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모임-언제나 다층적인 읽기를 위한 좌담 5 - 김주선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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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문장웹진 독자모임]

 

 

언제나 다층적인 읽기를 위한 좌담 5

 

 

참여 : 김주선(사회, 문학평론가), 김영삼, 송민우, 이다희, 이서영

 

 

 

지혜, 「개명」
(《문장 웹진》 4월호)
김수온, 「한 겹의 어둠이 더」
(《문장 웹진》 5월호)
정지우, 『정원사를 바로 아세요』
(민음사, 2018)

 

 

 

김주선 : 다섯 번째 《문장 웹진》 좌담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이번에 다룰 작품은 지혜의 「개명」(《문장 웹진》 4월호), 김수온의 「한 겹의 어둠이 더」, (《문장 웹진》 5월호), 정지우의 『정원사를 바로 아세요』(민음사, 2018)입니다. 지혜 작가의 「개명」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개명」을 즐겁게 읽었습니다. 화자의 기억에 등장하는 연인이 관성적인 만남을 이어 가고 있는데요. 남자 캐릭터가, 며칠 전 금정연 서평가에게 들은 말인데, ‘예술맨’적인 기질을 갖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이다희 : 예술맨. (웃음)

 

김주선 : 네. (웃음) 그 예술맨적인 기질을 갖고 있는 남자와 동거하는 여자 사이에 발생하는 여러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다들 어떻게 읽으셨나요.

 

김영삼 : 그 예술맨이 ‘명훈’을 말하는 거죠?

 

김주선 : 예. 저 보기에는 좀 그런 것 같더라고요.

 

송민우 : 작중 화자인 미연이나 명훈이나 대단히 현실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했어요. 특히 명훈은 살면서 여러 번 마주쳐 본 유형의 인물이었고요. 명훈은 인정 욕망이 큰 인물로 그려져 있는데요. 인정 욕망 자체를 두고 비난할 수는 없는데 인정받지 못한 상황을 미연에게 공격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은 문제가 있어 보였어요. 명훈이 미연을 처음 봤을 때 너 글 좀 쓰냐고 묻잖아요. 미연은 명훈보다 처지가 더 낫다고 말할 수 없는 사람으로 보여요. 그런데 명훈은 그런 미연에게 삐딱한 모습으로 시비를 걸죠. 그 부분이 명훈의 문제적인 모습을 잘 보여주는 지점인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 통쾌했던 장면도 있었어요. 미연이 대학 2학년 때 명훈을 다시 만나잖아요. 그때 명훈이 또 묻죠. 요즘도 글 쓰냐고. 여기서 미연은 침묵하기로 결심하는데 그때 명훈의 여자 친구이자 미연의 친구인 아진이 화를 내죠. 그…….

 

김영삼 : “좆도 아닌 게?”

 

(일동 웃음)

 

송민우 : 네. 그거요. 그러고 나서 아진이 조용히 좀 하라고 하는데, 미연이 하고 싶은 말을 아진이 대신해 준 것 같았어요. 또 이 작품은 여성 인물이 어느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이동하는 일을 명확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김수온 작가의 「한 겹의 어둠이 더」와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이에 관해서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할게요.

 

이다희 : 명훈의 캐릭터가 너무 잘 이해됐어요. 이런 사람들 많이 본 것 같아요. 저도 그랬고요. 저는 개명한 사람이 아진이어서 그런지 아진에게 주목했어요. 아진은 남자도 없고 결혼식할 일도 없다 하잖아요. 사주에 의거한 거긴 하지만요. 아진이 불안정해 보였어요. 그런데 아진은 또 미래가 밝다고 이야기하거든요. 좋은 미래를 만들려는 강한 의지가 있는 것 같았어요. 개명이라는 것이 기존의 주어진 자기를 버리고 새로운 자기를 스스로 선택한다는 건데, 이런 게 참 멋있었어요. 마지막에 사진 찍는 모습은 흔한 이야기잖아요. 신부랑 이야기하는 모습이요. 이 부분에서 미연도 자신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내리거든요. 아진과 명훈이 지지부진하게 끌어오던 만남처럼 미연도 지지부진하게 끌어오던 어떤 선배와의 만남이 있는데 그걸 끊는다고 해요. 그런데 저는 이때 아진과 나의 거리가 더 멀어진다고 생각했어요. 미연은 명훈과 아진을 보면서 모종의 죄책감을 느끼잖아요. 같이 글 썼던 명훈과, 같은 여자인 미연과 닮았지만 그들을 비판하는 자신을 생각하면서요. 또 아진은 인적도 소음도 없이 조용하고 깨끗한 아파트의 세계로 들어가지만 미연은 그렇지 않잖아요.

