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 - 민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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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in문학]

 

 

<새로운 시대, 문학의 키워드>
 

‘여성, 노동’같은 전통적인 주제에서 시작해 ‘문체, 주체’와 같은 비평 키워드나 ‘번역, 상호텍스트성’같은 문학적 키워드, ‘환상, 무의식’같은 인접학문 그리고 ‘빅데이터, 가상현실’같은 미래용어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문학의 키워드는 무엇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비평in문학]의 새로운 비평 기획입니다.

 

 

애도

 

 

민승기

 

 

 

    라스 폰 트리에(Lars Von Trier)의 <멜랑콜리아>(Melancholia, 2011) 도입부. 지구와 닮은, 그러나 지구보다 큰, ‘지구의 짝패(double)’와도 같은 멜랑콜리아라는 행성과의 충돌, 세상의 끝. 그러나 엄마는 아이를 안고 이 마지막 때를 벗어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멜랑콜리아의 영향력으로 모든 것은 땅 밑으로 꺼져 간다. 저스틴(Justine)이 아끼는 말 아브라함도, 레오(Leo)를 품고 있는 클레어(Claire)도 심연 속으로 빠져든다. 클레어의 깊이 팬 발자국은 세계가 이미 끝났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지시하는 ‘흔적’(trace)이다. 18번 홀로 구성된 완벽한 골프 코스를 갖춘 대저택의 주인인 존(John)은 과학적 지식의 신봉자이지만 멜랑콜리아가 지구와 부딪히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비켜 갈 것이라는 예측이 빗나가 세상의 끝이 명확해졌을 때 미리 자살하고 만다. 존의 죽음 이후에 클레어가 종말을 피하기 위해 레오를 안고 푹푹 빠져드는 걸음을 옮기고 있는 곳은 그러나 19번 홀이다. 온전함(18번 홀)에 더해져 그것이 이미 결핍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과학적 지식으로 계산할 수 없는 나머지이자 잉여.1) 19번 홀은 세상이 끝나버린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죽음 이후의 삶,’ ‘남겨진 삶,’ 삶 자체가 이후이자 나머지임을 보여주는 ‘흔적’이다.
    데리다(Jacques Derrida)는 세상이 끝난 뒤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윤리적 부름에 응답하고자 한다. “세상은 끝이 나고 나는 너를 품어야(운반해야) 한다”(“Die Welt ist fort, ich muss dich tragen”)는 첼란(Paul Celan)의 시구2)는 데리다 속에서 데리다가 제어할 수 없는 목소리로 남아 있다.3) 데리다의 세미나 속에서 반복적으로 인용되는 첼란의 파편은 관계가 시작되는 모든 곳에서 이미 울리고 있는 지울 수 없는 목소리이다. 관계는 ‘하나’가 되는 융합이나 대립되는 ‘둘’이 아닌 하나이자 둘, 하나 속의 둘이다. 그것은 타자를 품을 때, 타자를 내 안으로 운반할 때 생겨난다. 데리다는 유사성이나 차이로 설명할 수 없는 이런 관계(아닌 관계)를 ‘애도’(mourning)라 부른다.
    애도는 ‘이미 항상’(always already) 발생하고 있는 동시에 ‘아직 발생하지 않은’(not yet) 이중적인 작업이다. 타자의 죽음은 처음부터 타자와의 관계 속에 출몰한다. 친구가 살아 있을 때도 나는 이미 친구를 애도하고 있다. 데리다의 말대로 ‘우정은 둘 중 하나가 더 오래 살아남아 다른 친구의 죽음을 지켜볼 가능성에서 생겨난다.’4) 친구의 상실은 내 안에서 이미 발생하고 있는 동시에 여전히 도래할 가능성으로 남아 나와 친구의 관계를 가능하게 한다.5) 이미 죽은 그러나 여전히 살아 있는 타자, ‘도래할 타자에 대한 기억’이 바로 애도이다. 타자의 죽음과 기억을 내 안에 품게 될 때에야 비로소 ‘내 안에서’는 의미를 갖게 된다. 데리다의 말대로 애도는 타자와의 관계를 가능하게 할 뿐 아니라 나 자신과의 관계, 나의 내면성을 생성하는 기원적 조건이다.6) 타자를 애도할 때 나는 내가 된다. “나는 애도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7) “나는 사후를 숨쉰다”(I posthume as I breathe)8). 삶은 이미 (죽음) 이후의 삶, 의미로 종결될 수 없는 나머지이다. 애도는 애도할 수 없는 나머지를 불러낸다. 애도할 수 없는 것을 애도하기.
