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의 종말론 – 박민규, 「끝까지 이럴래?」 - 조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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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시와 소설로 읽는 2010년 명장면들

피로의 종말론

– 박민규, 「끝까지 이럴래?」(『끝까지 이럴래?』, 한겨레문학상 수상작품집, 2010)

조효원

종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누적된 피로의 결과에 다름 아니다. 처음에는 그저 발가락이 간지러운 느낌에 불과하던 피로가 조금 조금씩 시나브로 몸을 점령해 들어와 종내 눈알을 굴릴 만한 한 방울 힘조차 남지 않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종말이라 부를 수 있다. 힘이 없어서 눈알조차 굴릴 수 없다면, 그건 정말이지 ‘끝장’ 아닌가? 하므로 삶에서 벌어지는 모든 전투는 결국 피로와의 싸움이라 할 수 있다. 삶이 끝으로서의 죽음을 유예하기 위한 활동의 총합이라면 말이다. 그러나 난감한 사실은, 우리는 결코 피로와 싸울 수 없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피로는 싸움을 허락하지 않는다. 실상 그것은 모든 싸움의 가능성을 완전히 벗어나 있다. 피로는 오로지 평화와 번영만을 구가한다. 피로는 삶의 형이상학의 전제군주와도 같다. 이 군주 아래 엎드린 모든 피조물 — 당연히 인간을 포함한 — 은 말 그대로 ‘무기력’할 뿐이다.

