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의 민주주의에 대하여 - 진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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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in문학]

 

 

<새로운 시대, 문학의 키워드>
 

‘여성, 노동’같은 전통적인 주제에서 시작해 ‘문체, 주체’와 같은 비평 키워드나 ‘번역, 상호텍스트성’같은 문학적 키워드, ‘환상, 무의식’같은 인접학문 그리고 ‘빅데이터, 가상현실’같은 미래용어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문학의 키워드는 무엇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비평in문학]의 새로운 비평 기획입니다.

 

 

을의 민주주의에 대하여

 

 

진태원(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1. 이등 국민으로서의 을

 

   얼마 전에 출간된 『을의 민주주의: 새로운 혁명을 위하여』에서 나는 ‘을의 민주주의’라는 화두를 제기해 보려고 했다.1) 이 글에서는 내가 왜 을의 민주주의라는 화두를 제기하게 되었고, 그 쟁점은 어떤 것인지 간략하게 소개해 보겠다.
    우선 최근 몇 년 사이에 우리 사회에서 널리 사용되는 갑과 을에 관한 담론이 나에게는 흥미로운 현상으로 보였다. 갑과 을이라는 말은 몇 년 전만 해도 아주 평범한 말이었다. 그것은 주로 계약 관계에서 계약의 쌍방을 가리키는 말 이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갑질’, ‘을의 눈물’같이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들이 말해 주듯, 이 용어들은 더는 중립적인 관계의 쌍방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지배와 복종, 우월함과 열등함, 모욕과 혐오, 억압과 배제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 되었다. 프랜차이즈 본사의 부당한 횡포에 시달리는 가맹점 점주와 역으로 그 점주의 횡포에 신음하는 알바생들, 자본의 억압과 폭력만이 아니라 정규직 노동자들의 차별과 갑질에 고통 받는 비정규직 노동자, 원청업체의 부당한 요구와 전횡의 희생자인 하청업체 및 직원들, 교수에 절대 복종해야 하는 대학원생들, 무차별적인 혐오의 대상인 여성들과 소수자들, 가혹한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시달리는 어린 학생들같이 어느덧 ‘을’이라는 말은 부당한 억압과 폭력, 차별과 따돌림, 모욕과 배제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 일반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가 적절히 표현한 바에 따르면 을은 ‘몫 없는 이들’과 다르지 않다.2) 그리고 ‘10 : 90’, ‘1 : 99’ 같은 표현이 말해 주듯, 몫 없는 이들로서 을의 위치에 놓여 있는 이들은 바로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 대다수이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왜 최근 몇 년 사이에 이처럼 갑과 을에 관한 담론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지게 되었을까? 경제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은 대개 지난 1997년 IMF 외환위기가 하나의 변곡점이 되었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는 급속히 신자유주의적 질서에 따라 재편되었으며, 그 결과는 한편으로 양극화의 심화로, 다른 한편으로는 ‘이등 국민’으로서의 을들의 확산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경제학자인 장하성에 따르면 1990년대 중반까지 상위 10%의 고소득층은 전체 소득의 29%를 차지했는데, 2012년에는 44.9%까지 치솟았으며, 이것은 상위 5%, 상위 1%의 고소득층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3) 이는 또한 고용불평등의 문제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2014년 기준 비정규직 비율은 정부 통계에 따르면 32%이고, 노동계 통계에 따르면 45%이다. 