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자란 아이 외 1편 - 배수연
목록

[신작시]

 

 

오래 자란 아이

 

 

배수연

 

 

 

내게 날개가 있다면
그 날개를 고치겠어
내게 자전거가 있다면
그 자전거를 고치겠어
만일 선풍기가 있다면-

 

오래 자란 뒤

 

내게 말을 거는 것들에게
나는 많은 것을 물었다고
많은 것이 변했지
그런 날들은
많은 것을 사랑했던
하얗고 부드러운 가시
고양이 입가에서 웃으며
길고 가늘게 흔들렸다고

 

지구는 네 계절의 선풍기니까 *
푸른 얼굴 위로
흰 날개 돌아가고
자전거의 동력으로 회전하는
그곳에서 함께 흔들리면서
“나는 많은 것을 고쳤어요.”라고
입이 있다면

 

  *  박민재의 미발표 소설 「지구 선풍기」

 

 

 

 

 

 

 

 

 

 

 

 

 

식사시간

 

 

 

엄마는 공들여 큰 공을 구웠다가
아빠와 내가 식탁에 앉으면
커다란 접시에 공을 올리고
손도끼를 꺼내 박살을 내준다
공은 어떤 잘못인 것처럼
잠시 부끄럽고

 

깨진 공의 뜨거운 살을 주워 후후 불어 먹으며
아빠와 나는 똑 닮은 입술과 황니를 벌리고

 

이따금 외식을 하면
엄마는 남이 들인 공에 열심히 젓가락질을 하고는
돌아와 베개에 얼굴이 팍 먹힌 채로 잠을 잔다

 

엄마가 웃거나 엄마가 화나거나 엄마가 지루하거나 엄마가 무덤덤한 날에도
우리는 그 공을 먹었고 그 공이 가장 익숙해서
엄마가 박살을 낼 때마다
눈을 감지 않았다

 

 

 

 

 

 

 

 

 

 

 

 

 

 

작가소개 / 배수연

2013년 《시인수첩》으로 등단. 시집 『조이와의 키스』가 있음.

 

   《문장웹진 2018년 05월호》

 

목록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