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모임 '이미 시작된 변화' - 정홍수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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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독자모임

– 이미 시작된 변화

 

 

참여 : 정홍수(사회, 문학평론가), 장수라, 이영순, 김보배, 김지윤

 

 

 

정홍수 : 세번째 모임이네요. 오늘 이야기할 작품은 손홍규 씨의 「눈동자 노동자」(『현대문학』 2017년 2월호)), 임국영 씨의 「볼셰비키가 왔다」(『창작과비평』 2017년 가을호), 최은영 씨의 「601, 602」(『문학과사회』 2017년 봄호) 세 편입니다. 먼저 손홍규씨의 <눈동자 노동자>부터 시작해볼까요. 쉽게 읽히는 소설은 아니죠? 조금 어렵지 않았냐 하는 질문인데요. 작가가 이야기를 친절하게 배치해놓은 건 아닌 거 같고. 환각이랄까 시적인 이미지도 보이죠.

 

손홍규 「눈동자 노동자」
『현대문학』 2017년 2월호
임국영 「볼셰비키가 왔다」
『창작과 비평』 2017년 가을호
최은영 「601, 602」
『문학과 사회』 2017년 117_봄호
 

 

이영순 : 저는 그 복합적인 느낌이 좋더라고요. 처음 작품 읽으면서 회상 부분이 나오는데 회상이라기보다 기억을 불러온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어떤 사건으로 인한 죄책감이 자연스럽게 기억을 불러오고, 또 그 기억이 다른 기억을 불러오는데 기억은 무엇인가의 도움 없이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기도 했고요. 또 윤호가 카메라 렌즈에 어느 순간을 담고 그 사진을 통해 기억을 돌려주는 것도 마음에 남아요. 윤호는 없지만 윤호가 기록한 순간들은 어느 누군가의 기억으로 존재하게 되는 거잖아요. 이 작품을 읽는 동안 기억을 불러오는 단서들에 매료될 수 있어서 좋았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 작품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생생하게 마음에 와 닿았고요.

 

김보배 : 윤호가 흙더미에 깔려서 죽잖아요. 거기에서 세월호가 연상됐어요. 보는 내내 막막한 기분이었어요. 살아남은 사람들이 더 고통스러워하고, 죄책감을 느끼고. 마지막 희생자의 눈동자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후유증을 앓듯이, 이 소설도 그런 내용으로 읽었어요. 그렇지만 윤호의 죽음 때문에 슬픔에 빠져 있는 시간이 다소 길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이건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아픔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했어요.

 

김지윤 : 저도 마찬가지로 ’죄의식‘, ’애도‘의 감정을 나타내는 소설이라고 생각했고요. 그걸 상징하는 게 ’송아지‘가 아닐까 생각했어요. 작품 초반부에 ’김씨‘가 다치고 나서 송아지를 보게 되고, 또 윤호가 죽고 난 후에 그 집에 찾아가서 송아지를 마주하는데, 그게 나의 ’죄책감‘, 또는 ’죄의식‘으로 표현된 게 송아지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제가 하나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주인공의 가족에 대한 부분인데요, 잘 이해가 안 됐어요. 파편화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정홍수 : 멀게는 기르던 소를 판 뒤 이어진 아버지의 죽음이 있죠. 아버지가 병중이기는 했지만 화자 병만 씨에게는 죄의식으로 남은 거 같습니다. 그리고 당장의 이야기로는 상견례까지 마친 딸의 파혼이 있습니다. 파혼의 경위는 나와 있지 않지만 이 또한 화자 스스로는 자신의 탓으로 자책하는 것 같습니다. 넉넉지 못한 집안 형편이나 화자의 음주벽 같은 게 원인이 되었을 수도 있겠는데 딱히 구체적 이유에 상관없이 이 세대 부모가 자식에게 가지는 대책 없는 미안함, 면목 없음 같은 걸 생각하게 만듭니다. 이 소설이 잘못한 게 없는 사람들이 도리어 미안해하고 죄스러워하는 이야기라면 윤호의 죽음에 대한 화자의 자책과 연결지어 이해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싶습니다. 김보배 씨가 세월호가 연상된다고 했는데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이야기라고 봅니다.

