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과 문학, 오만과 편견을 넘어 - 남형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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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in문학]

 

 

<새로운 시대, 문학의 키워드>
 

‘여성, 노동’같은 전통적인 주제에서 시작해 ‘문체, 주체’와 같은 비평 키워드나 ‘번역, 상호텍스트성’같은 문학적 키워드, ‘환상, 무의식’같은 인접학문 그리고 ‘빅데이터, 가상현실’같은 미래용어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문학의 키워드는 무엇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비평in문학]의 새로운 비평 기획입니다.

 

 

법과 문학, 오만과 편견을 넘어

 

 

남형두(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얼마 전 마광수 교수가 그의 시처럼 세상을 떠났다. 신문마다 그를 재조명해야 한다고 난리다. 덧씌워졌던 음란마귀를 걷어내고 윤동주를 발굴한 청년 마광수를 복원해야 한다거나 박두진이 천거한 천재 교수였다는 식의 온갖 찬사가 넘쳐나지만 퀭한 표정의 영정 사진 앞에선 그저 수북이 쌓인 국화처럼 덧없게 느껴진다.

 

 

억압

 

    그와 일면식도 없던 나의 이름이 그의 이름과 함께 논의된 적이 있다. 작년 이맘때 즈음 한 일간지와 인터뷰에서 신경숙, 조영남, 천경자, 그리고 박유하(『제국의 위안부』)에 이르기까지 문학, 예술, 학술 영역의 논쟁이 툭하면 검찰이나 법원으로 향하는 현실을 비판하면서 해묵은 마광수의 『즐거운 사라』를 꺼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그 부분이 올해 초에 나온 마 교수의 신작, 『시선』과 관련하여 언론에 보도되었다.

 

    연세대 남형두 교수는 “마광수는 윤동주 시인 전문가였다. 재판을 받고 수감되는 아픔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과연 그를 단죄한 결과, 법원과 검찰이 원한 대로 우리 사회에서 음란물이 없어졌는가.”라는 견해를 최근 한 일간지를 통해 밝힌 바 있다.1)

  1)  김영태, “마광수 시선: 솔깃하고 솔직한, 아찔하고 짜릿한!”, CBS노컷뉴스 2017. 1. 8.자 기사,
http://www.nocutnews.co.kr/news/4714013#csidx9240576e98af3dfa77a8d66820c0a26 (2017. 9. 15. 방문).

 

    결과적으로 마 교수 죽음에 대한 헌사가 되어버린 인터뷰 전후를 조금 더 옮겨보자.

 

    “문학 속으로 법이 들어온 것이다. 문학적으로 좀 더 걸러질 필요가 있는 것을 과도하게 사법이 개입했다. (중략) 온 국민을 초등학생 취급하지 말라는 얘기다. 필요한 경우 연령제한을 하면 된다. 어떤 표현이 들어가야 나의 문학이 된다고 한다면 그걸 뺄 경우 이미 예술가가 아니다. (중략) 조영남이 예술을 위해 기꺼이 감옥에 가도 좋다는 자세를 취했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현대미술과 예술가를 주제로 좋은 논쟁을 벌이며 우리 문화계를 업그레이드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때로 예술가는 시대와 불화했다.”2)

  2)  배영대, “[배영대의 지성과 산책] 남형두 연세대 교수 인터뷰, 천경자·이우환·조영남 사건… ‘문화예술의 사법화’”, 중앙일보 2016. 11. 9.자 기사, http://news.joins.com/article/20842689 (2017. 9. 15. 방문).

 

 

조롱(嘲弄)과 자조(自嘲)

 

    나의 인터뷰가 마광수 교수에까지 닿은 것은 “문화 예술의 사법화”를 비판하는 과정에서다. 돌이켜보면 우리 사회에서 법의 잣대로 고꾸라진 문학, 예술이 어디 한둘인가. 특정 이데올로기에 위반하거나 음란 표현이라는 이유로 발생한 각종 필화 사건은 문학을 법의 피해자로 만들었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가 되어 버린 법학과 문학의 관계에서 법, 법률가, 법학은 끊임없이 문학과 예술의 조롱거리가 되어왔다. 문학의 법에 대한 조롱은 판결이란 이름으로 행해진 억압에 대한 보복적 성격을 띠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 식민 지배와 독재 정권을 거치면서 법은 권리보다는 의무 중심의 지배자 언어로 인식돼 법(학), 법률가는 우리 사회에서 더욱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자유, 평등, 재산권과 같은 인권 개념을 스스로 투쟁해 얻어낸 사회에서 법을 보는 관점과 외세로부터 급하게 이식받아 그 번역물을 법전 속에 집어넣은 사회에서 법을 보는 관점은 처음부터 사뭇 다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문학과의 관계에서 법(학)의 이 같은 자리매김은 법(학)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낳았고, 종래 ‘법과 문학’이란 제하로 이루어진 법학자들의 몇몇 저술은 문학의 이름으로 자행된 법(학), 법률가에 대한 조롱에 동조하는 자조의 수준을 넘지 못했다.

