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은 생선이 되고 - 강정
목록

[커버스토리]

 

 

선생은 생선이 되고

 

 

강정

 

 

 

 

 

*

 

    누구(필히 나보다 연배가 높은 사람일 테다)를 ‘선생’이라 불러야 할 때면 입도 항문도 꽉 막히는 기분이 들곤 한다. 어릴 적부터 그랬다. 칭찬도 꾸지람도 모두 폭력으로만 받았다. 머리를 어루만지는 손이나 볼기짝을 두들겨 패는 손이나 그렇게 한통속의 참섭이라 여겼다. 그래서 늘 삐딱하거나 빙충맞거나 어디로도 에두를 데 없는 외곬이었다. 가르침을 받으면 그 반대로 움직였다. 과한 비약이겠지만, 여직 운전면허가 없는 이유도 그것과 연관 있다고 여기는 바이다. 사람이나 기계나 ‘원래 그렇게’ 움직여야 하는 것의 통제를 받거나 스스로 통제해야 하는 것에 대한 공포가 뿌리 깊은 것이다. 컴퓨터가 오작동하면 지금도 짐짓 진땀부터 흐른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자답하긴 힘들다. 그래서 이미 죽어 면식도 없는 이들의 책만 오래 들여다봤던 듯하다. 답도 결론도 원인도 근거도 오로지 스스로 지어내고 짜내는 것이 소명이라 생각했던 걸까. 진중한 공부에의 욕망보다는 문장들을 따라 읽다가 저도 모르게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는 생각의 꼬투리와 그 방향 없는 질주 및 이탈이 경쾌했다. 부러 짊어지지 않아도 될 무슨 무거운 짐을 생떼 쓰듯 짊어졌다가 그 무게가 짐짓 나 자신이 된 것 같을 땐 보란 듯이 패대기치곤 기어이 한 겹의 삶을 덜어냈다며 우쭐해하는 자신을 경멸하거나 숭배했다.
    ‘선생’이란 내게 그렇게 보이지 않는 구멍1) 같은 것이었다. 얼굴을 들이대고 눈을 깊이 파묻어 그 속을 헤아리려 하면 아무것도 씌어 있지도, 공명하지도 않는 새카만 허방 속의 어느 가상의 존재. 그건 죽음에의 응시였다. 그렇게 꽤나 오래 가짜 선생(들)을 영전하고 우러렀다. 그가 만약 산 사람으로 내 앞에 있다면 동석은커녕 침이나 뱉으며 “난들 당신인들 그저 보이지 않는 구멍에나 구질구질하게 헛손질하며 바지춤에 흘린 오줌 찌끼를 가리려 하는 족속들 아니겠소.”라며 허공 빈터에 대나무 숲이나 우거지게 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혼자 존재하지 않는 면상을 꾸미고 우주의 달팽이관을 희롱하려는 작태가 이십여 년 시詩로 남았다. 빨래 안 한 속옷 더미 같은 언어 찌끼들. 세탁소는 어디 있는가.

  1)  필터/ 바로 앞까지 억세게 빨고 남은 담배를/ 스테인리스 재떨이에 비벼 끄는데, 도무지 꺼지지를 않았다/ (중략)/ 내가 꽁초를 비려 끄려 한/ 곳은 스테인리스 재떨이의 빈 구멍이었다. (「구멍」, 『래여애반다라』, 문학과지성사, 2013)

 

*

 