 

장수라 : 제 경우도 읽으며 걸리적거리는 부분이 있었어요. 흙더미에 깔려 죽는 윤호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데, 넓게는 인간을 억누르는 외부적, 야만적 폭력 같다는 생각입니다. 그 압력과 폭력 아래 놓인 무력한 노동자의 모습 말입니다. 윤호도 청년 노동자로 죽은 거잖아요. 그때 한 사람의 개별성이 압살된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윤호가 사진을 찍어 주변인들에게 주는 걸로 봐서 말보다는 사진을 통해 소통을 추구하며 나름 그런 압력과 조용히 싸워온 사람이 아니었을까 생각했어요.

 

정홍수 : “그는 윤호를 죽이지 않았지만 윤호를 구원하지도 않았다. 스물다섯 살 청년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건 그가 아니었지만”이라는 말이 나오죠. 매몰되면서 윤호는 화자의 발목을 잡은 것 같습니다. 사실 병만 씨가 윤호를 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 육체의 기억은 화자를 끝없는 자책과 죄책감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그런데 그의 죄책감이 길어내는 질문의 연쇄는 상당히 문제적인 것 같습니다. “죽음으로 몰아넣은 건 그가 아니었지만, 스물다섯 살 젊은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세상을 죽지도 않고 살아온 건 그였다”는 대목 같은 게 그렇죠. 그렇게 해서 “이게 죄인지 아닌지 대답해 줄 수 있느냐고 묻고 싶었다”는 질문이 이 소설의 심부에서 우리를 찌릅니다. 문제를 세상 탓으로 돌리는 것은 쉬운 일이죠. 그러나 직접적인 연루나 인과와 상관없이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자기 자신에게 도덕적 윤리적 심문을 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소설 마지막 대목을 보면, ‘문 닫고 나가라’는 할아버지의 말을 어떤 아포리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경으로 삼는 윤호의 철저한 자기 심문이 화자의 회상으로 제시되는데, 이 대목이 처음에는 소설의 사족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만, 다시 보면서는 소설의 최종적 질문에 힘을 실으려는 작가의 완강한 의지 같은 걸 느끼게 되더군요. 어쨌든 이 난문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다짐 같은 것과 함께. 다만 그게 윤호나 병만의 언어, 의지라기보다는 작가의 언어, 의지 쪽에 더 가깝다는 느낌은 들었습니다.

 

이영순 : “네가 문밖에 있다 해도 내 마음속에서 너를 내보내지 않았으므로 너는 나간 동시에 나가지 않은 것이라는 뜻”이라는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저는 화자가 윤호에 대해 오래도록 애도의 시간을 가져야 했다는 것에 공감이 되었고, 그러면서 앞의 문장이 윤호에 대한 기억을 계속 가지고 가겠다는 마음으로 읽었는데요. 그러면서 눈동자 사진이 화자가 기억하고자 하는 것과 무관치 않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 눈동자는 어떤 눈동자이며 누구의 눈동자인지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눈동자가 단선적이지 않아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돼요.

 

정홍수 :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이영순 : 어느 누군가에게도 드러낼 수 없는 죄책감을 담고 있는 나의 눈동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편으로 “평생을 그 눈깔 뒤에 숨어 살아왔으니 뭘 알겠는가”라는 부분이 말하는 것처럼, “이놈의 세상은 잘못한 게 없는 사람들만 잘못했다”고 하는데, 역설적으로 잘못했는데도 잘못했다 말하지 않는 사람들, 즉 그 사건들에 책임이 있는 권력자들의 눈동자일수도 있겠다고 생각했고요. 또 윤호처럼 희생된 누군가의 눈동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스쳐가더라고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다른 분들의 의견이 궁금해졌어요.

 

장수라 : 윤호가 준 눈동자 사진을 보면서 아내가 살기가 있다고 말하잖아요. 어쩌면 그게 윤호의 눈동자, 윤호를 구해주지 못했다는 자의식으로 윤호의 원망을 의식한 눈동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두번째는 세상 속에서 찌들어버린 자기를 아내가 바라보는 눈동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세번째는 자신을 바라보는 거울 같은 의미의 눈동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또 딸아이의 상견례자리에 왜 참석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봤는데 남편이 술을 마셨을 때 아내가 독설을 날리는 장면과 윤호가 죽고 며칠이 지난 뒤 찾은 장소에서 아내가 기분 나쁘게 웃으며 말하잖아요. “죄지은 놈은 꼭 죄지은 곳에 다시 온다잖아요“라는 말. 전 이 장면에서 함께 몇십 년을 살아왔지만 서로의 마음을 보살피지 않는 남 같은 아내와의 관계가 섬뜩하기도 했습니다. 메울 수 없는 거리감을 느꼈어요. 상견례 때 식당 앞에서 결국 들어가지 않는 화자의 행동을 이 거리감에 연결시켜 생각해보기도 했습니다.

