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언 스텐더즈: 박민규, 편혜영 - 서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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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코리언 스텐더즈: 박민규, 편혜영

– 버스를 타고 고속도로를 바람처럼 달려가자

 

 

서희원

 

 

 

 

 

    한때, 그리고 지금도, 어쩌면 앞으로도, 한국과 한국인의 모든 것을 말해 준다고 생각되는 두 가지 숫자가 있다. 대한민국의 경제성장률과 1인당 국민소득이 그것이다. 1998년 IMF 이후 2018년까지의 경제성장률을 먼저 보자. 제15대 김대중 정부의 경우 평균 5.32%의 경제성장률을, 제16대 노무현 정부는 4.48%를, 이명박 정부는 3.2%를, 박근혜 정부는 2.95%를,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2017년은 3.1%를 기록하였다. 어림잡아 지난 20년 동안 대한민국의 경제는 매년 3.5% 이상씩 성장한 것이다. 이런 비유가 경제학적으로 의미를 갖는지 판단할 수는 없지만 나름의 이해방식으로 설명하자면, 1997년에 160cm의 키를 가진 사람이 매년 3.5%씩 성장하여 2018년엔 318cm가 되었다는 ‘재크와 콩나무’ 같은 이야기이다. 쑥쑥.
    1인당 국민소득의 경우 더욱 놀라운데, 1997년의 경우 한국인의 국민소득은 1만 달러가 조금 넘었으나(IMF를 겪었던 1998년의 경우 7,989달러로 크게 하락하였다), 2007년에는 22,992달러가 되었고, 2017년에는 29,745달러 그리고 2018년인 올해에는 선진국의 지표인 대망의 3만 달러대에 진입할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1) 사용가치는 없고 오로지 교환가치만을 가진, 그 덕분에 모든 가치를 환원할 수 있는 물신이 된 돈(달러)이 백분율(percentage)보다는 좀 더 이해하기 쉽게 느껴지겠지만 실제 한국인이 자신의 삶에서 느끼는 여러 가지 감각(행복의 척도가 되는 가치의 단일화와 불행을 감지하는 지표의 다양화, 더욱 힘겨워진 노동 강도와 볼품없는 여가, 가정에서 느끼는 만족감의 저하, 인간을 지탱하는 자존감의 붕괴, 높아진 실업률과 자살률 등)을 통해 이해하자면 이 숫자들은 20년의 시간 동안 한국인이 경험한 고통과 정신적 황폐화에 대한 그럴듯한 설명을 전혀 할 수 없는 거대한 허수이자 경제학자들과 정부 관료가 합작하여 만들어낸 국가의 픽션(fiction)에 불과하다.

  1)  경제성장률과 1인당 국민소득은 한국은행 홈페이지 내 <한눈에 보는 우리나라 100대 통계지표>를 참조하였다. http://ecos.bok.or.kr/jsp/vis/keystat/#/detail

 

    노드럽 프라이의 짧지만 정확한 정의에 따르자면, “소설에 있어서의 기법상의 과제는 모든 이론을 인간관계로 해소하는 것”이다.2) 은행원이나 보험설계사처럼 숫자를 통해 한국인의 현재와 미래를 명쾌하게 표현할 수 없는 소설가들은 사건의 플롯과 인간에 대한 형상화를 통해 이를 에둘러 보여준다. 소설가는 개별적 상황에서 개별적인 인간들이 연기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동시에 이를 통해 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인간이 경험할 수 모든 다양성의 양상들을 그려내고자 시도한다. 소설이 형상화하고 있는 대상과 그에 대한 폭넓은 이해 사이에서 벌어지는 인과의 관계를 설명해 주는 기법 중 하나의 명칭은 알레고리인데, 자본주의 이후의 소설에서는 벤야민이 얘기했던 ‘알레고리적인 것의 이율배반’ 즉 개별적인 인물, 관계, 대상이 절대적으로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3) 박민규가 2005년에 발표한 단편 「코리언 스텐더즈」와 편혜영이 2008년 발표한 「관광버스를 타실래요?」는 이러한 작가들의 알레고리 기법을 멋지게 펼쳐낸 단편이다. 각각 SF 농촌 활극과 부조리극 형식의 스릴러로 서사화 되고 있어 개별적인 독서물로도 매력적이지만, 여기에는 매년 세계 경제의 성장률을 뛰어넘는 고속성장을 거듭하여 연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로 진입한 한국인들에 대한 알레고리적 스케치가, 읽지 못했다고 말할 수 없는 정도로, 분명하게 담겨 있다.