    십 수 년 전 시인을 만나러 대구에 간 적 있다. 기차역에서 택시를 타고 시인이 일러준 작업실 주소로 가자고 했다. 떡하니 ‘개인택시’ 간판을 단 기사가 이상하게 길을 헤매었다. 바가지요금인 줄 알면서도 확증이 없어 우물대며 분통만 삭이는 촌뜨기 관광객이 된 기분이었다. 그렇게 약속시간보다 삼십여 분 늦게 작업실이 있는 아파트 단지에 도착했다. 시인이 단지 내 상가 쪽 입구에 마중 나와 있었는데, 왜 이렇게 늦었냐는 말에 낯이 붉어져선 얼버무리기만 했을 뿐 뭐라 대꾸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 ‘어눌’이 이후, 그를 대하는 나의 태도로 확정되었다.
    나의 ‘어눌’에 비해 그의 ‘달변’은 일사천리였다. 몸 전체로 받아쓰기 노트가 되어버린 듯한 그때의 수동성과 난망함이 요즘도 때로 병풍처럼 사위를 둘러싸곤 하는데, 무슨 은밀한 기방妓房에 든 것 같은 그 오밀조밀한 야릇함에 가끔 아랫도리의 파동에 집중하게 되곤 한다. 어떤 물질적으로 에로틱한 내통이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성별 구분 무관한 가로지름과 수직과 수평의 질서 따위 망각한, 초학제적 변설의 일렁임 속에 시간의 한 부위가 물컹하게 녹아들었던 것인데, 일상에서의 격절과 통념이 해체된 의식의 굴절이 장마 끝의 지렁이 떼처럼 흐덕지게 뒤엉켰다. 내가 여자였다면, 그에게 홀딱 반했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나는 남자였기에, 또는 남자였으므로 그가 외려 남자인 게 신기했다(아니, 그리고, 그래서, 그는 여전히 빼도 박도 못할 남자였음이 확연했다). 그렇게 생뚱맞게 두툼해진 아랫도리가 그와 나완 상관없는 먼 산의 말뚝 같았다. 내 타고난 모든 속성이 나 아닌 것의 불연속적인 확정 속에서나 임의적으로 분명한 듯싶었다. 그렇게 나는 내 바깥에서 처음 말을 배우는 동자처럼 그의 형형한 눈빛만 좇았다. 작업실 내부는 책 몇 권 없이 말끔했고, 벽에 걸린 카프카 초상만 표일했다. 일어서면서 들고 있던 가방으로 아랫도리를 가린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작업실 옆엔 세탁소가 있었다. 타임캡슐로 들어가는 외계인마냥 커다란 세탁기 안에 숨어들고 싶었던 기분은 창피함도 자괴감도 아니었다. 본인은 싫어하지만 누군가는 자꾸 예뻐해 인지시켜 주려 하는, 주근깨를 들킨 소녀의 기분 같은 게 아니었던가 싶다.

 

*

 

    오랫동안 그의 시를 읽지 않았다. 오랫동안 그가 시를 쓰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그가 시를 써왔다 해도 그의 시를 자주 읽진 않았을 것이다. 만나는 횟수는 더더욱 줄어들었고, 그러다 보니 굳이 만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되었고, 우연히 만나더라도 처음 보는 사람인 양 대하는 게 상례가 되었다. 어느 한낮, 느닷없는 정분에 겨워 몸을 섞고는 시간이 흐른 후에 마주쳐선 생면부지보다 더 먼 사람이 되어 아무런 실재감도 반색도 없이 그저 뭇사람들 속에 점이 되어 사라지는 존재. 그런데 그 점이 워낙 선연해서, 또는 상대가 아니면 그 점에 대한 인식조차 흐릿해질 만큼 너무 돌올하게 독보적이어서, 외려 무감해지고야 마는 시간의 작은 혹 같은 것. 그 혹을 쥐어짜며 나도 어느 날 주제넘은 ‘접장질’을 시작했다.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 선생이 좋은 선생이라는 말은 어디에서 주워들은 건지 잘 모르겠다. 학교를 다녔으나 학점이 뭔 줄도 몰랐던 학생이었고, 숱한 선생을 만났으나 배움의 체계를 군복보다 거추장스러워하던 이가 도대체 누구에게 무어 가르칠 게 있겠는가. 일대다(一對多)의 만남이란 ‘다’의 입장일 땐 늘 폭력이었지만, ‘일’의 입장이 되고 보니 외려 더 세게 폭행당하고 싶은 충동에 달아 속엣 것을 게워내며 ‘이것이 나요, 이 사람을 굳이 봐야 하겠소?’라는 게 소위 나의 수업체계였다 말해도 말이 되려나. 말이 되거나 말거나, 그렇게 전적으로 낭비하며 홀로 부끄러워하는 게 선생의 일이라 일러준 게 누구였던가 싶어 자못 궁금해지지도 했다. 그 누구의 이름도 떠오르지 않았으나 내가 읽었던 (살아 있든 죽었든) 많은 이들이 한꺼번에 떠오르기도 했다. “선생이란 자기 말과 반대로 사는 사람이다,/ 뭐 그런 구절을 읽고// 그만하면 나도 참 좋은 선생이구나/ 하고 무릎을 쳤”(「선생 1」, 『래여애반다라』)다는 시인의 말은 그래서 자조도 자책도 아닌 선생 노릇에 대한 엄밀한 자성으로 읽혔다. 시인은 이미 오래전, 스스로도 모르게 (또는, 스스로도 모른다는 사실을 스스로도 너무 잘 깨닫는 상태에서) 이렇게 쓰지 않았던가. “선생은 생선이 되고……(『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에 수록된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의 부분인데, 정확하지는 않다. 그 시집을 잃어버리고 다시 안 산 지 15년은 족히 넘었으니까)라고.   

