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인간주의’를 다시 사유하기 위하여 - 서용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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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in문학]

 

 

오늘의 ‘인간주의’를 다시 사유하기 위하여

 

 

서용순

 

 

 

‘인간’은 사라졌는가?

 

일찍이 푸코는 말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최근에 발견된 형상이고, 바닷가 모래사장에 그려 놓은 얼굴처럼 언젠가 사라질지 모른다고. 이 담대하고도 도발적인 선언은 1960년대의 지성계를 놀라게 했고, 인간 주체의 유효성에 대한 비판은 앎과 실천의 지평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인간이 중심이 되는 사유, 17세기에 확립된 인간(중심)주의의 사유는 비로소 의문에 부쳐지기 시작했다. 그러한 모든 비판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지평이 완전히 포기된 것은 물론 아니었다. 인간주의에 대한 비판 이후, 많은 사유의 투사들은 새로운 인간-주체에 대한 성찰에 몰두하여, 인간에 내재적인 또 다른 형상을 구하고자 했다. 예컨대 인간을 이성으로 환원하려 했던 근대 철학의 시도에 반대하고, 자연과 타자를 전유하려는 동일자의 논리를 비판하면서, 인간-주체에 대한 새로운 사유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인간의 신화는 깨졌다. 그 자리에 들어온 것은 ‘거세된 주체’, ‘익명적 주체’, ‘벌거벗은 생명’과 같은 새로운 형상의 인간-주체들이었다. 그것은 이해관심에 사로잡힌 인간-동물로부터 벗어난 예외적인 사유의 주체성의 출현을 보여주고, 순수 생명/순수한 몸으로서의 인간 주체를 드러내는 과정이었다. 다시 말해, 오늘날 인간은 새로운 지평에서 다시 발견되고 조명되는 와중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인간의 발견은 어떤 폐기의 과정에 따른 결과임에 분명하다. 사라지는 것은 과거에 통용되었던 세계의 중심으로서의 인간, 사유와 실천을 통해 세계를 전유하는 능동적 인간이라는 관념이었다. 그것이 20세기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사유의 운동이 만들어낸 효과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한 사유를 통해 인간의 관념은 다시 의문에 부쳐졌지만, 인간주의의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인간주의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바디우가 『세기』에서 잘 지적하듯, 20세기 전체가 추구했던 ‘새로운 인간’의 창조,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 요구되었던 이 창조의 실험이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에 따라 완전히 실패로 돌아간 후,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인간에 대한 맹목적인 변형의 시도이다. 옛것의 보존이라는 사유의 반동적인 흐름과는 별개로 ‘인간’은 실제로 변화하고 있다. 공리주의의 실질적 지배와 함께 인간의 삶은 행복과 안락을 중심으로 재평가되고, 모든 프로메테우스적 기획은 헛된 몽상을 넘어 범죄로까지 치부되고 있다. 오늘날의 지배적인 과학은 더 이상 추상적 사유의 영역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실질적인 인간의 변형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 놓고 있다. 편리함과 안락함이라는 실용주의적 관념은 모든 과학적 연구를 이윤 추구의 길로 이끌었고, 유전 과학의 발전을 통해 그 영역은 식물과 동물을 넘어 인간 그 자체로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바로 거기서 인간주의는 제 정점을 찍는다. 인간주의는 이제 무사유로 철저히 변형되고 만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하이데거가 그토록 비판했던 저 ‘기술의 지배’는 가장 부정적인 방향으로 변형되는 와중에 있는 것이다. 그 확장과 변형의 영역을 일별해 보자.

