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의 축 - 김애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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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의 축

 

김애란

 



  


*

 

  새벽. 평소보다 일찍 잠에서 깬 기옥 씨는 줄기차게 천장만 바라보다 부엌을 향해 모로 누웠다. 그러곤 다시 꼼짝 않고 어둠 속 한 점(点)을 응시했다. 동틀 무렵이라곤 하나 대낮에도 볕이 들지 않는 기옥 씨네 집은 여전히 깜깜했다. 이 시각 기옥 씨네 집에서 형체를 드러내고 있는 건 저기 식탁께서 빛나고 있는 빨간 불빛이 전부였다. 기옥 씨는 아까부터 그걸 보고 있었다. '보온'이란 글자 옆에 박힌 동그란 전원 표시등이었다. 오래 전에도 기옥 씨는 혼자 잠에서 깨 공장 식구들 틈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면 이렇게 한참 밥통 불빛을 바라보곤 했다. 그러면 이상하게 차분하니 좀 쓸쓸해져 마음의 캄캄함을 견딜 수 있어서였다. 밥통 불빛은 사람이 공복(空腹)시 자신의 식욕으로부터 느끼는 거리와 비슷한 자리에서, 가까운 듯 멀고 또렷한 양 어슴푸레 빛났다. 누군가 발 딛은 땅이되 전체를 안아볼 수 없는 행성의 둘레로, 허기(虛氣)의 크기로, 마냥 그렇게.

 

  알람이 울리자 기옥 씨가 자리에서 일어나 불을 켰다. 순간 메마른 형광등 아래로 한 가계의 남루와 수치가 한꺼번에 드러났다. 취향도 계통도 없이 어지러이 놓인 세간도 그렇고 애석하다 못해 어딘가 참혹한 느낌을 주는 기옥 씨의 머리도 그랬다. 몇 달 전부터 정수리의 숱이 줄기 시작했는데 이제는 손에 잡히는 게 얼마 안 될 정도로 휑뎅그렁한 상태가 되었다. 미장원에서는 흔한 스트레스성 탈모라 했지만 그걸 뭐라 부르든 50대 중반의 여자가 감당하기 쉬운 증상은 아니었다. 기옥 씨는 베갯잇서 무심히 머리카락 한 올을 떼어냈다. 그러곤 며칠 전 버스에서 마주친 여학생의 표정을 떠올렸다. 근처 정류장에서 여중생 무리가 왁자지껄 버스에 올라탔는데 그중 한 녀석이 기옥 씨를 보고 자기도 모르게 '어머' 소리를 낸 거였다. 그 아이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눈치를 살폈지만 짧은 신음 속에 담긴 탄식과 연민 그리고 경악의 감정은 고스란히 기옥 씨에게 전달됐다. 학생들은 서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뭔가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방금 전 그 여중생이 눈썹 근육을 이용해 제 친구들에게 '이 여자 좀 봐' 하는 식의 신호를 보냈다. 딴에는 악의 없이, 보기 드문 광경이니 같이 보잔 뜻이었다. 이윽고 그때까지 창밖만 보던 기옥 씨가 찬찬히 고개 들어 그 아일 빤히 올려보았다. 그러곤 책망도 질타도 아닌 투로 한마디 했다.

  "뭐 그럴 것까지야."

 

  창밖에서 익숙한 기계음이 났다. 용역업체의 오토바이가 한겨울 사냥 나온 개처럼 가쁜 입김을 내뿜으며 가르랑거리는 소리였다. 기옥 씨는 커튼을 걷고 방 안을 환기시켰다. 골목에서 한 노인이 오토바이 뒤 칸에 쓰레기봉투를 싣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곧이어 음식물종량제쓰레기봉투에서 새어 나온 구정물 냄새가 청량한 새벽 공기를 타고 기옥 씨네 집까지 들어왔다. 간밤, 잠을 설친 도시가 찌뿌둥한 얼굴로 기지개를 켜며 내는 구취(口臭)였다. 기옥 씨는 부엌으로 나와 홍화씨가 섞인 보리차를 반 컵 마시고, 보일러의 '온수' 단추를 눌렀다. 20년 넘은 보일러는 따로 독립된 공간이 아닌 부엌 한쪽에 설치미술처럼 걸려 있었다. 그게 거기 있음 안 되는데. 그게 거기 있음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을 동정하고 나무라는 식으로, 난해하게. 기옥 씨는 티셔츠를 벗고, 커다란 면 팬티만 입은 채 욕실에 쪼그려 앉았다. 집에 아들 녀석이 없는 데다 씻다 보면 옷이 젖어 하는 수 없었다. 어젯밤 빨아 놓은 브래지어는 안방 문고리에 걸려 있었다. 뽕도 와이어도 없는 게 뜻밖에 화려하기도 해 이름을 알 수 없는 이국의 꽃들이 무더기로 그려진 브라였다. 기옥 씨는 변기에 팔꿈치나 허벅지가 닿지 않도록 주의하며 세탁기 옆 공간에 쪼그려 앉았다. 그러곤 머리 위에 물을 끼얹으며 '영웅이는 지금 뭐 하고 있을까……' 생각했다. 밥은 잘 먹고 있는지. 때리는 놈은 없는지. 보내 준 것은 다 읽어 보았는지…… 하고. 현관에는 기옥 씨가 모아 놓은 폐지가 수북 쌓여 있었다. 지면 곳곳이 네모나게 뻥뻥 오려져 있는 신문조각들이었다. 이웃집 티브이에서는 한복을 입은 기상캐스터가 '황금연휴인 이번 주에는 고기압의 영향으로 전국적으로 맑고 쾌청한 날씨가 이어질 거'라는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건넛집, 고속버스터미널 매표소에서 일하는 스무 살 아가씨는 누렇게 뜬 얼굴로 양치 중이었고. 옆집 젊은 아기 엄마는 어제 종일 은행 창구에서 '진상' 손님에게 시달린 탓에 전도 부치기 전에 녹초가 돼 있었다. 불편한 친척들을 피해 일찌감치 영업 나온 택시기사나, 대목을 기다려 온 이발사는 좀 나은 표정이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연휴란 크게 반길 만한 일이 못 되는 듯했다. 그리고 그건 기옥 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오늘 같은 날에는 영종도로 사람들이 엄청나게 몰리니까. 그러면 기옥 씨가 할 일도 평소보다 몇 배로 늘어나게 마련이니까 말이다. 기옥 씨는 눈을 감고 정수리에 몇 번 더 물을 부었다. 머리 모양이 조금이라도 풍성해 보이기 위해 린스는 하지 않았다. 이윽고 기옥 씨의 흰 머리카락이 쪼르륵─ 하수구 속으로 회오리쳐 나갔다. 지구가 자전하는 방향과 같은 쪽을 향해서였다. 세계는 전보다, 또 방금 전보다 푸르게 묽어지고 있었다. 예고도, 추가수당도 없이 계속된 연장근무에 급기야 공휴일인 오늘까지 일터에 나가야 되는 위층 여자가 '이번에는 정말 그만둘까' 고민하며 끄응─ 돌아누울 즈음. 밤새 오락을 하다, 우연히 관련 기사를 보게 된 그녀의 초등학생 아들이 '백화점 이 개새끼들' 하고 댓글을 다는 사이. 해가 뜨고 어둠이 물러가며 연휴의 첫째 날이 시작되고 있었다. 도시의 한산했던 도로 위론 어느새 피가 돌듯 차가 돌고 있었고……. 기옥 씨네 골목 어귀에서도 새벽의 귓불을 퉁기고 가는 자전거 벨소리가 들려왔다. 추석이 내일이었다.