    ‘도래할 타자에 대한 기억.’ 기억은 기억할 수 없는 것을 기억한다. 무엇보다도 기억은 미래를 향해 있기 때문이다. “기억은 근본적으로 실제로 존재했던 과거를 향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과거의 ‘흔적’과 함께한다. 흔적은 이미 항상 지나가 버려 현전화할 수 없는 것인 동시에 와야 할 것으로 남아 있는, 미래로부터 도래하는 것이다.”9) 애도는 타자를 내 안으로 운반해 와 봉인하는 작업이 아니라 그가 내 안에서 계속 살 수 있도록(living-on) 미래의 가능성을 여는 행위이다.10) 이제 “타자는 내면화를 통해 타자를 종결짓고자 하는 기억을 거부하게 된다.”11) 타자의 예측할 수 없는 도래는 애도의 기억을 가능하게 해주는 동시에 그것을 넘어선다. ‘내 안의 타자’는 기억을 통해 타자를 전유하려는 나의 모든 시도를 중지시키고 나를 나와 다른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타자는 ‘나의 가까움 속에서 결코 지배될 수 없는 멂’(far away in us)12)으로 남아 나를 ‘타자를 책임지는 주체’로 변형시킨다.13) 아직 발생하지 않은 가능성으로 말미암아 타자는 애도의 기억 속에서 그것을 능가하는 잉여로 작용한다. 미래를 기억하기.14) 애도가 종결될 수 없는 ‘읽기’(reading) 또는 다른 사유를 위한 약속이 되는 것15)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엄마가 품고 있는 ‘아이.’ 클레어가 안고 있는 레오. 아이야말로 과거이자 미래, 흔적으로서의 타자이다.16) 우리는 모두 아이였고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도래하는 아이를 품고 있다. 와야 할 것으로 남아 있는 기원. 아이의 탄생은 세계의 다른 기원을 여는 기회이자 위협이다. 과거는 위협이자 기회로 미래 속에서 반복된다.17) 도래하는 자는 이미 항상 다시 오는 자이다.18) 과거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종결되지 못한 채 다시 돌아오는 가능성들. 과거는 온전히 과거일 수 없고 미래 역시 과거 속에 이미 있던 ‘틈’이다. 그러므로 데리다는 아이의 괴물성(monstrosity)을 이야기한다.19) 에일리언을 임신하고 있는 리플리를 생각해 보자. 미래는 괴물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괴물은 이미 우리 속에 있던 아이이다. 아이는 우리 속의 틈으로 도래한다. 그것은 또 다른 세계가 아닌 이 세계의 다른 기원을 연다(<멜랑콜리아>에서 클레어는 곧 끝나버릴 이 세상과는 다른 세상, 레오를 위한 세계에 대해 질문하지만 저스틴은 ‘그런 곳은 없다’고 답한다). 아이 역시 흔적이다. 그것은 어른으로 지양되어야 하는 부정적 장애물이 아니라 어른의 기원이자 어른이 제거할 수 없는 틈으로 다시 돌아온다. 이제 애도는 애도할 수 없는 아이를 품고 있다.
    애도 속에서 애도가 종결될 수 없도록 틈을 여는 아이. 애도는 자신의 실패를 고지하는 멜랑콜리아라는 아이를 품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불가능성을 품고 있는 애도, ‘멜랑콜리아적 합체’(melancholic incorporation)만이 유일한 애도일 수 있다.20) 우리는 타자와 관계 맺기 위해, 타자에게 무관심하지 않기 위해 타자를 내 안으로 운반해야 하지만 이것이 타자 전유를 통한 나의 확장으로 귀결되어서는 안 된다.21) 타자를 나의 집으로 맞아들이는 행위가 타자의 전유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애도해야 하는 동시에 애도하지 말아야 한다. 