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는 문학’의 가치 - 김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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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in문학]

 

 

<새로운 시대, 문학의 키워드>
 

‘여성, 노동’같은 전통적인 주제에서 시작해 ‘문체, 주체’와 같은 비평 키워드나 ‘번역, 상호텍스트성’같은 문학적 키워드, ‘환상, 무의식’같은 인접학문 그리고 ‘빅데이터, 가상현실’같은 미래용어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문학의 키워드는 무엇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비평in문학]의 새로운 비평 기획입니다.

 

 

‘듣는 문학’의 가치

 

 

김현우 (번역가)

 

 

 

 

    내가 일하는 방송국에서는 해마다 두 번 정도 다큐멘터리 기획안 공모를 받는다. 회사 내부의 프로듀서와 외부의 제작사 모두 지원할 수 있는 공모는, 다큐멘터리를 계획하고 있는 프로듀서에게는 꽤 중요한 일이다. 공모 결과에 따라 다가올 일 년, 혹은 그 이상의 시간 동안의 생활이 결정될 것이니 당연하다. 두 건의 기획안을 준비하면서 이번엔 인터뷰가 참 많겠다 싶었다. 기획안이 통과가 되면 나는 아마 당분간은 꽤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될 것이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도 있고, 공감하지 못하는 이야기도 있을 것이다. 그건 두려우면서도 기대되는 일이기도 하다.
    기획안을 준비하면서 인터뷰 모음집들을 찾아 읽었다. 스터즈 터클의 『일』을 읽고, 스테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체르노빌의 목소리』를 읽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언더그라운드』를 다시 읽었다. 그리고 기획안에 참고를 하겠다는 원래의 목적에서 벗어나 ‘듣는’ 행위 자체에 대해, 그리고 자기의 이야기를 표현하는 문학이 아니라, 자신이 들은, 혹은 (들어서) 알게 된 타인의 이야기를 ‘전하는’ 문학에 대해 생각이 많아졌다. 보기에 따라서는 그 둘이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 같은 것이라고 해도, 우선은 ‘듣기’라는 행위를 중심으로 글쓰기에 대해 정리해 보고 싶었다. 가장 직접적으로는 하루키의 『언더그라운드』 때문이었다.

 

    『언더그라운드』는 소설이 아니라 논픽션이다. 1995년 3월 20일, 옴진리교 교인들이 다섯 조로 나뉘어 도쿄 시내의 지하철에 사린가스가 든 비닐봉지를 터뜨렸다. 13명이 사망하고 5천 명 이상이 부상을 당한 이 사건은 일본을 충격에 빠트렸다. 하루키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는 사건이 터진 다음 해에 직접 62명의 피해자를 인터뷰하고 그 내용을 기록했다. 나는 그 작업을 시작하는 하루키의 동기가 흥미로웠다. 그는 우선 사건을 다룬 매스컴에서 피해자들을 ‘상처받은 순진한 일반 시민’으로 묶어서 다루는 것이 불만이었다.

 

    “그날 아침 지하철을 타고 있던 한 사람 한 사람의 승객에게도 개성적인 얼굴이 있고, 생활이 있고, 인생이 있고, 가족이 있고, 기쁨이 있고, 갈등이 있고, 드라마가 있고, 모순과 딜레마가 있고, 그것들을 종합한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없을 리가 없다.”
    – 무라카미 하루키, 『언더그라운드』, 22쪽

 