 

 

*

 

  공항은 황금연휴 동안 해외로 떠나려는 이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사람들은 세부로, 파타야로, 홍콩으로, 드물게는 팔레스타인이나 카자흐스탄, 이집트로 가기 위해 국제선 게이트에 모여 있었다. 천장이 높은 여객터미널은 이들이 발산하는 엷은 흥분과 피로, 수다로 왕왕거렸다. 탑승동과 교통센터, 주차장도 마찬가지였다. 뉴스에서는 이번 명절에 해외로 나가는 사람이 45만 명에 이를 거라고 했다. 평일 인천공항 출국자가 3만 명쯤 되니 실로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하지만 이런 역동적인 풍경과 달리, 멀리 바깥에서 본 인천공항의 모습은 고요하기만 했다. 공항리무진버스에서 소리가 소거된 채 나오는 연합뉴스화면마냥 그랬다. 허허벌판 섬 한쪽에 외따로 핀 문명의 꽃이라 그런 듯했다. 현대의 복잡하고 거대한 시스템이 정적(靜的)으로 평화롭게 돌아갈 때, 그 무탈함이 주는 이상한 압도, 안심, 혹은 아름다움 같은 것이 공항에는 있었다. 사람들은 그걸 길게 뻗은 고속철도나 우아한 현수교, 송전탑에서도 느꼈다. 시커먼 타이어 자국이 밴 활주로 사이로 휘이─ 시원한 가을바람이 지나갔다. 정차된 항공기들은 모두 앞바퀴에 턱을 괸 채 눈을 감고 그 바람을 느끼고 있었다. 어느 나라에서 불어와 어떤 세계로 건너갈지 모르는 바람이었다. 몇몇 항공기는 탑승동 그늘에 얌전히 머리를 디밀은 채 졸거나 사색 중이었다. 관제탑 너머론 이제 막 지상에서 발을 떼 비상하고 있는 녀석도 있었다. 딴에는 혼신의 힘을 다해 중력을 극복하는 중일 테지만 겉으로는 침착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얼마 뒤 녀석이 지나간 자리에 안도의 긴 한숨 자국이 드러났다. 사람들이 비행운이라 부르는 구름이었다.

 

  가을이라, 공항 곳곳의 격자무늬 창에도 농익은 햇살이 쏟아졌다. 건물 전체가 큼지막한 통유리로 싸인 공항 내부는 아낌없이 달린 형광등 덕에 이미 빛으로 꽉 차 있었지만, 쨍쨍한 듯 그윽한 가을볕은 나름대로 광채를 더해 주고 있었다. 말 그대로 하도 밝아 터질 듯한 명도(明度)였다. 인천국제공항은 내장이 훤히 비치는 물고기마냥 유려한 곡선과 과감한 직선을 바탕으로 세련되게 설계돼 있었다. 특히 여객터미널은 5만 장 이상의 유리가 사용돼 하늘과 최대한 가깝게, 하늘과 통하게끔 지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좀 더 투명하라고, 좀 더 반짝이라고, 매일매일 수백 명의 사람들이 공들여 일하고 있었다. 탑승동에만 약 500명, 공항 전체로 따지면 700여 명에 달하는 청소노동자들이 그들이었다. 기옥 씨는 그중 한 명이었다.

 

  청소는 3개조로 나뉘어 24시간 내내 이뤄졌다. 기옥 씨는 오후 1시부터 9시 반까지 일했다. 여객터미널 3층에 있는 여자 화장실 두 개가 기옥 씨의 담당구역이었다. 전에는 남자 화장실도 여자들이 맡았지만, 식겁하는 외국인이 많아 성별로 나눴다는 게 조장의 설명이었다. 기옥 씨는 세면대와 변기, 바닥과 거울 위를 '이제 막 닦아낸 것처럼' 만들어 놓아야 했다. 많은 사람들이 쉴 새 없이 오가는 공간에서 바로 그 '드나듦의 흔적'을 없애는 것. 이것이 공항 청소의 핵심이었다.

 

  기옥 씨는 오늘 오전, 전단지 아르바이트를 쉬었다. 며칠 전 업체에서 '그날도 할 수 있느냐'는 전화가 왔을 때 망설이다 '어렵겠다' 말해 둔 덕이었다. 딱히 할 일이 있는 것도, 갈 데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굳이 명절 때까지……' 싶어 둘러댔던 거다. 그리고 기옥 씨는 그 선택이 마음에 들었다. 같은 알바 자리를 두고 경쟁중인 10대 아이들이 내심 의식됐지만. 자신이 이 세상의 풍습에 속하고, 풍속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게 좋아서였다. 기옥 씨에게는 요즘 그런 게 필요했다. 때가 되면 중년들이 절로 찾게 되는 글루코사민이나 감마놀레산, 혹은 오메가3처럼……. 몸이 먼저 알아채 몸이 나서 요구하는 것들이. 이를테면 설에는 떡국이, 보름에는 나물이, 추석에는 송편이, 생일에는 미역국이, 동지에는 팥죽이 먹고 싶다는 식의. 그래야 장이 순해지고, 비로소 몸도 새 계절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 같다는, 어느 때는 너무 자명해 지나치게 되는 일들이 말이다. 제사는 조상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지내 줘야 했다. 기옥 씨는 음식으로 자기 몸에 절하고 싶었다. 한 계절, 또 잘 건너왔다고.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고. 시간에게, 자연에게, 삶에게 '내가 네 이름을 알고 있으니, 너도 나랑 사이좋게 지내보자' 인사하듯 말이다. 기옥 씨는 그걸 '말'이 아닌 '감'으로 알았다. 그래서 오늘 상가와 주택가를 돌며 대출 전단지를 돌리는 대신, 방을 닦고 장을 보고 떡쌀을 불린 거였다. 기옥 씨는 해마다 해오던 걸 올해도 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웃에 음식 냄새를 풍기고 싶었다.