 

김지윤 : 저 역시 제목에서부터 ’눈동자‘ 라고 언급되었기 때문에, 눈동자가 뜻하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 고민했었는데요. 누군가를 지켜보는 눈이면서 동시에 나를 되돌아보는 눈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김보배 : 눈동자는 ‘나’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가해자가 되었을 때 마주해야 할 피해자의 눈동자, 또 상견례 자리에서도 다른 사람에게 비춰질 것을 걱정하고 그들의 눈동자를 피하려는 나의 눈동자는 아니었을까 생각을 했어요.

 

정홍수 : 예. 그런 차원들과 함께 “눈동자 뒤로 숨을 수도 있다”는 게 이 소설이 한 발 더 나아간 지점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생각할수록 무서운 말 같습니다.

 

이영순 : 그 이야기를 하시니 더 또렷해지는데요. 김씨가 사고를 당하고 윤호한테 사진을 받아보면서도 그렇고 화자가 윤호의 죽음 이후에 윤혜한테 건네받은 사진을 보면서도 마찬가지로 어떤 사진들은 사진 속의 모습이 자기 자신이 아닌 것 같다고 하잖아요. 자기 모습 같지 않다고 느끼는 사진들은 윤호가 카메라 렌즈를 통해 눈동자 뒤에 숨어 있는 모습을 포착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장수라 : 우리가 사진을 찍힐 때 카메라를 의식해서 표정과 눈빛을 만들며 자신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길 바라잖아요. 그런데 윤호가 찍은 사진은 그의 모습은 의식하지 않은 순간에 포착된 거죠. 표정을 꾸미지 않은 순간의 포착, 어쩜 이게 진짜 생생한 모습일 수 있는 거죠. 롤랑 바르트의 『밝은 방』에서도 가장 자연스럽게 나온 엄마의 사진 한 장을 가지고 이야기를 끌고 나가잖아요. 그것처럼 윤호의 눈동자 사진도 인간의 진정한 모습이 담겨 있는 사진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돼요.

 

정홍수 : 대만 에드워드 양 감독의 영화 「하나 그리고 둘」에서 사람들의 뒷모습만 찍는 소년의 이야기가 떠오르네요. 우리가 자신의 뒷모습을 볼 기회가 거의 없는 것처럼, 눈동자만 찍거나 자신의 눈동자를 제대로 응시하는 경우도 거의 없죠. 기실 문학이 인간을 포착하는 각도나 자세가 이런 것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소설 마지막에 “나는 너를 보내지 않을 것이다”를 세 번 반복하는데, 이건 거의 소설 밖으로 보내는 작가의 전언 같습니다. 죽은 자를 보내는 애도의 의례는 일상으로의 복귀를 위한 것이기도 한데, 이 반복은 손쉬운 애도의 거부, 복귀의 거부라는 점에서 이 또한 문학만이 붙잡을 수 있는 질문의 방식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이제 임국영 씨의 「볼셰비키가 왔다」 로 넘어가볼까요. 상당히 재밌죠?

 

에드워드 양 감독, 영화 <하나 그리고 둘>, 2000년

 