  2)  노드럽 프라이, 『비평의 해부』, 임철규 옮김, 한길사, 1982, 437쪽.
  3)  이에 대해서는 프랑코 모레티의 『근대의 서사시』(조형준 옮김, 새물결, 2001) 중 4장의 「알레고리와 모더니티」 1, 2절을 참고하였다.

 

    박민규의 「코리언 스텐더즈」는 사회적 공동체가 가져야 하는 경제적 지위와 정치적 역할 등이 소멸하고 있는 농촌과 발전의 산물을 독점하고 있는 대도시, 1980년대 중반 민주주의에 대한 정치적 신념만이 삶의 전부였던 청년과 모든 것이 아파트 평수와 경제적 성공으로 환원된 2000년대 중반의 속물적 중년의 대조를 통해 한국인에 대한 풍자를 우화의 방식으로 진행하고 있는 작품이다. 85학번인 석현은 마흔 살이 된 어느 날 대학 시절 자신이 소속된 운동권 그룹의 리더이자 속칭 학생운동 “스타 플레이어”였던 “기하 형”의 전화를 받는다. 기하 형은 석현 아내의 첫사랑이자 출소 후 정치권으로 입성하여 국회의원이 될 것이라는 선후배들의 기대 ― 그들은 자발적으로 후원회를 조직해 석현의 정치적 행보를 돕지만 국회의원이 될 거라는 세속적 기대와는 달리 석현이 농촌운동을 지속해 나가자 후원회는 유명무실하게 와해된 상태이다 ― 와는 달리 농촌운동에 투신한 상태이다. 절실하게 도움을 요청하는 “기하 형”의 목소리에 석현은 예정된 가족과의 휴가를 포기하고 기하 형의 농촌공동체가 있는 실상리(失像里)로 내려간다. 농촌을 미디어나 스쳐 지나가는 차창 밖 풍경으로밖에 접한 적이 없는 ‘나’에게 기하 형이 있는 실상리는 그 본모습(實相/實像)을 가름할 수 없는 공간, 한자 뜻 그대로 ‘失像里’이다.
    역설적이지만, 근접한 미지의 공간인 농촌으로 떠나는 낯선 모험을 위해 ‘나’는 만반의 준비를 한다. “심해로 거처를 옮기게 된 열대어처럼, 그래서 나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또 갖추었다. 등산복과 등산화를 챙기고, 각종 구급약과 붕대를, 또 이런저런 공구들과 사냥총을, 또 충분한 탄환을, 트렁크에 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돈을, 상당한 액수의 현금을, 구비했다. 돈만큼 사람의 마음을 안심시키는 것은 없었다.” ‘나’의 말처럼, 돈만큼 사람의 마음을 안심시키는 것도, 돈만큼 문제의 해결에 도움이 되는 것도 없는 시대이지만, 실상리에서 ‘나’는 돈도, 심지어는 사냥총도 전혀 쓸모가 없는 새로운 형태의 문제 상황을 목도하게 된다. 오랫동안 진행된 농촌의 경제적 붕괴와 함께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던 실상리의 공동체는 “외계인의 습격”이라는 새로운 종류의 침략을 맞고 있었던 것이다. 외계인은 기하의 공동체가 오랜 시간 공들여 이룩한 축사나 유기농 청정미가 자라는 논 등을 철저하게 파괴하고, 마지막에는 옥수수밭 위에 거대한 “크롭 서클(Crop Circle)”을 남기고 사라진다.