 

  기옥 씨는 아침 내 나물이며 잡채 등의 밑 작업을 했다. 재료를 불리고, 다듬어 놔야 내일 바로 쓸 수 있어서였다. 잡다한 부엌일을 마친 뒤에는 큰 솥에 고깃덩어리를 넣고 팔팔 끓였다. 한우와 오래 저울질하다 고른 값싼 미국산 쇠고기였다. 양지가 한소끔 끓어오르자, 기옥 씨는 가스 불을 약하게 줄여 뜸을 들였다. 그러곤 묵은 밥을 랩에 싸 냉동실에 넣고 새 쌀을 안쳤다. 잇달아 설거지를 하고, 음식쓰레기를 정리하고, 행주를 삶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더 이상 할 일이 없자, 그때서야 거실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두서없이 티브이 채널을 돌리며 시간을 때우다 봄 가스 불 끌 시간이 될 것 같아서였다. 화면에선 틀에 박힌 추석특집 프로그램과 뉴스, 철지난 외화가 방영되고 있었다. 이 채널에서는 '이 시각 도로 상황'이, 저 채널에서는 족두리를 쓴 채 트로트를 부르는 필리핀 아가씨가, 다른 방송에서는 샅바 찬 아이돌 가수가 나오는 식이었다. 기옥 씨는 옆에 있던 두루마리 휴지를 머리에 베고 옆으로 누웠다. 그러곤 다시 무료하게 이리저리 채널을 돌렸다. 집 안 가득 더운 김이 차 그런지, 간만의 짧은 휴식이 기꺼워서 그런지 자꾸 눈이 감겼다. 그리고 얼마 뒤, 밥솥에서 치이익─ 증기가 배출되는 것도 모른 채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햅쌀에 찹쌀을 섞은 거라 잠결에도 밥 냄새가 달았다.

 

  기옥 씨가 눈을 떴을 땐 이미 버스 탈 시간이 훌쩍 넘어서 있었다. 기옥 씨는 화들짝 일어나 가스레인지 불부터 끄고 출근 준비를 했다. 일부러 새로 한 밥은 정작 한 술도 못 뜨고였다. 화장은 선크림과 립스틱만으로 1분 만에 해치웠다. 복장은 아울렛에서 산 만 원짜리 등산 티에 바람막이 점퍼면 족했다. 기옥 씨는 머리를 다 덮어 주는 챙 넓은 모자를 쓰고, 구찌 로고가 어지럽게 새겨진 손가방을 든 채 현관을 나섰다. 누가 봐도 어딘가 안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하지만 기옥 씨는 구찌가 구찌인 걸 몰라 가짜가 가짜인 줄 몰랐다. 가판에서 몇 번 들어 본 뒤 싸고 가벼워 택한 데다, 공항에서 비슷한 걸 봐도 삼선슬리퍼의 삼선 띠처럼 한국에서 유행하는 보편적인 원단이려니 했던 거다. 기옥 씨는 '아, 참! 밥통의 밥을 젓고 나왔어야 하는데……' 안타까워하며 계단을 바삐 올랐다. 그러면서도 다시 돌아갈 생각은 못 했다. 기옥 씨는 대문 앞을 지나다 우편함에 뭔가 희끗한 걸 발견했다. 보나마나 고지서겠거니 싶어 그냥 가려는데, 유인물 때문에 집이 빈 것처럼 보이면 안 좋을 것 같았다. 지금은 여자 혼자 사는 집이니 더 그랬다. 기옥 씨는 발길을 돌려 우편함 앞으로 다가섰다. 기옥 씨의 손에 대형 마트의 추석맞이 폭탄세일 광고지와 아울렛매장 할인쿠폰, 그리고 최근 제2금융권에서 만든 신용카드 사용내역서가 들려 나왔다. 공휴일인 오늘 왔을 리는 없고, 아무래도 어제 오후쯤 도착한 것을 어두워서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기옥 씨는 '그럼 그렇지' 하고 우편물을 주르륵 넘겨 봤다. 그런데 전단지 틈에 낯선 봉투 하나가 끼어 있었다. 시중에서 흔히 쓰는 흰색 규격 봉투였다. 기옥 씨는 '보낸 사람' 이름을 먼저 살펴보았다. 기옥 씨가 아는 이름이었다. 기옥 씨는 제자리에 서서 그걸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러곤 뭔가 망설이다, 손에 쥔 우편물들을 전부 가방에 넣고 버스정류장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반가움인지 불안함인지 모를 감정에 뛰는 내내 가슴이 쿵쿵거렸다.

 

  기옥 씨가 사무실에 도착한 건 1시가 좀 넘어서였다. 관리자에게 이미 한 소리를 들은 터라 기옥 씨는 후다닥 유니폼을 갈아입었다. 그러곤 따로 챙겨온 머릿수건을 꽉 조여 맸다. 작업복 가슴 한쪽에는 기옥 씨가 지금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려주는 그림이 조그맣게 박혀 있었다. 얼핏 보면 구름 같고 다시 보면 태극 문양 같은 공항공사 로고였다. 그것은 누군가를 어디로든 데려다줄 날개처럼 날렵하고 영험해 보였다. 동시에 바람이랄까 추위랄까 하는 것도 자연스레 떠오르게 해, 직원들에게 옷깃을 단단히 여미라고 일러주는 듯했다. 안 그랬다가는 감기도 감기지만, 기압골마냥 조그맣게 응축된 로고에서 회오리쳐 나오는 감정을 어쩌지 못해 가슴에 외풍(外風)이 들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기옥 씨는 바퀴 달린 청소도구함을 끌고 첫 번째 화장실로 향했다. 맞은편에서 미니스커트 차림의 아가씨가 킬힐을 신고 위태롭게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한 손에 대형 캐리어까지 잡고서였다. 별로 놀라운 광경은 아니었다. 지각생은 어디에나 있었다. 특히 공항에는 반드시 있었다. 기옥 씨는 '저러다 넘어지진 않을까' 걱정하며 아가씨의 뒷모습을 끝까지 바라봤다. 그러곤 자신의 첫 번째 담당 구역 안으로 사라지듯 쓱 들어갔다.

 

  표지판에 '화장실'이란 단어는 한국어와 영어, 한문과 일본어로 동시에 표기돼 있었다. 아울러 철자를 모른대도 문명화된 지구인이면 누구든 이해할 수 있는 그림이 함께 그려져 있었다. 누가 봐도 명백히 이곳이 '볼일 보는 곳'임을 말해 주는 국제적인 기호였다. 그러나 세계인이 이곳에서 해결하는 건 '볼일'만이 아닌 듯했다. 사람들은 화장실서 뜻밖에 많은 걸 했다. 씻고, 싸고, 버리고, 꾸미는 것은 기본이고 먹고, 울고, 싸우는 일을 비롯해 폭행이나 추행, 폭발물 설치 같은 것까지……. 물론 기옥 씨가 테러범을 실제로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언젠가 남자 화장실에서 소총용 실탄과 해상 조명탄이 발견돼 난리가 났었단 얘기는 알고 있었다. '왜 하필 화장실인가' 동료들은 투덜댔지만, 따지고 봄 거기 말고 따로 둘 데도 없을 듯했다. 뭔가 버리게끔 만들어진 공간에다 진짜로 뭔가 버리고 가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일도 없을 테니 말이다. 기옥 씨는 고무장갑을 낀 채 입구 쪽에 청소도구함을 세워 놓고 하루 업무를 시작했다. 노란색 청소도구함에는 탈취제와 락스, 싹3, 걸레, 휴지 따위가 실려 있었다. 세제의 양과 종류, 쓰임은 모두 공사 내 시설환경팀에서 정해 줬다. 하지만 기옥 씨에게 월급을 주는 곳은 용역회사였다. 그래서 기옥 씨는 용역회사 쪽 사정과 공항공사의 상황을 두 개 다 잘 몰랐다. 그리고 그건 회사가 바라는 바이기도 했다.

