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모임-언제나 다층적인 읽기를 위한 좌담 2 - 김주선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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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문장웹진 독자모임]

 

 

언제나 다층적인 읽기를 위한 좌담 2

 

 

참여 : 김주선(사회, 문학평론가), 김영삼, 송민우, 이다희, 이서영

 

 

 

조진주, 「베스트 컷」
《문장웹진》 2월호
김엄지, 「목격」,
《릿터 9호》
안웅선, 『탐험과 소년과 계절의 서』
(민음사, 2017)

 

 

김주선 : 두 번째 《문장 웹진》 좌담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이번에 다룰 작품은 조진주의 「베스트 컷」(《문장 웹진》 2월호), 김엄지의 「목격」(《릿터 9호》), 안웅선의 첫 시집 『탐험과 소년과 계절의 서』(민음사, 2017)입니다. 먼저 조진주 작가의 「베스트 컷」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아주 간단히 말해 이 작품은 기억의 불확실성 문제를 사진과 연결시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홍보용 제품 사진을 고르는 사람이 주인공인데, 그는 타인에게 보여줄 만한 사진 혹은 보여주고 싶은 사진을 추려내는 작업을 합니다. 소위 B컷 사진은 배제하는 사람이죠. 저도 인스타그램을 하는데……. (웃음)

 

김영삼 : SNS의 노예! (웃음)

 

이다희 : 다 얘기해요 여기서! (일동 웃음)

 

김주선 : 저는 노예는 아니고요. (웃음) 저도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릴 때 예쁜 사진만 골라서 올리거든요. B컷 사진은 다 지우고 없애버려서 휴대폰이나 인터넷에는 A컷 사진만 남게 돼요. 당연히 그런 과정이 제 기억에도 영향을 미치고요.

 

김영삼 : 과연 그게 A컷일 것인가? (웃음)

 

 

김주선 : 아 뭐…… (일동 웃음) 저도 사진 기술 전문가가 아니어서……. (웃음) 어쨌든 다들 어떻게 읽으셨나요?

 

김영삼 : 저는 소설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기억은 해석이다’라는 영화 <메멘토>의 명제가 떠올랐습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알고 보면 조작된 기억일 수 있다는 것. 그러니까 ‘진실은 보존되고 거짓은 망각될 것이다’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보존된 것은 사실 거짓이고 진실은 망각될 수 있다는 거죠. 사진으로 비유하면 B컷은 지워지고 베스트 컷은 남는다고 생각하지만, 남은 게 반드시 베스트 컷이라고 말할 수 없잖아요. 소설의 전개가 바로 그런 걸 보여주죠. 시간이 흐르면 망각된 기억(B컷)이 진실이라 믿었던 기억(A컷)을 대체하게 되잖아요. 그러다 보니 주인공은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미궁에 갇히는 거죠. 사진이라는 매체가 현실을 정확하게 기록하는지도 의문이니까요. 과거의 기억, 표절시비, 지난밤의 사건 등과 같은 여러 모티프도 이런 주제로 수렴되어서 주제의식을 뒷받침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다만 소설의 모든 소품이 주제로 너무 잘 모여서 소설의 다층적 해석 가능성이 좁다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물론 개인적인 판단이고 감상입니다.

 

송민우 : 저는 화자의 태도에 대해 유의하면서 읽었습니다. 작가가 화자의 묘한 뻔뻔함을 부각시키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 뻔뻔한 성격을 더 밀고 나갔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었어요.

 

김주선 : 더 나아가야 된다는 그 지점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송민우 : 말하자면, 이 소설의 화자인 ‘현기’는 고등학교 시절 따돌림을 당한 ‘원호’에게 전혀 공감하고 있지 않는 것으로 보였거든요. 저는 그 감정 상태가 매우 중요한 소설로 보였어요.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공감하지 않고, 과거의 일에 대해 사과하지 않는, 이 뻔뻔함이 특히 요즘의 인간상을 대변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그래서 저는 ‘현기’가 좀 더 교활한 인물로 그려졌으면 어땠을까 싶었던 거예요. 그럼 좀 더 문제적인 소설이 되었을 것 같아요.