 

이서영 : 저도 제가 살아가는 곳과 멀지 않은 곳에 있을 법한 세계를 보고 온 느낌이었어요. 꼭 가까이 사는 친구가 건네준 이야기처럼 느껴졌을 정도로 와 닿는 이야기였던 것 같고요. 그래서 즐겁게 읽었던 것 같아요. 특히 결혼식에서 곤돌라가 나오는 장면이 제일 좋았어요. 뭔가 엉뚱한 느낌인데, 문장들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장면을 내비친다는 생각이었어요.

 

김영삼 : 방금 친구가 쓴 것 같다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그 때문에 습작품 같은 느낌이에요. 덜 익었달까요. 저는 최근에 뭔가를 평가하려는 태도를 지양하려고 하는데요. 이유는 작품을 잘 썼나 못 썼나를 떠나서 나에게 어떤 감정을 촉발하는가가 더 중요한 것 같아서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의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어요. 먼저 형식을 지적하고 싶은데요. 현재의 내가 낯선 곳으로 가잖아요. 낯선 곳으로 간다는 것 자체가 나의 일상을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죠. 그래서 화자가 언아진이라는 친구와의 과거 관계를 회상하잖아요. 이 이야기의 구조가 현재-과거-현재-과거-현재-과거의 구조예요. 여기서 언아진이라는 인물의 삶을 보여주고 그 인물의 삶이 나에게 어떤 변화를 촉발하게 되었다, 라는 전형적인 구조예요. 그러다 보니, 이건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어딘가에서 이와 같은 형식을 배웠거나 혹은 자기 나름의 규칙이거나 할 텐데, 저한테는 이런 게 클리셰적인 것으로 보였어요.
    두 번째는, 명훈이 멋있는데, 고등학교 때 명훈 같은 선배를 만나면 멋있죠.

 

이다희 : 아, 고등학교 때는 멋지죠.

 

김영삼 : 저도 동아리 활동을 했고 연합 동아리도 했어요. 광주에도 많았거든요.

 

이다희 : 여기 해보신 분 있지 않나요. (웃음)

 

이서영 : (웃음)

 

김영삼 : 동아리에서 선배들은 담배 피고 술 마시고 머리도 길고 기타도 메고 다니는 모습이었어요. 뭔가 세상에 초연한 것 같기도 하고요. 글 쓰는 분위기가 빡빡 나오는 거죠. 좋게 표현하면 문학청년이고요. 한데 이 사람은 생활의 세계에 적응하는 데 실패했고 글이 써지지 않는 자신을 의식하고 있어요. 이제는 글을 쓴다라는 행위가 자신을 변명하는 도구로만 남아 있고 늪으로 빠져드는 자신의 삶에 좌절하고 있고요. 그런 걸 아진이 알았기 때문에 좆도 아닌 게라고 얘길 하게 됩니다. 이렇게 명훈이란 인물과 아진이란 인물이 보여주는 건 낭만적인 차원인데요. 중요한 건 요런 인물은 글 쓰는 사람 주위에 많이 있기 때문에 작가가 세계를 많이 접해 보거나 경험해 보지 않은 상태인 것 같아요. 이런 주제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저 인물들이 꼭 적합한가를 생각해 보면, 글쎄요. 그리고 이 지리멸렬한 두 사람의 관계가 끝나고 아진은 다미로 이름을 바꿔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잖아요. 미연도 아진의 선택을 보고 선배와의 지리멸렬한 관계를 끝내겠다고 해요. 그런데 이후를 생각해 보면, 다미의 삶 역시 실패할 것 같아요. 결혼식장에서 미연이 바라본 다미의 세계는 너무나 전형적이고 평범한 또 다른 사람들의 세계로 들어온 것뿐이에요. 이전까지는 일상적 삶에도 미치지 못했던 다미가 이제 지극히 평범한 세계로 들어온 거죠. 때문에 개명 이후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아요. 미연과 다미의 삶이 더 좋은 방향으로 갈 수 있을 것이라는 짐작을 하려면 그에 맞는 근거가 필요한데 그런 게 없는 느낌이에요. 물론 둘의 미래를 좋게 읽을 수도 있겠지만요.