장수라 : 신인상 작품이라서 기대를 가지고 읽게 되더라고요. 뭐랄까 약간 서툴지만 신선하다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작품 속 오빠의 죽음을 아이러니하게 표현한 게 좋았고요. 슬픔을 표면에 드러내지 않았지만 소설 끝으로 갈수록 내면 깊숙한 곳에서부터 슬픔이 서서히 묻어나는 작품이었어요. 마지막에 여동생이 토사물을 보면서 “어떤 것은 흔적도 없이 녹았고 어떤 것은 아까 먹은 그대로”라고 하는데, 오빠가 블로그에 써놓은 글도 그렇고 오빠와 부모의 좋지 않은 관계, 엄마에 대한 원망으로 인해 과거의 아픔들 가운데 녹은 것도 있고, 어떤 것은 아픔 그 자체로 남아 있는데, 이런 어정쩡한 상태가 더 진실에 가깝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영순 : 오빠인 혁태가 고등학교 졸업하고서 집을 나가 밴드를 결성했는데 빠리꼬뮌, 마오쩌둥, 볼셰비키처럼 저항과 혁명을 상징하는 이름을 사용하잖아요. 밴드의 이름처럼 저항을 추구하는 삶을 살고자 했으면서도 결국에는 술을 마시고 어처구니없이 질식사하는 것의 대비가 인상적이었어요. 혁태의 외모 자체도 화자가 기억하기에는 이상하리만큼 인상이 좋지 않아서 저항의 상징처럼 느껴지는데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장례식장에서 라커들이 떠들썩하게 혁태를 애도하는 과정, 이런 부분들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져서 좋았어요.

 

김지윤 : 죽은 오빠의 장례식장에서 보이는 화자의 덤덤한 태도는 사실 가족들의 안 좋은 관계 때문이기도 한데, 딱히 그것과는 무관한 듯한 화자의 태도나 말투가 개성적으로 느껴졌어요. ‘죽음’이라는 무거운 상황이 소설 전반에 깔려 있음에도 소설 자체가 유쾌하고 명랑한 분위기를 만든다고 생각했는데 인물들 때문인 것 같아요. 오빠의 친구들인, 외적으로든 내적으로든 개성적인 ‘록커’들이 등장하는 장면이 특히 재미있었고요. 그들이 하는 대화나 말투 같은 것들도 굉장히 유쾌하고 발랄한 느낌이었어요. 각각의 개성 있는 인물들이 죽음이라는 무거운 소재를 가볍게 만드는데, 재치 있는 작가의 언어 감각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정홍수 : 예, 뭔가 핀트가 조금씩 어긋난 듯한 말과 상황에서 발생하는 유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죽은 오빠 혁태와 11살 차이 나는 여동생의 시선과 말투라는 점을 감안해도 “그들의 구성은 남자 셋 여자 하나였다” “나는 엄마에게 그들을 고발했고 엄마는 그들을 내쫓았다” 같은 표현은 상가에 찾아온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언어로는 약간 이상하죠. 그런 게 묘한 재미를 줍니다. 조문 온 록커들의 유치한 행동도 그게 그들로서는 정작 진지한 것이기에 웃음을 유발하고요.

 

김보배 : 소설의 구성은 전형적인 반면, 문체나 인물들이 튀어 보입니다. 그리고 재미있었던 점은 토는 뱉어내야 되는 건데 뱉어내지 못해서 의도치 않게 다시 삼키다가 죽게 되었다는 진술인데요. 그게 우리의 모습 같았어요. 뭔가를 하려고 하지만 뱉어낸 것에 눌려 질식할 수밖에 없는 상황들 말이에요. ‘돈키혁태‘ 같은 작명을 보면서 작가의 센스를 느끼기도 했고요.

 

정홍수 : 이 사람들이 무슨 거창한 저항을 하려 했던 것은 아니죠. 혁명적인 밴드의 이름은 그런 상황의 아이러니를 잘 드러내고요. 포효주법인 그로울링과 연결되기도 하지만 구토가 이들에게는 살아 있고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증표라는 점도 그렇죠. 구토는 이 소설의 열쇠어 같은 건데 지금 이들 세대가 봉착한 곤경을 아주 적실하게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사르트르의 구토와는 달리 무슨 철학적이거나 실존적인 배경이 없다는 점이 오히려 이들 세대의 실존적인 아픔을 잘 표현해주는 거죠.

 

김보배 : 혁태가 하는 락의 경우에는 소수 마니아층이 주로 즐기는 음악이거든요. 주류가 아닌 변두리에 모인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어 애잔했어요.

 

정홍수 : 그렇죠, 혁태의 경우 기타도 잘 못 치잖아요. 세련과도 거리가 멀고요. 바보들의 행진 같죠. 저항을 하긴 하는데 그 저항의 대상도 명확하지 않고, 저항의 방법도 잘 보이지 않는 거죠. 그렇게 해서 저항의 희극적 제스처만 남은 상태가 사실은 더 애잔하고 아픈 거 같습니다. ‘볼셰비키’라는 말이 예전 세대들에게 주었던 함의를 생각해보면 ‘볼셰비키가 온다’는 제목부터가 이 소설의 아이러니한 전언을 잘 담아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장수라 : 어떻게 보면 20대가 영웅적인 것이라든지 스타 의식을 꿈꾸기도 하고 무모하지만 도전도 해보는 나이잖아요.