문제는 ‘정규직 대비 비정규직의 임금 수준이 절반에 불과’하며,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임금 격차도 이와 비슷하다는 점’이다. 1980년대 대기업 대비 90%에 해당하던 중소기업 임금 수준은 1990년대에는 70%대로, 2014년에는 60%대로 떨어졌다. 그런데 ‘2014년 기준 중소기업은 전체 노동자의 81%를 고용하고 있고 대기업은 19%에 불과하다’. 따라서 대기업에 근무하는 일부 정규직 노동자를 제외한 나머지 노동자들은 심각한 소득 불평등과 고용 불평등에 직면해 있다. 실제로 한국은 OECD 국가들 가운데 저임금 노동자 비중이 두 번째로 높고, “월 임금이 100만 원 이하인 노동자가 전체 임금 노동자 1874만 명의 3분의 1이 넘는다”.4) 결국 한국 사회의 신자유주의적 재편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외환위기 이후 저임금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가 양산되면서 소득 불평등과 고용 불평등이 심화되었다는 것이 여러 통계 수치를 통해 입증되는 것이다.
    노동운동가 김혜진의 『비정규사회』라는 책은 한국 사회에서 을들이 이등 국민의 처지에 놓여 있음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5) 현장 활동가답게 저자는 지난 20여 년 동안 신자유주의적 재편의 결과 어느덧 비정규 사회가 되어버린 우리 사회의 구체적인 면모를 드러내준다. “은행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했을 때, 정규직으로 전환된 사람들에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아이를 한 명 더 낳기 시작했다는 것이다.”6) 왜 그럴까? 비정규직일 때는 출산휴가를 쓰기도 어렵고 직장 보육 시설이나 탁아 시설을 사용할 수도 없을뿐더러 미래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아이를 더 낳기 어렵다가 정규직 일자리를 얻으면서 이런 여건들이 갖추어지자 아이를 더 낳아 키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는 배제되었던 권리 안에 다시 편입되는 순간 사회적으로도 안정된 관계망에 들어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7)    조금 더 넓혀 말하면, 우리가 흔히 정상적인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직장을 갖고 가정을 꾸려 아이를 낳고 키워서 훌륭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만든 뒤, 적절한 시점에 은퇴하여 여생을 누리다가 삶을 마감하는 것이다. 그런데 ‘비정규적인 사회는 우리가 보통 정상적인 삶이라고 부르는 이러한 삶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을, 저자는 우리 사회에 편재해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예를 통해 매우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저자는 서문에서부터 “비정규 체제 안에 있는 우리 모두가 피해자들이다.”8)라고 역설한다. 비정규 사회는 단순히 비정규직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정규직 노동자들을 포함한 사회 구성원들 대다수가 보통 정상적인 삶이라고 부르는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어려운 사회, 실로 그것을 거의 불가능에 가깝게 만드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특히 고령화 사회를 지나 초고령화 사회로 접어들고 있지만 OECD 회원국 가운데 노인 빈곤율이 가장 높은 우리 사회에서 이는 더욱 절박하게 체감되는 문제이다.
    따라서 저자에 따르면 비정규직이 우리 사회에서 점점 늘어 가고 실로 보편적인 고용 형태로 바뀌어 가는 것은 단순히 좁은 의미의 일자리 문제, 또는 조금 더 넓게 본다면 사회경제적 문제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의 삶의 불안정성과 관련된 문제이며, ‘국민 내에서 구조적인 차별을 제도화’하는 문제이다. “비정규직은 고용 형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고용 형태로 말미암아 삶이 불안정해지고 희망을 잃은 채 불안에 떨며 노동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정규직이 확대되면서 노동자들은 ‘권리를 빼앗긴 이등 국민’이 되고 있다.”9)

