주먹질을 해가며, 찬장에 든 철제함을 기어이 빼앗아 그녀는 밖으로 나갔다. 어머니의 목소리 바깥, 들리지 않는 곳으로 멀리. 그녀가 집을 나가기 전, 누빔 이불에 숨어 눈을 감고 있는 나를 보며 말했다.

 

    기대해. 나는 아버지를 찾을 거고, 우리의 진실은 지금부터 시작이야. 시원 자체가 거짓투성이인 마녀 밑에서 자랐으니까.
너와는 영영 헤어지지 않을 거야. 하지만 너는 죽은 거야. 우린 서로를 못 보게 될 테니까. 아주 오랫동안.

 

 

    @발신자: 운다(Unda)

 

    공과는 만났다 헤어지길 반복하며 아직까지 잘 버티고 있어. 가끔 너의 안부를 물어보곤 해. 아이는 잘 크고 있어. 우리 아이의 이름은 산다야. 너의 이름을 따서 지었지. 가끔 소도시로 여행을 가기도 해. 물론 미련하게 불어난 배불뚝이 임산부인지라 많은 곳을 돌아다니진 못하지만. 산다에게 너의 얘기를 빠짐없이 하곤 해. 내게는 쌍둥이 동생이 있다고. 삼촌은 전 지구를 몇 백 바퀴쯤은 돌았을 정도로 뛰어난 비행기 조종사라고 했어. 그럴싸하지? 때때로 네가 온종일 지구본만 뚫어져라 보던 게 생각이 나더라고. 어머니의 장례는 잘 치렀다고 들었어. 가보지 못해 미안해. 요즘은 일기 형식의 소설을 써. 거짓말을 가장 거짓말답지 않게 하려면 일기가 가장 편하니까. 공은 가끔씩 어릴 적 자신의 아버지 얘기를 해주곤 해. 언젠가 공이 물었대. 아버지, 우리는 어디에서 어디로 가고 있는 거죠? 아버지는 공의 뒷목을 지그시 매만지며 말해 주었대. 「바다는 파란 카펫의 납골당」이라는 시를 아니? 사람들은 파도의 갈기를 타고 한동안 헤매다가 다시 파도의 입안으로 들어가는 거란다. 지금 이곳에 없는 모든 사람은 모두, 파도의 품에 있어.
    그럴싸하지? 우습게도 라틴어로 ‘Unda’라는 뜻이 ‘파도’래. 공은 마치 너의 분신 같아. 내가 조금이라도 비워진 느낌이 들 때면 공의 얘기로 다시 충만해지거든. 나를 만나기 전의 공의 과거는 마치 내 전생 같아. 누군가를 알고 만나 정답게 되어 좋은 건 그의 역사를 훔쳐볼 수 있다는 점인 것 같아. 내가 아닌데 이미 내가 되어 가는 자의 역사는 설핏 내 전생처럼 느껴지거든. 연인이 되어 준다는 건 서로의 전생이 되어 주는 것이 아닐까. 나로 인해 유통되는 누군가의 역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매우 행복해. 미안하지만 너와는 그럴 수 없었잖아. 너는 나였으니까. 나는 너였으니까. 기억나니? 어머니가 매일 밤 찬장에서 철제함을 꺼내어 와인에 무언가를 타 마시던 걸. 나는 그것이 아버지의 뼛가루라고 생각했어. 아버지를 죽였다고 생각했었거든. 나는 집을 나와 한참 동안 그 가루를 콧속으로 넣어댔지. 그러다가 공을 만나게 됐고. 아직도 나는 그게 아버지의 유골이려니 생각해. 어머니를 미쳐버리게 한 자. 한 번도 카르멘이 되어 본 적 없는 여자. 사랑에 빠져 차라리 진짜 미쳐버리는 쪽을 택하게 만든 자의 뼛가루.