 

정홍수 : 그런데 이 사람들에게는 그런 생각도 없는 것 같아요. 그냥 놀고 고함지르고 토하는 거죠. 살아 있다는 외침 같은 거.

 

김보배 : 허세라고 생각했어요. 허세부리기 좋은 이름이잖아요. 볼셰비키, 혁명, 뭐 이런 느낌들은. 뭔가 있어 보이는. 그렇지만 밉지 않은 허세.

 

장수라 : 어른이 볼 때 허세지 그 또래 친구들은 그저 하고 싶은 것에 도전하는 것 아닐까요. 자신의 감정이나 욕망을 솔직하게 표현하면서 말입니다. 무모해 보여도 꿈으로 이어질 수 있는 거죠. 20대의 가슴에는 20대의 신이 살고 있다는 말이 생각나네요.

 

이영순 : 볼셰비키도 중간에는 성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실패한 혁명이고 파리코뮌, 마오쩌둥도 마찬가지인데, 이 록커들이 추구하는 것도 실패와 맞물려서 보게 되더라고요. 혁태를 비롯한 록커들이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정신으로 밴드를 하는 것은 아니고, 또 독자들도 그들에게 성공을 기대하지는 않으리라고 봐요.

 

정홍수 : 차이점은 그거 같아요. 볼셰비키로 상징되는 혁명의 지평이라는 것은 비장하고 무겁기 그지없는 것이었죠. 근데 이들 밴드의 혁명에는 그런 비장미가 없죠. 안쓰러운 허세 같기도 한데, 바로 그 점이 도리어 진정성을 이루면서 세상이 마련해놓은 구획이나 좌표를 거슬러버리는 거죠. 그렇다면 여기에 혁명이 없다고 섣불리 단정할 수 있는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으로 최은영 씨의 <601, 602>입니다. 제목은 아파트 호수죠. 바로 이웃해 살았던 두 소녀의 이야기죠.

 

김지윤 : 제가 이 소설을 함께 읽어보고 싶다고 얘기 한 이유는, 최은영 작가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서 소설적인 기법 자체는 뛰어나다는 생각이 들진 않지만 작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여러 가지 문제를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작품이라 생각했어요. 현실을 그대로 재현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거든요. 계속해서 화두가 되고 있는 ’페미니즘‘적인 부분에서도 그렇고, 가부장제를 바라보는 시각도 그렇고요.

 

정홍수 : 효진, 기준이네는 경상도에서 이사를 온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딱히 특정 지역의 문제라기보다 한국 사회에 가부장적 관념, 남아선호 같은 게 완강하게 존재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소설에 그려진 모습은 너무 충격적이었습니다. 오빠가 다섯 살 차이 나는 여동생을 아무렇지 않게 폭행을 하고, 그걸 가족들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은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땠나요?

 

김보배 : 네. 정말 충격적이었어요. 보면서 너무 화가 났고. 특히, 아버지와 어머니의 태도에서 너무 화가 났어요. 보아하니 어머니도 폭력에 노출되어온 여성이고 피해자인데, 아무렇지 않게 딸이 당하는 폭력을 방관하는 게. 효진이의 입장이 너무 서글프더라고요.

 

정홍수 : 그런데 이 효진이라는 아이는 학교 가서는 공부도 잘하고 그러잖아요.

 

장수라 : 그러니까 이 효진이는 얼마나 내적으로 분열이 있었겠어요. 소설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오빠가 여동생을 때렸다는 것은 집에서 아빠가 엄마를 무시하는 것을 보고 여자한테는 이렇게 해도 되는구나 하는 것을 배워서 그런 게 아닐까요. 우리 세대만 해도 이러한 모습들을 쉽게 볼 수 있었고, 여자 또한 이러한 상황에 길들여진 거죠. 이 소설을 읽으면서 슬픔, 분노까지 느껴지더라고요. 제 경우도 폭력까지는 아니지만 유사한 경험이나 남아선호 사상으로 인한 차별을 겪었거든요.