  1)  진태원, 『을의 민주주의: 새로운 혁명을 위하여』, 그린비, 2017.
  2)  자크 랑시에르, 『불화: 정치와 철학』, 진태원 옮김, 도서출판 길, 2015 참조.
  3)  장하성, 『한국 자본주의』, 헤이북스, 2014; 『왜 분노해야 하는가』, 헤이북스, 2015 참조.
  4)  장하성, 『왜 분노해야 하는가』, 310쪽.
  5)  김혜진, 『비정규사회』, 후마니타스, 2015.
  6)  김혜진, 같은 책, 170쪽.
  7)  김혜진, 같은 곳.
  8)  김혜진, 같은 책, 7쪽.
  9)  김혜진, 같은 책, 76~77쪽. 강조는 인용자.

 

 

2.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인가?

 

    따라서 갑과 을에 관한 이러한 담론을 해방 이후 70여 년의 시간이 지난 우리나라 현대사의 중요한 한 가지 증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은 대한민국이라는 우리가 살고 있는 국가 또는 정치공동체가 과연 어떤 국가인가라는 질문과 연결된다.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인류사에서 매우 오래된 질문이며, 다양하고 심지어 서로 상충하는 답변들을 산출해 온 질문이다. 따라서 이 소론에서 이 질문에 대한 엄밀하고 체계적인 탐구를 수행할 수는 없기 때문에, 간단하게 세 가지 측면만 지적해 두겠다.
    우선 국가는 그 구성원들의 공동선 또는 공동의 가치 및 이익을 추구하는 정치 공동체라고 말해 볼 수 있다. 왕이나 황제를 주권자로 하는 국가이든 아니면 귀족들의 집단적 이익을 추구하는 국가이든 또는 넓은 의미의 민주정 국가이든 간에, 국가라는 정치 공동체가 오직 소수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경우는 없다. 또는 만약 그런 경우가 있다면 그 국가는 오래 존속할 수 없다. 정치 공동체로서의 국가는 늘 그 구성원 전체의 공동의 가치나 이익을 추구해야 하며, 그럴 경우에만 유지되고 존속할 수 있다. 스피노자가 군주정이든 귀족정이든 아니면 민주정이든 간에 “국가의 권리 또는 주권자의 권리는 자연의 권리와 다르지 않으며, 각 개인의 역량이 아니라 마치 하나의 정신에 의해서처럼 인도되는 대중들의 역량에 의해 규정된다.”10)라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국가는 또한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분할되는, 넓은 의미의 계급적 공동체라는 점 역시 부인할 수 없다. 국가는 공동의 가치와 이익을 표방하지만, 그것은 늘 지배하는 계급의 이익에 의해 매개되는(또는 데리다식으로 말하면 ‘대체보충 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는 근대 이후의 자본주의 국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자본주의 국가를 “부르주아 계급 전체의 공동 업무를 처리하는 하나의 위원회일 뿐”11)이라고 간주했지만, 우리가 굳이 이러한 규정을 따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나라를 비롯한 현대 자본주의 체제의 국가들이 자본가 계급(특히 재벌과 같은 대자본가들)의 이익을 보호하고 관철한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따라서 우리나라 최대 재벌의 명칭을 딴 ‘삼성공화국’이라는 말이 종종 쓰이거니와, 무엇보다도 ‘갑질’, ‘을의 눈물’ 같은 용어들이 많은 사람에게 공감을 얻고 사회적으로 널리 쓰이는 현상 자체가 우리나라가 재벌 및 권력자들과 같은 갑의 이익을 옹호하는 계급적 국가의 하나라는 점을 방증해 준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수많은 대중이 우리나라의 계급적 성격을 사무치게 자각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이 세월호 참사였다. 세월호 참사에서 대중들이 경험한 것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검은 구멍”12)이라는 점이었다. 그 이유는 사람들에게 보통 국가는 항상 이미 주어져 있는 가장 단단한 현실이라고 여겨지지만, 세월호 참사에서 대중들이 목도한 국가는 충격적이게도 “너무나 허망한 어떤 것”이고 “커다란 공백”13)이었기 때문이다.
    국가는 눈앞에서 침몰해 가는 배 안에 갇힌 학생들을 구조하는 데 무능력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학생들을 구조하려는 의지도 갖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이게 나라냐’ 하는 탄식이 흘러나왔고, “‘가난한 우리’를 위한 국가는 없다, ‘가난한 나’를 위한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14)는 자각이 이루어졌다. 만약 배 안에 갇힌 학생들이 안산 단원고 학생들이 아니라 외국어고나 과학고 또는 강남의 명문고 학생들이었어도 정부가 그렇게 대응했을까, 라는 의문이 대중들의 공감을 얻었고, ‘가만히 있으라’는 지시는 복종을 명령하는 환유적 표현으로 간주되어 분노를 자아냈다. “국가는 ‘그들의 편’”15)이었던 것이다.

  10)  Benedictus de Spinoza, Tractatus Politicus, 3장 2절, in Carl Gebhardt ed., Spinoza Opera, vol. III, Carl Winter, 1925, pp. 284~285.
  11)  칼 마르크스ㆍ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당 선언』, 최인호 외 옮김, 『칼 마르크스ㆍ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1권』, 박종철 출판사, 1991, 402쪽.
  12)  진태원, 『을의 민주주의』, 109쪽.
  13)  진태원, 같은 책, 110쪽.
  14)  진태원, 같은 곳.
  15)  진태원, 같은 곳.