 

변형되는 인간, 기계화되는 인간

 

기술은 거침없이 확장되고 있다. 가장 미시적인 과학적 연구의 성과는 화학과 결합하여 생명의 기초적 차원을 겨누는 실질적 변형을 가능하게 한다. 식물(GMO작물)과 어류(GMO연어)의 변형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유전자 변형 기술은 그 변형의 가장 기초적인 사례를 구성하는데, 이는 그저 이윤을 위한 자본주의적 기술에 불과하다. 이윤의 논리 앞에서 그러한 변형이 가져오는 위험성은 애써 무시되거나 최소화된다. 그러한 변형의 안전성이 보장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여러 연구들은 거대자본에 의해 철회를 강요당하거나 애써 무시된다. 이제 안전성을 결정하는 것은 자본이다. 자본에 의해 조직된 앎의 권력을 통해 유전학은 거침없이 전진하고, 생명에 대한 변형은 마침내 인간 복제의 꿈으로 향한다. 그것이 단순 복제에 그칠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은 무척 순진한 일이다. 복제가 가능하다면 변형 또한 가능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을 이유는 사실상 없다. 우리가 세 개의 팔을 가진 인간을 목도하는 것은 이제 결코 불가능한 꿈이 아니다. 사이버네틱스 기술은 몸의 기계화를 통한 인간 육체의 근본적 변형을 실질적으로 가능하게 할 것이다. 인간의 몸, 인간 정신의 거소로서의 몸, 모든 인간 실천의 근거로서의 몸은 조작할 수 있는 것이 된다. 난치병의 치료라는 명분을 지렛대 삼아, 결국 인간 육체는 완전한 변형의 가능성을 받아들일 운명에 있다. 우리가 실제로 몸을 변형시킬 수 있다면, 그 변형에 가해지는 제한은 별반 의미가 없다. 몸의 변형이 질병의 치료를 위해서만 적용되어야 한다는 법적-윤리적 제한은 지극히 소극적이고 한시적인 제한에 그칠 것이 분명하다. 일단 기술적 난점이 극복되고, 변형이 현실화된다면, 사실상 가장 민감한 문제는 역시 그것이 가져올 상업적인 이익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이윤을 만들어낸다면, 다시 말해 몸의 변형이 상품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복제 인간의 경우는 더 복잡한 과정을 거치겠지만, 실용성과 상품성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 역시 의료적 필요의 좁은 영역을 기어이 돌파하고야 말 것이다. 단언컨대, 복제 인간의 인권과 생명에 대한 윤리를 거론하는 것은 이러한 변형의 과정에 어떠한 영향도 끼칠 수 없다. 몸의 변형을 둘러싼 윤리와 인권은 그에 맞게, 다시 말해 그것이 가져다주는 상업적 이익에 부합하도록, 근본적으로 변형될 운명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변형은 비단 인간의 몸에 국한되지 않는다. 근간에 가장 뜨거운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인공지능(AI)은 인간의 변형을 앎과 사유의 수준까지 확장시켰다. 세계적인 수준의 프로 기사(棋士)들을 완벽하게 제압한 알파고는 인간 사유의 기계화 가능성을 실제 현실로 만들어버린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사실 AI의 모든 것은 인간에게서 나온다. AI가 학습하는 모든 규칙과 경우의 수, 역사와 사례들을 집적한 방대한 데이터는 모두 인간의 실천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설령 알파고가 인간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영역을 보여주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만들어낸 규칙과 논리의 파생물에 지나지 않는다. AI는 모든 인간적 활동의 집적물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러한 일대 혁신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인간 사유의 기계화이다. 인간의 지식과 사유가 기계화됨으로써, 엄청난 속도의 연산 능력을 갖춘 전산화된 기계장치는 오류 없이 사고의 과정을 체계화한다. 완벽하게 기계화된 지식과 사유는 이제 더 이상 꿈이 아닌 현실이다. 알파고의 성공은 AI의 영역을 모든 인간 사유의 분야로 확장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분명히 보여준다. 언젠가 AI가 심리 상담을 하고 소설을 쓸 것이라는 기대어린 예측은 언젠가 닥쳐올 수 있는 현실이다. 이제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이 AI를 통해 완벽하게 수행될 것이라는 낙관적인 기대는 그다지 허황되게만 들리지 않는다. AI를 통한 생산 라인의 체계적인 관리와 기업회계, 자율주행 자동차는 이미 현실화 단계에 들어가 있다. AI는 실제 인간 활동의 대다수 영역에 적용될 것이고, 그 과정을 통해 인간 사유의 기계화는 끊임없이 진행되고 발전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인간의 승리라고 볼 수 있을까? 그 바탕에는 인간의 사유가 있기에, 그것을 인간성의 승리, 인간 집단 지성의 승리로 여기는 것 또한 그다지 틀린 주장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까지 성급한 판단이다. 인간이 이루어낸 기술적 진보의 위대함을 열렬히 찬양하는 것보다는, 이 사태가 갖는 특징을 더 근본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인간의 변화와 인간주의의 반복