 

이서영 : 저도 김영삼 선생님 말씀에 대부분 동의하는데요. 기억을 조작하거나 복구해 내려는 상황 속에서 만들어져 가는 ‘나’라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담백한 에피소드들 속에 배치된 캐릭터들도 선명해 보였고요. 그 속에서 이 소설이 독자 쪽을 향해 제기해 오는 질문들 역시 흥미로웠던 것 같아요. 확실히 산문으로서의 질감이 쫀쫀하게 느껴진 소설이었던 것 같아요. 다만 이야기의 주제와 그것을 드러내려는 방식이 명료했던 만큼, 소설로서의 말하기가 비교적 단순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다희 : 저도 비슷한데, 이 소설의 주제나 모티프가 현실과 굉장히 밀접해서 직관적으로 이해되는 측면이 있어요. SNS나 인스타그램 이야기도 나왔듯이 읽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여서 좋았는데, 이야기 전개 방식이 좀 아쉬웠어요. 소설이 다루는 게 기억의 자의성 내지는 불확실성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그런 상황으로 독자를 같이 데려갔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송민우 : 얘기를 듣다 보니 생각났는데요. 소설이 구조상 앞에서는 의뭉스럽잖아요. 그 의뭉스러움을 계속 끌고 갔다면 소설적 재미가 더 컸겠다 싶네요. 그리고 주인공이 마냥 자기 기억을 의문시하는 게 아니라 자기 기억에 나름의 확신이 있는 사람이잖아요. 이런 인물인데 갑자기 결말에서 마치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처럼 ‘내가 뭘 하려고 했지?’ 이런 독백을 한다는 게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았어요.

 

김영삼 : 소설이 계속 비판받는 느낌인데, 이제는 조금 다른 각도로 접근해 보죠. 아까 소설이 하나의 주제의식으로 너무 잘 수렴되어서 문제라고 했는데, 사실 그렇게 쓰는 것도 쉽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작가가 생각한 주제가 딱 맞는 현실의 옷을 입고 등장하는 게 어려운 거니까요. 또 인물의 행동에 대한 의구심에 대해서도 변론해 보자면, 소설의 구조를 봤을 때 앞부분에서는 주인공인 현기가 A컷이고 원호가 B컷인데, 소설이 진행되면서 원호가 A컷이 되고 현기가 B컷이 되는 우열관계의 역전을 볼 수 있습니다. 인물들의 행동에 약간의 개연성이 아쉬운 점들을 이런 구도상의 의도로 읽을 수 있다면, 그것도 재밌는 부분이 되는 거죠. 굳이 바람 같은 것을 말해 보자면, 소설에서 현기라는 주인공만 기억 속에서 헤매는 게 좀 아쉬웠어요. 기억에 대한 불확실성이 유독 한 인물에만 집중되기보다는 여러 인물들에게도 같은 가능성이 적용되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송민우 : 저도 아마 작가가 그런 의도를 갖고 구조를 짰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다희 : 저는 특별히 좋았던 지점이 있어요. 주인공이 술집에 가기 전에 어떤 아이한테 카메라를 몰래 들이대잖아요. 그 아이는 반바지 차림에 대충 붙여 놓은 반창고와 채 떨어지지 않은 상처 딱지를 갖고 있는데, 주인공에게는 그 아이의 모습이 그저 찍고 싶은 피사체이잖아요. 그런데 세 번째 셔터를 눌렀을 때 아이가 주인공을 쳐다보면서 손으로도 욕하고 입으로도 욕하거든요. 이런 지점에서 모종의 윤리적인 차원을 끌어낼 수도 있겠다 싶더라고요.

 

김주선 : 피사체를 찍는 행위 자체를 문제로 삼고 탐구하는 것도 분명 흥미로운 지점인 것 같아요. 오래 전부터 있어 왔던 논란 중의 하나이긴 하지만, 지금 당장 도와줘야 하는 존재에게 사진을 찍는다는 건 양가적인 데가 있으니까요. 뼈만 앙상하게 남은 아이가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독수리 사진은 유명하죠.

