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피스인문학-삼두인간 바스카빌과 '변증법' - 권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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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원피스인문학]

 

 

“셋이 붙어 있었던 것뿐인가? 무슨 이유로?”
“단짝이지롱”

― 삼두인간 바스카빌과 ‘변증법’

 

 

권혁웅

 

 

 

 

    1.
    『원피스』가 상정한 지구 표면은 대부분이 바다로 이루어져 있다. 이 바다를 가로질러 지구를 감싸는 육지를 레드 라인(Red Line)이라 부르고, 레드 라인과 직각으로 놓인 항로를 그랜드 라인(위대한 항로, Grand Line)이라 부른다. 두 라인에 의해 바다는 넷으로 분단되어 있으며(각각 이스트 블루, 사우스 블루, 노스 블루, 웨스트 블루라 불린다), 이스트 블루와 사우스 블루로 이루어진 쪽 표면을 그랜드 라인의 전반부, 노스 블루와 웨스트 블루로 이루어진 쪽 표면을 그랜드 라인의 후반부 또는 신세계라 부른다. 전자는 세계 정부의 통치력이 미치는 지역이고, 후자(신세계)는 ‘사황’이라 부르는 네 명의 대해적이 지배하는 곳이며, 두 세력 사이에 해적이면서 세계 정부에 협력하는 일곱 세력(칠무해)이 있다. 곧 『원피스』 세계는 세 개의 거대 세력(세계 정부, 사황, 칠무해)이 분점하고 있다.
    한편 세계 정부를 대표하는 3대 기관은 해군 본부 마린 포드(Marineford), 대감옥 임펠 다운(Impel Down), 사법 섬 에니에스 로비(Enies Lobby)다. 해군 본부는 세계 정부의 행정력을 대표하는 기관이다. 해적들이 지배하는 곳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세계 정부가 지배하는 나라들 역시 무력이 통치의 근거라는 점에서 일종의 경찰국가들이다. 에니에스 로비는 재판정이 있는 곳이며 임펠 다운은 감옥이므로, 이 셋은 법에 의한 판정, 집행, 처벌을 대표하는 삼항조(trio)다. 물론 이것은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에니에스 로비에서 재판을 받는 모든 이들은 유죄판결을 받아서 임펠 다운으로 호송되며, 임펠 다운에 갇힌 모든 죄수들은 석방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 임펠 다운이 『신곡』의 지옥과 매우 흡사한 구조를 갖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아무런 희망도 없는 곳, 탈출할 가능성이 봉쇄된 곳이 지옥이다. 우리의 주인공 루피는 이 세 곳을 ― 에니에스 로비, 임펠 다운, 마린 포드 순으로 ― 휘저어 놓는다. 이로써 루피는 무력에 의해 정립된 세계 질서를 교란하고 자유의 이념을 전파하게 된다.
    에니에스 로비의 재판장이 ‘삼두 바스카빌’이다. 한 손에 칼을 든 거한인데, 특이하게도 머리가 셋이다. 세 머리는 등장할 때부터 서로 싸운다.

 

    “해적 한 명? 해적은 유죄다!”(왼쪽 머리)
    “끄응. 그러지 말고 무죄로 해주자고용.”(오른쪽 머리)
    “그럼 절충해서 사형!”(가운데 머리)
    “어째서!” “쿵.”(좌우에서 박치기) (삼두 바스카빌, 40권 379화)

 

    이 좌충우돌은 끊임없이 계속된다. 심지어 자신을 소개할 때도 그렇다.

 

    “3두 재판장 왼쪽에 자리하는 이 몸은 좌바스카빌!”(왼쪽 머리)
    “오른쪽에 자리한 이 몸, 우바스카빌!”(오른쪽 머리)
    “그리고 중앙에 있는 이 몸이 바로 중앙 고속도로!”(가운데 머리)
    “어째서!” “뻐억.”(좌우에서 박치기) (삼두 바스카빌, 40권 380화)

 