 

    차에서 내린 우리는 언덕의 끝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 비로소 자신의 위치를 찾은 허수아비처럼, 두 팔을 허하니 벌린 마음으로 옥수수밭의 전경을 확인할 수 있었다. 거기엔

    가 그려져 있었다. 놀랍도록 정확한 비례의, 거대한 KS였다. 이놈들… 하고 기하 형이 말문을 열었다. 우릴 너무 잘 알고 있구나. 아, 하고 나는 그래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우릴 너무 잘 알고 있구나.”라는 기하 형의 말처럼, 결말부에 찍힌 ㉿ 마크는 이 단편의 의미를 독자들에게 “너무 잘” 알려준다. 신념도, 첫사랑도, 청춘의 푸른 꿈도, 유기농 청정미도, 농촌도, 신뢰를 바탕으로 한 사람들의 연대도, 덧없이 사라진 세속적인 시대, ㉿ 마크가 찍힌 폐허가 된 옥수수밭 위에 한국인은 살고 있는 것이다. 말 그대로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심히, 나부끼는” 세계, 연봉과 “34평 아파트”가 가치의 척도가 된 일상, 이것이 바로 민주화 이후 맞이한 신자유주의 시대의 본모습인 것이다. 덧붙이자면, 박민규가 선택한 남성 서술자인 ‘나’는 “인정을 열망하다가 인정의 목적을 잊는” 전형적인 속물의 아이러니에 갇혀 있는 인간이다. 속물은 “타인을 타인 그 자체로 보지 못하고 그가 가진 지위 혹은 문화적 자본으로 그를 판단한다.”4) ‘나’는 “농촌”을, “운동권”을, 의리를 모른다고 동료 여직원이나 아내를 멸시하지만, 서사가 진행될수록 독자들이 분명하게 알게 되는 것은 ‘나’ 역시도 흉내만 내는 수컷 앵무새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4)  김홍중, 「스노비즘과 윤리」, 『마음의 사회학』, 문학동네, 2009, 84쪽.

 

    편혜영의 「관광버스를 타실래요?」는 상사에게 모종의 일을 지시받은 두 회사원 “케이”와 “에스”의 간단한 출장을 다루고 있는 단편이다. 상사는 케이와 에스에게 정체를 알 수 없는 하나의 자루를 배달하는 일을 지시하고 돌아올 때 쓸 “관광버스 승차권”을 준다. 이 일에 붙은 단서조항은 단 하나 “절대 자루를 열어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남자 둘이 들어야 하는 육중한 자루를 들고 상사의 지시에 따라 “D시”에서 “B군”으로, 다시 “G읍”으로, 거기에서 “장승이 있는” “흉가”와 같은 “낡은 집”으로 간다.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기에 그들은 자루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는 것인지, 이걸 누구에게 전달해야 하는 것인지 등과 같은 상식적 질문을 던지지만 이내 자신들이 회사에서 지금까지 해온 업무와 이 일이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결론으로 회귀한다. 그들은 자루를 인계할 누군가를 기다리며 낡은 집에서 잠이 든다. 아침이 되었을 때 자루는 사라졌지만 그들은 “야간 근무자”나 “당직자”가 다녀갔을 것이라 생각하며 상쾌한 기분으로 복귀한다. 그들은 터미널에서 고속버스 표를 끊지만 상사가 준 “관광버스 승차권”을 떠올리고는 “터미널과 반대쪽에” 위치한 승차장에서 지금 막 출발하려는 버스를 탄다. 흥겨운 노래가 나오는, 승객 중 몇몇은 그 노래를 큰 소리로 따라 부르는, 관광버스를 타고 그들은 목적지도 모르는 길을 간다.
    간단한 스토리지만 편혜영은 결코 이러한 이야기를 가만히 두고 있을 만큼 단순한 작가가 아니다. 편혜영은 그들이 운반해야 하는 자루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불길함과 더러운 범죄의 흔적을 아로새긴다. 남자 두 명이 들어야 하는 자루의 기분 나쁜 무게감, 절대 열어서는 안 된다는 단서조항, 담긴 것에서 풍기는 냄새나 부유물이 밖으로 쉽게 배출되지 않게 “안에 비닐이 덧대어진” 자루의 매무새,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렁한가 하면 단단하고 단단한가 하면 물렁거”리는 마치 “생고기” 같은 촉감과 비닐 밖으로 스멀스멀 풍겨 오는 악취는 독자들에게 혹시 이것이 시체일지도 모른다는 악몽과도 같은 상상을 자아낸다. 이 의구심은 열리지 않는 자루와 그것의 흔적도 없는 사라짐으로 인해 결코 해소되지 않지만 이것이 더러운 어떤 일과 깊게 연계되어 있다는 그러한 감각만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이 일을 마치고 케이와 에스는 대화를 나눈다.

