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의 방 외 1편 - 김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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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장마의 방

 

 

김재근

 

 

 

여긴 고요해 널 볼 수 없다
메아리가 도착하려면 아직 멀기에
당신의 방은 침묵을 기다린다
시간의 먼 끝에 두고 온 목소리
하나의 빗소리가 무거워지기 위해
빗소리는 얼마나 오랜 침묵을 배웅하는지
몸 안에서 몸 바깥을 들여다보는
고요를 거슬러 오르는 눈동자
아직 마주친 적 없어
침묵은 떠나지 않는 것이다
말없이 서로의 몸을 찾는 일
말없이 서로의 목을 매는 일
빙하에 스미는 물소리처럼
여린 식물의 초록 잠 속처럼
누구도 걸어 들어온 적 없기에
당신의 몸은 빗소리를 모은다

 

 

 

 

 

 

 

 

 

 

 

 

 

서울, 9호선

 

 

 

그에게서 여자 얼굴이 보였다
해지는 들녘 노을이 몸을 누일 때
계절은 물속 낙서처럼 흔들렸다

 

흰 뼈만 남은 가지 사이
바람은 멀고
숲에는 적요가 흘러 그의 젖은 몸을 감쌌다

 

오늘의 이름과
내일의 얼굴과
그 틈을 비집고 기우는 숨결

 

이대로 밤이 검어진다면 어디쯤에서 몸은 식어 갑니까

 

그림자가 물을 때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입술을 감추고
말할 데를 몰라 혀를 숨기고

 

기도를 했다

 

누운 자의 목소리 들리십니까?

 

계곡을 떠도는 바람소리
빛들은 하나 둘 떨어지는데
죽은 새는 어디에 어디에 둘까

 

꽃병에 꽂아 둘까

 

잠들기 전 읽은 문장에는 내일의 우물은 맑아
허공에서 신발이 우박과 함께 떨어지고 주운 신발을 신고
젖은 채로 예배당을 가야 하는데

 

기도할수록 버림받은 얼굴이 된다
미리 버려진 거라면 버려진 장소쯤은 기억해야 하는데
어떤 연주법으로 이 행성을 연주해야 할까
기도할수록 짧아지는 손가락을 가난이라 말해도 될까
어떤 운지법이 이 계절의 숨소리를 두드리는지

 

기차는 지하에서 지하로 이어 달리고
칸칸마다 악몽을 꾸는 검은 창문들
문이 열려도 출구는 어렵다

 

미안해, 이제 그만 하자

 

왔던 길을 몇 번씩 되돌며
입술이 빨간 남자를 다시 보고 다시 지나치고 다시 마주치는

 

지하역,

 

출구를 찾으시나요?

 

물어볼 수 없었다, 그의 애인이 될까 봐

 

차가워진 뱀의 발개진 살갗에 내리는

 

지하의 짓무른 불빛

 

허공에 뜬 잎사귀처럼
얼어버린 태양의 긴 혀처럼
문 닫은 카페처럼
이대로 밤이 검어진다면
이대로 몸이 식어 간다면 젖은 영혼은 어디서 말릴까

 

기도할수록 흐려지는 목소리
기도할수록 혀는 엉키는데
죽은 나는 아무 말도 들려줄 수 없었다

 

 

 

 

 

 

 

 

 

 

 

 

 

 

 

작가소개 / 김재근

부산 출신. 2010년 제10회 창비신인상. 시집 『무중력 화요일』(창비, 2015).

 

   《문장웹진 2018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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