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주의자의 꿈 외 1편 - 우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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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계몽주의자의 꿈

 

 

우대식

 

 

 

    덩치가 조금은 큰 흑인 레프리가 되어 사각의 링에서 한 세상을 살고 싶다. 푸른색 와이셔츠에 나비넥타이를 매고 왼손 검지를 흔들며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인자하면서도 근엄하게 타일러 주고 싶다. 링을 어슬렁거리다 표범처럼 날아가 두 선수를 떼어 놓고 좌우 앞뒤 스텝을 바꾸어 가며 싸움을 살피겠다. 사각에 쓰러진 선수에게는 머리를 감싸 안으며 위로를 전하고 싶다. 경기가 끝난 뒤 두 선수의 등을 툭 치며 인사를 건네고 콧수염을 매만지면서 링에 남은 삶과 죽음의 열기를 킁킁대다가 집으로 돌아가겠다. 어느 골목길에서 어깨를 부딪는 소년들에게 고개를 가로젓고 웃어 주며 손에 든 커다란 봉지에서 빵을 하나 꺼내 주고 싶다. 나무계단으로 된 방에 올라가 와이셔츠 소매를 걷고 담배를 피우며 촤르르 돌아가는 흑백 영사기를 돌리겠다. 아주 오래전 경기를 보며 “아름다운 시절이었군.” 독백처럼 되뇌다 가끔 지나가는 새벽녘 자동차 소리가 남긴 여운처럼 깊은 잠에 빠져들고 싶다. 삐거덕거리는 꿈속에서 아무도 없는 링에 올라 혼자 심판을 본다. 여전히 현란한 스텝으로 더 열심히 싸우라고 파이트 파이트를 외치며, 아무도 듣지 않는 파이트를 외치며,

 

 

 

 

 

 

 

 

 

 

 

 

 

신(神)을 묻다

 

 

 

순례의 날들
이박삼일 정도는 걸을 수 있겠다
푸른 강물을 따라 어둠 속을 걷는다
걷는 것은 죽음과의 해후
발자국마다 신을 의심한 흔적
더러운 손으로 얼굴을 문질러 본다
손에 묻어나는 인간의 기름기
나를 사랑한 나는 어디쯤 올까
약대를 돌보는 어린 소년의 코에서 콧물이 흐른다
나의 아버지여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는
어느 광야
얼음집에서 지상의 한철을 보내고 있습니까
저 구릉과 바람은 내 안의 불안을 흔들고 있다
천천히 서서히 마구 흔들리다가 멈춘다
천막 안의 커다란 그림자가 당신입니까
한 통의 물과 낡은 천막 그리고 몇 조각의 음식을 남기고
아버지를 버리고 다시 아들을 버리고
찬란한 문명 속에서 밤마다 술잔을 앞에 두고
빵처럼 부푼 불안을 뜯어 먹습니다
아버지, 당신은 아름다운가요
당신은 여자인가요
이 순례의 날들에,

 

 

 

 

 

 

 

 

 

 

 

 

 

 

작가소개 / 우대식

1965년 강원도 원주생. 1999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늙은 의자에 앉아 바다를 보다』, 『단검』, 『설산 국경』. 산문집 『죽은 시인들의 사회』, 『죽에 죽고 시에 살다』 등.

 

   《문장웹진 2017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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