 

  화장실 안은 사람들로 붐볐다. 명절 즈음 고속도로휴게소에 늘어선 '볼일' 인파만큼은 아니나, 웬만해서 줄을 서는 일이 없는 통로에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을 정도니 그만하면 많은 거였다. 기옥 씨는 능숙한 동작으로 거울의 얼룩을 지우고, 바닥을 닦고, 핸드타월 함에 재생지를 채우며 주위를 정리했다. 모두 고개와 어깨, 허리와 무릎을 굽혀 가며 해야 하는 일이었다. 기옥 씨가 세면대를 닦는 동안 거울 앞에서는 한 여고생이 눈을 가늘게 뜬 채 마스카라를 덧칠하고 있었다. 얇은 카디건 안에 민소매 티를 입은 걸 봐 곧 더운 나라로 떠날 모양이었다. 그 옆에는 진작 화장을 고친 또 다른 아가씨가 양 볼을 크게 부풀린 채 셀프카메라를 찍고 있었다. 기옥 씨는 혹시라도 자기가 배경화면에 나오지 않을까 얼른 자리를 피했다. 그러곤 속으로 '대체 자기가 오줌 누는 데서 사진을 박는 이유는 뭘까' 의아해했다. 하지만 잡념도 잠시, 할 일은 계속해서 늘어 갔다. 기옥 씨는 작은 양동이에 변기 솔과 수세미, 세제 등을 담아 화장실 칸칸을 돌았다. 사람이 들고 나는 순서가 일정치 않아 차례를 잘 외워 두지 않으면 동선이 꼬이기 쉬웠다. 기옥 씨는 칸마다 휴지통을 비운 뒤 좌변기 안쪽을 변기솔로 구석구석 닦았다. 손이 잘 닿지 않는 곳엔 칫솔질을 했고, 도기 겉면은 스펀지로 문지른 뒤 마른걸레질을 한 번 더했다. 칸 너머서, 승객들이 고독하게 일을 보는 동안 문 밖에서는 각양각색의 캐리어가 충견처럼 오도카니 선 채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좌변기 앞 공간이 꽤 넓어도 그 안에 다 못 들어가는 가방들이 있었다. 그것들은 기옥 씨가 통로를 닦을 때 종종 방해가 됐다. 기옥 씨는 장신구가 많이 달린 일본 아가씨의 트렁크와 진짜 가죽으로 된 누군가의 명품 캐리어와 20킬로그램도 넘는 등산용 배낭을 피해 요령껏 대걸레질을 했다. 그리고 자신의 크고 작은 배려에, 각자 자기네 고장 사투리로 '오브리가도(Obrigardo)'라 하거나 '컵─프라 쿤 크랍(?????????????)'이라 하거나, '씬 다 따(Xin đa t?)' 또는 '블라가다류 바쓰(Благодарю вас)'라 말하는 외국 여자들 앞에서 어색하게 웃었다. 지역별로 미묘하게 다를 억양과 발음을 고려해, 한국말로 바꿔 보자면, '고마워유' '고맙데이' '고마부러라' 정도가 될 테지만. 그런 섬세한 차이를 모른대도, 기옥 씨는 그게 다 '감사하다'는 인사란 걸 알았다. 그들의 눈빛과 표정이 그들의 언어를 번역해 주고 있어서였다. 그럴 때면 기옥 씨도 그녀들에게 뭐라 대꾸해 주고 싶었지만 할 줄 아는 외국어가 없어, 소극적인 목례와 함께 그저 '예, 예' 소리만 했다.

 

  기옥 씨는 청소도구함을 끌고 종종거리며 두 번째 화장실로 향했다. 원래 양쪽 화장실을 10분 간격으로 오가며 살펴야 하는데 오늘은 시간이 더 걸렸다. 기옥 씨는 방금 전과 같이 파우더룸과 장애인룸, 세면대 주위를 정리하고, 통로를 쓸며, 화장실 칸칸을 치웠다. 그런데 오늘 따라 이쪽 화장실이 유난히 지저분했다. 제일 처음 걸려든, 저기 맨 끝 칸부터 그랬다. 기옥 씨는 양동이를 들고 이제 막 누군가 용무를 보고 나온 자리로 들어갔다. 그런데 문을 열자마자 안쪽에서 훅하고 피비린내가 끼쳤다. 방금 전 덩치 큰 백인 여성이 어두운 얼굴로 지나간 자리였다. 어쩐지 눈도 안 마주치고 급히 자리를 뜨더라니. 기옥 씨는 경험상, 가끔은 피 냄새가 똥 냄새보다 역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물론 최악은 '생리 중인 여자가 똥을 누고 간' 경우였다. 기옥 씨는 탈취제를 뿌린 뒤 미간을 찌푸리며 변기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러곤 꽃처럼 활짝 벌어진 따끈한 생리대를 보며 역시 화장실은 여자가 남자보다 더 더럽게 쓴다는 걸 확인했다. '더군다나 휴지도 많이 쓰고 말이지' 기옥 씨가 볼 때 다 쓴 패드를 예쁘게 오므려 놓거나, 배변 후 물을 내리는 건 무척 쉬운 일에 속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쉬운 일'을 안 했다. 기옥 씨가 처음 보는 나랏말로 벽에 낙서를 한다거나, 갓 청소한 바닥을 흙투성이로 만드는 일쯤은 귀여운 축에 속했다. 비행 전 긴장 탓인지 '폭풍설사'를 해놓곤 물도 안 내리고 도망치는 인간이 있는가 하면,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바닥에 금빛 음모만 한 스무 개 떨어트리고 가는 여자도 있었다. 막힌 변기 구멍 안에서 뽀로로의 머리통이나 줄이 엉킨 이어폰, 구형 휴대전화가 나오는 일쯤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국제공항은 본디 별의별 게 다 모이는 데였다. 특히 화장실은 전 세계 사람들의 배설물이 버려지는 곳이었다. 전 대륙의 먼지가 쌓이고, 별 빛깔의 체모가 발견되는 데였다. 음모만 해도 그랬다. 금빛 음모, 은빛 음모, 빨강 음모, 까만 음모, 갈색 음모, 더 갈색 음모……. 뭐가 됐든 전부 기옥 씨가 치워야 하는 것들이었다. 쓰레기통에서 나오는 것들의 종류는 더 다양했다. 기옥 씨는 한 짝만 버려진 등산화를 높이 들어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한참 쳐다본 적이 있었다. 동남아시아 쪽인가? 산호색 바다를 배경으로 찍은 화목한 가족사진이 반으로 찢겨져 있는 걸 두 손으로 다시 합쳐 본 적도 있었다. 날짜를 보니 최근인데 그게 왜 거기 있는지 납득이 안 되는 물건이었다. 분명히 일부러 버린 걸로 보이는 트로피나 기념패, 저자 사인이 들어간 원서가 나온 적도 있었다. 물론 개중에는 버린 것이 아니라 흘린 것, 즉 누군가가 잃어버린 물품도 있었다. 기옥 씨는 그걸 청소함에 잘 보관해 두었다가 사무실이나 유실물센터에 갖다 주었다. 혹은 연락처를 보고 주인을 직접 찾아 주기도 했다.

