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무인간 루피와 ‘연장(延長)’ - 권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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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원피스인문학]

 

 

“몸이 또 늘어났다!”

― 고무인간 루피와 ‘연장(延長)’

 

 

권혁웅

 

 

 

    1.
    오늘은 『원피스』의 주인공 루피 얘기다. 어렸을 때 해적 빨간 머리 샹크스가 적에게서 빼앗은 악마의 열매를 멋모르고 먹어서 능력자(악마의 열매를 먹은 자를 이렇게 부른다)가 되었다. 악마의 열매를 먹으면 그 열매에 해당하는 능력을 갖게 된다. 악마의 열매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가 자연계 열매다. 자연계 열매를 먹으면 빛, 불, 얼음, 지진 등 자연에 존재하는 물질이나 현상으로 변신할 수 있으며, 무장색 패기를 통한 공격 외에는 일체의 공격이 통하지 않는 강력한 능력을 얻게 된다. 둘째가 동물계 열매다. 이 종류의 열매를 먹으면 새, 개, 두더지 등 해당 동물의 능력을 갖게 된다. 이 가운데에는 티라노사우루스 같은 고대종(古代種)이나 불사조 같은 환수종(幻獸種)도 있다. 마지막이 초인계 열매다. 자연계나 동물계가 아닌 여타의 모든 능력이 초인계로 불리며 따라서 그 범위가 넓다. 루피가 먹은 고무고무 열매도 초인계에 속한다. 루피는 고무의 특징인 탄력성, 신축성, 충격 흡수, 절연체(絶緣體) 등의 특징을 활용하여 맨몸으로 싸운다. 처음 열매를 먹었을 당시에는 몸이 늘어나는 것 외에는 보여줄 게 없었으나 끊임없는 단련을 거쳐 강자의 반열에 올랐다.
    아무리 단련을 한다고 해도 루피는 몸을 늘이거나 줄이는 것, 풍선처럼 탄력 있게 바꾸거나 쇠처럼 단단하게 바꾸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없다. 무수한 악마의 열매 능력자들 사이에서 제 몸뚱이 하나로 싸우는 주인공을 보면 안쓰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다. 실제로 루피는 모래인간 크로커다일에게 수분을 빨려 미라가 되기도 하고, 얼음인간 아오키지에게 체온을 잃어 냉동인간이 되기도 하며, 독인간 마젤란에 의해 중독되어 식물인간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당당한 주인공이다. 얼핏 보면 무능하기 짝이 없는 능력을 주인공에게 부여하다니, 여기에는 어떤 비밀이 숨어 있을 듯하다. 루피의 성장 과정을 따라가며 이 비밀을 밝혀 보기로 하자.

 