 

*

 

    누구(굳이 연배와는 아무 상관없을 터이다)든 배울 게 있으면 그자가 선생이다. 주변에 그런 사람이 의외로 많다고 느끼는데, 그게 복인지 또 다른 굴레인지 아직 판별은 요원하다. 다만 익히 잘 알고 잘 행해 오던 것들이 여전히 서툴고 여전히 잘 알 수 없는 것의 요철로 작용해 이전에는 제대로 해보지 않은 것들을 마주하고는 다시 동자의 눈빛을 가지게 될 수밖에 없는 이 생의 좁디좁은 미로망이 새삼 달가울 뿐이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애먼 고추가 자꾸 팔딱팔딱거리는, 차마 떠벌리고 싶지 않으나 마음보다 먼저 몸을 훑고 내리는 생의 내밀한 물리物理와 거기에 사로잡힌 스스로의 몽매가 민망하게도 기꺼울 따름인 것이다. 가령 이런 식으로.

 

 

    두 콧구멍 사이보다 가깝다면 가깝고 멀다면 한참을 더 멀 듯, 대체 사내인 나의 쾌감이 상대의 쾌감과 같은지 다른지, 종내 그 일이 궁금한 나머지 어느 날은 잘 아는 여인들한테 물어보았다. “어떻습니까? 혹시 면봉으로 귀 후빌 때 뭐 그런 느낌입니까?” 그네들은 겸연쩍게 웃으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건 아니고…….” 그렇다면 대체 어떤 은유로 통할 수 있을지 마저 물어보지 못했지만, 이건 아예 두 콧구멍 사이가 아니라 따로 파인 두 귓구멍 사이의 일, 끝내 전해지지 못한 느낌들은 오래 묵은 귀지처럼 베갯머리에 쌓일 뿐, 일단 한 구멍으로 들어온 것은 옆 구멍으로 질러 들어갈 수 없다는 것. 그러니까 처음부터 지구와 태양계와 첩첩 은하를 둘러 둘러 돌아가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다.

– 「두 콧구멍 사이」 부분, 같은 책

 

 

    민망하든 기껍든, 여하간 이런 식으로 물어보고 깨물고 곱씹어야 할, 내가 아닌 다른 것들의 생태 원리 같은 게 부지불식 이 삶을 처음 껴입어 보는 남의 살로 여겨지도록 만들 때가 있는 법인 것이다. 이를테면, 새로 개관한 어느 연극 극단 연습실 출입문 위에 걸어 둔, 고사 치르고 남은 통북어의 기다랗고 푸석한 몸뚱어리가 거듭 올려다보고 가르침을 받을 새 선생으로 여겨질 때처럼. 그것은 참 우러를 만한 죽은 생선生鮮이었다.

 

 

 

 

 

 

 

 

 

 

 

 

변웅필
12월 표지 / 변웅필

변웅필은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 독일 뮌스터 쿤스트 아카데미에서 순수미술을 전공했다. 현재 강화도에서 강아지 만득이와 살며 전업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작가소개 / 강정

1971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1992년 《현대시세계》로 등단했다. 시집 『처형극장』, 『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 『키스』, 『활』, 『귀신』과 산문집 『루트와 코드』, 『나쁜 취향』, 『콤마, 씨』 등이 있다.

 

   《문장웹진 2017년 12월호》

 

 

목록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