 

  한 차례 변기 청소를 마친 뒤 기옥씨가 허리를 펴고 복도로 나왔을 때, 세면대 근처에서 한 아이가 토를 하고 있었다. 여섯 살? 아님 일곱 살쯤 됐을까. 찰진 상고머리에 멜빵바지를 입은 남자애였다. 그 옆에선 아이의 엄마로 보이는 여자가 아이 등을 두드려 주고 있었다. 세면대에 물을 계속 틀어 놓은 채였다. 옆에 사람 몇몇이 불쾌한 듯 자리를 피하는 모습이 보였다. 기옥 씨는 재빨리 그쪽으로 다가가 '여기다 이러시면 안 되죠.'라고 말했다. 하지만 애 엄마는 기옥 씨를 한 번 흘깃 쳐다본 뒤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기옥 씨는 기분이 상했지만 최대한 예의를 차리며 '저기 애들 변기 있는데요.'라고 말했다. 애 엄마는 기옥 씨와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이상할 정도로 건조하고 침착한 말투로 '애가 여기서 하는 걸 어쩌라고요' 했다. 아이가 한 번 더 우엑─ 소리를 내자, 아주 작은 양의 토사물이 세면대 위로 쏟아졌다. 기옥 씨가 초조한 듯 하수구를 살폈다. 그런데…… 토 색깔이 좀 묘했다. 다홍색 죽 같은 게…… 왠지 좀 예뻤다고 할까. 기옥 씨가 신기한 듯 잠깐 그것을 보는 사이, 기옥 씨와 애 엄마 사이에 웬 덩치 큰 여자가 들어왔다. 나이도 많고 사연도 좀 있어 보이는 러시아 여자였다. 여자는 흐르는 물에에 한 손만 댄 채, 나머지 한 손으로는 휴대전화를 잡고 큰 소리로 뭐라 떠들었다. 어깨에는 기옥 씨 것과 똑같은 가짜 구찌 가방이 걸려 있었다. 기옥 씨는 흠칫 놀라 '역시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인가' 생각했다. 기옥 씨가 잠시 가방에 정신이 팔린 사이, 애 엄마는 핸드타월을 뽑아 침착하게 아이 입 주변을 닦아 줬다. 그러고는 거울에 자기 모습도 한 번 비춰 본 뒤 아이 손을 잡고 화장실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저기요."

  기옥 씨가 마지못해 그녀를 불렀다. 실은 그냥 보내려다가, 고객의 분실물을 보고도 못 본 척하는 게 도리가 아닌 것 같아 붙잡은 거였다.

  "이거 놓고 가셨어요."

  기옥 씨가 세면대에 있던 종이상자 하나를 건넸다. 살짝 벌어진 틈 사이로 내용물이 보였다. 스무 가지가 넘는 색깔의 신선한 마카롱 세트였다. 한 개에 2천 원이 넘는 과자로 상자 겉면에는 모 호텔 베이커리 상표가 붙어 있었다. 기옥 씨는 그게 '마카롱'이라 불린단 사실을 몰랐지만, 자기 손에 들린 과자가 거의 새 거나 다름없이 꽉 차 있다는 건 알았다. 이윽고 애 엄마가 말간 얼굴로 기옥 씨를 바라보며 말했다.

  "놓고 간 거 아니에요."

 

  이동 중인 기옥 씨 앞으로 '리스킨'이라 불리는 청소차가 지나갔다. 말끔해진 인조대리석 위에 형광 불빛이 화사하게 아른댔다. 쓰레기분리수거를 담당하는 동료 여자는 하루 종일 누군가가 먹다 남긴 음료를 빈 통에 옮겨 담느라 초췌해져 있었다. 공항에서 제일 많이 나오는 쓰레기는 음료수 캔과 병이었다. 전광판 위로 각국의 항공편과 출발 시간, 도착지 정보 등이 일사분란하게 보여졌다. 그것들은 수시로 바뀌고 움직이며 하늘의 상황을 알렸다. 전광판을 매운 알파벳과 숫자는 칠판에 가득 적힌 수학식마냥 복잡한 듯 자명했고, 어딘가 좀 장엄해 보였다. 저 수(數)들이 누군가를 곧 날게 할 터였다. 혹은 이미 누군가를 실어오는 중이거나. 아울러 누군가를 내몰고 묶어두는 일 역시 각국의 식(式)이 하는 일 중 하나일 테였다. 기옥 씨는 두 눈을 찌푸린 채 호주 행 비행기의 정보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문득 한국에서 얼마나 먼 데인지, 또 몇 시간이나 걸리는 나라인지 알고 싶어서였다. 기옥씨는 찬찬히 출발 시간에서 도착 시간을 빼며 이곳에서의 거리를 계산했다. 그러고는 속으로 '먼 데 있는 나라구나……' 중얼거렸다. 그러자 새삼 그 나라의 환율, 풍습, 날씨 같은 것도 궁금해졌다. 기옥 씨가 갈 맘에 그런 건 아니지만 '영웅인 혹시 모르니까……'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사실 '국제'라는 낱말이나 '세계'라는 단어와 관련해 기옥 씨가 아는 건 별로 없었다. 기옥 씨는 오세아니아가 인도양에 있는지 대서양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북미와 남미 중 어느 쪽이 더 큰 대륙인지 알지 못했고, 세상에 몬테네그로 또는 앤티가바부다라는 이름의 나라가 있다는 것 또한 몰랐다. 하지만 그런 기옥 씨도 세상에는 갈 수 있는 나라와 그렇지 못한 나라, 이렇게 두 나라가 존재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뿐 아니었다. 기옥 씨는 눈치껏 내국인과 외국인을 구별할 줄 알았고, 초행자와 베테랑 여행자를 분간해 낼 줄 알았다. 기옥 씨는 동북아시아인 중에서도 한국인과 중국인 일본인을 가려낼 수 있었다. 아울러 그녀는 한국에 '돈 벌러 온 사람'과 '돈 쓰러 온 사람'을 구분할 줄 알았다. 타국에 일하러 온 사람들의 표정과 자세 그리고 눈빛은 어딘가 좀 달랐다. 그들이 그걸 드러내길 원하지 않았다 해도. 마치 누군가 지하철 안에서 기옥 씨의 얼굴을 보고 그녀의 '생활'을 판단하고 있는 것처럼. 밑이 짧은 바지를 입고 쪼그려 앉았을 때 함부로 드러나는 엉덩이골처럼, 옆구리살처럼, 이상하게 그런 건 기어코 표가 나고 마는 것처럼 말이다.