    2.
    공간에서 일정한 부피를 갖는 것은 모든 물체(사물)의 특성으로, 이를 철학에서는 연장(延長, extention)이라고 부른다. 우리 집 부엌에 있는 냉장고는 직육면체의 부피를 차지하고 있어서 (제 안에 품는 음료와 얼음, 야채와 반찬통 같은 것들을 제외하면) 다른 것들, 이를테면 TV나 장롱과 공간을 나누어 갖지 않는다. 연장의 가장 중요한 특성이 이것이다. 곧 연장은 (연장을 가진 물체를 통해서) 공간에 특정한 형태와 부피와 방향성을 제공한다.
    우리가 아는 공간은 세 개의 차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의 점은 영차원이다. 점이란 길이, 넓이, 높이가 모두 0인 지점을 가리킨다. 이 점이 일정한 방향(x축)으로 움직이며 생긴 흔적들이 일차원이다. 따라서 일차원은 선분으로 이루어진다. 이 선분이 일정한 방향(y축)으로 움직이며 생긴 흔적이 이차원이다. 따라서 이차원은 면을 구성한다. 면이 일정한 방향(z축)으로 움직이며 생긴 흔적이 삼차원이다. 따라서 삼차원은 부피를 나타낸다. 점 → 선 → 면 → 부피로 전개되면서 차원이 증가하는데, 인간의 통상적인 감각이 파악할 수 있는 공간 차원은 여기까지다.
    초창기 루피의 공격기술은 이 순서를 따라서 발전해 간다. 루피가 모험을 시작하면서 맨 처음 선보인 기술은 앞바다의 괴물에게 쓴 것이다. 10년 전 자신을 잡아먹으려고 달려들었던, 은인 샹크스의 팔 한 짝을 물어뜯고 달아났던 커다란 악어를 닮은 괴물이다. 루피의 공격기 이름은 “고무고무 총”(1권 1화, 2화)이며, 오른팔을 어깨에서 주먹까지 일직선으로 뻗는 기술이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다. 자신의 몸을 일차원 방향으로 연장하기. 그다음 선보인 기술은 도끼손 모건의 부하들을 날려버린 발차기로 “고무고무 채찍”(1권 6화)이라 부른다. 루피는 발을 횡으로 뻗어 평면을 쓸고 지나갔다. 이렇게 정리하자. 자신의 몸을 이차원 방향으로 연장하기. 그다음 선보인 기술은 “고무고무 해머”(2권 13화)와 “고무고무 풍선”(2권 15화)이다. 전자는 두 손을 꽈배기처럼 꼬아서 상대를 잡은 다음 회전력을 이용하여 내려치는 기술이며, 후자는 몸을 풍선처럼 부풀려 날아오는 포탄을 튕겨내는 기술이다. 이렇게 적어 두자. 자신의 몸을 삼차원 방향으로 연장하기.
    xyz, 세 개의 축으로 이루어진 삼차원 공간에 추가된 네 번째 차원의 공간(흔히 w축으로 표시된다)은 인간의 지각체계에 알려지지 않았다. 만일 사차원의 공간이 있다면, 삼차원의 우리가 이차원의 개미를 쉽게 들어 올리듯이(그리고 그것이 개미에게는 마술적인 출현과 증발로 지각되듯이), 삼차원의 어느 공간에서든 마술적으로 나타나고 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원피스』에서는 문문열매 능력자 블루노가 바로 그런 사차원의 인간이다. 그는 어디서든 공간의 문을 열고 나타났다가 문을 닫고 사라질 수 있다. 연장을 대표하는 주인공 루피는 당연히 그런 차원을 인정하지 않으며, 한 번의 전투로 그를 간단히 제압한다.

 

    3.
    근대 과학을 대표하는 뉴턴은 사과를 끌어당기는 힘과 달이 지구를 도는 힘이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만유인력의 법칙은 중력이 바로 이 인력(끌어당기는 힘)이라고 설명한다. 돌을 던지면 돌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다가 떨어진다. 포물선의 변곡점이 지구 중력과 돌이 날아가는 힘의 크기가 같아지는 지점이다. 돌을 지구의 중력을 이길 정도로 세게 던지면 돌은 지구 밖으로 날아가게 될 것이다. 그 중간의 힘으로 던지면? 돌은 지구를 벗어나려는 힘과 지구가 끌어당기는 힘 사이에서 균형을 찾게 되므로, 지구를 돌게 될 것이다. 그렇게 도는 거대한 돌이 바로 달이며, 인간이 그 힘으로 던진 쇠붙이가 인공위성이다. 그런데 만유인력이 가능하려면 힘이 ‘어디서나’ 그리고 ‘언제나’ 동일하게 작용한다고 가정해야 한다.

 

    뉴턴에 따르면 이런 힘들은 즉각적으로 작용한다. 예를 들어 태양이 갑자기 사라진다면 뉴턴은 지구가 즉각 궤도를 벗어나 암흑의 공간 속에서 얼어붙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때 우주의 모든 존재는 태양이 바로 그 순간에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주의 어느 곳에서든 모든 시계가 같은 시간을 가리키고 일정하게 흘러가도록 맞추는 게 가능하다. 지구에서의 초는 화성이나 목성에서의 1초와 같다. 나아가 공간도 시간처럼 절대적이다. 지구에서의 1미터는 화성과 목성에서도 1미터이며, 우주의 어느 곳에서든 이 길이는 변치 않는다. 그러므로 공간의 어느 곳을 여행하든 시간과 길이는 언제나 일정하다.
    뉴턴은 이처럼 상식적인 절대시간(absolute time)과 절대공간(absolute space)의 관념 위에 그의 아이디어를 세웠다. 뉴턴에 있어 이런 공간과 시간은 절대기준계(absolute reference frame)의 역할을 하며 모든 물체들의 운동은 이에 대하여 판단된다.1)

  1)  미치오 카쿠, 『아인슈타인의 우주』, 고중숙 옮김, 승산, 2007, 26-27쪽.