    원피스 세계가 삼분되어 있고, 세계 정부가 삼대 세력으로 지탱되고 있으며, 사법부가 삼두체제(이것은 3심제 및 재판장, 주심, 부심 판사에 대한 비유이기도 하다)를 이루는 셈이다. 우리의 세계 역시 이렇다. 국가의 체제는 권력의 소재가 일인이냐 소수냐 다수냐에 따라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의 셋으로 나뉘고, 통치의 이념이 덕이냐 명예냐 공포냐에 따라 공화정, 군주정, 독재정으로 나뉘며, 민주주의에서는 권력의 분산을 제도화함에 따라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로 나뉜다. 우리 세계든 원피스 세계든 우리는 ‘셋’을 사고와 이념과 체제의 기본 단위로 삼고 있는 것 같다. 왜 그럴까? 그런데 삼두인간의 저 엉뚱한 대화에서 보듯, ‘셋’이 전개하는 사고와 이념과 체제가 반드시 조화와 화해로 귀결되는 것 같지는 않다. 왜 그럴까?

 

    2.
    신화와 종교에서는 흔히 셋이 하나를 이룬다. 힌두교의 지배 신은 우주를 창조한 브라마, 우주를 유지하는 비슈뉴, 우주를 파괴하는 시바라는 삼항조이며, 그리스의 지배 신은 하늘(땅 위)의 신 제우스, 바다의 신 포세이돈, 저승(땅 밑)의 신 하데스라는 형제 트리오다(이들의 상징물 역시 각각 세 갈래 번개, 삼지창, 머리 셋 달린 개 케르베로스다). 기독교의 유일신 역시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삼항조로 한 몸을 이루고 있으며(삼위일체), 잉카의 주요 신도 태양과 달, 폭풍을 대표하는 트리오다. 그리스의 여신 헤카테(하늘과 땅, 바다를 지배했다는 풍요의 여신)는 아예 삼두여신이다. 불교의 삼보(三寶), 알라의 딸로 알려진 세 여신(알-라트, 알-우자, 알-마나트), 그리스의 운명의 세 여신, 분노의 세 여신, 미의 세 여신, 고르곤 세 자매, 기독교의 세 가지 덕목(믿음, 소망, 사랑), 동방박사 세 사람, 예수가 받은 세 가지 유혹, 베드로의 세 번에 걸친 부인, 골고다에 세워진 세 개의 십자가, 사흘 만의 부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야기들이 ‘3’을 품고 있다.
    실제로 인간과 세계 전체가 3분할되어 있다. 지구는 하늘과 땅, 바다로 구획될 수 있으며, 세계는 저승을 포함하면 이승, 천국, 지옥으로 나뉘고, 인간은 육체와 영혼, 정신으로 구성되고, 태어나고 살고 죽으며, 시간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구성되고, 이야기에는 처음과 중간과 끝이 있으며, 논리는 삼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3’은 우리의 세계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인 듯하다. 이것은 어떻게 출현했을까?
    먼저 ‘하나’가 있었다. ‘하나’는 ‘모든 존재하는 것’ 곧 ‘있음’의 이름이며, 무(無, zero)와 대립하는 것이다. 태초에는 ‘하나’가 아니라 ‘무’가 있었다. 이 무는 사실은 ‘없음’이 아니라 문명 이전의 폐허, 황무지를 뜻한다. 수메르의 창세신화는 이렇게 말한다.

 

    하늘신 주(主)가 하늘을 밝게 하였으며
    땅은 어두웠고 저승에 눈을 두지 않았다.
    골짜기에 물이 흐르지 않았고 무엇도 생기지 않았으며
    넓은 땅에 밭고랑이 없었다
    엔릴의 훌륭한 구마사제가 존재하지 않았고
    거룩한 손을 씻는 정결례를 갖추지 않았다
    하늘신의 성녀(聖女)는 손을 두드리지 않았고
    찬양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하늘과 땅은 서로 왕래하지 않았고
    아내로 택하지 않았다.
    달이 비치지 않았으며
    어둠이 와 걸려 있었다.
    좋은 땅에 풀과 약초가 스스로 자라지 않았다1)

 