 

  퇴근까지 네 시간이나 남았는데 기옥 씨는 벌써 지쳐 있었다. 폐경 뒤 쉽게 열이 올라 얼굴이 붉어지곤 했는데, 오늘도 가슴이 답답한 게 식은땀이 났다. 터미널엔 창이 많았지만, 환기가 잘 되지 않아 공기가 좀 탁했다. 사실 여객터미널과 탑승동을 감싼 수만 장의 유리는 '창'이라기보다는 '벽'에 가까웠다. 통풍보다는 보안과 전망에 방점을 둔 데다 냉난방의 효율을 위해서라도 '잘 열리지 않게끔' 만들어진 창이라서 그랬다. 그래서 기옥 씨는 눈이 뻑뻑해지는 것과 함께 종종 참을 수 없는 졸음을 느꼈다. 가끔은 입이 찢어질 듯 하품을 했는데, 그러면서도 조장이나 파트장이 자신을 태만하게 보지는 않을까 신경 썼다. 기옥 씨는 잠도 깰 겸 근처 식수대에서 찬물을 들이켰다. 그래도 좀처럼 몸의 화기가 가시지 않아 몇 모금을 더 마셨다. 마음 같아서는 답답한 머릿수건을 확 벗어버리고 싶었지만 쉽게 그러지 못했다. 괜히 손님들 앞에 흉한 머리를 드러냈다가 회사에서 잘릴지도 몰라서였다. 아직 누가 뭐라 한 적은 없지만, 그건 관리자들이 기옥 씨의 머리를 제대로 본 적이 없어서였다. 심각한 탈모가 진행되고부터 기옥 씨는 직장에 항상 머릿수건과 모자를 쓰고 다녔다. 대부분의 직원들이 '탈(面)'이 좋은 이곳에서, 모든 것이 깨끗하고, 환한 이곳에서 자신이 단 하나의 얼룩처럼 보이지는 않을까 마음이 쓰여서였다. 더군다나 기옥씨는 청결의 제 1원칙이 얼룩을 지우는 거란 걸 알고 있었다. 기옥 씨의 머리는 가끔 개그맨들이 소품으로 쓰고 나오는 가발처럼 가운데 부분이 문어처럼 휑했다. 500원 만한 크기의 구멍에서 시작됐던 것이 어느새 수박만큼 커진 거였다. 원형탈모를 겪는 여자들의 증상 중에서도 보기 드문 경우였다. 기옥 씨는 식수대에 기대 잠시 먼 곳을 바라보았다. 창밖으로 조그마한 비행기가 하늘 위로 사선을 그으며 천천히 날아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꼬리 부분에 언뜻 로고가 보였지만 기옥 씨는 그게 어느 나라 것인지 알지 못했다. 기옥 씨 나이에 인천에 취항하는 60여 개의 항공사 이름을 모두 왼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건 기옥 씨에게 필요하지도 다급하지도 않았다. 비교적 낯익은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 또는 단풍잎이 크게 그려진 에어캐나다 정도는 분간할 수 있었지만. 아에어플로트나 가루인도네시아, 메가몰디브항공 같은 건 쉽게 새겨지지 않았다. 기옥 씨는 그게 알고 싶은 적도 없었다. 대신 기옥 씨가 항상 궁금해하는 건 따로 있었다. 번번이 이해하려 해도 결국에는 납득이 안 되는 그것.

  '사람들은 왜 이렇게 뭘 흘릴까.'

 

  청소는 계속 반복됐다. 이쪽이 괜찮으면 저쪽이 더러워지고, 저쪽을 정리하면 이쪽이 어지러워졌다. 기옥 씨는 자기 일을 묵묵히 해냈다. 퇴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조금만 참으면 되니까. 더군다나 내일은 휴일이니까. 부엌에는 잘 다듬은 식재료가 있고. 그리고…… 그리고, 편지! 기옥 씨는 그제야 자기 가방 속에 우편물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공들여 천천히 읽으려 아껴 뒀던 건데, 하도 바빠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리고 한번 그 사실을 의식하자 그걸 빨리 읽고 싶은 마음이 조바심쳤다. 기옥 씨는 표가 날 정도로 자주 시계를 보며 하루 업무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 뒤, 드디어 퇴근시간이 되자, 지금껏 8시간이나 머물렀던 공간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그리고 발걸음을 옮기던 중 파트장과 웬 여자가 심각한 얼굴로 대화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자세히 보니 기옥 씨와 같은 층에서 화장실 청소를 하는 여자였다. 가끔씩 짧은 영어로 외국인들을 상대하는 걸 보고, 내심 존경의 눈으로 바라봤던 기억이 났다. 그래봤자 아주 단순한 단어로만 이뤄졌거나 문법이 엉망인 대화였지만 기옥씨의 눈에는 대단해보였다. 사람들은 그녀가 부평에 산다 해서 그냥 '부평 아줌마'라 불렀다. 청소노동자들은 대부분 명찰이 있었지만, 몇몇 미화원들끼리는 그렇게 별명으로 통했다. 기옥 씨는 호기심 어린 눈을 숨긴 채 두 사람 사이를 천천히 지나갔다. 이윽고 파트장의 거친 목소리가 기옥 씨 있는 데까지 들려왔다.

  "씨발, 누구는 명절에 나오고 싶어 나오나……."

  눈치 빠른 부평댁이 재빨리 맞장구를 쳤다.

  "어휴, 그러게. 갑자기 빵구를 내면 어쩐대요."

  "요새 아줌마들은 참 책임감이 없어, 책임감이……."

  그러자 부평댁은 혹시 자기에게 불똥이 튈까, 조그마한 목소리로 갑자기 제 동료를 감쌌다.

  "아프다잖아요…… 많이."

  파트장이 버럭 언성을 높였다.

  "니미, 그걸 어떻게 믿어?"

  그러곤 담배가 든 상의 주머니를 더듬으며 딴 데를 봤다.

  "됐고. 그거 아줌마가 좀 해요."

  그제야 상황 파악을 한 부평댁이 펄쩍 뛰었다.

  "네?"

  두 사람에게서 멀어지며 기옥 씨는 귀를 더욱 쫑긋 세웠다. 여객터미널 안의 왕왕거리는 소음 사이로 드문드문 '다음에 잘 챙겨 준……' '추석에 갑자기 사람을 어떻게 구하……' 어쩌고 하는 말이 들려왔다. 여느 때처럼 부탁도 명령도 아닌 독특한 말투였다. 그러자 얼마 뒤 울먹이는 건지 짜증내는 건지 모를 부평댁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휴, 안 돼요, 나도. 목포에서 아들내외가 오는데, 아니 지금 다 왔다는데. 나 없으면 문도 못 따요."

 

  동료들과 가벼운 명절 덕담을 나누고, 사무실을 빠져나온 기옥 씨는 곧장 집으로 가는 대신 터미널 근처의 한 조용한 벤치에 앉았다. 복장은 등산티에서부터 챙 넓은 모자까지 집에서 출발할 때와 같은 차림이었다. 기옥 씨의 두 손에는 천 소재의 구찌 가방이 얌전히 들려 있었다. 기옥 씨는 무릎 위에 손가방을 올려놓고 구겨진 전단지 사이에서 흰색 봉투를 찾아냈다. 버스에서 읽으려니 올 때처럼 복잡할까 겁났고, 집에 도착할 때까지는 기다릴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기옥 씨에게는 오늘 이 편지가 필요했다.