 

    근대과학은 이처럼 시간과 공간에 불변적인 지위를 부여했는데, 이것은 상식적인 시간관, 공간관에도 부합한다. 그런데 이런 시공간은 물리적인 실체일까? 혹시 인간이 세계를 파악하기 위해서 가정한 눈금 같은 것은 아닐까? 『프린키피아』(1687)보다 1세기 뒤에 출판된 책(1781)에서 칸트는 이렇게 말한다.

 

    공간은 사물들 자체의 속성을 표상하거나 사물들 자체를 그것들의 상호 관계에서 표상하지 않는다. ~공간은 대상들 자체에 부착해 있어서 사람들이 직관의 모든 주관적인 조건들을 추상화해 버려도 남는, 그런 사물들 자체의 규정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물의 규정은>) 그것이 절대적 규정이든 상대적인 규정이든 규정이 귀속하는 사물들에 앞서서 직관될 수 없고, 따라서 선험적으로 직관될 수 없기 때문이다.
    공간은 다름 아니라 외감의 모든 현상들의 형식일 따름이다. 다시 말해 공간은 그 아래에서만 외적 직관이 가능한, 감성의 주관적 조건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오직 인간의 입장에서만 공간에 대하여 연장적인 것 등에 대하여 얘기할 수 있다. 우리가 이 ~주관적 조건에서 이탈한다면, 공간이라는 표상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이 술어는 오로지 사물들이 우리에게 현상하는 한에서, 다시 말해 감성의 대상인 한에서만 사물들에 부과된다. 우리가 감성이라고 부르는 이 수용성의 항구적인 형식은, 그 안에서 대상들이 우리 밖의 것으로 직관되는 모든 관계들의 필연적 조건이고, 우리가 이 대상들을 도외시할 경우에는 공간이라는 이름을 지니는 하나의 순수 직관이다.2)

  2)  칸트, 『순수이성비판』, 백종현 옮김, 아카넷, 2006, 247-248쪽.

 

    칸트에 따르면 공간은 물리적인 실체가 아니며, 인간이 외부의 경험에서 얻어낸 경험적 개념조차 아니다. 인간이 어떤 사물(연장적인 실체)을 떠올리기 위해서는 먼저 공간이라는 표상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것이 연필이든 나무이든 지구이든, 우리는 그것을 특정한 공간에 위치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외적인 것을 표상할 때 선행하는 것이 공간이라면, 공간은 물리적이거나 경험적인 실체가 아니라 모든 외적 표상을 가능하게 하는(그 표상들의 바탕을 이루는) 우리 감성의 형식, 곧 외적인 직관에 지나지 않는다. 같은 방식으로 칸트는 시간 역시 경험적 개념이 아니며, 우리가 사물들이 나란히 있는가(동시성), 잇따라 있는가(계기성)를 지각하게 해주는 내적 직관이라고 말한다.
    칸트의 주장대로 시간과 공간이 갖는 실체로서의 성격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절대적인 좌표계로 작용하는 (유클리드에서 뉴턴에 이르는) 무한하고 동질적이며 균일한 시간과 공간이란 인간의 직관에는 부합하지만(칸트의 말대로 이런 시공간은 인간의 직관의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적이지는 않다. xyz, 이 세 개의 축으로 무한히 뻗어가는 삼차원 공간은 실재하는 공간이 아니며, 어디서나 동일하게 측정되는 시간은 실재하는 시간이 아니다. 상대성이론은 중력이 끌어당기는 힘이 아니라, 질량에 의해서 시공간 연속체(잠시 후에 보겠지만 시간과 공간은 이제 뗄 수 없는, 연속적인 실체로 기술된다)가 구부려진 장(場, field)이라고 말한다.