    엔릴은 하늘(의 신)과 땅(의 여신)의 결합으로 탄생한 대기와 대지의 신이며, 엔릴의 구마사제는 지하수의 신 엔키를, 하늘신의 성녀는 여신 인안나를 말한다. 태초에 구마사제가 없었다는 말은 지하수로 손을 씻을 필요 곧 정결례를 치를 필요가 없었다는 뜻이며, 성녀가 손을 두드리지 않았다는 것은 손으로 나무토막을 두드려 예식을 선포하는 성혼례가 없었다는 뜻이다.2) 하늘과 땅, 남녀의 결합이 없었으므로, 인간은 신과 통합되지 못했으며 문명은 자연과 이어지지 못했다. 성스러움과 질서가 없었다는 이야기다. 또한 태초에는 밭고랑도 없었고(농사가 없었고) 풀과 약초도 자라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에는 이미 땅과 하늘이 (서로 왕래하지는 않았지만) 존재했다. 농경이 시작되지 않았고 문명이 발생하지 않았으나, 장차 그것들이 자리 잡게 될 황무지는 거기에 있었다. 그러니까 ‘무’는 아직 인간을 위해 세어지지 않은(=셀 수 없는) 것들, 황무지처럼 인간에게 ‘유익’을 제공하지 않은 것들의 이름인 셈이다.
    메소포타미아 창세신화는 히브리 창세신화의 원형이다.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일은 대략 이렇다. 하느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나무나 풀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않았다.”(「창세기」 2장 4-5절) 여기서도 창조 이전에는 황무지가, 과실수와 채소가 자라지 않는 땅이 먼저 있었다. 「창세기」가 두 개의 서로 다른 이야기들을 결합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지금 우리가 읽은 구절은 학자들이 J문서라고 부르는 자료에서 따온 창세신화인데, 학자들이 P문서라고 부르는 또 다른 자료는 창세의 시작을 이렇게 적었다. “태초에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땅은 형체도 없이 어둠이 깊은 물 위에 있었고, 하나님의 영(the Sprit of God)은 물 위에서 움직이고 계셨다.”(「창세기」 1장 1-2절) 여기서도 창세 이전에 어둠과 물이, 나아가 어쩌면 그 물이 흐르는 대지까지가 선재(先在)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의 ‘깊은 물’(트홈)은 아카드어로 ‘바다’(티암투)에서 온 말로, 농사지을 수 있는 물(민물)이 아닌 황폐한 물(바닷물)을 뜻한다. 이 역시 황무지란 하나로 셀 수 없는(=인간에게 유익한 것으로 세어지지 않는) ‘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나’는 이런 ‘없음’ 위에 나타난 문명의 시작이다.
    그다음 ‘하나’가 다른 하나, 곧 ‘둘’을 낳는다. ‘낳는 자’이기 때문에 처음의 ‘하나’는 어머니라 불리고, 두 번째 ‘하나’(곧 ‘둘’)는 ‘자식’이자 ‘아버지’라 불린다. 후자가 아들이라 불리는 것은 어머니가 낳았기 때문인데, 아버지라 불리는 것은 왜일까? 세상에 둘이 출현했기 때문에, 어머니는 짝을 지어서 생산하는 존재로 변하며, 따라서 그 자식은 아들이자 아버지가 된다. 신화에 근친상간 이야기가 많은 것은 이 태초의 산수(하나에서 둘로, 둘에서 셋으로……)가 요구하는 필연적인 논리 때문이다.
    처음 ‘하나’(첫 번째 존재하는 자)는 대지모신(만물을 낳은 대지의 여신)이자 할망(산과 바다와 인간을 낳은 큰어머니)이며, ‘둘’(두 번째 존재하는 자)은 자식이자 아버지인 근친상간의 주인공(가이아의 아들이자 남편인 우라노스, 레아의 아들이자 남편인 제우스, 이시스의 아들이자 남편인 호루스)이다. 그리고 마침내 둘이 짝을 지어 세 번째 하나(=‘셋’)인 자식을 낳는다. 따라서 ‘셋’만이 진정한 계승이자 발전이며, 새로운 시작이자 근본적인 변환의 이름이다.