 

    자, 여기 아버지의 편지가 있어. 내가 대신 네게 전해. 사실 공을 만나고 아이를 낳고 소도시로 여행을 갔으며 타인의 역사를 몸에 바르며 살아왔다는 모든 말은 다 거짓이야. 대신 아버지를 찾았지. 어머니가 남겨준 유품을 타 먹고 흡입하고 주사까지 넣으니 진정 그가 나타나더군. 사실 아버지는 공이었어. 거리에 공과 같은 사람들은 무척이나 많았어. 나는 수많은 그들을 빠빠PAPA라고 불렀어. 그리고 그들 앞에서 옷을 벗고 끊임없이 중얼거렸지. 빠빠, 빠빠, 빠빠………. 이걸 읽고 있을 때쯤, 나는 해변이 길게 뻗어 있는 멋진 바다에 있을 거야. 이라는 시를 아니? 애초에 그런 시는 없어. 산다야. 나를 살아. 나를 대신 살아 줘. 부탁할게.

 

 

    @ 발신자: 아버지
    @ 수신자: 운다, 그리고 산다

 

    내 뼈를 먹은 자를 나는 안다. 야금야금. 아니지, 실은 마신 거지. 나는 불바다에 갇혔었으니. 내 육체는 소진되고, 뼛가루만 남았다. 그걸 물에 타 마신 여자를 나는 안다. 알고 있다. 나의 뼛가루를 탕진한 여자를. 탕진하듯 고아 마신 여자를. 때때로 와인에 넣고 변비약이나 다이어트약 먹듯 가루를 타 마신 여자를 나는 알고 있다. 그녀는 내 옆모습을 좋아했다. 내 어깨와 승모근을 좋아했다. 뒷짐 지고 걸을 때나 택시를 부를 때, 좌우로 나란히 하듯 곧추 올라선 나의 어깨뼈와 삼두박근을 좋아했다. 당신, 교통경찰이야? 하고 물어 온 그녀를 나는 알고 있다. 그것밖에 모른다, 실은. 그녀의 이름도 까마득하다. 실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그녀의 입술을 기억한다. 그녀가 내게 물어 오던 질문이 기억난다. 당신, 교통경찰이야? 하고 잘근잘근 깨물던 입술을 처음 보았다. 내가 그녀를 처음 봤을 때 처음으로 읽혔던 건 입술이었다. 그녀는 손톱 거스러미를 한참 뜯고 있었다. 바짝 마른 입술을 침으로 덧바르던 그녀의 표정을 알고 있다. 그녀가 각도기 모양으로 다리를 벌리고 있던 것을 알고 있다. 고양이처럼 등뼈를 곧추세우고 비명을 지르던 것도 알고 있다. 기억한다. 기억이 난다. 까마득하다. 내 앞에서, 나만 보는 데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 자리에 객체는 나뿐이었던 것을 알고 있다. 그때는, 그곳에, 나밖에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녀를 보던 사람이 오직 나뿐이었던 때를 나는 알고 있다. 기억한다. 기억이 난다. 까마득하다. 바짝 잘린 수염이 그녀의 음부에 닿을 때 느끼던 감촉을 알고 있다. 기억한다. 기억이 난다. 까마득하다. 어슴푸레하다. 닿을 수 없다고 느낀다, 이제는, 감당하기 힘들다, 도저히. 기억이 안 난다, 감촉이, 생김새가, 너의 음부는 마름모꼴이면서, 쪼그라든 심장 모양이면서, 빅밴드가 지나간 수풀이면서, 놓고 간 악기들이면서, 엄포를 놓는 자의 옆모습이면서, 우는 형상의 기울기면서, 침 자국이다. 나는 그녀가 흘린 침 자국을 기억한다. 자고 일어난 그녀의 옆모습에 허옇게 분명 있었다. 그녀가 흘린 침이 내 팔뚝에 고스란히 남겨졌던 때를 알고 있다. 그때는 다소 오래된 것 같다. 많은 시간이 지났다고 나는 판단한다. 태고 적보다 더 오래된 것 같다. 이제는 말끔하다. 그녀가 흘린 침 자국도 사라졌다. 나의 뼛가루를 와인에 타 마신 그녀를 알고 나서야 기원전에서 기원 이후로 바뀐 것같이, 나는 그녀를 알고 있은 지 너무도 오래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야 나는 그녀를 알고 있다는 착각이 든다. 아니지, 실은 착각했었다. 나만이 그녀를 알고 있다는 착각. 그것은 기원전이었던 것 같다. 시원의 이전이었지 않았나 하는 오만한 태도를 보이며 나는 그녀를 알고 있다고 판단한다. 나는 그녀를 안다. 그녀가 누구인지 안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안다. 