 

이영순 : 저는 어릴 때 오빠를 둔 친구들에게서 오빠한테 맞은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여러 차례 들었던 것 같아요. 물론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보통 남매의 나이 차가 몇 살 나지 않아 경쟁심을 느끼는 경우에나 한때 그러고 마는 것이고, 그렇게 동생을 때릴 경우에는 부모가 혼내는 게 정상적이잖아요. 이 소설에서는 나이 차도 많이 나고, 그 폭력이 장기적, 지속적이라는 데 더 문제가 큰 것 같아요. 더 놀라운 것은 오빠 기준이가 효진이한테 가하는 폭력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집안 분위기와 기준이가 엄마한테 폭언을 하는 장면 역시 당연하게 여겨진다는 거였어요. 마치 기준이가 아버지의 대리자 역할을 하는 것처럼요. 또 기준이와 효진이 모두 집 밖에서 보이는 모습은 너무 다르잖아요. 기준이는 집에서와는 정반대로 인사성 바르고 공부도 잘하는 모범생의 모습이고, 효진이도 밖에서는 빛이 나는 아이이고요.

 

정홍순 : 그런데 이 소설의 문제의식이 간단한 차원에서 구축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 기준이의 폭력을 충격 속에서 지켜보는 ‘나‘, 그러니까 소설 화자의 가족의 경우에도 이 문제가 다른 형태로 잠복되어 있는 거죠.

 

김보배 : 아들을 낳으라는 압력을 받고 있어요.

 

정홍수 : 그렇죠. 엄마는 아들을 못 낳기 때문에 계속해서 시댁으로부터 압력을 받고 있고, 동서 역시 아기를 가졌는데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여러 번 낙태를 하죠. 이게 젠더사이드, 특정 성별에 대한 집단적 학살이란 사실을 저 자신 부끄럽게도 최근에 알았습니다. 태아감별을 하고 딸이면 지우라고 요구하는 것이 한동안 한국 사회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일어났던 거죠. 지금도 얼마간 그럴 테고요. 이 또한 효진이네의 가부장적 폭력 못지않게 심각한 폭력이자 죄악인 거죠.

 

김보배 : 더욱 끔찍한 것은 주영이가 효진이에게 편지를 쓰는 마지막 부분이었는데요. 주영이는 어머니가 아들을 임신하자 효진이에게 부칠 편지에, 우리는 누구보다 더 행복해질 거야, 라고 말하잖아요. 그게 참 섬뜩했어요.

 

정홍수 : 그게 소설의 화자도 폭력적 세계의 외부에 있지 않았음을 통렬하게 드러내는 거죠.

 

김지윤 : 제가 이 소설에서 가장 끔찍하게 느꼈던 게 바로 그 부분이었어요. 화자는 자신의 친한 친구를 보면서 분명히 이상하고 잘못된 상황임을 감지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자기 상황이 더 낫다고 스스로 위안을 하고 있었고, 마지막엔 결국 자신도 그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걸 보는 독자인 나 역시도 주영과 같은 위치에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장수라 : 효진이는 오빠에게 실질적으로 맞았지만 주영이의 경우에는 아들을 원하는 주변 시선으로부터 맞은 거라 볼 수 있겠죠. 그런데 “이제 우리는 누구보다 행복해질 거야”라는 말이 아들을 낳으면 부모의 걱정이 하나 해결되는 것이잖아요. 그로 인해 내가 행복해지는 것일 수도 있겠고, 또 주체로서 행복해질 거라는 막연한 기대라고 볼 수도 있을까요?

 

정홍수 : 물론 그 당시에는 별 생각 없이 그랬겠지만, 지금 소설의 시선에서 보자면 화자가 그 시절을 돌아보며 치명적인 부끄러움을 고백하고 있는 거겠죠.

 

이영순 : 그 마지막 편지를 보면, 어린 주영에게서 남동생이 생기게 되어 가부장제적 구조 안에 편승했다는 그런 안도의 시선이 느껴졌어요. 주영이는 자신이 효진과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해왔고 기준의 폭력에 저항하기도 했지만, 마음 한편에는 집에 남동생이 없음으로 해서 불안함을 가지고 있었던 거죠.

 

김보배 : 소설에서는 “그(기준)의 공격성에는 일종의 징그러움이 있었다”라고 표현했는데 저도 딱 그렇게 느낀 것 같아요. 읽는 내내 그런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공격성이 사회 전반적으로 깔려 있잖아요. 무서움을 넘어서 징그러운 것 같아요.