 

송민우 : 문청과 학교를 결합시켰을 때 더 새로운 이야기를 해볼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최근에 읽은 책에서 대학-문청-남성성을 묶어서 이야기하거든요. 명훈을 보면 이런 이야기로 더 심화시켜 볼 법한데, 여기서는 그저 여성을 통제하려는 마음만 있는 남성으로만 그려지고 만 것 같았어요.

 

김영삼 : 뒤에 가서는 좀 찌질하기도 하잖아요.

 

김주선 : 방어 먹을 때 좀 짠하더라고요.

 

이다희 : 그게 바로 진정한 예술맨들의 포인트죠. (웃음)

 

이서영 : 짠해 보여야 돼. (웃음)

 

(일동 웃음)

 

김주선 : 네네(웃음) 그게 진짜 포인트죠.

 

김영삼 : 그러니까 뭔가 정리하면 안 돼 삶이. 막 널브러져 있어야 돼. (웃음)

 

송민우 : 문창과 출신 학생들이 이 소설을 보면 친숙하다는 생각을 무조건 할 수밖에 없다는 게 장점일지 단점일지는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는 문청 얘기나 실패한 얘기로만 느껴질지도 모르겠어요. 말씀대로 결말은 좋은 방향과 나쁜 방향 다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저는 좋은 방향 쪽으로 생각했어요. 미연과 다미가 자신의 과거로부터 떠나고 비로소 새 시작을 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서요.

 

김주선 : 네, 이제 김수온 작가의 「한 겹의 어둠이 더」를 읽겠습니다. 이 소설은 폐쇄적인 마을의 폐쇄적인 집을 배경으로 쓰였습니다. 전체적으로 어둡고 모호한 분위기인데 현실성이 탈각되어 있어서 알레고리적으로 읽을 소지가 다분합니다. 어떻게 보셨나요?

 

송민우 : 기본적으로 탈출 서사인데, 저는 여성들의 걷기 문제에 관해 생각했어요.

 

김주선 : 걷는다는 게 삶을 걷는다는 뜻인가요?

 

송민우 : 네. 여기서 여성은 바깥으로 나가고 싶어 하는데 이 사적이고 밀폐된 공간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잖아요. 그게 자기 삶을 더 큰 차원으로 나아가게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야기한다고 생각했어요. 공적 공간으로 나아가려고 하는데 그게 자꾸 좌절되니까요.

 

김주선 : 말씀하신 게 「개명」과 어떻게 연결되는지요?

 

송민우 : 「개명」은 미연이 결혼식을 가려는 과정 속에서 아파트와 숲을 보고 아진의 새로운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되잖아요. 그때부터 서사의 상황이 좀 달라졌다고 생각해요. 여성들의 삶의 문제라는 큰 틀에서 놓고 보면 두 소설이 어느 정도 연결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독특했던 건 「한 겹의 어둠이 더」에서 여성의 방이 아무에게도 발설되지 않는 방인데, 방을 발설하는 최초의 사람은 여성이에요. 또 이 여성에 의해 방이 명명되고 마을 사람들에게 구전도 되고 산 너머로 기록도 돼요. 이런 면에서 이 소설 속의 여성은 상징적인 기능을 하는 것 같아요. 서술자에 의해서 표현된 소설 속 여성이 처한 상황은 이렇습니다. 여성은 “하나의 방을 완주하면 또 다른 방이 기다리고 있”는 그런 상황 속에 놓여 있어요. 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계속 걷는데, “아무리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고요. 그리고 이런 문장도 있죠. “여긴 방이구나./나는 다만 문턱을 넘은 것뿐이었지.” 내부에서 외부로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문턱’밖에 넘지 못했어요. 이 여성이 계속 내부에 머물러 있는 이유는 ‘현실’이라는 외부에 의해 억압되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고요. 이 여성의 걷기는 ‘공적 공간의 진입’을 위한 행위로 보이는데, 끝과 시작이 반복될 뿐인 뫼비우스의 띠 같은 내부를 계속 맴돌고 있어요. 예전에 리베카 솔닛이 『걷기의 인문학』을 통해 ‘여성들의 걷기 문제’에 대해 섬세하게 탐구한 적이 있어요. 여성이 사적 공간과는 전혀 다른 공적 공간인 도시의 밤거리를 자유롭게 돌아다니지 못하는 문제를 ‘시민으로서의 공적 생활의 문제’와 연결시키거든요. 「개명」과는 이것을 정확하게 연결시키기는 무리가 있지만, 어쨌든 두 소설 모두 걷기 행위가 중요한 것처럼 보였어요.