 

  편지는 영웅이에게서 온 거였다. 영웅이는 기옥 씨가 서른 넘어 어렵게 얻은 외동아들이었다. 애 아빠가 일찍 죽어 기옥 씨는 아들을 혼자 키우다시피 했다. 영웅이 아빠는 집안일은 뒷전으로 하고 어디 구경 가고, 놀러 다니는 게 취미였는데, 새해 벽두에 가족들과 있는 대신 해돋이를 본다며 강원도 어디 산에 올라갔다, 절벽에서 실족해 죽었다. 이제 막 뜨는 해를 등지고 사진기를 향해 포즈를 잡은 직후였다. 집안일에 무심해서 그랬지 평소 농담 잘하고 낙천적인 양반이었는데, 죽을 때도 웃으면서 '김치~' 하고 떠났다. 그뒤로 기옥 씨는 온갖 궂은일을 해가며 아들을 길렀다. 영웅이도 말수 적고 성실한 아이로 바르게 잘 자라 준 편이었다. 최근에는 호주로 어학연수를 간다며 열심히 아르바이트도 했는데……. 언젠가 엄마도 꼭 해외여행 보내 드리겠다며 수줍게 약속한 적도 있었다. 비록 대단하지 않은 관광지라도…… 가이드의 깃발 아래 몰개성하게 우르르 몰려다니고, 적당히 사기를 당하고, 기념품을 강매당하고, 바가지를 써도, 좋을 그런 여행 말이다. 하지만 영웅이는 지금 교도소에 있었다. 평생 말썽 없이 자란 아이인데.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까지 갔다 온 녀석이 남의 집 택배를 훔쳐 졸지에 전과자가 되었다. 초범이니 가볍게 넘어갈 수 있었던 걸, 쫓아오는 택배기사를 보고 당황한 나머지 발로 차서 내친 모양이었다. 영웅이는 절도에 폭행이 붙어 실형을 받게 되었다. 나중에 들은 말로, 아들 녀석은 훔친 장물을 인터넷에 올려 어학연수비를 마련하려 했다고 했다. 그래서 거기 뭐가 들어 있었느냐고, 기옥 씨는 담당 경찰에게 물었다. 저쪽에서 '뭐가라니요?'라는 반응이 돌아오자 기옥 씨는 영웅이가 갖고 도망가려 했던 그 박스 안에 뭐가 들어 있었느냐고 다시 물었다. 담당자는 머뭇대다 서류를 한번 보곤 '유축기라는데요'라고 답했다. 몸을 푼 지 얼마 안 된 어느 산모가 신청한 독일제 스윙 전동 유축기를 말하는 거였다. 기옥 씨는 처음에 그 단어를 잘 못 알아들었다. 하지만 무슨 물건이면 어떠랴 싶었다. 영웅이도 어차피 몰랐을 것을. 간장게장일 수도, 조사가 완료된 설문지일 수도, 원터치모기장세트일 수도 있었을 것을……. 기옥 씨는 그 비루하고 구체적인 이름들이 하도 생생해, 힘이 빠져 웃었다. 그러고는 어찌 이리 쉬운가. 어째서 이렇게 한 가족의 단란이 시시하게 망가지는가 이해할 수 없어했다. 기옥 씨의 머리가 빠지기 시작한 것은 그 즈음이었다. 처음에는 별거 아니려니 했는데, 머리를 감고 빗을 때마다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졌다. 그래도 기옥 씨는 내색 않고 매주 아들 면회를 갔다. 그리고 신문에서 건전하고 아름다운 기사를 볼 때면 일부러 가위로 오려 부쳐주곤 했다. 16세 영국 소녀 스키로 남극 도달. 눈 먼 11세 일본 소녀 14시간 달려 마라톤 완주. 청각장애인 최초 공학박사 탄생. 이런 유의 기사들이었다. 영웅이는 그걸 끔찍이 싫어했다. 기옥 씨는 그 사실을 몰랐지만 말이다. 영웅이는 형을 살면서 따로 집에 전화를 하거나 엄마를 찾는 일이 없었다. 아들이 전혀 다른 사람이 돼가는 것 같아 기옥 씨는 애가 탔지만, 쉬는 날에 꼬박꼬박 아들 얼굴을 보러갔다. 영웅이는 엄마에게 미안해하지도, 고마워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리고 꼭 그 때문은 아니지만 기옥 씨는 얼마 전, 아들과 사소한 말싸움을 한 뒤 면회를 2주째 안 간 상태였다. 그래 놓고 마음이 좋지 않아 잠자리서 매일 뒤척였는데……. 다시 찾아갈까 싶으면서도 이번만은 아들이 먼저 연락해 주길 바랐다. 그런데 정말로 오늘 영웅이에게서 편지가 온 거였다. 초등학교 때 학교에서 숙제로 내준 어버이날 카드를 제외하곤 기옥 씨도 처음 받아 보는 거였다. 기옥 씨는 가로로 네 번 접힌 A4지 모양의 종이를 조심스레 펼쳤다. 그러곤 벌써부터 답장은 뭐라고 쓰나 걱정했다. 연필 잡아 본 지가 하도 오래돼 문장 하나를 완성하는 데도 엄청난 에너지가 들어서였다. 기옥 씨는 편지지를 활짝 편 채, 설레는 맘으로 그 안에 적힌 문장을 바라봤다. 몇 십 개의 줄이 그어진 하얀 편지지 위로는 볼펜으로 꾹꾹 눌러쓴 단 한 개의 문장만 적혀 있었다.

  '엄마, 사식 좀'

  ……순간 기옥 씨는 바보 같이 종이를 뒤집어 봤다. 혹시 뒷면에라도 뭐가 더 씌어 있지 않나 확인해 보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편지지 뒤에도, 앞에도 다른 내용은 없었다. 잘 계시냐는 말도, 보고 싶다는 말도 없었다. 편지지 맨 윗줄에 적힌 엄마 사식 좀, 그 한마디뿐이었다.

 

  기옥 씨는 모자를 벗어 의자 위에 올려놨다. 하루 종일 갑갑했는데, 가슴에 다시 열이 올라 참을 수 없었다. 지나가던 몇몇 사람이 '어머' 하고 자기들이 무슨 해를 당하기라도 한 듯 기옥 씨를 바라봤지만 개의치 않았다. 대신 적막한 얼굴로 고개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기옥 씨의 휑한 머리 위로 크고 휘영청 둥근 달이 떠 있었다. '추석'은 '가을 달빛이 가장 좋은 밤'을 뜻한다는데. 명절까진 아직 2시간이나 남았지만, 거의 완벽하게 차오른 달을 보니 새삼 오늘 아침 기상캐스터가 했던 말, '고기압'이라는 말, '황금'이라는 말, '전국'이라는 말, 그리고 '맑음'이라는 말이 전부 맞는 말이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전국의 오늘은 늘 맑았으며 틀림없이 내일도 맑을 거라는 예감이……. 그런데도 기옥 씨의 마음은 어쩐지 계속 스산하기만 했다. 머리에선 열이 나고 가슴 안으론 외풍이 들어 그런 지도 몰랐다. 기옥 씨가 알기로, 공항 안에 제일 많은 단어는 '출발'이란 말과 '도착'이란 말이었다. 그런데 기옥 씨는 이 순간 수천 개의 표지판 아래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고아 같은 얼굴을 하고 앉아 있었다. 기옥 씨는 하아─ 얕은 숨을 뱉었다. 배가 고파 입에서 쓴내가 났다. 생각해 보니 오늘 먹은 것이 없었다. 그러자 문득, 아까 가방 속에 넣어 둔 마카롱이 떠올랐다. 어느 아기 엄마가 놔두고 가는 걸, 음식 버리는 게 죄스럽고 아까워 따로 챙겨 둔 거였다. 기옥 씨는 자신의 구찌 가방을 뒤져 고급스런 종이상자를 꺼냈다. 그러고는 먹기 너무 아까울 정도로 예쁜 색색의 파스텔 톤 마카롱을 바라보았다. 밀가루와 달걀, 우유, 설탕 등 기본 재료는 변함없지만 종류 별로 송로버섯과 푸아그라, 라임과 장미가 들어간 것들이었다. 기옥 씨는 그 중 핑크색 마카롱을 집어 가만히 바라보았다. 불안함과 호기심이 반반씩 섞인 표정을 하고서였다. 그것은 오백 원짜리 동전 비슷한 크기에 완벽한 구형을 이루고 있었다. 기옥 씨는 입을 크게 벌려 과자를 반쯤 베어 물었다. 처음에는 살짝 '아유 달어' 하고 몸서리쳤지만, 곧 프랑스 전통 과자의 그윽하고 깊은 단맛, 부드럽고 바삭한 식감이 조심스레 느껴졌다. 생전 처음 먹어 보는 친숙한 듯 신기한 맛이었다. 하지만 그러고 얼마 안 돼 기옥 씨의 얼굴은 이내 어두워졌다. 기옥씨는 왠지 울 것 같은 얼굴로 나지막하게 웅얼거렸다.