데리다의 말대로 “타자를 내 안에 나와 같은 것으로 보존한다는 것은 항상 타자를 망각하는 것이다. 바로 거기(타자를 전유하는 곳)에서 타자의 망각이 시작된다. 타자의 타자성을 존중하기 위해 타자를 품어야 한다면 멜랑콜리아가 필수적이다.”22) “그러므로 전유 불가능성을 통해 타자의 무한성을 가능하게 하는 멜랑콜리아로부터 시작해야 한다.”23) 가능성이 불가능성과 같아지는 이중 구속(double bind). 타자를 나의 내부이자 외부로 운반해야 하는 "실패하기로 운명지워진"24) 작업. 그러므로 애도는 늘 ‘온전하지 못한 애도’(half-mourning)25), 불가능한 애도, 멜랑콜리아로만 존재할 수 있다. 멜랑콜리아는 애도의 결핍, 충분치 못한 애도가 아니라 애도를 애도로 만들어주기 위한 내부적 절개, 애도가 단순히 의미의 복구나 프로그램으로 환원될 수 없도록 하는 애도의 (불)가능 조건이다. 문제는 애도될 수 없는 나머지이자 잉여인 멜랑콜리아를 과도하게(militantly) 긍정하는 것이다.26) 베닝턴(Geoffrey Bennington)의 말대로 삶 역시 ‘종결될 수 없는 삶’(half-life), 애도로 봉합될 수 없는 멜랑콜리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 이후에도 지속되는 삶(after-life).27)
    “세상은 끝이 나고 나는 너를 품어야(운반해야) 한다.” 세계는 이미 항상 상실된 것이다. 우리는 “세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섬들만이 있다”(“There is no world, there are only islands”)는 데리다의 말에서 시작해야 한다.28)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하나의 세계는 “당연한 것으로 전제되어 있는 기대의 산물”29)일 뿐이다. 그것은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 주는 세계가 상실될까 두려워 우리가 만들어낸 방어적 판타지이다.30) 우리는 한 번도 이런 온전한 세계를 가져 본 적이 없다. 섬들은 하나의 세계를 전제하거나 공유하는 개별화된 존재들이 아니라 세계의 상실을 이미 품고 있는 멜랑콜리아적 파편들이다. 파편들은 흔적으로서의 세계에 열려 있다. 세계로의 열림은 예측 불가능한 미래를 향한 노출로 섬들의 타자성을 이룬다. 어떤 지식이나 이론으로 규정되거나 통합될 수 없는 열림이 섬들 간의 무한한 거리를 지시한다.31) 섬들은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하나를 전제하고 있는 다양한 세계들이 아니라 하나의 불가능성을 고지하는 흔적들이다. 그러므로 데리다는 ‘친구의 죽음이 세계 속에 있는 어떤 세계의 종말이 아니라 세계 자체의 종말’이라고 말할 수 있다.32) 처음부터 이미 항상 상실된 세계, 멜랑콜리아적 세계(의 종말)만이 남아 있다.
    사가피(Kas Saghafi)의 말대로 처음부터 타자와의 관계를 규정짓고 있는 것은 ‘근원적 상실,’ ‘멜랑콜리아’이다. 친구와의 첫 만남 속에 이미 멜랑콜리아가 깃들어 있다. 우리는 모두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고, 둘 중 하나가 더 오래 살아남아 죽은 자를 애도할 것이다.33) 데리다의 말대로 친구의 상실이 세계 속의 특정한 세계의 상실이 아니라 세계 자체의 상실이라면 ‘너를 품고 가야 하는’ 남겨진 자의 행위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세계가 완전히 상실된 이후에 뭔가가 남아 있다면 세계는 처음부터 온전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모든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하나의 세계가 사라진 이후에도 남아 있는 세계는 어떻게 구성되는 것일까? 온전한 세계라는 판타지 속에서 멜랑콜리아적 상실을 극복하려는 시도가 실패하는 지점, <멜랑콜리아>의 19번홀. 19번홀은 온전함에 더해져 온전함이 처음부터 온전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잉여, 나머지이다. 