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눈으로 변할 때 사랑의 위험한 이쪽이 탄생한다 외 1편 - 김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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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물이 눈으로 변할 때 사랑의 위험한 이쪽이 탄생한다

 

 

김윤이

 

 

 

    ‘고대문명인 마야 제국 티칼 유적지에는 태양왕 신전에 얽힌 일화가 있다. 태양왕이 살아생전에 사랑한 왕비를 위해 자신의 신전과 마주하게 그녀의 신전을 짓고, 자신도 신전 밑에 묻혔다. 그리하여 매년 낮밤 길이가 같아지는 날 두 신전은 하나의 그림자가 된다.’

 

    ‘고대문명인 마야 제국 티칼 유적지에는……’ 첫머리를 눈으로만 따라 읽네. 태양이 내리쬐는 원고에서 눈을 떼면, 이층, 삼층, 사층 지금 이곳은 눈으로 바뀐 세상이네. 불현듯 쓰던 원고를 박차고 나가네. 나는 눈송이로 별 모양을 말하던 당신을 생각하네. 눈 모양이 지문만큼 많다구, 강설이 쏟아지던 연도에 당신은 정지해 있네. 겨울은 이별의 구도로 앞장서 나가지 않고 눈 속으로만 들어오네. 눈에 이끌려 서점가를 산보하다 돌아오면 흥성거리는 저녁이 페이지에 들어와 노숙(露宿)하네. 세상의 분별이 무슨 쓸모랴. 허물어지네. 종각(鐘閣) 크리스마스트리에 매달린 눈 결정이 빙글 도네. 기상학은 분간할 수 없는 세상을 원경으로 드리우네.
    문면 너머 여기는 태양이 내리쬐는 변방이 분명한데, 버려진 문명이네. 누군가의 전생에 들어온 듯 태양력이 흐릿하네. 내생을 위한 신전을 에워싸며 낮밤이 흘러가고, 구름이 바뀌네. 석조만 수세기 살아남을 거라는 사실이 존재하네. 어느 연대에까지 그림자는 겹쳐질 것인가. 땅에 엎질러진 물이 눈동자에서 증발하네. 물이 눈으로 변할 때 사랑의 위험한 이쪽이 탄생하네.
    칠십육 억 명 눈동자에 자본의 밀레니엄이 송출되네. 천 년 과업이 초읽기에 들어가느라 인파 속에서 시간이 거꾸로 세어지네. “삼, 이, 일!” 새 시대 문이 열리네. 전승을 축하하는 듯한 분위기에 휩싸여 행인들이 환호하네. 진땀이 배어 나와 눈을 감았다 뜨면, 시야 저쪽이 보이네. 붉은 태양이 뜨네. 수천 년 전 오늘이 겹쳐지네. 마야 여자가 부역을 나가는 시간, 멀리 아물대는 햇무리를 쳐다보자 망막에 크고작은 상이 맺히네.

 

    살면서 며칠 몇 달 몇 년의 그리움이 문자로 떠났다 돌아왔는가. 아아, 눈 내리네. 어쩌면 수천 년 걸친 한날한시 만남이라 생각하네. 좁디좁은 내 방으로만 어지럽게 땅겨오는 눈 속에서 저쪽이 보이네. 혼돈과 사랑은 한 장 화폐인 양 짝패네. 사람을 잃고 중얼중얼 귀신처럼 돌아다니네. 도대체 당신 있는 거긴 어디야?

 

 

 

 

 

 

 

 

 

 

 

 

 

혼종

 

 

 

    예명 확인 불가. 서류를 빤히 쳐다본다.
    예술인 증명으로 난 누구냐를 재차 밝히란다. 난데없이 심인(尋人)이다.

 

    예술가라는 경력엔 과거와 미래가 때 절은 누더기처럼 맞붙는다. 틈입 없는 현재가 언제 꿰매졌는지 몰라 태연히 난 누군가를 찾아 헤맨다. 무상거주 사실확인서와 신분증 사본을 뚫어지게 본다. 인정하는 시간이 빙글 돌고 망막에 상하좌우가 뒤바뀐 상이 맺힌다. 공중에 붕 뜬 착각이 든다. 중력은 인간이라는 최소한의 느낌인데 왜 사라진 것인가. ‘가난의 냄새를 풍길수록 사람들은 멀어진다.’ 오래 전부터 글은 되지 않고, 파지에 적힌 그대가 날 빤히 쳐다본다.

 

    오늘은 건강보험공단 직원에게 시인의 현실에 대해 속히 설명하고 돌아와도 죄다 비현실이다. ‘가난의 냄새를 풍길수록 사람들은 멀어진다.’ 딴 짓 할 겨를 없게 할 요량인지 현실에서 추방된 귀신들이 제각기 모여드는 방. 지상에 발 못 붙인 무상거주자; 성씨 없이 출몰하는 유령 작가; 이직을 밥 먹듯 하는 프리랜서; 걸식하는 잉여인간이 오래 머물 기색으로 좁장한 방구석에 한데 드러눕는다. 수세기를 넘어온 모래알갱이가 사정없이 흩날린다. 춥다. 외풍이라고 애써 넘겨보지만, 그대가 도처에서 나타나 제멋대로 돌아다녀서란 걸 안다.

 

    미라를 감싼 영생의 천처럼 종이엔 수천 년 예술이 교차한다.
    이번엔 그대를 어느 연대에서 만나고 돌아온 걸까.
    나는 누구냐는 표정의 지난 세기 여자가
    친형제보다 닮은 얼굴로 울고 있다.

 

 

 

 

 

 

 

 

 

 

 

 

 

 

 

작가소개 / 김윤이

200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흑발 소녀의 누드 속에는』, 『독한 연애』.

 

   《문장웹진 2018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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