 

오늘날 우리가 겪어내고 있는 인간의 변화(몸의 변형과 사유의 기계화)는 사실상 가장 극단적인 인간주의의 실천이다. 그 변화 안에 세계의 전유와 활용이라는 오랜 인간의 욕망이 숨 쉬고 있음을 간파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것은 17세기에 확립된 인간(중심)주의, 인간을 신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했고, 인간 자신의 능력을 통한 인간 스스로의 해방과 사유 가능성을 확증했던 그 인간주의의 연장선상에 있다. 근대가 이룩한 기술적 발전은 인간을 수많은 제약에서 해방시켰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발전의 끝을 목도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 발전은 아직 진행 중이며, 철학적 사유 안에서 진행된 인간주의 비판과는 완전히 별개로, 여전히 이 자본주의 세계 안에서 점점 더 맹위를 떨치고 있다. 문제는 그러한 발전이 인간의 실제 존재를 주변화 하는 방향으로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AI를 둘러싼 가장 기초적인 우려(‘인간이 설 자리는 어디인가?’)는 그러한 위험을 즉자적으로 예견한다. 그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기술의 발전은 무서운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마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궁극적인 ‘하나’의 지점을 마침내 찾아낸 것처럼, 인간의 모든 능력은 인간 자신의 변모(몸의 변형과 사유의 기계화)에 집중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거기서 스스로를 지양하는 동일자의 사유를 발견한다. 예컨대 현대의 모든 기술적 혁신이 말하는 것은 이러하다. “인공지능은 우리 삶의 조건을 바꿀 것이고, 우리의 앎을 더욱 풍요롭게 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행복의 열쇠이다. 우리는 인공지능을 통해 우리의 삶을 더욱 편리하고 효율적으로 만듦으로써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다.” 어쩐지 친숙한 말들이다. 인공지능을 이성(의 지배)으로 바꾸면, 그것은 완벽한 계몽주의적 명제들이 된다. 앎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근대 계몽주의의 낙관은 오늘날 일반화된 AI의 찬양에서 똑같이 반복되고 있다. 동일자의 사유가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동일자는 바로 ‘인간’에 다름 아니다.
물론 그 인간이 같은 인간은 아니다. 차이는 과거의 ‘인간’, 즉 사유하고 실천하는 인간이 오늘날 기계화된 인간, 변형된 인간으로 바뀌었다는 점에 있다. 확실히 ‘인간’은 달라졌다. ‘인간’의 영역은 지속적으로 확장되고 있고, 그 확장 속에서 ‘하나’로 집중되고 있다. 아직 출현하지 않은 복제인간을 넘어, 이제 AI는 인간이다. AI가 인간 사유의 집약체로서, 인간의 자리에서 인간의 역할을 대신하는 한, 우리는 그것이 ‘기계화된 인간’ 또는 ‘인간화된 기계’임을 부인할 수 없다. 물론 아직은 걸음마 수준의 새로운 인간이지만, 그 ‘인간’은 점점 정교하고 세련된 방식으로 ‘진화’할 것이다. 과거에 인류가 겪었던 모든 과정을 이 새로운 인간은 더 빠른 속도로, 더 집약적인 방식으로 경험하게 될 것이고(알파고의 학습과정과 그 속도를 보라.), 그 결과 그는 새로운 인격을 부여받을 것이 확실하다. 이 모든 과정은 오늘날의 기술적 실천이 인간을 ‘다른 인간’으로 대체하는 실천임을 확실히 보여준다. 모든 것은 인간의 변형으로 향한다. 그것은 이미 막을 수 없는 과정 안으로 들어갔다. 살아 있는 인간 그 자체는 변형될 것이고, 기계는 빠르게 인간화될 것이다. 우리는 인간과 기계를 더 이상 구분할 수 없는 상황을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인간을 염려한다. 인간이 위기에 처했다고. 인간의 일을 모조리 기계가 하게 되어 인간의 존재 가치는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미래의 변화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 것인지 정확하게 예측하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인간은 장차 전혀 다른 인간이 될 것이고, 인간의 존재 의미 또한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한 인간의 변화 한가운데에서 숨 쉬고 있는 것은 역설적인 인간주의이다. 현대의 기술은 비인간화를 초래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무한한 확장 속에서 어떤 인간주의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과학과 기술을 그저 세계의 전유를 위한 수단으로 삼는 인간을 넘어, 인간은 기계화 과정의 한복판에 들어와 있다. 이제 기계화된 인간은 새로운 인간주의적 사유를 합리화하는 알리바이가 된다. 세계에 대한 전유의 욕망은 이제 기계화된 인간/인간화된 기계를 통해 더욱 강화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인간의 변형과 기계화의 과정이 위대한 사유의 기획과는 동떨어진 맹목적인 과정이라는 점에 있다. 유전자 변형과 복제에서 출발하여 인공지능에 이르는 기술의 과정은 사실상 자본주의적인 이해관심에 의해 추동되고 있다. 그것은 인류의 미래를 겨누는 어떤 기획이라기보다는, 현재의 이해관심만을 고려하는 일종의 투기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다. 모든 기술적 혁신은 자본의 이해관심에 의해 전유되거나 이윤추구의 수단으로 왜곡되기 십상이다. 블록체인 기술의 혁신성과 밀착된 비트코인 투기 열풍은 그러한 전유와 왜곡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태이다. 오늘의 인간주의는 신으로부터의 엑서더스라는 최초의 사명을 훌륭하게 수행했던 과거의 인간주의에 비해 한참이나 열등한 무사유의 표징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다시, 이론적 반(反)인간주의