    맞다. 이야기가 없는 인생은 없다. 하루키가 그런 자세로 듣고 기록한 62명의 증언은 과연 한 덩어리의 ‘피해자’가 아니라 모두가 한 명 한 명인, 각자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62명의 개인들이다. 하필이면 ‘그 지하철’에 타야 했던 이유들부터 이미 다양함은 드러나고 있다. 점심에 마실 우유를 이틀에 한 번씩 사야 하기 때문에 해당 지하철역에서 내려야 했던 사람도 있고, 한 해에 한 번밖에 없는 강습회에 가기 위해서 탔던 사람도 있고, 성 패트릭데이 축제에 참석하기 위해 도쿄로 나온 아일랜드 출신의 외국인도 있었다. 똑같은 사린이지만, 그 냄새도 각자 지나 온 삶에 따라 다르게 느껴졌다. 어떤 이에게 그것은 초산 냄새였고, 다른 이에게는 ‘크레용이 녹는 냄새’였으며, 또 다른 이에게는 ‘고무를 태우는 것 같은’ 냄새였다. 그런가 하면 평소 복사기를 점검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그것이 ‘이소프로필알코올’ 냄새였다고 정확히 알아차렸다. 사고 후의 반응 역시 같을 리가 없다. 그날 처음 겨울 코트를 벗고 나온 회사원은 몸이 좋지 않은 것은 사린가스 때문이 아니라, 코트를 벗고 나왔기 때문이라고 끝까지 착각했다. 나란히 쓰러진 남자 한 명과 여자 한 명을 보고 ‘부부가 동반자살을 한 모양’이라고 생각한 승객도 있다. 구급차가 오지 않아 방송용 차량에 환자를 싣고 날라야 했을 때, 비상용으로 흔들며 가라며 자신의 손수건을 빌려준 사람이 있고, ‘오늘은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는 중학교 3학년 학생도 있다. 사고 때문에 몰래 하던 사내연애를 들켜버린 연인들이 있고, 지하철 테러를 이차대전 당시 연합군의 폭격과 비교하는 노인도 있다.

 

    700쪽에 가까운 인터뷰 모음집은 온통 이런 ‘개별적’인 이야기로 가득하다. 그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따라가다 보면 하루키가 처음에 의도했던 것처럼 ‘순진한 일반 시민’으로 묶을 수 없는, 모두가 다르고, 그 자체로 고유한 62명의 삶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하루키는 그 62명의 삶을 하나로 묶어내는 일반화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대신 독자들이 경험하는 것은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 한 명 한 명에 대한 ‘알아봄’이다. 그 알아봄은 하루키가 던진 질문의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라고 물을 뿐, 단 한 번도 ‘이런저런 일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까?’라고 묻지 않는다. 상대의 이야기가 듣고 싶다는 바람과, 나의 생각을 상대의 대답을 통해 확인하고 싶다는 바람 사이의 차이. 인터뷰를 진행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던지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 두 번째 질문을 하루키는 끝까지 하지 않았고, 『언더그라운드』는 그 남다른 접근이 만들어낸 귀한 성과가 된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성과는 그렇게 개별적 삶을 알아보게 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하루키는 인터뷰 대상자들을 하나로 묶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면 신기하게도 1990년대 중반의 도쿄라는 세계가 구체적으로 그려지고, 인물들 각각의 개별적인 이야기들을 하나씩 거쳐 가는 중에, 그들이 의도하지 않았던, 하지만 숨길 수도 없었던 어떤 공통점들이 드러난다. 문학이 전하는 일반화란 그런 것이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문학은 명제를 던지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을 제시하고, 거기서 일반적인 명제가 드러나게 해야 한다는 것. 작가는 직접적으로 명제를 제시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알아본 구체적인 삶들을 세세하게 전달함으로써, 그 구체적인 삶들이 모여 종합적인 명제가 드러나게 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어쩌면 그러한 일반적 명제로의 수렴은 작가의 의도조차 아닐 것이다. 적어도 하루키의 『언더그라운드』에서는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일반화는 작가의 의식적인 노력보다는, 오히려 ‘보편성을 담지하고 있는’ 구체성을 알아보는 그의 눈과 귀에 의해, 글의 소재가 되는 대상에 대한 ‘선택’에 의해 좌우되는 것처럼 보인다. 좋은 작가에게 문장력 같은 ‘기술’보다 먼저 요구되는 것은 예리한, 혹은 성실한 눈과 귀일 것이다.

 

    그런 작가들, 그런 문장들을 점점 더 드물게 만나고 있는 것 같다.