 

    무극이 곧 태극이다. 태극이 움직여 양(陽)을 낳고 움직임이 극에 이르면 고요해진다. 고요함이 음(陰)을 낳고 고요함이 극에 이르면 다시 움직이는 것이다. 한 번 움직이고 한 번 고요한 것이 서로 근거가 되며, 음으로 나뉘고 양으로 나뉘어 두 가지 모양이 정립된다. 양과 음이 변하고 합하여 오행(물, 불, 나무, 쇠, 흙)을 낳으며, 이 다섯 기운이 차례로 펼쳐져서 사계절이 운행된다. 오행은 하나의 음양이요, 음양은 하나의 태극이며, 태극은 본래 무극이다.3)

  1)  조철수, 『메소포타미아와 히브리 신화』, 길, 2000, 101쪽.
  2)  같은 책, 102쪽.
  3)  “無極而太極, 太極動而生陽, 動極而靜, 靜而生陰, 靜極復動, 一動一靜, 互爲其根, 分陰分陽, 兩儀立焉, 陽變陰合, 而生水火木金土, 五氣順布, 四時行焉. 五行一陰陽也, ​陰陽一太極也, 太極本無極也.”(주돈이, 「태극도설」)

 

    동양의 역(易)도 이런 논리라고 할 수 있다. ‘무’와 ‘하나’가 어우러짐 → ‘하나’가 ‘둘’이 됨 → ‘둘’이 서로 어울려 ‘만상’이 됨의 논리이기 때문이다. 무극이 ‘무’라면 태극은 큰 ‘하나’(존재하는 모든 것으로서의 하나)이며, 양과 음이 짝을 이룬 ‘둘’이라면 만상은 이 둘이 부모가 되어 낳은 자식들이다. ‘셋’은 그렇게 낳은 자식이기에 3이자 모든 만물을 대표하는 수다. 곧 3은 2와 4의 중간수가 아니라 모든 다양성의 출구이자 단순성의 입구다. 셋까지밖에 세지 못하는 어린아이를 생각해 보자. 아이는 손가락을 짚어 가며 “하나, 둘, 셋, 셋, 셋……” 이렇게 셀 것이다. 셋은 바로 그런 다양성을 이르는 대표수다. 그 아이가 손가락을 줄여 가며 카운트다운을 한다고 해보자. 셋이 될 때까지 아이는 동어반복을 하겠지만, 그다음에는 확실하게 단순해질 것이다. “……셋, 셋, 셋, 둘, 하나.” 셋은 음양(“둘”), 태극(“하나”), 무(“없다”)로 줄어드는 단순성의 문턱이다. 그래서 주역의 논리가 음양의 둘(2)에서 넷(2의 제곱)이나 여섯(2의 3배수)으로 가지 않고, 여덟(2의 3제곱인 팔괘)로 가는 것이다. 셋은 모든 다양성의 시작점이기 때문이다.

 

    3.
    1 → 2 → 3으로 나아가는 논리는 신화시대의 사유에만 속한 것이 아니다. 의식이나 무의식을 기술하는 모든 논리에서도 이 과정은 관찰된다. 이때 ‘3’은 구체화이자 보편화를 상징하는 신비로운 수다. 이를 불교에서는 아바타(avatar, 현신), 기독교에서는 성육(incarnation)이라고 부른다.

 

    숫자 1, 2, 3에 대한 그러한 실체화의 예는 자연민족의 사유에서뿐 아니라 오늘날의 모든 문화적으로 위대한 종교들에서도 분명하게 보인다. 일자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와서 ‘타자’, 즉 제2의 것이 되고, 마지막으로 제3의 자연에서 다시 자기 자신과 결합되는 것 ― 이러한 문제는 인류의 참된 정신적 공동 자산인 것이다. 이 문제의 순수한 사상적 표현은 사변적 종교철학에서 비로소 등장하는 것이지만, ‘삼위일체의 신’이라는 관념이 보편적으로 퍼져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관념에 대한 어떤 궁극적이고 구체적인 감정의 기반이 존재하고, 그 관념은 이러한 기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이것으로부터 항상 새롭게 생겨난다.4)

 