 

김영삼 : 저는 사실 이 소설을 여성성과 관련해서 읽진 않았는데요. 송민우 평론가의 말을 듣다 보니 떠오르는 게 있어요. 소설 마지막 부분에 남자는 문 밖으로 나가잖아요. 여자는 못 나가는데. 이런 차원도 송민우 평론가의 말을 뒷받침해 주는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 같네요.

 

이서영 : 저는 이 작품에 처음 진입할 때 조금 힘들었던 것 같아요. 이 소설을 진행하는 음성이 매우 내밀하고 깊은 곳에서 나오는 것 같아서, 일단 그러한 텐션에 따라 저도 섬세한 독법과 시선을 갖춰야 할 것 같다는 의무감이 들었던 것 같아요. 또 어둠에서 시작해 아침이 오면서 끝나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함께 그 과정을 겪은 것 같았고요. 그래서 좀 버거웠어요. 긍정적인 의미에서요. 마치 길고 캄캄한 터널을 처음부터 끝까지 걷는 지난함이 있었는데요. 이러한 터널을 만든 것도, 터널을 건널 때 움켜쥘 수 있는 손전등을 건넨 것도 이 작가의 저력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저는 이 소설에서 특히 좋았던 지점이 “여긴 방이구나. 나는 다만 문턱을 넘은 것뿐이었지.”라는 자각이었는데요. 그 순간 이 이야기가 단순한 평면 상태이기를 거부해낼뿐더러 어떠한 고통을 돌출시키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던 것 같아요.

 

김영삼 : 우선 처음에는 문장이 먼저 눈에 띄었어요. 문장과 문장 사이에 시공간이 있는 것 같아요. 하나의 문장을 읽고 다음 문장으로 넘어갈 때 그 사이를 충분히 상상해야 했어요. 여자의 정서도 그래야만 했고요. 시적이었어요. 그러나 이 말을 달리 해보면 서사가 꼼꼼히 펼쳐진 건 아니어서 읽기에는 상당히 더뎠어요. 소설의 내용을 살펴보면 공간상으로는 마을이고, 그 내부에는 일곱 번째 집이 있고, 집 내부에는 남녀가 누워 있어요. 그리고 여자는 밤이 되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걸어 다니죠. 아무리 읽어도 현실의 서사처럼 보이진 않아요. 그래서 저는 이 소설을 꿈의 서사로 읽었어요. 그러자 문체도 이해가 됐어요. 꿈은 의미가 명징하지 않으니까요. 또 여자는 매일 밤마다 방을 반복해서 도는데 자신이 그곳에 온 적 있었다는 사실을 몰라요. 꿈이 그렇잖아요. 우리는 비슷한 꿈을 반복해서 새롭게 꾸니까요. 이러한 차원에서 여성의 밤샘 배회는 어딘가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한 자아의 모습처럼 느껴졌어요. 자신이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슬프기도 했고요.

 

이다희 : 소설의 장면을 생각해 보면 공포감이 커요. 여자가 한밤중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걸어 다닌다는 게 상상해 보면 되게 기이하잖아요. 그래서 저는 일단 여자를 귀신으로 봤어요. 귀신이 아니고서는 스토리가 잘 안 읽히더라고요. 마을 사람들이 산을 넘어가지 못하는 이유가 거기 가면 사람이 죽어 나가기 때문이잖아요. 그래서 여자는 마을 사람들이 은폐하고 있는 악몽, 마을의 집단적인 악몽 같았어요. 또 여자는 강박적이고 인간적이지 않은 걷기를 하는데 귀신처럼 보이는 이 여자가 놀라는 지점이 있잖아요. 아이가 치마를 슥 잡는 부분이요. 그러니까 여자도 뭔가 은폐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소설 마지막에 햇살이 만물을 비춘다고 하는 표현이 있는데 여자에게는 안 비출 것 같아요. 항상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는데 어떻게 햇살이 비추겠어요.