 

송민우 : 제 생각에도 이 사람의 일방적인 사진 찍기 행위가 갖는 의미에 관해 더 탐구해 보면 의미 있을 것 같습니다.

 

김주선 : 네, 그럼 다음으로 김엄지 작가의 「목격」을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다른 분들도 비슷하게 느끼셨을 것 같은데 일단 기조는 작가의 이전 작품들과 크게 다르진 않은 것 같습니다. 어떻게 읽으셨나요?

 

송민우 : 저는 이 소설이 매우 매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설명하기 어려운 부조리한 상황을 능청스럽게 처리하는 게 인상적이었거든요. 김엄지의 다른 소설들이 그러하듯 이 소설에서도 성적 욕망에 탐닉하는 동물화 된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의 부조리한 생각과 대화가 단편적으로 제시되죠. 어떤 상황이나 감정에 대해 작가는 굳이 부연설명을 하지 않아요. 아내는 y가 죽었다고 말하죠. y의 행방은 확실히 묘연해요. 하지만 한편으론 y가 죽은 존재라고 섣불리 단정 짓기도 어려워요. y는 왜 집에 연락을 하지 않는 걸까요? 아내는 왜 y를 향해 증오 섞인 말을 하는 걸까요? 작가는 이에 대해 부연하지 않아요. 저는 작가의 이런 스타일이 매력적으로 느껴졌어요.

 

이서영 : 저도 좋았어요. 무엇보다도 김엄지 작가가 계속 몰두하고 있는 ‘미래’라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과연 그것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의문이 들었어요. 이 소설을 읽다 보니까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라는 이전 작품집 제목이 생각났어요. 미래라는 것이 과연 도모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미래는 결국 미래여서 느닷없이 쏟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니만큼 인간은 이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는 것인지. 여러 질문들이 마음에 남았어요.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어쩌면 인간으로서 미래를 꾀하고 도모해 볼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글쓰기, 곧 창작이다, 왜냐하면 소설가들이 구상하고 써내려 가는 서사 앞에서 인물은 어느 정도 무력할 수밖에 없잖아요. 물론 그 인물들이 작가의 손아귀 밖으로 나가서 살아가는 순간도 분명히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맥락에서 이 소설의 중반쯤에 나오는 Y의 언급이 돋보여요. 신이 자신의 모든 미래를 알고 있으므로,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기묘한 확신. 다만 소설가가 소설 속 인물에 대하여 그렇듯, 신이 인간의 삶을 플롯처럼 꾀하고 있는지는 영영 알 수가 없지요.

 

이다희 : 저도 비슷하게 읽은 것 같아요. 이 소설에는 y가 범람하는데 y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사람을 안다는 건 그 사람의 배경을 안다는 것과 함께 갈 수밖에 없는데, 이 소설에서는 y는 있는데 y의 배경이 전혀 등장하지 않아서 읽으면 읽을수록 y를 모르겠다는 생각에 빠지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등장인물이 유령 같고 기계적인 느낌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것은 김엄지 소설의 미세한 변화 같아요. 기존의 작품들보다 더 차갑고 건조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같습니다.

 

송민우 : 저도 그 말씀에 동의합니다. 이전 소설들에서는 최소한의 욕망이라도 있어서 강박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던 것 같아요. 기계 같다는 느낌을 받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 소설에서는 모든 등장인물들이 각자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것 같아요. 기계들이 어떤 명령에 의해서 같은 말을 반복 수행하는 것처럼 느껴지더라고요.

 