 

    작은 부상 때문에 삼 주째 병원에 다니고 있다. 주로 오전 시간에 찾는 병원의 대기실에는 늘 오전 뉴스를 틀어 놓고 있다. 지난 일주일 동안 나왔던 뉴스 중에 가장 큰 뉴스는 제천의 화재 사고였다. 그런데 소식을 전하는 아나운서와 패널들의 어투가 이상했다. 그들은 팩트를 전할 때도 목소리를 높였고, 누군가를 질타할 때는 거의 고함을 질렀다. ‘소리를 지르는’ 아나운서들의 뉴스에 대해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지만, 직접 듣고 보니 거의 충격적이라 할 만큼 이상했다. 그 아나운서와 패널들이 전하는 것은 뉴스가 아니라 감정이었다. 그들은 시청자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감정을 자극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뉴스에도 피해자들의 개별적인 사연들은 등장했다. 장모와 아내를 함께 잃은 남편, 수능을 마치고 장학생으로 대학에 진학하기로 되어 있던 소녀……. 하지만 그 ‘이야기’들에서는 아나운서가 전하고 싶어 하는 ‘감정’을 자극하기 위해 동원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 감정은 안타까움, 혹은 거기서 이어진 분노일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뉴스는 그 분노가 향해야 할 대상들을 찾아 나선다. 건물을 날림으로 지은 건축업자와 건물 주위에 불법주차를 해둔 차주와, 급박한 현장에서 했던 일들에 대한 칭찬보다는 하지 못했던 일에 대한 질타를 감내해야만 하는 소방관들을 향해 아나운서는 다시 한 번 목소리를 높였다. 분노의 대상이 된 이들의 이야기는 소개되지 않는다. 그들의 이야기가 끼어들면 ‘안타까움 – 분노’로 매끈하게 이어지는 감정의 흐름이 흐트러지므로, 그 이야기는 들려주어서는 안 된다. 하루키의 표현에 따르면 그 뉴스는 처음부터 그렇게 ‘닫힌 회로(closed circuit)’ 안에 있었다. ‘소리를 지르는’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뉴스는 그 순환에서 벗어날 생각이 전혀 없었고, 그 뉴스에 포함된 이야기들은 그 목적을 위해 동원되었다.

 

    나는 현재의 많은 이야기들이 이러한 기능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한다. 그 이야기들을 소비하는 독자들도 마찬가지이다. 뉴스에서부터 SNS, 각종 오디션 프로그램의 ‘사연팔이’까지, 그 수많은 이야기들에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대변해 주는 이야기에만 반응하고, 그것만을 소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인스타그램과 트위터, 페이스북에 올라오는 수많은 독서 인증샷들은 읽고 있는 책에 대한 소개인가, 아니면 그런 책을 읽고 있는 나에 대한 과시인가? 나는 ‘자기 이야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개인들의 인정 욕구에도 사회적인 배경이 있을 거라고 믿는다. 개인들이 인정에 목말라 있는 것은, 그만큼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라고.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던 것, 혹은 현재에 지니고 있는 것들을 지키기 위해 구축된 세계에서 한 발도 나오려 하지 않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지는 시기는, 개인들이 자신의 노력을 통해 후천적으로 무언가를 성취할 가능성이 낮아진 시기와 대부분 일치했다는 것을 역사는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패망 직전의 조선왕조가 그랬고, 나치의 독일이 그랬으며, 70∼80년대 군부독재 시절의 대한민국이 그랬다. 그것이, ‘소리 지르는’ 뉴스 앞에서 느끼는 절망이 그저 미디어에 대한 실망감보다는 더 깊은 우울함이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스스로 무언가를 성취해 본 경험이 없는 개인일수록, 스스로 생각하는 법 역시 배우지 못한다. 그런 이들은 생각의 내용마저 자신이 믿는 권위에서 허용하는 것만을 받아들이고, 재생산하는 것 같다. 나는 그 지점에서 문학의 기능에 대해 생각해 본다. 문학은 그런 머리를 깨워 주는 역할을 줄곧 맡아 왔기 때문이다.