  '왜 이렇게 단가 …… 이렇게 달콤해도 되는 건가…….'

  바람이 불자 기옥 씨의 브래지어 위에 핀 가짜 꽃들이, 이름을 알 수 없는 이국의 열대 식물이 휘청대는 느낌이 들었다. 무언가 위를 자극하자 허기가 더 크게 밀려왔다. 기옥 씨는 가슴팍의 선득한 기운을 느끼며, 양 볼에 검버섯이 핀 달, 휑뎅그렁한 대머리를 드러내고 있는 저 달을 망연히 바라봤다. 그러고는 부시럭─ 봉투 안에 손을 넣어 노란색 마카롱 하나를 더 집었다.

 

  얼마 뒤 기옥 씨는 다시 터미널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곤 화장실 앞에 있는 무료 식수대에 몸을 기댄 채 정신을 차리려는 듯 다시 목을 축였다. 혀끝에서 수돗물 특유의 비린 쇠 맛이 났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전에 백화점에서 근무할 때는 오줌도 잘 못 누고, 물도 못 마셨을 뿐 아니라, 감시 중인 인사과 직원에게 '아줌마는 왜 웃지 않느냐'는 얘기를 들어야 했다. 여기서도 기분과 상관없이 미소 지어야 할 때가 많았지만, 사람 얼굴을 보며 직접 물건을 팔 때보단 감정 지출이 덜했다. 그리고 승객들은 이따금 기옥 씨가 거기 있는 줄 모르거나, 있어도 없는 사람처럼 여겼다. 마치 많은 이들이 재떨이와 재떨이 청소부를, 승강기와 승강기 청소부를 동격으로 대하듯 말이다. 기옥 씨는 소매로 입가를 닦아냈다. 그러곤 주먹을 쥔 채 결심한 듯 저기 누군가와 잡담 중인 파트장에게 용기 내어 다가갔다.

  "저기요……."

  기옥 씨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저기…… 아까 그 일 말이에요."

  말이 끊긴 파트장이 성가신 듯 다소 예민한 얼굴로 대꾸했다.

  "예?"

  "누가 못 한대서, 빵구 난 일 말이에요. 부평 아줌마도 하기 싫어하는 것 같던데."

  파트장이 의아한 듯 기옥 씨를 빤히 쳐다봤다.

  "근데요?"

  파트장 앞으로 히잡을 쓴 무리가 우르르 지나갔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어색한 기운이 흘렀다. 이윽고 기옥 씨는 힘을 내, 마치 좋아하는 남자에게 고백이라도 하듯, 설렘인지 수치심인지 모를 감정에 바르르 몸을 떨며 말했다.

  "그 일…… 제가 하면 안 될까요?"

  하지만 기옥 씨가 그 얘길 꺼내기 전부터 파트장의 얼굴은 이미 흙빛으로 변해 있었다. 기옥 씨는 그걸 의식하지 못한 채 천진하게 눈을 끔뻑였다. 아들의 편지를 읽은 뒤 정신이 멍해져, 본인이 방금 전 벤치 위에 두고 온 게 무엇인지 알아채지 못한 까닭이었다. 기옥 씨는 그저 자신이 윗사람에게 의견을 묻고 있는 중이라 생각할 테지만. 파트장의 눈에, 이 풍경은 가운데 머리가 통째로 없어 마치 암 환자처럼 보이는 여자가 다짜고짜 자기를 찾아와 야근을 해도 되느냐고 묻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기옥 씨의 얼굴을 모르지 않는 파트장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려 했만 동공만은 몹시 크게 벌어져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마치 놀라운 게 아니라 무서운 걸 보기라도 한 것처럼. 새삼스레.

 

  시간은 이미 밤 10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세계는 전보다, 또 방금 전보다 검게 짙어져 가고 있었다. 오늘이 어떤 날인지 모른 채 지금 막 한국에 온 방글라데시 청년은 생전 처음 겪는 추위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주위를 둘러보았고. 자기 신랑이 틀림없이 좋은 사람일 거라 믿는 베트남 처녀는 목을 길게 뺀 채 마중 나온 한국 남자를 찾고 있었다. 늘어난 비행기대수나 자연감소분만큼 인원을 충원하지 않아, 점점 피로해져 가는 한 비행사는, 조금 전 유니폼 단추가 떨어진 징조를 의식하지 않으려 애썼고. 출장 뒤 부정(不淨)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 아내에게 줄 스카프를 산 중년남성은 면세점 카드기기에 이제 막 서명을 하고 있었다. 심드렁한 얼굴로 아이패드를 들여다보던 초등학생은 학교에서 숙제로 내준 '옷은 시집올 때처럼, 음식은 한가위처럼'이란 속담의 뜻을 막 '터치'하고 있었고……. 근처 유흥가 한복판에서 두 팔을 번쩍 든 파키스탄 사내는 '부대찌개' 네 글자가 쓰인 판자를 벌 서듯 들고 있었다. 오늘도 국제공항 활주로에는 비행기 이착륙 지점을 밝히는 수천 개의 항공등이 은하수처럼 반짝였고. 퀭한 눈을 한 여자가 두건을 쓴 채 여객터미널 화장실 바닥을 닦는 사이. 추석에도 마트에 나가야 되는 엄마를 둔 한 초등학생이 본사 홈페이지에 들어가 '18, A마트, 내일 하루 종일 정전돼서 좆망해라'라고 게시글을 쓰는 사이. 탑승 게이트 곳곳에서는 '사요나라(さよなら)', '톳친쓰(Tot ziens)', '굿바이(Good bye)', '잘 가', 그리고 '안녕'이란 말이 연이어 들려오고 있었다. 추석이 내일이었다.  

 

《문장웹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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