“내일은//인류의 마지막 날이었다”라는 불가능한 문장, 그러나 섬뜩한 의미와 빛나는 통찰로 가득 찬 문장을 담고 있는 박민규의 근작 「끝까지 이럴래?」는 피로에 휩싸인 인간을 그리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소설을 더없이 불쌍하고도 참을 수 없을 만큼 가증스러운 피조물에 대한 탁월한 관찰의 결과물로 읽을 수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끝까지 이럴래??는 피로의 종말론을 말하는 소설인 것이다. 이 소설을 한 문장으로 압축한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종말은 견딜 수 없는 피로감과 함께 온다. 이 소설 안에 ‘내일’이라는 미래 명사와 ‘이었다’라는 과거 어미가 한 문장으로 묶여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태를 암시한다. ‘내일’이라는 ‘종말’은 인류의 모든 ‘이었다’가 중첩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지극히 하찮은 하나의 ‘이었다’ 안에도 이미 ‘내일’은 들어 있는 것이다(이 사실을 모른다면, 피로는 결코 느껴질 수 없고 따라서 해소될 수도 없다). 그러나 이처럼 극단적인 대립자들을 한 장소 안에 동거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극단적인 탈력(脫力) 현상을 통과해야만 한다. 즉 시간의 위력으로부터 철저히 벗어나야 가능한 일이라는 말이다. 박민규의 불가능한 문장이 대립자들 사이에 두 줄의 빈 공간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은 이런 관점에서 고찰되어야 한다. 즉 시간의 탈력이라는 관점에서. 이것은, 말하자면 싸우지 않고 피하는 길이다. 아니, 싸움 자체를 무력화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하겠다(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이 선택은 불가피하다. 왜냐하면 피로는 싸움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시간을 탈력시키는 것은, 앞에서 뒤로, 과거에서 미래로, 탄생에서 죽음으로 맹렬하게 혹은 쏜살같이 흘러가는 시간을 반복적으로 응시하게 만드는 — 레이싱 카들이 굉음을 뿜으며 지나갈 때마다 기계적으로(사실은 자연스럽게!) 이쪽에서 저쪽으로 돌아가는 머리를 떠올려 보라 — 괴물을 잠재우는 일이다(이 괴물은 아마도 에드거 앨런 포가 묘사했던 ‘어셔 저택’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박민규는 어떻게 시간을 탈력시키는가? 「끝까지 이럴래?」가 제시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관찰’이 그것이다. 단 한 번도 명시적으로 목소리를 내거나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 않지만, 이 작품에서 가장 놀라운 존재는 바로 ‘화자’다. 그는 놀라우리만치 냉철하고 비인간적일 정도로 강력한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가공할 시선(시력!)에 의해 인류 최후의 두 인간 — 애덤스와 창 — 은 말 그대로 ‘끝까지’ 발가벗겨진다. 화자는 결코 눈에 띄게 나서지 않지만, 다시 말해 중뿔난 논평을 가하지 않지만, 그의 집요한 관찰력은 최후 인간의 실상을 낱낱이 파헤친다. 이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사실은 최후의 두 인간 애덤스와 창(創)은 기실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점이다. 애덤스(Adams)는 최초의 인간 ‘아담(Adam)’의 알레고리이며, 창(創)은 창세기(Genesis)의 제유다. 따라서 두 사람의 이름은 공히 최초=최후의 인간을 가리키는 것 — 시간의 원환에서 시작과 끝은 동일한 점 위에 포개어져 있다 — 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두 사람의 만남의 계기가 되는 ‘층간 소음’을 생각해 보자. 위층에 사는 창은 애덤스가 일으킨(다고 생각된) 소음 때문에 아래층의 애덤스를 방문한다. 하지만 애덤스는 자기는 결코 소음을 유발한 적이 없으며 그럴 만한 이유도 기회도 전혀 없다고 시치미를 뗀다. 이렇게 해서 오해가 풀린 두 사람은 함께 ‘최후의 만찬’을 들게 된다. 그러나 작품 말미에 밝혀지는 사실은 두 사람이 모두 똑같이 소음을 냈고, 이 때문에 서로에게 아주 신경질이 나 있었다는 것이다(“모두가/예민할 때죠”). 이를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는 사실은 이 두 인물이 맞닥뜨린 것은 결국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폴 리쾨르)에 다름 아니라는 점이다. 요컨대 애덤스는 창이고 창은 애덤스라는 사실, 정확히 말해 아담은 아담이라는 사실이 이 소설의 첫 번째 핵심이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이 있는데, 그것은 ‘아담은 아담이다’라는 문장에서 첫 번째 아담과 두 번째 아담이 시간의 축 위에서 서로 정반대 편에 서 있다는 사실이다. 즉 첫 번째 아담은 최초의 인간이고, 두 번째 아담은 최후의 인간인 것이다. 다시 말해 아담(과 아담)은 시간의 시작과 끝 —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결국 하나의 동일한 점이다 — 에 동시에(서로를 마주한 채) 서 있는 셈이다. 애덤스와 창이 각기 첫 번째 아담과 두 번째 아담을 표상한다는 사실은 애덤스의 아이들 — 존과 보니 — 이 창의 나이와 비슷하다는 진술을 통해서 더욱 강력하게 뒷받침되며,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은 애덤스(첫 번째 아담)의 말을 통해서 결정적으로 확증된다. “오랜 세월 되새겨온 거짓말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전부를 동원해 스스로의 환상에 몰입해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거짓말을 되새겼으며, 자신의 전부를 동원해 스스로의 환상에 몰입해 있다는 진술은 정말이지 놀라운 차원 비약의 가능성을 담보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 문장은 인류 역사 전체를 남김없이 압축하는 단 하나의 문장인 것이다. 이것은 잠언의 형태로 제시된 빼어난 역사철학이다. 그리고 우리의 이 추측을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만들어 주는 것은 다음과 같은 정황이다. 그러니까 이 역사철학적 문장은, ‘행복하냐’는 창의 마지막 물음에 대한 애덤스의 대답, 즉 ‘아이들과 함께 디즈니랜드에 갔었다’는 말에 대한 화자의 보충 진술로서 제시되었다는 사실. 말할 것도 없이 애덤스의 대답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는 결코 아이들과 함께 디즈니랜드에 간 적이 없다. 