    하느님은 모든 자연의 이법 내지 섭리를 상징하는 일자(‘하나’)다. 일자가 지배하는(=일자의 원리가 관철되는) 세상은 어떤 분열(유혹자 뱀의 출현, 선한 신 아후라마즈다에 대적하는 악신 안그라마이뉴의 작용, 오시리스 신을 죽이고 왕좌를 차지하는 세트 신의 개입……)로 인해 통일성을 상실하고 만다. 타자화된 세상은 본래의 일자와 통합될 수 없으며, 이 분열은 항구적이다. 분리된 타자가 일자로 되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둘이 재통합하기 위해서는 일자가 타자가 되는 방법밖에는 없다. 신이 인간이 되어 유한자로서의 죽음을 겪고 신으로 다시 부활하는 일이 그것이다. 예를 들어, 성부 하느님이 자연의 위력을 상징하는 문명 이전의 일자라면, 성자 하느님은 타자(인간)가 되어 그 유한성과 필멸성을 고스란히 겪고 죽은 후에(=구체성을 획득하기) 다시 신으로 귀환한다(=보편성을 회복하기).5) 이것은 자아가 세상과 부딪쳐 타락 내지 고난을 겪고 다시 신성을 깨달아 보편성을 회복해 가는 과정에도 투영되어 있다. 영웅담의 주인공이란 결국 ‘깨달은 나’였던 셈이다.
    무의식을 설명하는 기본적인 도식에도 셋의 논리가 배어 있다.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세 가지 영역이란, 미분리된 일자의 영역(상상계), 타자화된 분리의 영역(상징계), 분리가 생산해 내는 사후적인 가상의 영역(실재계)의 셋으로 나뉘는데, 이 역시 1 → 2 → 3의 전개 과정을 보여준다.(이 세 영역에 관해서는 고고학자 로빈을 다룰 때 상술하겠다).

  4)  에른스트 카시러, 『상징형식의 철학 2권 신화적 사유』,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4, 309-310쪽.
  5)  정확히 말하자면 기독교의 삼위일체는 성부, 성자, 성령이므로 지금 우리가 기술하는 셋의 논리(어머니, 아버지, 자식)와는 잘 들어맞지 않는다. 사정이 이렇게 된 것은 유대교가 성립할 때, 이미 확립된 가부장적인 질서의 영향으로 모신이 억압(삭제)되고 그 자리를 아버지(2위가 1위로)가, 아버지의 자리를 아들(3위가 2위로)이, 하나씩 올라가서 차지했기 때문이다. 비어 있는 아들의 자리(3위)는 기독교 바깥의 신들(정령과 요정들)에게 배당되었다. 본래 유대-기독교 전통에도 여신의 자리가 있었으니 이름을 소피아(지혜)라고 부른다. “지혜가 길거리와 광장에서 소리쳐 부르며 복잡한 길목과 성문에서 외친다.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언제까지 어리석은 것을 좋아하겠느냐?’”(「잠언」, 1장 20-21절) 「잠언」에서 직접 말을 하는 ‘지혜’는 의인화된 관념이 아니라 본래 여신이었다.

 

