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탕약 외 1편 - 유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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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목련탕약(木蓮湯藥)

 

 

유형진

 

 

 

목련 꽃망울이 가지 맨 끝 솜털 속에 자고 있다
이 아파트 단지엔 목련이 유난히 많다
목련꽃이 툭, 툭, 떨어지는 계절이 되면
온 천지에 탕약 달이는 냄새
집 안에 시름시름 앓고 있는 폐병 환자가 있는 듯

 

잎도 없이 알몸으로 봄을 앓는
목련이 흰 촛대 같은 꽃망울을 들면
마침내 뿌리 끝 탕기에 불이 오른다
검게 젖었던 탕기는 차츰 달구어지다
가장 서럽게 어두운 날,
마당 가장자리에 놓인 곤로 탕기 위 훈김에
서성이는 봄눈들이 어디로도 내려앉지 못하고
증발해 버리는,
가보지도 않은 북유럽 어느 하늘처럼
하루 종일 저녁같이 깜깜한,
그런 날을 골라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툭,
촛대에 올린 흰 빛을 터트리고 마는데

 

흰 종이에 쌓인 약 한 재 모두 달일 쯤
꽃잎 터질 때처럼 흙색 꽃잎들
무거워 멀리 날지도 못하고 곧장 바닥으로 툭,
아무나의 발에 차이고 짓이겨지면
천지에 목련탕약 냄새는 더 진동한다

 

 

 

 

 

 

 

 

 

 

 

 

 

춘분(春分)

 

 

 

복강경 수술로 담낭의 돌을 꺼낸 친구가 준 커피에서 담뱃재 냄새가 난다. 친구는 요즘 캡슐커피머신을 쓰기 때문에 커피콩이나 갈아 놓은 커피를 주면 손 흘림으로 내려야 해서 자주 안 먹게 된다며 커피를 좋아하는 나에게 가져왔다. 지인이 동남아 여행 다녀오면서 선물로 커피를 주었다는데. 에스프레소 머신용으로 갈아 놓은, 아주 진하게 볶은 콩이었다. 봉지에는 ‘아라비카 100%’라고만 되어 있고. 베트남 커피 만드는 식으로 우려서 연유를 넣어 먹어야 할까, 차가운 물로 한 방울씩 내려 우유를 타서 마셔야 할까 고민한다. 남쪽엔 눈이 온다는데. 담뱃재 냄새가 나는 커피를 들고 창밖을 내다본다. 나무에겐 아무것도 없다. 눈도, 새 잎도, 꽃도, 단풍도. 지나가는 계절의 진공상태. 계절 밖의 계절 같은. 어쩌면 가을 같기도 하고, 겨울 같기도 한. 보이지 않게 모든 것이 충분한 춘분이다.

 

 

 

 

 

 

 

 

 

 

 

 

 

 

 

작가소개 / 유형진

2001년 《현대문학》 등단. 시집 『피터래빗 저격사건』, 『가벼운 마음의 소유자들』, 『피터 판과 친구들』, 『우유는 슬픔 기쁨은 조각보』가 있다.

 

   《문장웹진 2018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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