 

    4.
    우리의 주인공 루피로 돌아오자. 몸을 단순히 연장시켜 ― 일차원적으로 뻗고, 이차원적으로 쓸고, 삼차원적으로 부풀리거나 회전하거나 담아내는 방식으로 ― 싸우던 루피는 세 번에 걸쳐 굴욕적인 패배를 당한다. 한 번은 해군대장 아오키지(‘푸른 꿩’이란 뜻으로 본명은 쿠잔이다)에게, 또 한 번은 폭군 바솔로뮤 쿠마에게,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상결전에서 해군대장 아카즈키(‘붉은 개’란 뜻으로 본명은 사카즈키이다)에게. 물론 루피는 여러 차례 패배했으나, 그것은 대개 일시적인 패배였다. 그때마다 루피는 불굴의 의지로 재기했다. 그러나 이 세 번은 다르다. 루피는 압도적인 무력 앞에서 공포에 사로잡히거나 넋을 놓았다. 루피는 본래 공포를 모른다. 광대 버기에게 잡혀 처형대 위에서 목이 잘리기 직전에도 그는 웃으며 “미안, 나 죽나 보다.”(11권 99화)라고 말하는 인간이다. 그가 공포나 비탄에 사로잡히는 것은 동료(밀짚모자 일당)나 형제(불주먹 에이스)를 잃는 순간이다.
    얼음인간 아오키지와 다대일로 승부하던 밀짚모자 일행이 하나씩 얼어버리자, 루피가 선장으로서 일행에게 명령한다.

 

    “그만 가만있어. 너흰 손대지 마라. 일대일로 맞붙고 싶다.”(루피가 동료에게)
    “이 승부, 너와 나 둘이서 결판을 내자.”(루피가 아오키지에게, 34권 320화)

 

    이 대결에서 루피는 ‘아이스타임’이라는 아오키지의 기술에 간단히 제압되어 얼음 덩어리로 변하고 만다. 루피가 일대일 승부를 제안한 목적은 아오키지로 하여금 다른 일행에게 손을 대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일당은 아오키지의 아량으로 살아남는다. 이 싸움 이후에 루피는 기존의 전투방식에 한계를 느껴 ‘기어2’와 ‘기어3’라는 기술을 개발한다.

 

    “아오키지에게 졌을 때 난 생각했거든. 앞으로 갈 바다에 또 이렇게 강한 녀석이 나타난다면, 난 더 강해지지 않는 한, 동료를 지킬 수가 없다고. (중략) 내가 어느 누구보다 강해지지 않으면 그 녀석들을 모두 잃어버리게 돼.”(루피가 블루노에게, 40권 387화)

 

    ‘기어2’는 혈관에 펌프질을 해서 혈류량을 늘리고, 이를 통해 산소와 영양분을 폭발적으로 공급함으로써 힘과 스피드를 높이는 기술이며, ‘기어3’은 엄지를 물어 뼈에 공기를 주입하여 신체의 일부를 크게 부풀리는 것으로 일명 ‘뼈풍선’이라고 불리는 기술이다. ‘기어2’에 비해 속도는 줄지만 공격력과 방어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기존의 기술명에 ‘JET’(기어2), ‘거인의’(기어3)라는 접두사를 붙여 구별한다. 이것은 단순한 몸의 ‘연장’이 아니다. 몸을 균일하게 늘리거나 부풀리는 게 아니라, 비대칭적으로 늘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기술이 적용되는 몸은 이미 균일한 공간을 표상하는 몸이 아니라, 더 크거나 작고, 밖으로 휘어 있거나 안으로 말려 있는 비동일성의 공간을 표상하는 몸이다. 이 기술로 CP9의 강자 로브 루치를 제압한 루피는 사봉디 제도에서 다시 한 번 절망을 맛본다. 폭군 바솔로뮤 쿠마에게 일행들을 모두 잃고 만 것이다. 도톰도톰 열매 능력자 쿠마는 도톰살이 난 손바닥으로 일행을 하나하나 제거해 나간다. 루피는 절망에 사로잡혀 소리친다.