그녀의 표정을 안다. 눈빛을 안다. 그녀가 떠나보낸 침 자국을 안다. 침으로 그려진 그녀의 지도를 안다. 그녀가 발라 놓은 침 자국을 안다. 그녀에게 흩뿌렸던 나의 지도들을 안다. 사정과 동시에 파멸하는 우리의 지도를 안다. 아침이 되면 모든 게 사라지는 메커니즘을 안다. 부정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누군가가 악마의 침이라 발설한 것이 그녀의 방 모서리 어디쯤에 있었던 걸 알고 있다. 기억이 난다. 그녀의 몹쓸 곳에 가득 찬 거미줄을 안다. 알고 있다. 돌돌 말아 삼켰던 나를 알고 있다. 그것은 나였다. 나였으리라. 나밖에 없었다고 착각한 적이 있었다. 그랬던 시기를 안다. 나밖에 없었다고 믿고 싶었던 때가 있었음을 나는 안다. 내 몸이 알고 있다. 내 팔뚝에 가득했던 그녀의 자국을 알고 있다. 그녀가 베고 누웠던 나의 팔뚝이 존재한다. 기억이 난다. 기억하고 싶지 않아도 기억이 난다. 어슴푸레하게. 안개가 걷히고 악마의 침도 걷히고 침대 정 가운데서 바라보던 각도기같이 벌린 네 다리를 알고 있다. 안다. 나니까 안다. 나였으므로 안다. 나였기 때문에 알고 있다고 착각한다. 그것을 나만 볼 수 있었던 때가 온전히 있었음을 안다. 나는 그녀 때문에 내가 살았던 기록을 발췌할 수 있음을 안다. 나의 흔적이 그녀의 음부에 남겨졌음을 안다. 그랬던 시기가 존재했고, 그렇기에 우리의 아이가 아직 서른 살밖에 안 됐다는 것이 음울하다. 의아하다. 이 세계가 탄생한 지 삼십 년밖에 안 됐다는 것이 서글프다. 시원의 이전이었던 것 같은데, 나의 시초가 삼십 년밖에 되지 않았음이 의아하다. 내 아이들이 태어난 지 고작 삼십 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건 이상하기 그지없다. 나는 그녀를 통해 내가 그곳에 있었음을 알게 됐는데, 나는 죽은 지 너무도 오래된 것 같은데, 그녀가 나를 죽였나. 그건 아닌데. 나는 죽었나. 그렇지. 그녀가 더 이상 나를 보고 있지 않으므로 나는 죽었다. 나는 안다. 내가 죽었는지 알고 있다. 내 옆모습을 좋아했던 그녀가 없기 때문에 나의 옆모습은 존재할 수가 없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내 승모근도, 어깨뼈도, 삼두박근도, 그녀가 없으므로 없다. 부당하지만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어디 갔나. 나도 모른다. 나는 그녀를 아나? 모른다고 할 수 있다. 분명 알았던 적이 있었다. 명징하다. 그것만은 사실이다. 그것을 증명할 우리의 아이들이 아직 살아 있다. 아이들은 태어난 지 삼십 년이 됐다. 그들은 나의 자식들이다. 나의 유전자를 빼다 박은 나의 아이. 둘째 아이는 나와 똑같다. 오른쪽 종아리 근육이 더 부각되고, 구레나룻부터 턱까지 내려앉은 수염의 모양새나, 왼쪽 쌍꺼풀이 더 짙은 것과 연한 갈색의 동공이 다른 이들보다 크다는 점과, 콧대의 기울기, 내력과도 같은 습관, 앉는 자세, 음식을 잘못 씹어 생기는 질환과, 나이가 들수록 패어 가는 주름의 곡선과, 머리카락이 빠져 가는 모양새, 여자를 대하는 태도, 사정할 때 내는 특유의 소리, 내력과도 같은 정액. 이 모든 게 나와 닮았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증명해 보려 한 적은 없지만 분명히 나의 유전자를 빼다 박은 것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나와 그녀는 최소한 12개월 이상의 시간을 함께 보냈다. 보냈을 것이다. 잘 모르겠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죽은 지 너무 오래된 것 같다. 나는 죽었다. 그녀가 없으므로 나는 이곳에 없다. 없는 것 같다. 당신, 살아 있어? 