김영삼 : 저는 이 소설을 읽고 난 후, 자연스럽게 두 가지 질문이 생겼습니다. 첫째, y는 죽었는가 살았는가. 둘째, 도대체 소설의 시간 구조는 어떻게 흐르고 있는가.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면 내가 ‘목격’한 것의 정체도 알 수 있을 것이고, 김엄지 소설이 가지고 있는 특징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먼저 소설의 시간 구조를 이야기해 볼게요. 이 소설에는 ‘돌아오는 토요일 오후 5시’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돌아오는 토요일 오후 5시’에 만나자고 먼저 말한 사람은 소설에서 y입니다. 그 후 화자가 y의 아내를 만난 시간도 ‘돌아오는 토요일 오후 5시’예요. 그게 ‘다음날’이라고 쓰여 있어요. 시간의 선후관계가 이상해지죠. 그러다 보니 화자가 y를 먼저 만난 것인지 y의 아내를 먼저 만난 것인지 명확히 알기 어려워요. 한데 화자가 y를 먼저 만났다고 보든 y의 아내를 먼저 만났다고 보든 다 이야기가 돼요. 어쨌든 y는 사라졌고, 남겨진 자들은 모르는 것들과 싸우는 중이라는 점은 같아요. 작가가 의도적으로 순환적인 구조를 만들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꿈도 그렇습니다. 꿈에 등장하는 게 현실에 등장하고 현실에 등장하는 게 꿈에 등장해요. 캐럴 소리, “응, 알아.” 하는 누군가의 말소리 등 반복되는 표지들이 그 증거들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구조를 만든 것일까? 이는 김엄지 작가가 일관되게 보여주고 있는 ‘일상 지옥’과 연관성이 있어 보입니다. 실제로 김엄지 작가는 2015년 즈음 발표한 작품부터 특별한 사건이 없는 무채색의 일상들, 반복되는 일상의 건조한 모습들을 그립니다. 그래서 인물의 이름도 아무런 특색 없이 A, B, C 등으로 표현하고, 인물들의 생활패턴도 크게 다르지 않아요. 미지칭의 영역으로 들어가고 있어요. 「목격」에서는 일상만 반복되는 게 아니라 현실과 꿈도 무차별하게 뒤섞이고 반복된다는 점에서 김엄지 작가의 세계가 더 심화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이제 독자가 무엇을 진실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의문을 품게 만드는 영역에 이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목격’한 것도 사실 ‘목격’인지 꿈인지 모르게 됩니다.
    다만 저는 이제 이 작가의 소설에 ‘사건’이 등장했으면 좋겠어요. 지금의 소설은 이제 사유 중심적이고, 철학의 영역으로 빨려가고 있는 듯 보입니다. 3년 정도 썼으니 이제 ‘사건’으로 다른 걸 보여 달라고 말하고 싶어요.

 

이서영 : 저도 ‘일상 지옥’이라는 명명에 어느 정도 동감해요. 그저 정해진 패턴이 입력된 채 사소한 것들을 반복하면서 살아가야만 한다는 운명과 그것에 대한 암시가 보였어요. 이 작품은 최소한의 사건과 의식, 대화만 남겨둔 채 나머지 것들을 전부 다 지워냈어요. 그만큼 별다른 군더더기가 없고, 친절하면서도 불친절하지요. 투명하면서도 불투명하고요. 결국 여러 방향에서 살필 수 있고 여러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소설 같았어요. 그러한 세계를 향해 저는 ‘목격’하는 것 외에는 도통 관여할 수 없었고요. 이 작품을 읽을 때 저는 오직 목격자로서의 최선을 다해 보고자 했던 것 같아요. 소설을 읽는 동안 스산하면서도 슬픈 느낌이 들었어요. 이 차분한 말들의 배치 뒤에 숨겨진 것은 결국 삶의 지리멸렬함에 대한 감정이 아닐까 싶었어요. 그런데 이런 감정을 자아내게 하는 것도 결국 이 소설이 가진 힘이 아닌가 싶어요.

 

송민우 : 저는 이 소설이 한편 공포 소설로 읽히기도 했어요. 입안에 모래알들이 들어와서 굴러다니는 느낌을 준다고 할까요. 「목격」을 다 읽고 나니까,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일상의 요소들이 기묘하게 느껴졌어요. 김엄지 작가가 지금까지 비슷한 작품을 많이 쓰긴 했는데, 이런 분위기를 자아내는 한국 소설이 최근에는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앞으로도 이런 공포 소설을 더 많이 썼으면 좋겠어요.