 

    “전원 여기에서 도망쳐! 뒷일은 살고 난 다음 생각해!”
    “도망쳐, 상디. 제발 도망쳐!”
    “뭐냐구. 대체 어떻게 해야…….”
    “그만 해, 이 자식아! 제발! 도망쳐!”
    “흐윽, 뭐야……. 나! 동료 한 명도 구하지 못하고!”(루피, 53권 513화)

 

    그러고는 자신마저 쿠마에게 당한다. 쿠마가 밀짚모자 해적단을 죽일 작정이었다면 이것으로 밀짚모자 일당은 사라졌을 것이다. 사실은 해군들의 손에서 일당들을 구하기 위해 꾸민 작전이었다. 밀짚모자 일당은 세계 각지로 날려 보내져서 그곳에서 각자 힘을 키우게 된다. 그러나 루피에게는 힘을 기를 시간이 없었다. 칠무해 보아 행콕이 지배하는 구사 해적단의 본거지로 날려간 그는 형 에이스의 처형 소식을 듣게 되고, 숨 돌릴 틈도 없이 대감옥 임펠다운으로, 다시 해군본부 마린포드로 형을 구하기 위해 달려간다. 정상결전의 와중에 마침내 형을 구했다고 안심한 순간, 형 에이스는 대장 아카이누의 용암 주먹에 몸을 관통 당해서 죽는다. 이 일로 루피는 정신이 붕괴되고 만다. 나중에 정신을 수습한 루피는 명왕 레일리를 스승으로 모시고 패기를 수련한다.
    원피스 세계에서 패기(覇氣)란 인간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특별한 힘이라 정의되며, 상대의 기척을 강하게 느낄 수 있는 견문색(見聞色), 보이지 않는 갑옷을 두르는 효과를 주는 무장색(武裝色), 극한의 기백으로 상대를 위압하는 패왕색(霸王色)의 세 가지가 있다. 견문색이 극한에 이르면 동물이나 마음속의 말, 기억이나 가까운 미래의 일을 볼 수 있고, 무장색은 물리적인 타격이 미치지 못하는 자연계 능력자의 실체를 잡거나 때릴 수 있으며, 패왕색은 눈빛만으로도 상대를 기절시킬 수 있다(이것은 패왕의 자질을 가진 자만이 습득할 수 있다). 루피는 세 가지 패기를 모두 익혔으며, 특히 격투기에 무장색을 입혀 ‘기어4’라는 신기술을 창안했다. ‘기어2’가 혈관에, ‘기어3’이 뼈에 작용하는 기술이라면, ‘기어4’는 근육에 공기를 불어넣어 힘과 탄력을 강화하는 기술이다. 고무의 탄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다음 거기에 무장색을 입혀서, 탄력성과 경도를 함께 높인 것이 특징이다. 이 가운데 ‘연장’과 관련하여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견문색’과 ‘기어4’의 두 번째 변신 형태인 ‘스네이크맨’이다.

 

    5.
    상디를 찾으러 빅맘 해적단의 본거지를 찾아간 루피는 빅맘 해적단의 일인자인 강적 카타쿠리와 대결하게 된다. 카타쿠리는 떡떡 열매 능력자로 루피가 구사하는 기술을 모두 흉내 낼 뿐만 아니라 가까운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인 견문색을 익혀 루피의 공격을 모두 무효로 만들어버린다. 루피가 주먹을 날리면 주먹이 공격하는 부위를 구멍으로 만들어버리는 식이다. 루피가 ‘기어2~4’라는 기술을 통해 ‘연장’이라는 공간의 속성을 최대한으로 활용한다면, 카타쿠리는 거기에 ‘시간’ 차원을 덧입힌 셈이다.
    현대과학은 절대적인 좌표로 기능하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념을 폐기하고, 시공간연속체 곧 시간과 공간의 차원이 결합된 상대적인 시공간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상대성이론에서 절댓값을 갖는 것은 시간이나 공간이 아니라 빛의 속도(광속)이다. 빛의 속도는 299,792.458km/s이며, 어떤 경우에도 이 속도는 불변이다. 이 속도에서는 시간이 정지하고(그래서 빛은 빅뱅 이래 0살이다), 질량은 0이 된다(빛이 블랙홀을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은 빛처럼 가벼운 물질에도 영향을 미칠 만큼 중력이 강해서가 아니라, 중력이 공간을 안으로 말아버렸기 때문이다. 빛은 그 구부러진 공간 속에서 여전히 광속으로 ‘달린다’).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임의의 물체의 속도(공간이동과 시간이동을 조합한 속도)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항상 광속(빛의 속도)과 같다는 것이다. 독자들은 여러 경로를 통해 “광속으로 달릴 수 있는 것은 빛뿐이다.”라는 말에 익숙해 있을 것이므로 방금 한 말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물체가 광속보다 빠르게 달릴 수 없다는 것은 오로지 공간상의 이동만을 고려했을 때 그렇다는 뜻이다. 지금 우리는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을 따라가는 운동도 같이 고려하고 있다. 아인슈타인이 주장하는 바는 두 종류의 운동(시간운동과 공간운동)이 서로 상보적인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당신이 길가에 서서 바라보던 주차된 자동차가 어느 순간에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은 오직 시간만을 따라 광속으로 이동하던 자동차가 어느 순간에 방향을 바꿔서 공간으로도 이동을 시작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두 속도를 조합한 전체 속도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공간에서 이동을 시작한 자동차의 시간은 정지해 있을 때보다 느리게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3)