 

    “소설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나는 대체로 늘 이런 대답을 한다. ‘소설가란 많은 것을 관찰하고, 판단은 조금만 내리는 일을 생업으로 삼는 인간입니다.’라고……. 독자는 (소설가가 제시한) 그 가설의 집적을 일단 자기 안에 받아들이고, 자기 질서에 따라 다시 한 번 개인적으로 알기 쉬운 형태로 배열한다. 대부분의 경우 그 작업은 거의 무의식중에 자동적으로 행해진다. 내가 말한 ‘판단’이란 결국은 그 개인적인 배열 작업을 가리킨다.”
    –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19~20쪽

 

    우리는 너무 적게 관찰하고 너무 많이 판단만 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것은 지금의 한국 사회가 판단을 지나치게 강요하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그 판단이라는 것도 언제나 같은 곳으로 되돌아가게 만드는 것인 경우가 많고, 그런 판단들이 대부분 그렇듯, 사실은 이미 어떤 권위가 내려놓은 판단의 재생산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직접 판단하지 않고 권위가 내려놓은 판단을 녹음기처럼 반복하는 개인들은 그 행위를 통해 소속감, 즉 안정감을 느낄 것이다.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그 소속감에만 도취되어 스스로 생각하지 않기로 결정해 버린 사람들이 많아지는 사회가 얼마나 위험해지는지를 도쿄 지하철 사린가스 사건은 보여주었다. 그렇게 멀리 갈 필요도 없다. 내가 다니고 있는 방송국 앞에는 요즘 시위대가 매일 나타난다. 최근 어떤 프로그램에서 LGBT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출연하여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 특정 집단을 자극했고, 그 집단에 강하게 소속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방송국에 찾아와 ‘비정상인 사람들’, ‘정신병자들’을 ‘교육방송’에 출연시키는 것이 말이 되냐고 큰 소리로 외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자신과 다른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 그렇게 쉽게 ‘비정상’이라고 단정하는 폭력성에 분노하고, 다른 목소리를 듣지 않겠다는 마음을 넘어 그 목소리 자체를 내지 말라고 주장하는 그들의 당당함에 두려움을 느낀다. 그들이 속해 있는 세계, 그 ‘닫힌 회로’의 구조가 지하철에서 우산 끝으로 사린이 든 비닐봉지를 찔렀던 1995년 도쿄의 테러 실행범들이 갇혀 있던 ‘닫힌 회로’의 구조가 똑같아 보이기 때문이며, 2017년 대한민국의 ‘소리 지르는 뉴스’가 그런 닫힘을 더욱 공고하게 만들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멈춘 사람들, 듣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지는 사회…….

 

    문학은 그런 폐쇄적 안정감이 지닌 위험을 거부하는 행위였다. 하루키는 판단이란 ‘개인적인 배열 작업’이라고 정의한다. 그가 말하는 배열의 대상은 소설가가 작품을 통해 제시한 여러 ‘가설들’이다. 하지만 그 배열의 대상이 ‘들은 이야기’가 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중요한 것은, 그 배열 작업이 개인적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물론 그 배열이 개인적인 까닭에, 그런 판단들이 뒤섞이는 사회는 효율적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 사회에서 개인은 쉬운 정답과 소속감을 얻지 못해 불안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스로 그러한 배열들을 해보는 훈련을 하지 않으면 개인은 성장할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아마도 더디고, 어쩌면 눈에 띄지도 않을 성장일 것이다. 내 밖의 어떤 이야기를 듣고 나면 그저 내 주위의 풍경이 그만큼 달라질 뿐이다. 어쩌면 조금 더 예의를 갖출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조금 달라진 풍경을 조금은 더 예의를 갖추어 대하는 것을 통해 세상을 이전과 다르게 살아갈 수 있을 뿐이다. 그만큼만의 변화들이 쌓여서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다만 주변의 풍경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 그리고 풍경을 마주하는 나까지 조금은 달라진다는 것, 그것이 희망이라면 희망이다. 그리고 문학은, 줄곧 그런 희망을 던져 주는 것이었다. 닫혀 있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희망, 늘 닫히려 하는 어떤 움직임(때로는 억압이고 때로는 유혹이다)에 지지 않는 희망, 그만큼의 희망일 뿐이다.

 

 

 

 

 

 

 

 

 

 

 

 

 

 

작가소개 / 김현우

번역가.
존 버거 <행운아>,<A가X에게>, 리베카 솔닛 <멀고도 가까운>, 헤닝 만켈 <사이드트랙> 등 번역.

 

   《문장웹진 2018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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