 

정홍수 : 그 대목을 다시 한번 읽어볼까요. “시간이 지나면서 효진의 집에는 점차 걸음하지 않게 되었다. 그가 나에게 따로 해코지를 한 적은 없었지만 내가 있는데도 효진이를 위협하고, 자신의 엄마를 함부로 대하는 태도에서 나를 향한 부정적 감정이 느껴져서였다.” 여기서 ‘부정적 감정’이 바로 여성혐오와 연결되는 것 아닐까요.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그러니까 지금의 세상인데, 이 징그러움의 세계로부터 얼마만큼 빠져나왔을지,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장수라 : 거의 변한 게 없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기준이가 효진이를 때리고 엄마한테도 충고하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그가 마치 작은 효진이 아빠처럼 보였다.” “엄마조차도 아들의 기분을 살피며, 머쓱한 웃음을 짓곤 했는데 그 이상한 웃음이 아들에 대한 노골적인 굴종의 포즈라는 것을 나는 나중에야 이해하게 된다.” 이 웃음이 가부장적 폭력을 스스로 묵인하는 웃음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정홍수 : 그러니까 이런 것들이 결국 데이트 폭력이나 여성혐오로 이어진다고 보면 되는 걸까요.

 

김보배 : 네. 기준이 같은 경우에는 특히나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어머니로부터 억압된 것들이 여성혐오로 가는 경우도 있지만, 이렇게 아버지로부터 학습된 것들이 여성혐오로 나타날 수 있다고 봐요.

 

김지윤 : 저 역시도 김보배 씨의 말에 동의하는 바이고요. 단순히 부모로부터 학습되고, 가정에서 교육받은 것들이 알게 모르게 내재화되어 여성혐오로 자라난다고 일반화하는 것은 조심스럽기도 하지만요. 표출의 방식에서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까요. 소설에서 ’기준‘은 좀더 극단적인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홍수 : 최근에 한겨례문학상을 받은 강화길 씨의 장편 『다른 사람』은 ‘데이트폭력‘ 문제를 정면에서 다룬 작품이죠. 강화길 씨는 연작소설 형식으로 이 문제를 계속 다루고 있기도 하고요. 말고도 페미니즘의 문제의식은 이제 한국 문학이 피해갈 수 없는 과제가 된 것 같습니다.

 

강화길 장편소설 『다른 사람』, 한겨레출판사, 2017년

 

김보배 : 사실 소재에서 나올 수 있는 방향은 이미 많이 나온 것 같아요. 데이트 폭력도 그렇고, 직장 내 남녀차별과 유리천장 등도 이미 많이 다루어져 왔기 때문에 소재 자체로는 특별한 것은 없다고 봐요. 소재에만 기대어 가려고 한다면 이제 지루한 게 되어버리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동성애가 소재로만 남으면 이제는 지루한 얘기가 돼버리듯이 말이에요.

 

정홍수 : 소재주의는 당연히 넘어서야 되는 거겠죠. 물론 절실하게 싸우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한 번이라도 더 언급하고 비판해야 되는 거겠지만, 문학은 거기에 그쳐서는 안 되겠죠.

 

김보배 : 사실 여성이라는 틀에 맞추기보다는 한 사람으로 접근하면 이야기가 더 풍부해질 것 같아요.

 

이영순 : 한 사람으로 접근한다면, 직장 안에서 남자와 여자가 겪어야 하는 억압과 배제가 겹쳐지는 많은 지점들이 있는 것 같아요. 사실 직장을 퇴직하지 않는다면 직장에서 규범화된 휴가라든지 휴직 이런 것들을 쓴다는 게 쉽지 않을 수 있잖아요. 내 자리가 영영 없어지면 어쩌나, 복귀한 후에 내 입지가 좁아지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을 느낄 테니까요. 저희 직장은 연수휴직이라는 제도가 작년에 생겼는데, 올해 초에 제가 연수휴직을 신청하면서도 내면의 불안함까지는 어쩔 수 없더라고요. 몇 년 동안 준비해왔던 거고, 저에게 더 소중한 것을 위해 이후의 모든 것들을 내려놓겠다고 단단히 결심했는데도요. 제가 2년여 동안 휴직한다는 것에 직장의 많은 직원들이 충격을 받았죠. 그 실행과 용기를 부러워하기도 하면서요. 그리고 규정에도 있고 무급휴직인데도 앞으로는 휴직하는 것이 더 어려워질 것 같다는 이야기를 얼마 전에 전해 들어서 안타까웠어요. 이런 건 남자나 여자의 문제가 아니고, 모든 직장인이 처해 있는 어려움이잖아요. 보배씨 이야기처럼 한 사람으로 접근하면 많은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 것 같아요.