 

 

3. 상상의 공동체로서 국가

 

    하지만 국가의 또 다른 특성이 존재한다. 국가는 한편으로 공동의 이익과 가치를 추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무엇보다 지배 계급의 이익을 관철하는 치안기계이기도 하지만, 국가는 또한 베네딕트 앤더슨의 표현을 빌리면 ‘상상의 공동체’이기도 하다.16) 앤더슨 자신도 지적하고 있거니와, 이때의 상상이라는 말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국가가 상상의 공동체라는 말은 상상적인 것이 국가를 구성하는 본질적인 요소라는 것을 뜻하며, 따라서 상상적인 것은 그것을 걷어내고 깨뜨려야 비로소 우리가 국가의 실체 내지 진상(眞相)을 파악할 수 있게 되는 주관적인 공상이나 착각 또는 기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상상적인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국가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상상적인 것으로서의 국가의 특성은 ‘국민국가’라는 개념에서 잘 드러난다. 근대 국가는 보통 국민국가라고 한다.17) 이는 국민이 자연적인 공동체(곧 혈통에서 유래하거나 에스니시티를 기반으로 하는)가 아니라 근대에 만들어진 “특수한 종류의 문화적 인공물(cultural artefacts)”18)임을 뜻한다. 그리고 앤더슨에 따르면 이러한 문화적 인공물로서의 국민은 인쇄 매체들에 기반을 둔 근대에 고유한 시간, 곧 ‘공허하고 동질적인 시간’을 통해 가능하게 되었다. 하나의 국민을 이루고 있는 성원들은, 대부분의 경우 서로 아무런 개인적ㆍ가족적ㆍ사회적 관계를 맺지 않고 있다. 가령 나는 서울 관악구 성현동의 한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나는 같은 아파트에 사는 다른 주민들과 극소수를 제외하면 아무런 면식 관계가 없다. 더욱이 같은 성현동의 다른 아파트 주민들이나 단독주택 주민들과는 더더욱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러니 같은 서울에 살고 있다고 하지만, 내가 구체적인 면식 관계나 친분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 한국이 작은 나라라고는 하지만, 한국 전체로 범위를 넓혀 보면 더욱더 그렇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은 수많은 이런저런 사람들을 ‘나와 같은 한국사람’이라고, 더 나아가 때로는 ‘나와 피를 나눈 한민족’이라고 상상한다. 그리고 나와 개인적으로 매우 가깝거나 어쨌든 이런저런 친분을 지닌 일본 사람, 프랑스 사람 또는 캐나다 사람을 나는 ‘나와는 다른 공동체에 속한 사람’이라고 구별한다. 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일본 사람들을 적대시하거나 혐오하는 일도 일어난다. 이것은 일본인들이 우리 한국사람 또는 재일조선인을 비롯한 ‘한민족’을 대할 때도 일어나는 일이다. 이러한 상상적 동일성, 상상적 일체감이 없다면, 국민과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국민주의(nationalism)는 일부 지식인들이 생각하듯이, 서구 유럽 같은 ‘선진국들’에서는 이미 사라진 것이며 ‘후진국들’이나 ‘제3세계 국가들’에서나 나타나는 병리적 현상으로 치부할 수 없다. 국민주의는 국민국가라는 정치 공동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한 상상적 지주(支柱)이다. 마이클 빌리그(Michael Billig)라는 영국의 사회심리학자가 『일상적 국민주의』19)에서 잘 보여주었듯이, 미국, 프랑스, 영국, 독일 등을 비롯한 서구의 이른바 ‘선진국들’ 역시 정치 공동체로서 존립하고 재생산되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국민’이라는 정체성과 일체감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국기나 국가(國歌), 축구 대표 팀 같은 것, 역사 교육이나 국가의 영웅들에 대한 기억과 숭배 따위는 모든 국가에서 일상적으로 전개되는 일상적 국민주의의 대표적인 현상들이다. 