하고 그녀가 내 방문을 금방이라도 열 것 같다. 이곳에 있는 그녀가, 이곳에 없는 내게로 올 것 같다. 금방이라도 까무러칠 듯 비명을 지르며 등뼈를 곧추세우며 기어올 것 같다. 내게로. 나는 여기 없다. 그녀는 여기 있나? 여기는 어디인가. 내가 있는 곳이 여기고 이곳이 아닌가? 나는 누군가. 나는 나를 나라고 말할 수 있나? 그녀가 없으면 나도 없다. 나는 없다. 없는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아니다. 하나 아이들은 잘 자라고 있다. 벌써 삼십 년이 지났다. 그녀와 내가 다른 곳에 머물게 된 지도. 그렇다면 그녀는 어디 있나. 아이들과 함께 있을까. 아이들은 어디 있나. 나는 아이들과 있나? 없다. 그녀가 없기 때문에 나는 아이들과 함께 있지 않다. 아이들 곁에는 그녀가 있나? 잘 모르겠다. 그녀를 본 지 너무나 오래된 것 같다. 그녀를 처음 읽었던 입술이 생생한데, 그것 말고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어째서일까. 나는 없기 때문이다.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사정을 하지 않은 지 너무도 오래되었다. 그래서 내 사정을 알 길이 없다. 그녀의 질 속이 아니면 사정할 곳이 없었다. 시원 이전부터 그래 왔던 것 같다. 아닌가. 그 전에 다른 누군가를 만났을 수도 있었겠지.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은 없다. 그녀가 처음 내게 말을 걸어 왔을 때부터 나는 존재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명징하다. 말끔하다. 그렇다면 지금은? 아이들은? 그녀는? 여기는? 나는? 어디지? 모른다. 중요한 건 무언가가 종료되었다는 점이다. 분명히 종료되어 모든 게 사라졌다는 점이다. 아이들은 자라고 있다. 하나 볼 수 없다. 나도, 그녀도, 우리 모두 신기루가 되어버렸다. 이상하리만치 짧고도 아주 긴 신기루. 그게 전부인 신기루가 종료되었다. 문을 닫았다. 우리는 어떤 공간 안에서 태어났다가 사장됐다. 관 안에 묻혔다. 이 공간은 문을 닫았으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어떤 것도 명확하지 않다. 중요한 건 무언가가 종료되었다는 점이다. 이 공간은 더 이상 열리지 않는다. 개폐될 수 없다. 아무것도 다시 시작되지 않는다. 이야기는 끝이 났다. 마침표를 찍은 지 너무도 오래된 것 같다. 그러므로 여기에, 이곳에, 라는 말은 쓸 수가 없다. 여기는 없고, 저기도 없고, 우리는 신기루니까. 내게 그녀는 신기루였고, 그녀가 사라졌으니 나 또한, 내 옆모습과 승모근과 삼두박근과 교통경찰이었을지도 모르는 나의 직업과 내가 사정할 때 내는 소리와 그녀가 좋아했던 특유의 표정과 종아리 근육은 다 없었던 소재에 불과한 셈이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있다. 지금 있다. 말하고 있다. 이야기를 꺼내고 있다. 그녀가 존재했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녀를 알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녀라는 사람을 안다고, 그녀의 얼굴과 똑 닮은 첫째 아이가 있다고, 지금도 잘 크고 있다고, 나는 말하고 있다. 이야기를 꺼내고 있다. 나는 지금 있다. 그렇다면 분명히, 그녀도,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내가 있으므로 그녀도 있다. 그녀는 분명 있다.

 

 

 

    《문장웹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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