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 외 1편 - 이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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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딸기

 

 

이순현

 

 

 

하얀 쟁반 위에
딸기 하나

 

손은 움직이고 딸기는 가만히 앉아 있다
딸기는 펜을 들고 있고 손은 향기를 들고 있다
손은 동물성이고 딸기는 동물성을 겪어내고 있다

 

전투기도 미사일도 순해지는 격납고처럼
1월의 딸기 내부도 조용하다

 

손은 미라보 다리 아래에 밑줄을 긋고 딸기는 바닥에 검은 타원을 그리고 있다
딸기도 손도 통과하고 있는 오후 여덟 시,

 

세워진 무한이라는 여덟 시,
손 하나가 딸기를 집어 올린다

 

붉은 타원과 검은 타원이 그리고 있던
무한이 입안으로 들어간다

 

비상계단 끝에 사람 하나
무한으로 기운다
기울어진다

 

 

 

 

 

 

 

 

 

 

 

 

 

내 신발 속의 여자

 

 

 

그녀가 떠났습니다

 

캐리어를 반려처럼 옆자리에 앉히고
어느 이른 새벽 가버렸습니다
자동차 꽁무니의 빨간 등이 둘이다가 넷이다가
송이송이 부풀다 번지다 주르르 쏟아졌습니다

 

의심과 질투, 그녀의 천적들도
저장할 수 없는 느낌들도 한꺼번에 사라졌습니다

 

새끼를 낳는 해마 수컷처럼
나는 그녀를 낳습니다

 

그녀1, 그녀2, 그녀3…… 불어나는 그녀는
붐비며 넘쳐나며 핏줄을 돌고 돌다
안경 밑으로 흘러내리거나
음경 끝으로 분출되거나

 

너무 많은 백혈구가 생명까지 갉아먹듯
골수가 헐고
내 심장이 부어올라
못 쓰게 되어버렸습니다

 

나는 그녀에 좀 더 가까운 사람이 되어 갔지만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불어난 그녀로
공기 한 가닥 드나들 수 없을 때
염낭거미처럼 뿔뿔이
나를 박차고 날아가겠지요

 

비로소 떠남이 완성되겠지요
안쪽을 파 먹혀 찬란한 나는
가장 그녀다워질 겁니다

 

 

 

 

 

 

 

 

 

 

 

 

 

 

작가소개 / 이순현

1996년『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내 몸이 유적이다』

 

   《문장웹진 2018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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