 

김영삼 : 확실히 소설에 서스펜스적인 면이 많아요. 몽유병적인 느낌도 있고. “그들”도 나와요. 함께 밤을 누비는 이들이요. 그런데 아무도 “그들”을 몰라요. 여자도 이들을 모르죠. 모르는데 같이 살아요. 그런데 이 집 바깥의 사람들은 여자를 몰라요. 마을의 일과는 반복되는데 여자는 그곳에서 비가시적으로 존재해요. 때문에 여자는 마을 사람들의 악몽, 감춰진 내면, 또는 발설되지 못한 가위눌린 욕망처럼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여기서 이러한 것들을 부정하지만, 이때 이 ‘이러한 것들’을 지칭할 수 있는 건 많아요. 송민우 평론가가 이야기한 것처럼 남성적 세계 속에서 억압당한 여성성의 세계라고 할 수도 있고요.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기 위해 어딘가에 감춰 두어야 할 것들에 관한 은유로 읽을 수도 있고요.

 

김주선 : 이제 정지우 시인의 첫 시집 『정원사를 바로 아세요』에 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최근에 본 그 어떤 시보다도 비약적인 표현이 많고, 나와 대상 간의 전도된 시선도 많습니다. 때문에 읽기 쉬운 시집은 아니었던 것 같고요. 주로 여러 고통들에 관해 이야기하는데 개인적인 고통은 물론이고 사회적인 차원에도 관심이 많으신 것 같아요. 시집을 읽는데 여러 사건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더라고요. 다들 어떻게 읽으셨나요.

 

김영삼 : 인상을 먼저 이야기하면, 시를 오랫동안 써왔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시어 하나하나에 의미를 꾹꾹 눌러 담은 것 같아요. 편하게 쓴 시가 없고 편하게 쓴 단어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시인 나름의 단어 사전이 머릿속에 명확히 저장되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어요. 요즘 어떤 문제나 단어를 쉽게 소비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시인은 그렇지 않다는 거죠. 그런 점에서 이 시집이 가지고 있는 무게감이 상당하다고 느꼈습니다.

 

송민우 : 이질적이라고 생각되는 두 개 이상의 어휘를 한 공간에 배치하는 것 같아요. 그런 배치를 통해서 어떤 효과를 만들어냈는가 하면, 저는 사실 잘 모르겠어요. 어휘들이 제게는 너무 무거워서 소화가 잘 안 되더라고요. 「등고선의 편견」이라는 시를 보면 청색과 빗소리를 결합한다거나, 비가 바지를 입고 있다거나, 북서풍을 찢고 있다거나, 옷의 불안이 되고 싶다거나 이런 표현들이 제게는 무겁게 다가왔어요.

 

이다희 : 시의 한 문장으로 시 한 편을 다시 쓸 수 있을 것같이 밀도가 촘촘했어요. 하루에 많은 시를 읽을 수 없고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어야 할 것 같은 느낌. 그래서 전반적으로 시의 구조가 확실히 보이는 시들이 좋았습니다.

 

이서영 : 저도 이 시편들을 오래 두고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먼저 했어요. 무엇보다 문장 하나하나에 얽혀 있는 구속과 해방이 눈에 띄었어요. 물론 모든 시인들이 그러하겠지만, 어떠한 고통을 통과해 낸 뒤 그것을 하나의 시적 패턴으로 만들어낼 때 결국엔 시인 스스로가 그 패턴에 구속되고, 또다시 그 패턴이라는 사슬을 끊고 나올 수 있는 강력함을 갖추면서 이전의 시를 능가하는 시를 만들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이 시집에는 그 영원히 끝나지 않는 싸움의 흔적들이 곳곳에 있는 것 같았어요. 이렇게 치열한 착상에는 뼈 물이 녹아 있을 수밖에 없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저도 시어 앞에서 숨이 막히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고요. 하지만 그 숨 막힘이 싫진 않았어요. 몸속에 둔 고통을 시로 만들 때까지는 절대적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이 시인은 그 공정 기간을 더 깊이 앓은 것 같아요. 저는 「날뛰는 면」이라는 시에 나타난 사물의 물질성에 대한 철저한 도취도 좋았고요, 「영역을 밟았기 때문이다」도 좋았어요. 열도가 굉장히 높은 말들로 구성된 시였다고 생각해요. 모든 단어가 꼭 다이너마이트처럼 느껴졌어요.