그렇다면 국민주의를 제3세계 국가들에서나 볼 수 있는 후진적인 이데올로기로 간주하는 것 자체가 지극히 ‘서구 중심적인’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국민주의 가운데서도 민족적 국민주의(ethnic nationalism) ― 우리가 보통 ‘민족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이것의 줄임말이다 ― 가 강한 나라이다. 민족적 국민주의의 특징은 인종적ㆍ문화적 정체성으로서의 민족과 정치적 정체성으로서의 국민이 거의 일체를 이룬다는 것이다. 가령 프랑스나 미국같이 이민자들에 기반을 둔 이민자 국민국가는, 같은 미국 국민 또는 프랑스 국민이라 하더라도 민족적 출신들은 지극히 다양하다. 이 나라들은 수십 개 이상의 상이한 민족 출신들이 모여서 동일한 국민을 형성해서 살아가는 나라들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최근에는 좀 달라지고 있지만, ‘단군의 후손’으로서의 한민족이 한국 국민과 거의 동일시되는 나라이다. 따라서 광대뼈가 좀 나오고 머리가 검고 무슨 가문의 무슨 후손인 사람들, 어느 지역 어느 출신이라는 것이 금방 밝혀질 수 있는 사람들만이 국민으로 간주되고 또한 국민으로서의 자격을 지니고 있다고 여겨지는 나라가 우리나라이다.
    이처럼 국민적 정체성이 민족적 정체성과 거의 동일시되는 나라일수록, 그러한 동일성이 강조되는 나라일수록 소수자들 및 개인들의 권리가 제대로 보호되거나 존중되기 어렵다. 전근대 사회에서 전해진 강고한 가부장제적 질서가 더욱 권위를 부여받게 되고, 개인보다는 가문, 공동체, 국가의 정체성이 더욱 중요성을 얻게 되며, 피부색이 다르고 민족적 출신이 다르고 젠더 정체성이 모호한 이들은 정상적인 국민으로, 또는 시민이자 인간으로 대접받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갑과 을의 위계 및 차별 구조가 더 강하게 작용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를 단순히 시민들의 공동선을 추구하는 시민들의 공동체로 간주할 수도 없고 지배 계급의 이익이 전일적으로 관철되는 계급 국가로만 사고할 수도 없으며, 그와 더불어 국가에 본질적인 상상적인 것의 측면을 유념해야 한다. 작년 가을과 겨울에 걸쳐 촛불 시위의 뜨거운 함성이 전국을 뒤덮을 때, 그 한편에서는 태극기를 들고 나와 국정농단을 자행한 주범인 전(前)대통령과 그 일당의 무죄를 옹호하는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탄핵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정권이 들어선 지금 그 목소리는 잦아들었지만, 독재자와 그 딸을 자신과 동일시하고, 최고 재벌의 이익에 자신의 이익이 달려 있다고 믿는 사람들, 따라서 자신과 비슷한 을들과 일체감을 느끼고 연대하기보다는 그들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이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김남주는 「낫」이라는 유명한 시에서 “낫 놓고 ㄱ 자도 모른다고 / 주인이 종을 깔보자 / 종이 주인의 모가지를 베어 버리더라 / 바로 그 낫으로”라고 노래했지만, 사실 종의 낫이 다른 종의 목을 겨누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이다.20) 이것은 주관적 착각이나 기만의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그에 앞서 국가의 본질적인 상상적 성격에 뿌리를 두고 있다. 따라서 ‘1 : 99’, ‘10 : 90’이라는 구호들이 가리키는 심각한 양극화의 현실 속에서 국민 대다수를 이루는 을들 사이에 공통의 이해관계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동일한 계급의식으로 나타나지 않으며 공동의 이해관계의 정치적 추구로 이어지지도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을의 민주주의가 문제적인 화두인 것이다.