상실이라는 ‘사건’ 역시 무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뭔가를 남긴다.34) 의미가 완전히 소진된 이후에도 의미로 환원될 수 없는 존재가 항상 남아 있다. 글은 저자가 사라진 이후에도 반복되어 읽힐 수 있어야 글일 수 있다. ‘반복되어 읽힐 수 있는 가능성’(readability)은 저자의 죽음 이후에도 살아남아 글이 이미 남겨진 글임을, 사후의 읽기를 통해 비로소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35) 글은 이미 항상 상실된 그러나 도래할 것으로 남아 있는 흔적, 멜랑콜리아적 파편으로 존재한다. '글이 (남아) 있게 될 것이다.' 친구의 상실 역시 세계 자체의 상실이지만 또 다른 친구의 죽음을 통해 반복될 수 있다. 데리다에게 ‘사건’은 완전하게 종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도래할 것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매번 세계 자체가 상실되고 다시 반복된다. 멜랑콜리아가 반복되는 실패로 이야기될 수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세상은 끝이 나고 나는 너를 품어야(운반해야) 한다.” 의미나 가치를 보증해 주는 근거가 모두 사라져 버렸을 때, 모두가 공유하는 하나의 세계라는 알리바이가 상실되었을 때, 윤리적 행위의 가능성이 생겨난다. 세계의 상실 이후에 남겨진 자는 상실된 자(의 세계)를 자신 안으로 운반한다. 상실된 이후의 세계, 세계라고도 세계가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남겨진 세계 속에서 행해지는 타자의 운반 작업, 애도는 나인지 타자인지 구분할 수 없는 잔존물을 남긴다. 타자를 기억하기 위해 애도는 타자를 내 안으로 운반해야 하는 동시에 타자를 나와 같은 것으로 봉합하여 망각하지 않도록 타자와의 무한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전유의 불가피성과 탈전유의 필연성이 겹치고, 타자에의 충실성과 배반이 동시에 발생한다.36) 타자는 나의 안이자 바깥이고 나와 타자는 구분 불가능한 잔존물, ‘나-타자’로 남아 있다. 품는 행위는 바로 ‘내 안에 있는 바깥,’ ‘죽었지만 아직 살아 있는,’ ‘과거이지만 도래할 것으로 남아 있는’ 유령들에게 말을 거는 것이다.37) 그것은 또한 보편적 세계의 종말을 내 안으로 운반하는 것이다. 나와 타자를 구분하여 ‘나-타자’라는 잔존물을 말끔히 제거하는 지식의 종말, 보편적 지식으로 완전히 소진될 수 없는 나머지를 환대하는 작업이 바로 타자의 운반, 타자를 내 안에 품는 행위이다. 윤리는 상호인정을 기반으로 한 의미에 종속될 때가 아니라 괴물과도 같은 잔존물을 환대할 때 생겨난다.38) 어떤 공통된 근거도 없는 심연 속에서 알 수 없는 것으로 도래하는 괴물을 환대하고 창조할 때 윤리가 시작된다.
    너를 내 안으로 운반하는 윤리적 행위는 애도할 수 없는 것의 애도, 온전히 애도될 수 없는 잔존물을 수행적으로 반복하는 작업일 수 있다. 이것이 세계의 사라짐이 세계의 기원과 같아지는 이유이다. 세계는 완전히 사라지는 동시에 여전히 남아 있고 죽음은 탄생과 분리될 수 없다.39) 이미 항상 상실된, 우리가 종속되어야 할 어떤 근거나 의미도 갖지 않는 ‘심연적 기원,’ 멜랑콜리적 잔존물의 세계는 수행적 반복을 통해 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는 타자를 내 안으로 옮길 때 비로소 존재한다. “존재 이전에 타자의 운반,” 타자에 대한 책임이 있다.40) 타자의 운반 속에서 나는 태어난다. 어떤 근거도 없는 심연적 운반 행위 속에서 나(의 세계)는 다시 태어난다. 세계의 상실 이후에도 세계가 도래할 것으로 남아 있는 이유는 심연적 행위의 사후적 결과물로 (재)창조되기 때문이다.41) 무엇보다도 세계가 잔존물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상실된 세계와 다른 세계가 아닌 온전하게 상실될 수 없어 남아 반복되는 ‘나머지-세계.’