 

김주선 : 전체적으로 밀도 높은 시, 깊이 있는 생각, 느린 독서가 필요하다는 인상을 공통적으로 받은 것 같네요.

 

김영삼 : 저는 제 나름대로 이 시인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키를 찾아봤어요. 표제작인 「정원사를 바로 아세요」를 보면 아름다운 이복형제를 관리하는 정원사라는 표현이 있고, 「가까운 자매」에는 가까운 자매는 얼굴 하나를 같이 썼다는 표현이 나와요. 정지우 시인의 시는 다른 두 가지가 하나의 곳에 접합되어 있어요. 안/밖, 밝음/어둠 같은 거요. 대표적으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가까운 자매」, 「늑대와 양」, 「정원사를 바로 아세요」예요. 프로크루스테스는 동일성의 논리를 갖고 인식의 폭력을 휘두르는 존재고, 목동은 늑대와 양이 가진 성질을 모두 다스리는 인물인데 폭력적이진 않아요. 정원사는 서로 다른 것을 접붙이거나 높이 단층을 맞추는 관리사예요. 이것만 보면 개별적인 나무가 갖는 자연적인 속성을 마음대로 조정하기 때문에 프로크루스테스와 비슷하다고도 볼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시를 좀 더 읽으면 정원사는 아름다운 이복형제로 묘사된 나무를 관리해요. 서로 다른 나무를 접붙여서 관리하는 거죠. 그러니까 목동 같은 존재예요. 프로크루스테스와는 좀 다르죠. 저는 각각의 인물들 사이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생각을 해봤어요. 프로크루스테스처럼 동일성의 논리를 갖고 남에게 폭력을 가하는 사람인지, 정원사처럼 나름의 잘생긴 관상을 만들어내는 사람인지, 혹은 내 안의 늑대와 양이라는 양가성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존재인가라는 생각을 했어요. 아까도 말했듯이 작품이 내게 무엇을 주는가라는 관점에서 읽었을 때요.

 

이다희 : 저도 그 의견에 동의해요. 한 방향에 두 생각이 걸어간다고 하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런 표현이 나무의 이미지와 닮았어요. 나무를 생각해 보면 뿌리와 가지가 서로 거꾸로 가고, 하나의 가지에서 두 가지가 뻗어 나오기도 하잖아요. 그러니까 나무의 이미지가 모순의 한가운데 서 있는 느낌이에요. 저는 시집에 편재된 이미지가 나무와 의상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모순을 보여주는 곳에서는 한 극단을 택하는 게 아니라 둘 사이에 있는 나무를 보여주는 거고, 다채로운 비유들은 의상의 디자인이나 무늬, 색감을 보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런데 정작 내가 입을 수 있는 옷이 있고, 입지 못하겠으나 보는 것으로 즐거운 옷이 있잖아요. 때로는 전자처럼 직접 시를 입어보고, 때로는 후자의 상황처럼 예쁜 옷을 감상하듯이 시를 감상했던 것 같아요.

 

송민우 : 시에서는 의도적인 비문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데 저는 이 시집에서 의도적인 비문이 가질 수 있는 효과가 어떤지를 자꾸 고민했어요. 이 시인은 왜 언어의 운용을 이러한 방식으로 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가령 「의심 다섯 마리와 증거 한 마리」는 제게 좋게 보이지 않았어요. 표현의 층위에서부터 걸려요.

 

김주선 : 「마의 구간」은 어떠셨어요?

 

김영삼 : 「마의 구간」은 세월호가 생각날 수밖에 없는 시였어요. 배, 광화문 이야기가 나오고 자신의 손녀를 통해 죽음을 보는 인물이 있잖아요. 「찢어진 책」을 보면 아이들은 우리들의 영원한 은유인데 내일의 은유가 죽은 뒤에야 그 은유를 반성하기 시작한다고 하잖아요. 아이의 죽음 속에서 우리의 미래를 보는 거죠. 「마의 구간」도 마찬가지죠. 그렇다면 이 죽음을 무방비하게 내버려둔 존재는 누구냐. 잘살고 싶었던 지배 권력층이었고 그들은 우리에게 어떤 표준을 제시했죠. 그런데 그게 웃긴 게 어두운 동굴을 손으로 더듬는 법칙이에요. 정확하게 결과를 알 수 없는 법칙이요.