 

김영삼 : 일상이 기묘해진다는 걸 이렇게도 말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우리는 당연히 내일도 해가 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그랬으니까. 사실 이건 귀납 체계의 오류인데, 오류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유에는 대자연의 법칙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 대자연이라는 전제가 깨지면 어떻게 되죠. 내일 해가 뜨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사회학적 상상력을 조금 가동시키면 지금 삶을 사는 사람들의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거죠. 확실한 게 없어요. 그러면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은 당연히 뫼비우스의 띠처럼 현실과 일상의 무한반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소설에 “응, 알아.”라는 말이 엄청 등장하는데, 오히려 반대로 읽혀지게 되잖아요. 사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것으로.

 

 

김주선 : 다음은 안웅선 시인의 첫 시집 『탐험과 소년과 계절의 서』입니다. 시집의 전체적인 느낌은 종교적입니다. 시어로 쓰이는 낱말들을 보면 사도, 성당, 사순절, 롱기누스, 기도, 계시록 등등이 계속 나타나요. 이 시집을 잘 읽기 위해서는 종교적인 지식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송민우 : 기본적으로 이 시인은 신에 대한 증오를 기본 값으로 깔아 두고 시를 쓰지 않을까 싶어요. 또 한편으로는, 이게 맞는 접근인지 모르겠는데, 표제작인 『탐험과 소년과 계절의 서』 말미에 누군가를 대신해 무언가를 받아 적고 들려주겠다고 하는데, 제가 읽기에는 자신의 고통을 비명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자들의 이야기를 시적 화자를 통해 들려주겠다는 의지가 느껴졌어요. 시적 화자가 마치 신을 대신한 ‘대리자’의 역할을 자처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김주선 : 확실히 시집 전체에 걸쳐 고통이나 비참, 슬픔에 관한 시들이 수도 없이 등장하는 것 같아요.

 

김영삼 :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누군가 떠났어요. 나는 기다리죠. 그런데 그는 다시 오지 않아요. 그리고 나도 그가 다시 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어요. 그런 기다림이 지배하는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하는 생각이요. 희망, 소망, 사랑, 뭐 이런 거는 없을 것 같고, 다만 기다리는 사람의 서걱거리는 폐허의 언어만 남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요.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는 안웅선 시인이 구축한 시의 세계가(특히 1부가 그런 경향이 강한데) 더 이상 신이 오지 않는 세계를 지키는 사제들의 폐허 같은 신전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는 이제 없어요. 구원에 실패했어요. 한데 폐허가 된 신전에는 늙고 엄숙한 사제들이 모여 있어요. 진리와 구원의 진실에 대한 질문들을 애써 외면하면서. 그래서 그의 세계는 폐허가 된 신전이라는 느낌이에요. “사라져 버린 경전”, “살아남은 신도들”(「마르첼리누스」), “타락한 사제들과 / 먼지 쌓인 오르간 소리”(「구름 속에서는 안부를」), “독백으로부터 말하는 자가 증발했다… 이제 그만 고해성사를 멈춰요”(「희망봉을 돌아서」)처럼 신의 상실을 느낄 수 있는 시가 정말 많아요.
    특히 「Michelle」이라는 시가 재밌습니다. 굳이 뜻을 찾아보니, “Who is God like?”라는 의미가 있더군요. 이제 누가 하느님과 같은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시에는 그에 대한 답이 이렇게 나와요. 신이 사라진 자리에 남아 있는 신의 언어는 때로 “아이의 울음소리”이고, “의사의 바쁜 손놀림”이고, “값을 흥정하려는 정치가들을 내쫓는 단호함”이고, “맑은 날씨를 예보하는 일기예보의 거짓”이고, “경기 회복을 점치는 경제학자의 조심스러운 그래프”입니다. 그러니까 신은 아이나 의사처럼 순수나 헌신의 이름으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정치가나 경제학자들처럼 거짓된 모습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이제 그것들이 신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사실 신은 없고, 타락한 인간들의 언어들만이 그 자리에 남아 있어요.
    그래서 「탐험과 소년과 계절의 서」에 등장하는 집을 떠난 어린 소년이 제게는 ‘어린 예수’로 보여요. 구원에 실패했다고 해서 그가 나쁜 건 아니잖아요? ‘어린 예수’가 세상을 구원하고 싶어서 인간 세상으로 가출했는데, 여기는 “순회 판사의 부러진 망치”가 알려주듯이 선과 악을 구분해 주기 어려운 세계예요. 그래서 예수가 할 수 있는 건 앞서 송민우 평론가가 말한 것처럼 고통 받는 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데 그치는 거예요. 구원은 못해 주고. 말이 길어서 죄송합니다.