  16)  Benedict Anderson, Imagined Communities: Reflections on the Origin and Spread of Nationalism, Verso, 2006(3rd Edition); 베네딕트 앤더슨, 『상상의 공동체: 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 윤형숙 옮김, 나남, 2002.
  17)  ‘국민(nation)’이라는 말을 ‘민족(ethnicity)’이라는 말과 혼동하는 경향이 있고 실제로 20세기 중반까지 네이션이라는 단어는 정치 공동체로서의 국민이라는 뜻과 혈통 및 문화 공동체로서 민족이라는 뜻으로 혼용되어 사용되기도 했지만, 현대 인문사회과학의 논의를 고려한다면 양자를 잘 구별해서 사용할 필요가 있다. 더 자세한 논의는 진태원, <어떤 상상의 공동체? 민족, 국민 그리고 그 너머>, 《역사비평》 96호, 2011 참조.
  18)  B. Anderson, Imagined Communities, p. 35; 베네딕트 앤더슨, 『상상의 공동체』, 56~57쪽.
  19)  Michael Billig, Banal Nationalism, Sage, 1995.
  20)  더 자세한 논의는 진태원, <김남주 이후>, 『을의 민주주의』, 앞의 책 참조.

 

 

4. 국민주권을 넘어서

 

    지난 5ㆍ18 광주민주화운동 37주년 기념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새롭게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광주 민주화운동의 연장선 위에 서 있”다고 강조하면서 “마침내 5월 광주는 지난겨울, 전국을 밝힌 위대한 촛불혁명으로 부활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더 나아가 그는 “촛불은 5ㆍ18 광주의 정신 위에서 국민 주권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국민이 대한민국의 주인임을 선언했습니다.”라는 점을 역설했다.
    5ㆍ18, ‘촛불혁명’, 국민 주권. 이 세 개의 단어를 연결하고 더 나아가 이것들 사이의 등가성을 선언한 이 기념사는 여러모로 감회가 깊은 것이었다. 특히 지난 이명박ㆍ박근혜 정권 동안 5ㆍ18 항쟁의 의의가 (의도적으로) 축소되거나 폄훼되고 그것이 상징하듯 한국 사회의 인권과 시민권이 크게 후퇴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번 기념사는 남다른 울림을 준다. 이 기념사의 핵심을 이루는 단어는 내가 보기에는 ‘국민 주권’이다. 법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국민 주권이라는 단어는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 헌법의 첫머리에 기입되어 있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본다면,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선포한 헌법 조문은 오랫동안 유명무실한 조문으로 남아 있던 것이 사실이다. 국민이 주권자라는 것은 ‘통치자를 선출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는 의미로만 제한되어 있었던 반면,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은 ‘국민의 대표자가 아니라 국민을 다스리는 통치자들’로 인식되었으며 또 스스로 그렇게 처신해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촛불이 “국민 주권의 시대”를 열었고 “국민이 대한민국의 주인임을 선언”했다는 말은 국민이 단순히 피통치자에 머물지 않고 통치자를 통제하거나 적어도 실질적으로 감시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는, 그러한 시대가 되어야 한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아직 정권 초기이지만, 문재인 정부는 여러 측면에서 ‘국민 주권의 시대’를 열어 놓는 정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이 충분한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국민 주권 또는 인민 주권(popular sovereignty)이라는 개념에 대해 좀 더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국민 주권이라는 말은 일종의 ‘허구’이기 때문이다. 주권의 주체로서 ‘인민’ 내지 ‘국민’과 같은 것은 실물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며, 그것의 실물 내지 실체가 있다면 그것은 ‘그 실천적 효과 속에서만 현존’한다. 더욱이 국민은 동질적인 개인들의 집합이 아니며, 계급들로 분할되고 성과 젠더로 구별되고 지역ㆍ출신ㆍ학벌 등으로 나뉜다. 특히 우리가 정치공동체 안에 존재하고, 사회적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이상 국민은 지배자와 복종하는 자, 권력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몫을 가진 이들과 몫 없는 이들, 갑과 을로 분할된다.
    따라서 ‘주권자로서의 국민’이라는 범주에는 갑의 위치에 있는 국민과 을의 위치에 있는 국민, 1퍼센트의 국민과 99퍼센트의 국민의 차이가 기입되어 있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감춘다’. 이러한 은폐가 우연적인 사태이거나 단순한 이데올로기적 효과가 아니라, ‘보편적 평등을 표현하는’ 국민 주권 개념의 ‘구조적 특성’에서 기인한다는 점에서 이는 더욱 문제이다. 더욱이 주권자로서의 국민은 다른 주권자 국민들과 맞서는 범주일 뿐만 아니라, 한국 내에 있는 국민 아닌 이들을 시민 아닌 이들로, 따라서 한나 아렌트의 통찰에 따르면 (적어도 잠재적으로는) ‘인간 아닌 이들’로 배제하는 개념이다.21) 국민이라는 말이 정상성의 기준이 될 때 그것에 미달하는 사람들은 배제와 차별, 무시의 폭력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그 역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현실적으로는 국민 내지 인민이라는 단일한 개념 안에 이처럼 다양한 차이들이 존재하고, 또한 지배와 피지배, 인정과 차별, 포함과 배제의 다양한 관계들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이들이 모두 ‘하나의 이름’으로 불린다는 사실, ‘공통의 이름’으로 호명된다는 사실은, 국민 내지 인민이라는 개념이 ‘보편성을 표현하고 있음’을 말해 주지 않는가? 이것을 허구적 보편성 또는 ‘어느 정도까지는 기만적인 보편성’이라고 비판할 수 있지만,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보편성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보편성을 참칭하는 특수성’(특정한 계급이나 젠더 또는 인종이나 민족 등의 이해관계를 함축하는)의 표현이라고 고발할 수 있지만, 이러한 공통의 이름으로 호명될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정치적 주체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이 인민이든 국민이든, 아니면 마르크스주의적인 정치의 주체로서 프롤레타리아이든 또는 다중이나 기타 어떤 것이든 간에 정치적 주체라는 것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것은 어떤 공동체의 공통적인 틀 속에서 정치적 주체로 구성/제도화되어야 한다.
    따라서 국민 내지 인민이라는 개념의 허구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쉽게 포기하기는 어렵다. 이런 측면에서 을의 민주주의는 국민 내지 인민이라는 범주를 완전히 폐기하거나 무효화하려는 기획이라기보다는 ‘몫 없는 이들’로서의 을이라는 기초 위에서 국민이나 인민을 개조하려는 기획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자크 랑시에르는 ‘몫 없는 이들의 몫’, 곧 몫 없는 이들의 정치적 주체들로의 구성이라는 문제를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파악한 바 있다.