 

김주선 : 이 시에서 ‘표준’이나 ‘가파른 표정과 지붕’, ‘잘사는 나라를 건설하고 싶었단다’라는 시어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는 의견이 분분하겠지만 어쨌든 ‘표준’이라는 것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 것 같아요. 표준은 일종의 틀인데 이 시집 전체에서 일종의 규정이나 규범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여러 군데서 볼 수 있어요.

 

김영삼 : 재밌는 건 그 표준을 우리가 받아들였다는 점이죠.

 

김주선 : 네. 그러니까 바깥에서 만들어진 범주는 폭력적인데, 그 범주를 만들어낸 것도 사실은 우리 아니냐고 말하는 것 같아요. 이런 차원에서 생각해 봤을 때 「내일의 반경」도 의미심장해요. 여기서 “퇴화 목록을 살펴보면 가장 빈번한 곳이 반경이다”라고 말하는데요. 그러니까 반경은 항상 퇴화하는 곳이기도 하다는 뜻이잖아요.

 

김영삼 : 경계에 있으니까.

 

송민우 : 확실히 그런 정상성이라는 범주나 표준에 대한 거부감을 「단초」에서도 볼 수 있는 것 같아요. 이 시인은 무조건적인 동일성에 대해서 거부감을 갖는 것 같아요.

 

김주선 : 네. 어쨌든 시인에게는 일종의 균형감각에 대한 생각이 있는 것 같습니다.

 

김영삼 : 그걸 잘 해주는 이가 정원사인 것 같아요. 폭력적으로 느껴지면 프로크루스테스고요. 저는 아까 송민우 평론가가 말했던 「의심 다섯 마리와 증거 한 마리」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보고 싶어요. 이 시는 테크니컬 하잖아요. 사실 시집 전체적으로 기술적인 면이 도드라지죠. 하지만 이 훌륭한 테크니컬이 제 가슴에까지 오는지 잘 모르겠어요. 분명 그렇지 않은 시도 있는 것 같아요.

 

이다희 : 시인이 누리고 있는 자유와 그 자유를 가능케 한 절실함이 좋았어요. 다만 독자로서 제가 같이 진입했으면 하는 안타까움이 남았어요. 생활하다가 문득 한 구절, 한 구절 생각나면서 시집을 다시 펼쳐 볼 것 같아요.

 

김주선 : 시인의 테크니컬 함이 좀 더 편하게 와 닿는 시 중 하나가 「도도새 퇴화설」인 것 같아요. “발자국이 꽃잎으로 진화되었다”라는 구절이나 “새를 통과한 나무들만 날아오른다”라는 구절을 보면 이게 다 무슨 소린가 싶잖아요. 그런데 각주를 보면 도도새가 카바리아 나무의 열매를 먹고 살았고, 카바리아 나무는 새의 소화기관을 통해서만 성장할 수 있었다고 알려주죠. 그래서 저 구절들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또 이 시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도도새가 퇴화한 이유를 역설적으로 말하는 부분이 나오잖아요. 도도새가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서 퇴화한 게 아니라, 제 몸에 맞는 상공이 없어서 퇴화했다고요. 그러니까 자기와 대상 간의 관계를 전도시켜서 보여주는 시인의 테크니컬 혹은 시선이 눈에 잘 띄는 시 중 하나가 아닌가 싶어요.

 

김영삼 : 저는 시집을 읽으면서 르네 마그리트가 생각났어요. 마그리트 그림이 감동을 주진 않지만 일종의 인식적 충격을 주잖아요. 정지우 시인의 시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가슴에 와 닿지는 않아도 시인이 사용하는 전치, 병치, 치환 같은 기법들이 제게 세계를 보는 새로운 시선을 주더라고요.

 

김주선 : 네. 또 「불통을 어루만지다」를 보면 봄의 고집 덕분에 겨울을 뚫고 나온다고 하잖아요. 한데 시집 전체적인 분위기를 보면 고집이라는 시어가 그다지 좋지 않게 쓰일 것 같은데 여기서는 명백히 좋게 쓰인단 말이죠. 고집이 옆에 없어서 외롭냐고 묻기도 하고요. 그런데 시인의 시선은 단순히 고집이 필요하다, 고집이 좋다, 이렇게 말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고집 대 고집이 만났을 때 발생하는 게 불통이잖아요. 때문에 그 불통을 어루만져 줄 존재가 필요해요. 이 시에서 파마에 관해 얘기하는데 적당한 온도를 갖고 머리를 말면 곱슬거리는 머리를 가질 수 있다고 하고, 끌고 가는 힘과 버티는 힘에도 온도가 필요하다고 말하니까 양 끝을 아우를 수 있는 존재가 필요한 것 같아요. 정원사처럼요.

