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비둘기 아파트 외 1편 - 고형렬
목록

[신작시]

 

 

흰 비둘기 아파트

 

 

고형렬

 

 

 

오랜만에 찾아온 그 아파트는 따뜻하였다
양평에선 광열비가 무서워
이불 속에서 장자를 읽고 여행을 간다
십 년

 

파란 하늘 아래
어느 낯선 이의 한 구절이 지나가는 아파트는
언니 집 근처에서 구름과 사는 칠층 하늘
바라보고 누워서 늘 눈 감던
그 창과 그 발코니와 그 거실들

 

남의 아파트 사이로 김포 강안이 내다보이는
서울 서쪽은
늘 불안하게 해가 떨어지던 곳
흰 페인트칠한 한낮의 아파트 너머로
정오는 몇 마리 흰 비둘기를 넘겨주고 있다

 

다치지 않은
머리 위 높은 옥상 끝에서 그날의 햇살들은
여전히 쪽쪽, 쪽쪽거리며
작은 젖니로 고드름을 빨며 놀고 있는

 

오늘 오전 11시 14분, 시간은 소리가 없다
실내는 하얗고 추억은 파랗게 물든다
삼십대는 육십대가 되었고
학교에 가 있는 여학생은 삼십대가 되었다

 

 

 

 

 

 

 

 

 

 

 

 

 

 

북양평읍에서

 

 

 

북양평읍에서 보는 오빈리 산 129-1번지 산에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밤이나 낮이나 봄이나 여름이나
겨울이나 가을이나
대형 태극기 하나가 펄럭인다

 

태극기는 내 몸을 둘둘 말고도 남을 큰 요만 하다

 

멸망과 식민, 해방과 전쟁, 개발과 독재
시대를 관통해 온 태극기가 누군가의 피눈물 아우성처럼
찢어지고 있다 소리 없이

 

매일 아침마다 나는 그 태극기와 마주친다
대개는 서울의 서풍을 맞아 동쪽으로 펄럭이는 깃발은
지금도 시련을 겪고 있다
남한의 여자 대통령이 감옥에 투옥되고 일 년 동안
재판받는 나라
무서운 나라

 

피 묻은 태극기만 찬 강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펄럭이는 태극기에 옷을 입혀 주고 싶지만
그는 얼어 죽을 것 같지는 않다
하늘에 슬픈 비행운은 고향 바다까지 그어지고, 이제
사랑의 주가는 추락하고 말았다
오늘 아침의 추운 우리나라 눈이 부시고 아프다

 

 

 

 

 

 

 

 

 

 

 

 

 

 

 

작가소개 / 고형렬

1954년 속초 출생. 197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대청봉(大靑峯) 수박밭』, 『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 『유리체를 통과하다』, 『지구를 이승이라 불러줄까』,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거울이다』, 장시 『리틀 보이』, 『붕새』를 간행했으며 현재 양평에서 살고 있다.

 

   《문장웹진 2018년 03월호》

 

목록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