  3)  브라이언 그린, 『우주의 구조』, 박병철 옮김, 승산, 2005, 92쪽.

 

    속도란 거리(공간)를 일정한 시간 간격(시간)으로 나눈 값이다. 빛이 불변의 속도라는 말은 광속을 지키기 위해서 시간과 공간이 가변적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광속은 시간이동이 0일 때, 공간이동의 궁극적 최대치다. 다시 말해서 광속은 시간이 정지했을 때 최대로 이동할 수 있는 거리의 한계다. 우리가 속도를 높일수록 시간이 점차 느려지는 것은 이 때문이며(공간이동에 따라 시간이동이 0에 수렴해 간다는 뜻이다), 질량을 가진 물체가 이 속도에 도달할 수는 없으므로(가속하면 할수록 우리는 점점 ‘무거워진다’), 우리는 시간의 정지(광속)나 역전(광속의 초과)을 달성할 수 없다.

 

    정지해 있는 물체는 시간을 따라 광속으로 움직이는데, 여기에 공간이동이 추가되면 시간 쪽으로 향했던 광속운동이 공간 쪽으로 일부 할당되며, 공간을 이동하는 속도가 광속에 도달하면 시간을 따른 이동은 전혀 일어나지 않게 된다. 즉, 광속으로 움직이는 물체는 나이를 전혀 먹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것은 모든 속도가 공간이동에 100% 사용된 극단적인 경우이고 여기서 더 이상의 속도를 낼 수는 없으므로, 공간을 이동하는 속도는 어떤 경우에도 광속을 초과할 수 없다. 그리고 빛은 특이하게도 항상 광속으로 달리고 있으므로 나이를 먹지 않는다.4)

  4)  같은 책, 92-93쪽

 

    6.
    카타쿠리는 견문색 패기를 수련하여 가까운 미래를 보는 능력을 갖추었다. 이것은 시간과 공간의 상보적 관계를 보여주는 알레고리가 아닐까? 빠르게 이동하는 물체의 시간은 느려진다. 어쩌면 그는 미래를 본 게 아니라, 속도에 따른 시간지연의 효과를 예측한 게 아닐까? 루피는 이 강자에게 무수하게 얻어맞다가 그의 능력이 자신의 무장색 입힌 공격을 무효화하는 게 아니라, 요령껏 피하는 것임을 알아챈다.

 

    “네가 무적인 줄만 알았어. 무장색은 실체를 잡는 힘인데도, 자연계에도 통하는 힘인데도 네 몸을 빠져나갔으니까. 하지만 아니었어. 너한테도 공격은 먹힌다. (중략) 굉장한 건 떡 능력이 아니야! 네 견문색이잖아?”(루피가 카타쿠리에게)
    “그래. 나는 변형해서 효율 좋게 피하고 있을 뿐. 패기로 미래를 보면 가능하지.”(카타쿠리가 루피에게, 88권 884화)

 