    4.
    ‘셋’의 논리를 가장 정교하게 다듬은 것이 헤겔의 변증법이다. 변증법이란 대화술이나 문답법을 뜻하는 그리스어 ‘dialektike’에서 유래한 말로, 플라톤의 철학에서 그 고전적인 예를 접할 수 있다. 플라톤은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주인공으로 삼아 다른 이들과의 대화와 토론으로 자신의 철학적 체계를 기술하는 방법을 썼다. 이 과정에서 대화하는 둘 사이의 대립지점이 밝혀지고 논쟁이 벌어지며, 상대의 무지가 폭로되거나 주장이 논박되고, 마침내 올바른 결론에 이르게(=합의하게) 된다. 따라서 플라톤에게서 변증법은 먼저 제기된 덜떨어진 견해를 논박하고 나중에 제기되는 올바르거나 더 정교한 견해를 옹호하는 논쟁술이다.
    헤겔은 이렇게 거짓을 논박하고 참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논쟁술이나 대화술로만 간주하지 않고, 논리의 자기 전개 과정 내지 특정한 개념의 고차원적인 발전 과정으로 보았다. 헤겔의 말대로 하나의 논리나 개념이 자체 내의 모순으로 인해 분열되고, 그 분열을 극복하면서 보편성과 특수성을 겸하게 되는 과정이 변증법이라면, 변증법은 모든 사유가 고차적인 사유로 진화해 가는 데 필요한 내적 자가발전의 논리가 된다. 헤겔 변증법의 삼항조에 관해서 살펴보자.
    먼저 ‘하나’가 단순하게 주어진다. ‘다른 것’과의 관계없이 오직 그 자신에 대해서(ansich) 주어져 있다는 점에서 이 ‘하나’를 즉자(卽自, Ansich)라고 부른다. 즉자는 ‘하나’가 다른 무엇과도 관련되지 않고, 그 자신에게 밀착해 있는 상태다. 비유하자면 갓난아기나 처음 사랑에 빠진 젊은이와 같다. 아기는 배고프면 울고 엄마 젖을 접하면 만족한다. 아기는 허기나 배설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하나’로서 주어져 있을 뿐이다. 아기에게 엄마는 타자가 아니다. 아기의 입은 엄마의 젖과 한 몸이어서, 아기는 엄마 젖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처음으로 사랑하는 이를 자기 마음에 받아들인 젊은이는 그 사랑과 분리될 수 없이 한 몸이어서, 그가 없는 세상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 다음 ‘둘’로 세어지는 존재 곧 절대적으로 다른 타자가 그에게 도래한다. 이렇게 되면 하나는 더 이상 혼자만의 하나(=즉자)가 아니게 되고, 그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그 자신이 된다. 이렇게 타자와의 관계를 내면화함으로써, 그 자신을 대상화하여(fürsich) 볼 수 있게 된 존재를 대자(對自, Fürsich)라고 부른다. 최초로 자기의식이 생기는 때가 이때다. 자기의식이란 자기를 거울에 비추어보듯 타자로 볼 수 있는(=타자화된) 의식인 것이다. 젖떼기를 시작하는 아기는 드디어 엄마 젖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아기는 공갈젖꼭지나 손가락으로 이 결여를 채우려고 하지만, 자신의 일부로 알았던 어떤 것의 상실을 피할 수 없다. 아기는 엄마에게서 떨어져 나온 몸인 자기를 느낀다. 첫사랑과 헤어진 젊은이에게도 상실은 피할 수 없는 체험이다. 첫사랑이 세상 전부였기에 그는 세상에서 버려졌다고 느끼며, 자신을 버림받은 영혼으로 체험한다.
    그 다음에는 즉자로서의 나와 대자로서의 내가 그 모순을 품은 채 동거하는, 곧 둘의 대립이 보존된 채 종합되는 셋의 상태(모순된 둘을 하나로 세는 상태)가 온다. 총체성이란 이런 모순들의 공존을 포괄하는 전체성을 말하며, 이런 대립물의 통일 상태를 즉자대자(An-und-Fürsich)라 부른다. 이 상태에 이른 아기는 엄마를 특별한 타인으로, 내 자신은 아니지만 자신과 특별하게 맺어져 있는 존재라는 것을 자각한다. 이별의 슬픔에서 헤어 나온 젊은이 역시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기가 큰 ‘하나’(엄마와 한 몸이었던 나)를 상실했다는 사실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젊은이가 첫사랑을 영원히 상실했다는 사실이 지워지지도 않는다. 첫사랑은 그 결여 속에서, 모든 만남을 대상화하는 ‘부재하는 기준점’ 같은 것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흔히 변증법을 정반합(正反合: 테제, 안티테제, 진테제)이란 도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오해를 낳기 쉽다. 첫째, 두 번째 계기(안티테제)는 첫 번째 계기(테제)의 내적 모순이 표현된 것이므로 테제의 논리적인 전개인데, 저 도식은 이 둘이 서로 반대되는 대립자(이항대립물)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반(反)은 정(正)의 반대가 아니라 정의 필연적 귀결인 것이다. 둘째, 따라서 반이든 합이든 내재적인 전개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새로운 관념이나 계기가 외부에서 도입될 필요가 없다. 변증법에서 중요한 것은 이런 내재적 적합성, 논리적 필연성이다. 셋째, 합(合)은 앞의 모순을 절충하거나 뒤섞는 게 아니라 ‘부정+보존’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지양한다’(aufheben)고 하는데, 이것은 제거(=부정)하는 동시에 포함(=보존)하는 것이다. “독일어 동사 <aufheben>~은 헤겔의 변증법적 방법에서 대단히 중요한 개념이다. 헤겔은 <aufheben>에 이중의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aufheben>은 소거(부정)하는 동시에 보존하는 것을 뜻한다.”6) 곧 지양은 즉자적인 자신을 부정하는 동시에 부정된 자신을 내부에 포함하는 것이다. 아기가 크면서 영원히 자신이 아닌 타인으로서의 엄마를 품는 것이나, 젊은이가 다른 사람을 사귀면서 첫사랑의 설렘을 영원한 상실로서 (다른 사람을 통해서) 다시 갖는 것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넷째, 이 과정은 한 번으로 완결되지 않고 보편적인 개념이나 형태로 계속 진화해 나간다. 헤겔은 이 과정에 최종적인 완성(예컨대 모든 것을 포괄하는 무조건적인 것, 곧 절대자)이 있다고 보았으나, 우리로서는 그 끝을 짐작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6)  줄리 메이비, 『헤겔의 변증법』, 전기가오리, 2018, 13쪽.

