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희 시인(2013) 사랑은 - 이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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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년감수(十年感秀)_

 

 

  사랑은

 

   이승희

 

 

 


   스며드는 거라잖아.
   나무뿌리로, 잎사귀로, 그리하여 기진맥진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마른 입맞춤.

 

   그게 아니면
   속으로만 꽃피는 무화과처럼
   당신 몸속에서 오래도록 저물어가는 일.

 

   그것도 아니면
   꽃잎 위에 새겨진 무늬를 따라 꽃잎의 아랫입술을 열고 온 몸을 부드럽게 집어넣는 일. 그리하여 당신 가슴이 안쪽으로부터 데워지길 기다려 당신의 푸르렀던 한 생애를 낱낱이 기억하는 일.

 

   또 그것도 아니라면
   알전구 방방마다 피워놓고
   팔베개에 당신을 누이고 그 푸른 이마를 만져보는 일.

 

   아니라고? 그것도 아니라고?

 

   사랑한다는 건 서로를 먹는 일이야
   뾰족한 돌과 반달 모양의 뼈로 만든 칼 하나를
   당신의 가슴에 깊숙이 박아놓는 일이지
   붉고 깊게 파인 눈으로
   당신을 삼키는 일.
   그리하여 다시 당신을 낳는 일이지.

 

–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창비, 2006)에 수록

 

 

   추천하며

 

   사랑이 존재론적인 사건인 까닭은 그것이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을 이전과는 전혀 다른 존재로 만들기 때문이다. 사랑을 앓는 사람의 마음과 신체는 이미 그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랑은 오직 자신을 잃어버릴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으며, 그런 사람만이 사랑을 말할 수 있다. 사랑은 스며드는 것이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나’는 ‘너’의 일부가 되고, ‘너’는 ‘나’의 일부가 된다. ‘너’의 삶을 살아 보지 않아도 ‘너’의 한 생애를 기억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그리하여 사랑은 “서로를 먹는 일”이다. ‘나’는 ‘너’의 가슴에 빠지지 않는 칼을 단단하게 박아 넣고, ‘나’는 너를 기꺼이 삼킨다. 그리하여 다시 ‘당신’을 낳는다. 그래서 사랑은 때로 한 사람의 존재감을 상실케 하는 잔인한 사건일 수도 있다.

(문학평론가_고봉준, 김나영, 김영희, 양경언)

 

 

   《문장웹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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