 

이다희 : 적당한 온도를 갖고 머리를 말아야 예쁜 파마머리가 나온다는 게 재밌어요. 고집을 부리려면 겨울을 뚫고 나올 만한 고집이 있어야 하고.

 

김영삼 : 그 구불구불함이 시집 전체적으로 잘 사용되는 모티프인 것 같아요. 가령 양이나 등고선 같은 거요. 등고선을 표시할 때 간격이 촘촘하면 경사가 높은 곳이잖아요. 근데 이게 기압 표시할 때랑 같아요. 기압골이 촘촘하거나 멀면 고기압이 되고 저기압이 되거든요. 그래서 등고선이 등장하는 시에 비가 오고 그러는 거죠.

 

김주선 : 시집 전체적으로 사회적 고통이나 개인적 고통을 다룬다고 했었잖아요. 특히 세월호가 잘 생각나고요. 그런 의미에서 「무릎의 지평선」이 참 좋았어요. 이 시도 좀 잘 읽히는 시 중 하나인데요. 시적 화자가 흙탕물을 뒤집어쓴 꽃에게 꽃으로 보일 때까지 일어나지 말라고 해요. 어쩌면 옳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쉽게 수긍해버린 일들로 인해 일어나고 앉아야 할 때를 놓친다고 하면서요. 의미심장한 말이죠. 개인이 고통을 겪을 때 그 고통 속에서 어떻게 일어서야 하는지에 대해 힘을 주는 시인 것 같아요. 또 고통이 낮은 자세를 가르치고 슬픔이 슬픔에게 손을 내민다고 표현되는 시도 있는데요. 이런 시도 힘을 주는 것 같아요.

 

김영삼 : 슬픔은 낮은 곳에 있으니까 무릎을 굽히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김주선 : 시집에 관해 할 말이 많지만 다 얘기하는 건 무리일 것 같으니 이제 마지막으로 취향 저격 시를 말씀해 주세요.

 

이서영 : 저는 「영역을 밟았기 때문이다」와 「등 뒤에서」가 좋았어요. 가파른 곳을 달리는 시인이 보였던 것 같아요.

 

이다희 : 저도 「등 뒤에서」가 좋았어요. 완전히 제 취향 저격이에요. 「지평선 꼬리」도 좋았는데요. 여기에는 제가 좋아하는 것들이 많이 등장해서요.

 

송민우 : 저는 「mouthbreeder」가 좋았어요. 시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히 다가왔어요. 특히 5연에 너를 잘 키우고 싶어서 또 낳았다는 말이 제게는 강렬했어요.

 

김영삼 : 저는 「가까운 자매」가 좋았어요. 제 안에도 저랑 얼굴을 같이 쓰는 자매가 많아서요. 저도 좋은 정원사가 되겠습니다.

 

이다희 : 어떤 얼굴을 쓰고 계시는 거죠? (웃음)

 

김영삼 : 정원사는요, 나무의 본성을 감출 줄 알아야 해요.

 

김주선 : 세상에, 명언 하나 투척하셨는데요. (웃음) 저는 「꽃들의 시차」가 좋았어요. 꽃이 시간대가 맞지 않은 다른 지역에서 오는데 누군가의 머릿속에 기억되기도 하고, 또 그냥 숲 속에서 늙어 가기도 하잖아요. 그런 느낌이 좋았어요.

 

김주선 : 이것으로 제5회 좌담회를 마치겠습니다. 모두 수고하셨어요.

 

일동 : 수고하셨습니다.

 

 

 

 

 

 

 

 

참여자 소개 / 김주선

전남 화순 출생. 2015년 문학과사회 평론부문 등단. 조선대학교 강사

 

참여자 소개 / 김영삼

전남대학교 국문과 강사

 

참여자 소개 / 송민우

201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 등단. 조선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재학

 

참여자 소개 / 이다희

대전 출생. 광주 거주. 201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등단.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석사 수료

 

참여자 소개 / 이서영

조선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 재학

 

 

   《문장웹진 2018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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