 

이서영 : 저는 묘하게도 인간의 몸이 하나의 신전이자 성전이 될 수 있다던 테제가 생각났어요. 결국 한 편의 시는 하나의 육체이자 성전이 될 수 있을 것이라던 상상력들도. 아마 우리가 육체라고 믿는 것에 생겨난 상처는 일종의 출입구가 될 수 있는 것 같아요. 시인은 그 틈 사이로 쏟아지듯 들어오는 것들을 기꺼이 받아내는 이로 보였어요. 상처를 봉합하지 않고 기꺼이 열어젖혀 내는 이들만이 수행할 수 있는 작업이겠지요. 아마 그 틈 사이로 쏟아지듯 들어오는 것들은 정말로 잡다한 종류의 것들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이 시인은 그 잡다한 것들이 가질 수밖에 없는 미천함과 연약함을 기꺼이 환대하고 있다는 느낌이에요. 바로 이 환대 때문에 시 속에서 각종 이미지들이 풍요롭게 흘러내리는 것이 아닌가 싶은데 저는 그런 범람하는 것 같은 느낌들도 좋았어요. 『무한화서』라는 책에 실린 이성복 시인의 언급처럼 시인이 신이 버려둔 일들을 기꺼이 하는 존재라면, 이 시인은 그러한 책무를 끝까지 지키려고 하는 사람 같았어요. 그것이 제겐 이 세계 어딘가에 방치되고 유실되어 있던 것들을 손끝으로 그러모아 오는 성실함으로, 유일무이한 감정으로 빚어내려는 작업으로 보였던 것 같아요. 그런 태도에서 오는 감동이 있었어요.

 

송민우 : 「환절기」라는 시를 보면 숲에서 파랑이 빠져나가고 바다에서도 물빛이 빠져나가잖아요. 시인이 색과 빛이 사라진 세계를 전면적으로 내세운다는 느낌인데 아무튼 빛으로부터 추방된 존재가 바로 고통 받는 인간이 아닌가 싶어요. 시인의 목표는 아마도 빛에서 내쳐진 존재들을 다시 빛 속으로 되돌려 자리를 잡아 주는 게 아닐까 합니다. 저는 고통 받는 이들을 시로 표현하려는 시인의 의지를 또 느껴요. 시인은 세상과 다툴 때 그 수단으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안웅선 시인은 이런 의미에서 ‘연약한 투사’ 같아요.

 

김영삼 : 색에 대해 덧붙이고 싶어요. 안웅선의 시에서는 때론 그 아름다운 빛깔들이 구원이 사라진 세상을 속이는 가짜 구원의 변장술로 쓰이는 것 같아요. 「사생대회 불참의 변」이라는 시를 보면 ‘나’는 “묘사에 필요한 물감은 주머니에 넣고 꿰매버렸는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나’는 잠, 바다, 산맥, 평야, 강 등 이런 것들을 포기하는 존재예요. 다른 시들과 함께 보면 이 ‘나’라는 존재는 세상을 만들어내는 위치에 있어 보입니다. 사생대회에 불참하고 있으니까 저는 어린 신처럼 보이는데, 그러니까 그가 어린 신이든 조물주든, 그냥 어린아이이든 세상을 거짓으로 물들이기를 거부하는 거죠. 그가 색색의 물감으로 가짜 구원의 포장을 포기하는 거예요. “내가 모두 숨겨버렸는걸”이라는 표현도 그렇게 읽힙니다. 「희망봉을 돌아서」라는 시의 “허름하고 낡은 신발에 황금을 덧칠하는 이들” 같은 구절에도 색이 부정적이죠. 물론 반대로도 말할 수 있어요. 가령 「밀수꾼의 지팡이」에는 “우리에게는 악몽을 물들일 만한 염료가 없다”라는 구절이 나오지만 이건 ‘이 세상을 아름답게 색칠하고 싶은데 그럴 힘이 없다’는 마음으로 읽혀요.