 

    5.
    ‘지양’이라는 개념에 얹어서 생각하면 저 세 번째 항은 둘의 종합이긴 하지만, 실은 예전의 모순을 그대로 품은 종합이다. 어떤 연구자들은 헤겔의 변증법적 종합(‘셋’)이 고차원적인 종합이 아니라, 그 모순 자체를 덮어쓴 이름, 다시 말해서 그 모순을 종합이라 부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헤겔의 체계를 모든 부분적 계기들에 각기 고유한 자리를 부여하는 닫힌 총체로 이미지화하는 것은 심각한 오독이다. 모든 부분적 계기들은 <내부로부터 절단되어 있다>. 그것은 결코 완전하게 <자기 자신>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절대로 <자신의 자리>에 도달할 수 없다. 그것은 자기 내속적인 장애에 의해 표지된다. 변증법적 발전을 가동시키는 것은 바로 이런 장애이다. 헤겔의 일원론에서 <일자>는 모든 차이를 덮어버리는 동일성의 일자가 아니다. 그것은 어떠한 실정적 동일성도 획득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근본적인 부정성의 역설적 <일자>다.7)

  7)  슬라보예 지젝,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박정수 옮김, 인간사랑, 2004, 237-238쪽.

 

    지젝은 헤겔의 체계가 모든 부분이 체계의 발전 과정에 기여하는 통일적이고 진화적인 모델이라는 생각에 반대한다. 이런 생각은 ‘지양’을 극복하기로만 읽은 것이다. 지젝이 보기에 각각의 부분은 토막 나 있으며, 종합은 이런 모순과 분열을 극복할 수 없다. ‘지양’은 그 모순을 그대로 품은 채 다음 단계로 이행하는 것이며, 따라서 헤겔의 체계를 관통하는 하나의 원리(=일자)가 있다면, 그것은 이런 모순을 인정하고 그것의 부정성에 머물러 있는 일이다. 지젝은 이런 부정적 종합을 ‘아래로의 종합’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때로 헤겔의 저작에서 아래로의 종합(내가 붙인 이름이다)을 보게 된다. 대립하는 두 입장이 제시되고 세 번째 입장이 두 입장의 지양(Aufhebung)으로 나타날 때, ‘아래로의 종합’은 두 입장에서 보존할 만한 내용을 합치는 상위의 종합이 아니라 일종의 부정적 종합 ― 최저점 ― 을 뜻한다.8)

  8)  슬라보예 지젝, 『죽은 신을 위하여』, 김정아 옮김, 길, 2007, 6쪽.