 

장수라 : 단순히 계몽적이거나 교훈적으로 되어버리면 식상할 수밖에 없는 거니까, 문학적으로 입체적으로 다가서는 방법을 작가들이 연구해야 할 것 같아요.

 

이영순 : 저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 여성에 대한 편견과 배제를 어느 지점까지 극복하고 올라왔다고 생각하는데도 유리천장의 경우에는 앞으로도 극복하기 힘들 거라는 생각을 해요. 그리고 그 편견과 배제를 극복한다는 것이 남자 직원을 뛰어넘는 희생과 실력을 보여줘야 한다는 고통스런 측면도 있고, 모든 여자 직원에까지 보편화되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아요. 물론 조금씩 나아지고는 있지만요. 어렸을 때부터 가부장적인 문화에 학습된 사람과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사람이 있을 텐데, 어쨌든 그런 결들을 조금 섬세하게 접근해야 하지 않나 싶어요. 문학 작품이라는 게 재현만으로는 의미가 없기 때문에 여러 복합적인 지점들을 질문할 수 있게 소설이 쓰여져야 할 것 같아요. 이전에는 포착하지 못했던 다른 결들을 작품으로 보여주다 보면 조금씩 다른 울림을 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김지윤 : 저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데이트 폭력, 여성 문제, 페미니즘과 관련된 소설들이 더 많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지금도 많은 작가들이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와 관련된 작품들을 쓰고 계시지만요. 독자들은 ’또 페미니즘 소설이야?‘라는 생각을 하실 수 있겠죠. 그렇지만 문학 작품에서 나올 수 있는 페미니즘적인 서사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고요. 젠더적인 측면에서 해결되지 못한 부분들이 많고 또 언제 해결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다만, 앞에서 말씀하셨듯이 단순히 소재주의로 빠지지 않으려면 페미니즘뿐 아니라 여러 다양한 이야기들을 합치시켜서 확장시킬 수 있는 부분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저희가 처음에 얘기했던 작품 ’눈동자 노동자‘도 한 가지 이야기가 아니라 다양한 이야기를 가지고 왔기 때문에 서사가 풍부하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정홍수 : 구조의 문제와 인간의 문제를 같이 보는 게 문학이 할 일이겠죠. 여성이라고 해서 여성혐오에서 외부에 있는 것은 아닐 겁니다. 지금 최은영 씨의 작품에서 보는 것처럼 말입니다. 가해/피해의 구도도 마찬가지고요. 강화길 씨의 『다른 사람』도 문제를 단순한 구조의 차원 이상으로 접근해서 높은 점수를 받은 것 같고요.

 

이영순 : 직장 내에서도 남성만 여성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들 간에, 혹은 여성이 남성에게 그렇게 하는 경우도 꽤 있는 것 같아요. 우리가 경험하는 멸시, 혐오, 질투라는 감정이 직장 안에서는 더욱 복잡하게 작용하는 것 같아요. 가해와 피해가 얽히고, 차별이라든지 배제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 같고요. 그리고 이건 약간 다른 관점의 얘기인데, 아직까지 젊은 세대의 경우에도 육아휴직은 여자의 몫이라고 생각하잖아요. 저는 남자들도 충분히 낼 수 있고 낼만 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아직까지는 젊은 세대들도 여자들에게 국한해서 생각하는 것 같아요. 물론 민간 기업의 경우 여자들이 육아휴직을 내는 것 자체가 쉽지 않기 때문이기도 할 거예요. 이런 것들도 문학을 통해 얘기될 수 있는 부분들이 아닌가 생각해요.

 

정홍수 : 큰 변화의 흐름은 이미 시작되었고, 더딘 듯 보이지만 계속 나아가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죠. 수고 많으셨습니다.

 

 

   《문장웹진 2017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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