    데리다는 수행을 묘사하는 진술사와 묘사를 수행하는 수행사의 접목(grafting) 속에서 언어의 이중구속(double bind), 또는 잔존물로서의 언어를 이야기한다.42) “오 나의 친구들이여, 친구란 없다”(“Oh my friends, there is no friend”). 우정의 역사 속에서 이미 항상 인용되어 반복되는 동시에 아직 발생하지 않은 우정의 가능성을 여는 이 ‘부름’은, 우정을 보증하는 본질적 가치들이 모두 사라진 후에 ‘부름’이라는 수행적 행위에 의해 생겨나는 잔존물로서의 우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43) 모든 진술문은 부름이란 수행적 행위를 이미 포함하고 있다. 언어는 의미체이기 전에 타자에게 말을 건네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식으로 말하자면 언어는 ‘타자의 부름에 대한 응답’ ‘타자의 환대’이다. ‘친구란 없다’는 진술은 이미 항상 부름을 전제하고 있다.44) 아직 친구가 아닌, 도래할 친구, 지금 적일 수도 있는 친구에의 부름. 이미 전제하고 있지만 아직 오지 않은 친구의 가능성이 ‘친구란 없다’는 진술 속에 출몰하고 있다. 로러(Leonard Lawlor)의 말대로 우정은 이미 행해졌고, 여전히 도래할 것으로 남아 있다. 반면 모든 부름은 뭔가를 진술해야 한다.45) ‘오 나의 친구들이여’라는 부름은 적에게 건네질 때도 ‘친구란 있다’고 진술하고 있다. 진술사와 수행사는 이미 서로를 품고 있고, 수행사 안의 진술사, 진술사 안의 수행사로 남아 진술사와 수행사 안에서 서로를 와해시킬 수 있는 ‘바깥’으로 도래한다. 언어는 진술사와 수행사가 어떤 공통의 기반도 상실한 채 상대방을 자신 속으로 운반할 때, 서로를 품을 때 발생하는 나머지, 이미 항상 ‘남겨진 언어’이다.
    “세상은 끝이 나고 나는 너를 품어야(운반해야) 한다.”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하나의 세계는 세계의 근원적 상실, 기원적 세계 없음이 가져다주는 불안에 대처하기 위해 만들어진 판타지일 뿐이다. 우리에게 최종적 목적지(telos)를 부여하고 방향을 규정해 주는 규제적 이상으로서의 세계는 이미 상실되었다. 문제는 내가 이런 세계가 존재하는 것처럼(as-if) 가정하고 세계라는 판타지에 자발적으로 종속됨으로써, 어떤 행위의 가능성도 부정할 때이다. 데리다는 세계를 내 안으로 운반해, 나와 세계 모두를 절개(tele)함으로써 세계가 부여한 최종 목적에 틈을 내고자 한다. 'telos'와 'tele'는 서로를 품고 있다. 'tele'는 'telos'가 제거할 수 없는, 도래할 간극/거리로 남아 'telos' 내부에서 'telos'를 연다.46) 데리다는 세계라는 판타즘에 단순히 굴복하지 않고 세상의 끝에 직면한 내가 가질 수 있는 두 가지 주체적 태도를 이야기하고자 한다.47) 첫째, 세계는 없고 단지 섬들만이 있음을 인식하고 타자를 어떤 사건이나 어떤 환대도 발생할 수 없는 빈 공간으로, 세계라는 판타지 바깥으로 운반할 가능성. 둘째, 판타즘 없는 세계, 빈 공간과의 대면을 넘어 세계가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세계를 시적으로(poetically) 재구성하려는 시도. 세계가 상실되어 버린 바로 거기에서 세계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세계를 재창조하는 작업. 세계라는 판타지를 유지하거나 맹목적으로 믿는 것을 그만두고 빈 공간과의 대면으로부터 시적 재구성을 통해 세계 속에 이미 사라져 버린 세계의 흔적을 기입하는 행위.48) 미리 주어진 기원이나 목적을 갖지 않는 세계, 친밀함이나 가까움에 의해 회집될 수 없고, 지금도 앞으로도 ‘낯설고도 먼’ 채로 남아 있는 세계를 심연 속에서 구성해 내려는 시도. 시적 구성은 단순히 판타지의 바깥이 아니라 판타지의 반복을 통해 판타지를 내부적으로 절개한다. 온전한 세계가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진술하고 믿는 것이 아니라, 이미 상실된 세계 속에서 세계의 다른 가능성이 생겨날 수 있는 것처럼 행위하기. ‘무로부터의 창조.’ 멜랑콜리 역시 단순히 상실의 완전한 회복이라는 애도의 판타지와 대립되는 바깥이 아니다. 그것은 애도의 불가능성을 지시하는 빈공간이라기 보다는 애도를 반복함으로써 애도의 다른 가능성을 여는 시적 구성이다. 타자의 타자성을 유지한 채 타자를 내 안으로 운반할 때, 애도의 필연성과 불가능성을 동시에 구현할 때, 멜랑콜리의 윤리학이 시작된다.