    루피는 전투 중에 마침내 ‘기어4’의 또 다른 변형지점을 찾아낸다. ‘스네이크맨’이라 불리는 이 기술은 내뻗는 주먹이 불규칙적인 궤도로 이동하여 적을 명중시키는 기술이다. 예측 불가능한 궤도를 그리는 주먹에 카타쿠리도 두들겨 맞고, 마침내 난타전 끝에 루피가 승리한다. 저 궤도의 움직임은 ‘브라운 운동’과 닮았다. 식물학자 로버트 브라운이 발견했다고 하여 이 이름이 붙은 운동이다. 그는 물에 떠 있는 꽃가루 입자가 수면 위를 불규칙하게, 끊임없이 돌아다니는 현상을 현미경으로 관찰한 바 있다. 물체가 전체적으로는 움직이지 않는 평형 상태여도 물체를 이루는 미소입자는 끊임없이 진동하고 있어서, 다른 미소입자와 부딪혀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저 불규칙한 운동에는 특정한 방향성도 예측 가능성도 없지만, 그에 따른 확산을 통계적으로 정량화할 수는 있다. 루피는 이 예측 불가능한 움직임을 통해서 카타쿠리를 제압했던 것이다.

 

    7.
    ‘연장’은 근대 철학자들이 물질의 속성에 부여했던 이름이다. 데카르트는 물질적인 실체의 속성으로 연장을, 정신적인 실체의 속성으로 사유를 들고는, 감각적인 것의 불완전함을 들어 사유의 우선성, 우월성에 손을 들어주었다. 내 바깥의 모든 사물은 연장으로 곧 형태, 크기, 장소를 가진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이것들의 원천이 전능한 신이 아니라, 악마가 나를 속이기 위해서 만든 것이라면? 감각을 통해 들어오는 모든 것, 곧 연장적 속성을 가진 모든 것이 환상에 불과하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모든 것을 의심하는 나의 정신만은 의심할 수 없다.

 

    내가 보는 것은 모두 거짓이라고 가정하자. 저 기만적인 기억이 나에게 나타내는 것은 결코 현존한 적이 없다고 믿자. 나는 어떠한 감각도 갖고 있지 않으며, 물체, 형태, 연장, 운동 및 장소도 환영 이외에 다름 아니다. 그러면 참된 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아마도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이 한 가지 사실뿐이다.
    그렇다면 불확실한 것으로 방금 열거한 것들과는 다른, 조금도 의심할 수 없는 것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도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일까? ~그런데 나는 왜 이런 가정을 하고 있을까? 나 자신이 이런 생각의 작자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나는 적어도 그 어떤 것이 아닐까? ~세계에는 하늘, 땅, 정신, 물체가 없다고 나 자신을 설득하지 않았던가? 이때 나는 또 나 자신도 없다고 설득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지는 않다. 내가 만일 나에게 어떤 것을 설득했다면, 확실히 나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지는 모르지만 아주 유능하고 교활한 기만자가 집요하게 나를 항상 속이고 있다고 치자. 자 이제, 그가 나를 속인다면, 내가 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그가 온 힘을 다해 나를 속인다고 치자, 그러나 나는 내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 동안, 그는 결코 내가 아무것도 아니게끔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이 모든 것을 세심히 고찰해 본 결과, <나는 있다, 나는 현존한다(ego sum, ego existo)>는 명제는 내가 이것을 발언할 때마다 혹은 마음속에 품을 때마다 필연적으로 참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5)

  5)  데카르트, 『성찰』, 이현복 옮김, 문예출판사, 1997, 42-43쪽.

 

    이것이 데카르트의 유명한 철학의 제일원리, “철학함에 있어 나타나는 모든 인식의 제일원리”인 코기토이다. 데카르트가 연장보다 사유가 우선함을 입증하기 위해 든 예가 ‘밀랍’이다. 밀랍은 시각, 촉각, 후각 등의 감각으로 감지된다. 그것은 색도, 형체도, 표면의 질감도, 냄새도 있다. 그런데 열을 가하면 모양과 상태와 색깔이 모두 변한다. 아까의 밀랍과 지금의 밀랍이 동일하다는 것을 감각으로는 알 수가 없다. 그것이 같다는 것을 일러주는 것은 사유뿐이다. “그러므로 밀랍이 무엇인지는 상상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정신에 의해 지각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은 정신의 통찰(이다).”6) 그런데 열을 가한다고 밀랍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으며(타서 기체가 되지 않는 한), 따라서 질감은 달라도 밀랍의 ‘연장’으로서의 성질은 남아 있다. 이렇게 보면 밀랍은 정신(사유)의 우선성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고, 연장의 확실성을 입증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원피스』에서 여기에 대응되는 인물은 촥촥열매 능력자인 양초인간 Mr. 3(본명 갤디노)이며, (밀랍이 연장의 반대편이자 같은 편으로 활용될 수 있듯이) 처음에는 루피의 적이었다가 동료로 돌아서는 인물이다.
    반면 라이프니츠는 데카르트가 물체 실체의 본질을 연장에 있다고 본 것을 오류라고 비판했다. 연장은 분할 가능하므로 더 이상 분할할 수 없는 실체의 개념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물질 안에 있는 운동의 최종 근거는, 모든 물체 안에 있지만 물체의 충돌을 통해서 자연 안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제한되고 억제되는, 창조 시에 물질 안에 각인되어 있는 힘이다. 나는 이 작용하는 힘이 모든 실체에 내재해 있고, 항상 그로부터 어떤 활동이 생겨나고, 그렇기 때문에 (정신적 실체와 마찬가지로) 물체적 실체 자체도 그들의 활동을 결코 중지할 수 없다고 말한다.7)