실제로 애덤스가 스스로의 행복을 위해 한 일은 아들(존)을 죽이고, 딸(보니)에게 펠라티오를 시킨 것뿐이다(존을 죽인 이유는 물론 보니에게 펠라티오를 시키는 데 방해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보면, ‘층간 소음’에 의한 스트레스를 명분 삼아 애덤스를 죽이기 위해 총을 들고 찾아갔던 창은 죄악에 물든 아버지(첫 번째 아담)를 죽이기 위해 되살아 돌아온 아들(두 번째 아담) 존을 표상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아들이 아버지를, 최후의 아담이 최초의 아담을 죽이려는 장면을 담고 있다는 점, 이것이 이 소설의 두 번째 핵심이다. 덧붙이건대, 역사철학적으로 말하자면, 두 번째 아담의 살해기도(企圖)는 원죄에 의해 개시된 죄의 역사를 끊어내려는 노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의 가장 빼어난 핵심은 아직 말해지지 않았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이 소설의 클라이맥스를 이루는 장면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끝까지 이럴래?」의 압권은, (고의인지 실수인지는 밝혀지지 않지만) 창이 흘려 놓고 간 총을 뒤늦게 애덤스가 발견하는 장면이다. 그러나 식탁의자에 놓여 있던 총을 본 애덤스가 한 일은 예상과는 달리 무덤덤하게(!) 문을 잠그는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문을 잠근 애덤스는 보니가 자신의 성기를 펠라티오하는 장면이 녹화된 캠코더를 보면서 인류 최후의 밤을 그지없이 평화롭게 보낸다. 그러니까 결국 두 번째 아담은 죄악으로 물든 첫 번째 아담을 죽이지 못한 것이다. 창이 애덤스와 식사하는 내내 안절부절한 태도를 보인 것은 아마도 자신의 사명 — 첫 번째 아담의 처단 — 을 완수하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무기력하게도 창은 총을 애덤스에게 넘겨준 채 쓸쓸히 퇴장해 버린다. 두 번째 아담이 첫 번째 아담에게 (또다시) 패배한 것이다. 그런데 이 실패를 곰곰이 들여다보는 우리에게는, 애덤스와 창의 식사 장면이 이반 카라마조프의 서사시 「대심문관」의 현대적 계승이라는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두 번째 아담’이란 결국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아담의 패배를 확증해 주는 텍스트상의 증거. “이젠 예수가 아니라 예수 할애비가 온다 한들…… 말이죠.” 이것은 창의 말이다. 그러니까, 십자가 위의 예수가 그러했듯이, 창 역시 자신의 패배를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 아담은 어째서 첫 번째 아담에게 무기력하게 굴복하고 만 것일까? 이에 대한 답 역시 간단하다. 그것은 첫 번째 아담이 두 번째 아담보다 훨씬 더 피로에 강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아담은 피로에 철저히 무기력하다. 왜냐하면 그는 시간을 탈력시키는 데 모든 에너지를 쏟았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첫 번째 아담은 지칠 줄 모른다. 왜냐하면 그는 시간의 메커니즘에 완벽하게 적응했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피로’라는 단어가 죄의 환유에 다름 아니라는 비밀을 밝혀야 할 것 같다. 피로란 결국 죄의 현상 형태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피로에 강하다는 것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피로에 강한 인간들만 살아남는 세상에서는 이미 오신 예수뿐 아니라 다시 오실 예수 또한 철저한 무기력을 느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죄는 이미 시간의 지붕을 뚫고 나가 영원의 발목까지 붙들고 있는 형편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제 인간들은 피로를 즐기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실로 예수가 아니라 예수 할애비가 온다 한들! 애덤스에게 총을 넘겨준 뒤 ‘행복하냐’는 나직한 물음을 던지며 떠나는 창의 모습이 대심문관 앞에서 조용히 물러나는 예수의 뒷모습과 오롯이 겹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제는 정말로 이 소설이 창조한 최고의 핵심을 만져 볼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창과 애덤스 서로의 신경을 긁었던 두 가지 ‘소음’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다. 이 물음은 결국 이 소설의 제목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과 같다. 소설 말미에 밝혀지지만, 층간 소음을 만든 것은 아래층의 애덤스뿐 아니라 위층에 사는 창 또한 마찬가지였다. 실로 애덤스는 자기야말로 소음의 진짜 피해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창과 식사하는 중에 그 얘기 — 즉 오히려 자기가 피해자라는 얘기를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자부심에 가까운 감정을 느낀다(이것 역시 흥미로운 수수께끼다). 그러나 인류 최후의 날의 태양이 떠오르고 숙취에서 깨어난 애덤스에게, 다시금 위층으로부터 소음이 들려 온다. 애덤스는 혼자 중얼거린다. “끝까지 이럴래?” ‘끝까지’ 죄악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첫 번째 아담의 신경을 ‘끝까지’ 긁어 놓는 이 ‘소음’은 도대체 무엇일까? ‘끝까지’ 애덤스를 붙잡고 놓아 주지 않는 창의 ‘소음’은 대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아마도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아담의 소음은 죄의 소음이지만, 두 번째 아담의 소음은 사랑의 소음이라고. 다시 한 번 이반 카라마조프를 끌어오자면, 그것은 대심문관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입맞춤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 지독한 사랑의 소음에 직면해서는 제아무리 피로에 강한 애덤스라도 결코 ‘무덤덤하게’ 반응하지 못한다. 물론 그럼에도 이 지독한 인간은 여전히 죄의 소음으로 거기에 응답할 따름이다. 이처럼 기묘한 비대칭의 소음-대화, 이것이야말로 이 소설이 창조해 낸 최고의 문학적 열매다.

누적된 피로는 언제 풀리는가? 그것은 피로를 ‘진짜로’ 느낄 때다. 아직은 괜찮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여전히 피로에 붙잡혀 있는 것이다. 정말로 절실하게 피로를 느낄 때,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다고 느낄 때, 그 때가 되어야만 비로소 피로는 풀릴 수 있다. 박민규의 「끝까지 이럴래?」를 통해 한국 문학은 비로소 진정한 ‘관찰’의 가치를 배울 수 있게 되었다. 이 관찰은 그보다 한 세기 반가량 앞서서 도스토예프스키가 행했던 바로 그것이다. 

《문장웹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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