 

김주선 : 제가 보기에 이 시집에서는 붉은색과 파란색이 유독 도드라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이 두 색은 다른 색보다 확실히 더 의미심장한 것 같더라고요. 붉은색과 파란색이 차지하는 위상을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요. 두 색은 스테인드글라스에 많이 들어가지 않나요?

 

송민우 : 성당 벽에 장식된 타일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것 같아요.

 

이다희 : 전 이 시집이 딱 스테인드글라스 같은 면이 있는 것 같아요. 달리 말해 암시적이에요. 신성을 빛으로 암시하는 게 스테인드글라스라고 할 수 있다면 이 시집에는 형이상학적인 신성과 일상 속의 신성이 혼합되어 있어요. 제게는 이 두 신성이 비슷한데 충돌하는 느낌으로 다가왔어요. 색이 갖는 의미론적인 차원에 대해서는 뭐라고 단정 짓기 어려운 것 같아요. 「꼬마 하마 키보코」를 보면 “어설픈 결론은 식성에 맞지 않다”고 말하거든요. 저는 시적 화자의 의지가 시인의 의지와 비슷하다는 생각이에요. 한데 이 스테인드글라스 밑에 서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이 시집을 즐길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이 시집에 진입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뭐, 모든 시가 다 그런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웃음)

 

김영삼 : 그 말에 동의해요. 신전 안에서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폐허의 세계를 바라보는 느낌이에요. 저는 「꼬마 하마 키보코」를 「놀이터로 가기」라는 시와 관계시켜서 약간 다르게 이야기를 해볼게요. 여기 등장하는 화자는 어린아이인데 이 아이는 폐허 속에 사는 사람이 한 번씩 꾸는 꿈같아요.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꿈이요. 가령 놀이터는 “몰래 울어 보기 좋은 곳”이고, “친구가 되기 좋은 곳”이고, “신발을 벗어 주는 곳”이에요.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누군가를 환대하는 마음이 있는 거죠. 이런 시적 화자는 앞서 언급한 어린 예수일 수도 있고 아니면 사제일 수도 있죠. 고통 받는 세계와 타자에 대한 마음이 느껴져요. 그런 존재가 깨진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바라본 세상의 모습이 이 시집의 색들 같습니다.

 

김주선 : 시에 등장하는 많은 ‘나’들에 관해서는 어떻게 보시나요?

 

이다희 : 저는 시인이 ‘나’를 드러내지 않는 방식으로 시를 쓰는 사람 같아요. 시를 읽으면 시인이 안 느껴져요. 시인에게 스타일이 있는 것도 알겠고 시인이 생각하고 느끼는 신성이 뭔지도 알겠어요. 그런데 시인은 모르겠어요.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의 함의가 더 살아 있었으면 어땠을까요?

 

김영삼 : 저도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요. 시를 읽으면 이 사람의 얼굴이 잘 안 떠올라요. 특히 시집의 앞부분이 그래요. 많은 시에 등장하는 모종의 시선이 주체의 입장이 아니라 객체의 입장이라서 그런 것 같아요. 대상을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 말을 하는 게 아니라 그 대상과 사물의 입장에서 말을 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고 싶습니다. “길이 기울어 다리를 저는 모두를 위해”(「밀수꾼의 지팡이」) 같은 표현이 그래 보여요.

 

송민우 : 시인의 말을 보면 “나는 오래도록 친구가 필요했습니다.”라고 나와 있어요. 이 문장을 보자마자 선명하게 다가오는 아픔이 있었어요. 그 느낌 속에서 읽다 보니까 시인이 전면으로 나서지 않는 게 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네요. 또 시인이 언어를 부리는 솜씨가 뛰어나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 언어들이 최종적으로 지시하는 게 뭘까 싶은 생각이 종종 들었어요. 언어로 표현은 되어 있는데 그 표현들이 공중에 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어쨌든 시인이든 시적 화자이든 그 얼굴이 흐릿한 건 필연적인 것 같아요. 한데 오히려 그런 소극적이거나 연약한 모습 자체가 시인의 얼굴 혹은 시집의 얼굴이 아닌가 싶어요.