 

    ‘아래로의 종합’은 모순이 첨예하게 드러나고, 갈등이 해소되지 않은 채 보존되며, 분열이 화해 불가능한 지경에 그저 머무르는 종합이다. 이제 우리의 주인공 삼두인간 재판장 바스카빌의 말을 이해할 수 있겠다. 처음 등장한 자리에서 바스카빌의 좌우 머리는 “유죄”와 “무죄”를 주장한다. 가운데 머리는 둘을 종합해서 “사형!”이라고 선언한다. 아무것도 종합되지 않았으나 평결은 내려졌다. 사형은 가장 극단적인 유죄 판결이다. 앞의 모순은 제거되지 않은 채 보존되었다. 이 ‘아래로의 종합’의 비밀은 다른 장면에서 밝혀진다. “재판장이 이 섬에 있을 줄 몰랐다.”는 해적의 말에, 바스카빌의 세 머리는 입을 모아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그건 틀렸다, 해적들. 여긴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고 공정한 재판소! 재판은 공정하게 사람을 판가름하지. 단 유죄, 무죄의 평결을 내리는 이곳 배심원들이 원래 해적이었던 사형수이며, 너희들을 길동무로 삼고 싶어 하는 자라는 사실만 제외하고. 고로 이 도시에서 무죄가 된 자 따위, 역사상 단 한 명도 없다!”(바스카빌이 프랑키 일당의 일원인 한 해적에게, 41권 390화)

 

    결국 유죄냐 무죄냐가 대립항이었던 게 아니라, 작은 유죄냐 큰 유죄(사형)냐가 대립항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가운데 바스카빌의 평결은 정당했다. 두 번째 등장하는 장면에서 그는 자신의 이름을 밝힌다. 좌우의 머리가 소개한 방식대로라면 가운데 머리는 자신을 “중(中) 바스카빌”이라고 밝혔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엉뚱하게도 자신이 “중앙 고속도로”라고 소개한다. 상관인 스팬담이 자신들을 전보벌레(우리 세계의 전화기와 같다)로 호출하자, 바스카빌은 비슷하게 대답한다.

 

    “여긴 왼쪽의 좌바스카빌”
    “난 오른쪽의 우바스카빌”
    “그리고 중앙에 있는 이 몸이 ‘중앙 본선 나홀로 여행’!”(가운데 머리)
    “뉘겨!” “퍼억.”(좌우에서 박치기) (삼두 바스카빌, 40권 387화)

 

    가운데 바스카빌이 왜 “중앙 본선”인지, 왜 “나홀로 여행”인지는 나중에 밝혀진다. 전투 중에 해적들이 바스카빌을 공격해 오자, 바스카빌의 몸이 셋으로 쪼개진다. 그들은 삼두인간이 아니라 실은 세 사람이었던 것이다.

 

    “후후 안됐군. 실은 재판장 트리오지.”
    “왼쪽인 나의 이름은 바스!”
    “오른쪽인 나의 이름은 카빌!”
    “그리고 중앙에 있는 이 몸이 바로 공주님이어요.”
    “뭔 소리여!” “뻐억.”(좌우에서 주먹질) (삼두 바스카빌, 41권 399화)

 

    가운데 머리가 내뱉은 저 엉뚱한 별명이야말로 ‘아래로의 종합’이 다다른 특별한 경지라 할 수 있겠다. 좌우의 머리가 원래의 이름(“바스카빌”)을 나누어 가졌기에 그에게는 할당된 이름이 없다. 그래서 그는 좌우의 의견을 종합해서 평결을 내리는 자신의 지위를 비유하는 별명(“공주님”)으로 자신을 불렀던 것이다. 결국 바스카빌에게서 셋의 변증법적인 종합은 ‘아래로의 종합’, 분열과 모순을 그대로 품은 부정적인 종합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그냥 단짝이었을 뿐이다. 최종국면에서 루피 일행과 해적들은 폭주 기차 로켓맨을 타고 사법의 탑까지 날아오고, 이들을 가로막았던 바스카빌은 추풍낙엽 신세를 면치 못한다. 가운데 머리가 자신을 불렀던 이전의 이름(“중앙 고속도로”, “중앙 본선 나홀로 여행”)이야말로 로켓맨의 진로가 되어버린 자신의 부정성을 지칭하는 이름이었던 셈이다.

 

 

 

 

 

 

 

 

 

 

 

 

 

 

작가소개 / 권혁웅

1997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 『마징가 계보학』, 『소문들』, 『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 등이 있음.

 

   《문장웹진 2018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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