 

이러한 현실의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기술적 실천의 한가운데서 숨 쉬고 있는 새로운 인간주의를 성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가 출발해야 할 지점은 역시 변화한 인간, 다시 말해 기계화된 인간 또는 인간화된 기계이다. 사유하는 인간을 대신하여 나타난 이 새로운 인간은 어디까지나 몸과 언어로 대표되는 인간이고, 그것은 각각 인간의 실천과 사유에 가해진 변화와 관련된다. 바디우가 말한 것처럼, 진리가 없다면 몸과 언어만이 있는 것이다. 앎의 축적과 적용이 사유의 모든 것이 되고, 몸과 생명의 강박이 투사적 실천을 압도하는 오늘날, 인간이 만들어낸 기술적 혁신은 인간을 그저 혁명적 사유 없는 무기력한 신체로만 남겨 두려 한다. 남는 것은 그저 그 덧없는 인생을 즐기는 일이다. 우리는 다시 한 번 무의미와 무사유의 심연으로 들어간다. 이러한 사태를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새롭게 부활한 인간주의를 철저하게 비판하는 일이다. 우리가 호출해야 할 것은 일찍이 푸코와 라캉, 알튀세르와 들뢰즈, 바디우 등이 추구했던 이론적 반(反)인간주의이다.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철저히 인간을 사유의 구성물로 파악하면서 인간의 계보학을 다시 써야 할 때가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새로운 시작의 지점에 서 있다.

 

 

 

 

 

 

 

 

 

 

 

 

 

 

작가소개 / 서용순

파리 8대학 철학 박사.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알랭 바디우의 <<철학을 위한 선언>>(도서출판 길), <<베케트에 대하여>>(공역, 민음사), <<철학과 사건>>(오월의 봄) 등을 번역했다. 주요 연구로는 <바디우 철학에서의 존재, 사건, 진리>, <데리다와 레비나스의 반(反)형이상학적 주체이론에서의 정치적 주체성> 등이 있다.

 

   《문장웹진 2018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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