 

이서영 : 앞서 나온 말들에 동감하면서도 약간 다른 생각인데요. 저는 이 시인이 자신이 처한 고통 앞에서 전면적으로 맞서는 승부사와도 같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그런 치열한 태도는 결국에 가장 내밀한 고백과 맞닿게 되는 것 같아요. 시집 초중반쯤에 「오늘」이라는 제목을 가진 시가 나오는데, 이 시를 보면 “나는 아주 쉽게 사랑하는구나 사랑하는 나를 나는 만날 수 없는데”라는 구절이 있어요. 저는 이런 부분들에서 시인이 스스로를 토로하는 지점이 분명히 있는 것 같아요. 마지막 구절인 “나는 내가 흩어지도록 내 모든 인간을 바치겠습니다” 같은 표현에서도 처절함이 느껴졌어요. 저는 이런 게 시인이 가진 민낯이 아닌가 싶어요.

 

김영삼 : 아픈 사람들을 구원할 수 없어서 그런 것 같아요. 미안해서. 처음엔 비겁하게 느꼈는데, 미안해서 그런 것 같아요. 아마 이 구원 불가능함을 갖고 있는 시적 화자가 시인 안웅선의 얼굴에 가깝지 않을까 싶네요.

 

이다희 : 그 희미한 얼굴을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면 관점주의에 대한 극복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시인의 의견이나 목소리가 강하면 강할수록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는데 이 시인은 그런 점을 잘 피해 간 것 같아요.

 

김주선 : 방금 말씀하신 것과 관련된 시가 「단념」인 것 같아요. 여기 보면 “주의자들의 사랑은 항상 반성에서 시작하여 평가로 끝난다”라고 하거든요. 또 「탐험과 소년과 계절의 서」를 보면 “누구의 편도 들어줄 수 없어 슬퍼지는 이름이 되도록”이라는 구절이 있어요. 그러니까 어떤 누군가의 편을 들지 않겠다, 내가 어떤 관점을 갖거나 주의자가 되지 않겠다, 대신 나는 몸이 약한 아이와 친구들의 이야기를 모두 받아 적어 들려주겠다고 이야기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이 시집에 약한 자, 고통 받는 자의 이야기가 많이 들어 있는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자신의 취향 저격 시를 한 편씩 말해 주세요.

 

 

이서영 : 저는 「오늘」이 가장 좋았어요. 저에게는 이 시가 가장 잘 들려왔어요.

 

이다희 : 저는 「페르가몬의 양피지」가 좋았어요.

 

김영삼 : 저는 앞서 언급한 「놀이터로 가기」를 꼽고 싶어요. 시 자체는 소품에 가깝지만, 메마르고 서걱서걱한 시집 전체의 맥락 속에서는 달리 보입니다. 마치 엄숙한 사제의 옷장에 숨겨진 장난감 자동차와도 같은 느낌이에요. 시집 전체가 갖는 삭막하고 메마르고 구원 없는 폐허의 세계에서 이 시에 쓰인 말들이 하나의 오아시스처럼 기능하는 같아요. 순수하고 슬펐습니다.

 

송민우 : 저는 「환절기」가 가장 좋았어요. 이 시가 시집의 전체적인 주제를 관통하는 시처럼 느껴져서요.

 

김주선 : 저는 「내일」이에요. 읽는 순간 말할 수 없이 슬펐어요.

 

김주선 : 이것으로 좌담회를 마치겠습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일동 : 수고하셨습니다.

 

 

 

 

 

 

 

 

참여자 소개 / 김주선

전남 화순 출생. 2015년 문학과사회 평론부문 등단. 조선대학교 강사

 

참여자 소개 / 김영삼

전남대학교 국문과 강사

 

참여자 소개 / 송민우

201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 등단. 조선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재학

 

참여자 소개 / 이다희

대전 출생. 광주 거주. 201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등단.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석사 수료

 

참여자 소개 / 이서영

조선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 재학

 

 

   《문장웹진 2018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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