 

이제껏 이런 일을 해본 적이 있어?
자루에 관한 일은 처음이야. 너도 알다시피 늘 페로니켈이나 마그네슘에 관한 일만 해왔잖아.
나도 그래. 처음이야.
처음인데 낯설지가 않아.
그러게. 어쩐지 익숙해. 한 번만 해도 잘하게 될 것 같은 일이기도 하고.

 

    입사동기이지만 항상 서로를 경쟁자로 인식했던 케이와 에스. 비슷한 어린 시절의 추억과 성장배경을 공유하고 있는, 같은 회사에 근무하며, 누구든 할 수 있는 일을 누군가와 다르지 않게 처리하며 살아가고 있는 케이와 에스. 결코 못 봤다고 말할 수 없는 더러운 일의 흔적이 새겨진 자루를 운반하며 그 일 자체의 노동을 분업화하는 합리성을 가지고 있지만 결코 자루를 열어 보지 않는 케이와 에스. 편혜영은 그들을 신문의 낱말풀이에서 본 “군더더기나 무용지물을 뜻하는 ‘부’로 시작하는 두 글자의 낱말”, 즉 ‘부췌(附贅)’라고 지칭하고 있지만, 더 정확하게는 그들은 관료제 사회에 너무나도 완벽하게 흡착된 한국인의 표준, 즉 케이에스(㉿)이다.

 

    「코리언 스텐더즈」의 마지막 장면에서 기하 형과 ‘나’가 내려다보고 있는 크롭 서클이 찍힌 황폐화된 옥수수밭, 「관광버스를 타실래요?」의 결말에서 케이와 에스가 탄 관광버스가 달리는 “끝없이 이어져 있”는 고속도로, 이 상반된 듯 보이는 공간은 사실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공간과 공간은 길을 통해 연결되고, 한 곳은 농촌으로 착취되고 다른 한 곳은 도시로 개발된다. 산업화의 과정에서 알 수 있듯이 교통은 연결망을 확장하고 끊임없이 착취하며 번창한다. 처음이 힘들지 두 번은 쉽다. 케이와 에스의 말처럼 이런 일은 쉽게 익숙해진다. 죄책감은 관광버스의 흥겨운 노래와 함께 사라지고, 볼트와 너트처럼 규격화된 한국인은 “한 번만 해도 잘하게 될 것 같은” 숙련과 능숙의 경험을 축적하며 또 다른 일을 수월하게 해치운다. 시위 진압도, 댓글도, 4대강 사업도, 자원외교도, 비자금도, 블랙리스트도, 세월호 참사의 뒤처리도. 슥슥.

 

    한때, 그리고 지금도, 어쩌면 앞으로도, 한국과 한국인은 자본주의의 성장 속도에 몸을 맞추며 살아왔다. 마치 “버스를 타고 고속도로를 바람처럼 달려”가며 흥겹게 “뛰뛰 뛰뛰 뛰뛰 빵빵 뛰뛰 뛰뛰 뛰뛰 빵빵” 노래를 부르는 사람처럼.5) 우린 아픈데도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고, 괴로운데도 괴롭다고 말하지 못하고 지냈다. 무수하게 많은 한국인이 이 관광버스에서 탈락했고, 고속도로에서 로드킬을 당했다. 지금도 많은 한국인은 죽지 않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자동차와 같은 속도로 달리는 야생동물처럼 살아가고 있다. 한국인은 자신이 “뛰뛰 빵빵” 하고 신나게 클랙슨을 울리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는 거대한 착각에 불과하다. 자본주의의 강렬한 헤드라이트 불빛은 내 앞에 놓인 것이 아니라 내 뒤에 있다. 한국인은 차에 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차 앞에서 죽지 않기 위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공포를 망각하기 위해 내가 클랙슨을 울리고 있다고 합리화하며. 하지만 그 소리는 내게 들려오고 있는 것이다.

  5)  <뛰뛰빵빵>(1977년, 노래 혜은이, 작사/작곡 길옥윤).
https://www.youtube.com/watch?v=syz-TuppUxo

 

 

 

 

 

 

 

 

 

 

 

 

 

 

변웅필
표지 / 변웅필

변웅필은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 독일 뮌스터 쿤스트 아카데미에서 순수미술을 전공했다. 현재 강화도에서 강아지 만득이와 살며 전업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작가소개 / 서희원


문학평론가. 2009년 《문화일보》, 《세계일보》 평론으로 등단.

 

   《문장웹진 2018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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