  1)  Christopher Peterson, "The Magic Cave of Allegory: Lars Von Trier's Melancholia," Discourse 35:3 (Fall 2013): 408 참조.
  2)  Paul Celan, "Grosse, Glühende Wölbung," Atemwende (Frankfurt-am-Main: Suhrkampf, 1967), 93.
  3)  Jacques Derrida, The Beast and the Sovereign, Volume II (Chicago:: U of Chicago P, 2017), 258-68 참조.
  4)  Jacques Derrida, Memoirs for Paul de Man, Trans. Cecile Lindsay, Jonathan Culler, Eduardo Cadava, Peggy Kamuf (New York: Columbia UP, 1989), 29, 34 참조.
  5)  Derrida, Memoirs for Paul de Man, 22.
  6)  Derrida, Memoirs for Paul de Man, 33.
  7)  Jacques Derrida, Points…Interviews, 1974-1994, Trans. Peggy Kamuf and others (Stanford: Stanford UP, 1995), 321.
  8)  Jacques Derrida, "Circumfession," Jacques Derrida and Geoffrey Bennington, Jacques Derrida, Trans. Geoffrey Bennington (Chicago: U of Chicago P, 1993), 26.
  9)  Derrida, Memoirs for Paul de Man, 58.
  10)  Jacques Derrida, The Work of Mourning, Eds. Pascale-Anne Brault and Michael Naas (Chicago: U of Chicago P, 2001), 23.
  11)  Derrida, Memoirs for Paul de Man, 34.
  12)  Derrida, The Work of Mourning, 161.
  13)  Derrida, The Work of Mourning, 205.
  14)  Joan Kirkby, "Remembrance of the Future: Derrida on Mourning," Social Semiotics 16:3, 461-72 참조.
  15)  Derrida, Memoirs for Paul de Man, 93-97 참조.
  16)  Samir Haddad, "Inheriting Birth," Derrida and the Inheritance of Democracy (Bloomington: Indianda UP, 2013), 124.
  17)  Haddad, "Inheriting Birth," 123.
  18)  Haddad, "Inheriting Birth," 129.
  19)  Haddad, "Inheriting Birth," 125-27 참조.
  20)  Derrida, Points…, 321.
  21)  Jacques Derrida, "Rams," Sovereignties in Question: The Poetics of Paul Celan (New York: Fordham Up, 2005), 161.
  22)  Derrida, "Rams," 160.
  23)  Derrida, "Rams," 161.
  24)  Derrida, Points…, 321.
  25)  Geoffrey Bennington, Not Half No End (Edinburgh: Edinburgh UP, 2010), xi-xii 참조.
  26)  Bennington, Not Half No End, 120. 베닝턴은 이러한 긍정을 "militant melancholia"라고 표현하고 있다.
  27)  Bennington, Not Half No End, xii-xiv, 8-11 참조.
  28)  Derrida, The Beast and the Sovereign Volume II, 9.
  29)  Derrida, The Beast and the Sovereign Volume II, 265.
  30)  Derrida, The Beast and the Sovereign Volume II, 266.
  31)  Derrida, The Beast and the Sovereign Volume II, 266.
  32)  Derrida, The Beast and the Sovereign Volume II, 260.
  33)  Kas Saghafi, "The World after the End of the World," The Oxford Literary Review 39:2 (2017), 266.
  34)  Bennington, Not Half No End, 42. “사건은 사건 이후의 반복을 통해 비로소 사건으로 발생한다.”
  35)  Bennington, Not Half No End, 126-28. “나는 읽을 수 없는 곳에서만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의미에 도달하지 못한 위험은 또한 (읽기의) 기회일 수 있다.”
  36)  Derrida, Points…, 321.
  37)  Derrida, "Rams," 159.
  38)  Michael Naas, "If you could take just two books…," The End of the World and Other Teachable Moments (New York: Fordham UP, 2015), 53.
  39)  Bennington, Not Half No End, xiii.
  40)  Derrida, "Rams," 162.
  41)  Saghafi "The World after the End of the World," 272.
  42)  이하의 논의는 Leonard Lawlor, From Violence to Speaking Out (Edinburgh: Edinburgh UP, 2016), 253-59 참조.
  43)  Jacques Derrida, Politics of Friendship. Trans. George Collins (London: Verso, 1997), 213-14.
  44)  Lawlor, From Violence to Speaking Out, 254.
  45)  Lawlor, From Violence to Speaking Out, 254.
  46)  Lawlor, From Violence to Speaking Out, 253.
  47)  Derrida, The Beast and the Sovereign, Volume II, 268.
  48)  Naas, "If you could take just two books…," 60.

 

 

 

 

 

 

 

 

 

 

 

작가소개 / 민승기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 객원 교수. 해체론과 정신분석이 겹치는 공간에 관심을 갖고 있다. 지은 책으로 『라깡의 재탄생』(공저), 옮긴 책으로 『바디우와 지젝: 현재의 철학을 말하다』, 논문으로는 「눈먼 나르시수스」, 「열림의 윤리학」등이 있다.

 

   《문장웹진 2018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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