 

    민주주의의 주체이며, 따라서 정치의 모체가 되는 주체인 인민은 공동체 성원들의 총합이나 인구 중 노동하는 계급도 아니다. 인민은 인구의 부분들에 대한 모든 셈에 관하여 대체보충적인 부분으로(la partie supplémentaire), 이것은 공동체 전체를 셈해지지 않는 이들의 셈과 동일시할 수 있게 해준다.22)

 

    국민 전체를 구성하는 각각의 부분, 곧 각각의 계급, 집단에 대한 셈을 ‘대체보충 하는 부분’으로서의 을들이 국민 전체와 동일시될 수 있을 때, 계급적 국가로서의 대한민국은 시민들의 공동의 이익, 공동의 가치를 추구하는 민주주의적 정치공동체로 재구성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매우 아포리아적인, 그리고 그만큼 매우 복잡하고 까다로운 기획이지만, 해방 이후 70여 년의 시간이 흘러 이제 역사적인 전환점에 도달한 대한민국이라는 정치 공동체의 미래를 가늠할 기획이기도 하다. ‘을을 위한, 을에 의한, 을의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새로운 발명을 위한 표어이다.

  21)  한나 아렌트의 ‘인권의 역설’에 관해서는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1권, 이진우ㆍ박미애 옮김, 한길사, 2005 중 특히 9장을 참조. 이에 관한 평주로는 진태원, 『을의 민주주의』 5장 참조.
  22)  Jacques Rancière, Aux bords du politique, Gallimard, 2004, p. 234; 자크 랑시에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양창렬 옮김, 도서출판 길, 2013, 217쪽.

 

 

 

 

 

 

 

 

 

 

 

 

 

 

작가소개 / 진태원

연세대 철학과와 동 대학원 철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철학과 대학원에서 스피노자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고, 《황해문화》 편집위원으로 있다. 스피노자를 비롯한 서양 근대철학과 현대 정치철학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을의 민주주의』, 『스피노자의 귀환』(편저), 『포퓰리즘과 민주주의』(편저)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법의 힘』, 『마르크스의 유령들』, 『정치체에 대한 권리』, 『불화: 정치와 철학』 등이 있다.

 

   《문장웹진 2018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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