  6)  같은 책, 52쪽.
  7)  라이프니츠, 『형이상학 논고』, 윤선구 옮김, 아카넷, 2010, 142쪽.

 

    그런데 이 힘은 물체에 내재해 있는 역학적 힘이 아니다. 라이프니츠가 보기에 힘에는 두 가지가 있다. 근원적인 힘(vis primitiva)은 실체 안에 든 형이상학적 힘이며, 파생적인 힘(vis derivativa)은 운동하는 물체가 가진 힘이다. 따라서 그가 보기에 일반적인 물체란 실재가 아니라, 정신 안에서 존재하는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라이프니츠가 『원피스』의 천냥광대 버기를 알았다면, 자신의 이론을 지지하는 증거로 들었을 것이다. 동강동강 열매 능력자 버기는 몸이 여러 조각이 나도 살아서 움직이는 인물이다. 연장은 분할 가능하지만, 분할된 몸은 죽는다. 토막이 나서도 살아 있는 버기야말로 물질의 속성이 연장이라는 주장을 논박하는 살아 있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8.
    반면에 루피는 연장 그 자체다. 그는 그 자신의 몸과 일체다. (홀로홀로 열매 능력자 페로나로 대표되는) ‘유령’이나 (소울소울 열매 능력자 빅맘으로 대표되는) ‘영혼’과 같은 단어는 루피와는 가장 먼 단어다. 그는 복잡한 생각이나 설명을 아주 싫어해서 상대방의 말이 조금만 길어져도 딴청을 피우거나 잠이 들어버리며, 먹을 것이라면 사족을 못 쓰고, 머릿속의 생각과 입 밖에 낸 말이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자주 잊어서 거짓말이나 위장술에 젬병이다. 『원피스』의 주요 인물 가운데 ‘생각하는 말풍선’이 없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 루피다. 단 한 번 닥터 쿠레하의 성을 찾아 설산(雪山)을 오를 때, 저 말풍선이 쓰인 적이 있다.

 

    ‘힘내!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까. 죽으면 안 돼!’(16권 138화)

 

    하지만 이 말도 루피가 업고 가던 동료 상디가 기절한 상태이기 때문에 혼잣말이 된 것이지, 생각을 적은 것이라 하기 어렵다. 극단적인 체험이나 모험을 좋아하는 루피의 성향 역시 몸으로 겪은 것만을 생체험으로 받아들이는 몸 본위의 사고, 아니 차라리 ‘몸-사고’라고 불러야 할 어떤 특징을 보여준다.
    모험을 시작할 무렵의 루피는 인간이 오랜 역사를 거쳐서 받아들였던 연장으로서의 공간을 대표하는 인물로 출발했다. 그는 여러 모험을 겪으며 근대의 과학, 합리성, 유물론을 대표하는 인물로 성장해 갔다. 그는 몸으로 대표되는, 그리고 그 몸의 여러 변형을 통해서 연장에 대한 사유를 확장하는 인물이다. 다양한 원피스 세계에서 루피야말로 인간 자신의 토대인 몸 자체를 대표하는 특별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작가소개 / 권혁웅

1997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 『마징가 계보학』, 『소문들』, 『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 등이 있음.

 

   《문장웹진 2018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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