 

 

오만과 편견

 

    법학에 대한 문학의 편견은 법학, 법률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확산시키는 데 일조했고, 법학과 법률가의 문학 몰이해는 대표적인 예로 최근 발생한 신경숙, 조영남, 천경자 등 문학과 예술 영역의 법적 분쟁에서 보듯 법학의 무력감 혹은 무용론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다. 인류의 가장 오래된 학문과 예술인 법학과 문학의 서로에 대한 오만과 편견으로 사회적 비용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큰데, 문제는 그런 혼란이 앞으로도 지속되리란 점에 있다.
    일찍이 법과 문학의 소원한 관계의 화해를 시도한 사람이 더러 있었다. 대표적으로 한승헌 변호사다. 등단 시인이기도 한 그는 법률가로서 문학을 소개하고 분석한 여러 권의 저술을 냈으며, 필화 사건을 당한 문인들의 변론을 도맡아 문인들의 변호사라고 할 정도였다. 급기야 본인 또한 필화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해 법과 문학의 갈등을 몸소 겪은 예다.3) 안경환 교수는 법학자로서 문학을 이해하려고 했다. 그만큼 많은 문학 작품에서 법과 법률가의 흔적을 찾아내려 한 사람도 드물다고 할 수 있다. 『즐거운 사라』의 형사재판에서 법원의 요청에 따라 감정인이 되어 음란물에 해당한다는 견해를 제시했던 안 교수는 훗날 재판을 회고하면서 자신도 이 사건의 피해자였다고 소회를 밝힌 적이 있다. 그의 말로는 나름대로 법과 문학 사이의 화해 조정자 역할을 해왔는데, 이 사건으로 법과 문학을 가해자와 피해자로 만들어 결과적으로 둘 사이를 더욱 벌려버렸고 개인적으로는 자신이 가해자, 마 교수가 피해자로 되어버렸다는 것이다.4)
    안 교수의 말대로 음란물이란 판정보다 ‘하수도’란 자극적 비유가 문학계에 더욱 거슬렸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음란물에 해당한다는 감정서를 제출했던 안 교수나 이를 토대로 유죄판결을 선고한 판사가 지금 시점에서 『즐거운 사라』를 읽고도 같은 의견을 제시하거나 판결을 내렸겠는가고 묻는다면 아마도 부정적이지 않을까 싶다. 마 교수가 말한 문학적 의도는 그만두고 표현 수위만 따져도 『즐거운 사라』는 요즘과 같이 온갖 음란물이 넘치는 인터넷 세상에서 음란물 축에도 못 낀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불과 몇 년 사이에 한 작품에 대한 음란성 평가는 달라질 수 있다. 음란성이라는 것은 작품의 속성이 아니라 시대나 지역에 따라 다르고, 동시대 같은 지역에서도 그것이 놓여 있는 장소에 따라 달라지며, 누구를 대상으로 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가변적이다. 이른바 음란물의 가변성 또는 가변적 음란성(variable obscenity) 이론 또는 개념이다. 음란물이라는 이유로 출판사를 구하는 데 애를 먹었던 나보코프(Vladimir Nabokov)의 소설 『롤리타』는 하버드 대학뿐만 아니라 국내 주요 대학에서도 신입생 필독 추천 도서가 되었으며, 그밖에 법정에서 음란물이란 딱지가 붙여진 소설들이 불과 1세기도 지나지 않아 고전의 반열에 오른 예는 많이 있다. 파리 오르세 미술관(Musée d'Orsay)에 있는 꾸르베(Gustave Courbet)의 <세상의 기원>(L'Origine du monde)이란 1866년 작품은 여성의 성기 주위를 확대해 사실적으로 묘사한 그림이다. 이 그림을 보러 오르세에 가는 관객들은 미술관 깊숙한 곳에 전시된 이 작품의 소재를 알기에 예상치 않게 이 작품을 마주칠 염려가 없다. 누군가 이를 음란물로 치부한다면, 아마도 그 관람객이 이상한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광장이나 고속도로 톨게이트 근처 등 일반 공중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개방된 장소에 놓여 있다고 가정한다면 오르세에서와 달리 매우 불편한 것이 될 수 있다. 광장이란 공공장소의 평온을 깨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어떻게 같은 작품이 몇 년 지났다고 해서 외설에서 예술로, 장소를 바꾸었다고 해서 예술이 음란물로 둔갑할 수 있는가. 이에서 보듯 음란성이란 작품이 지닌 고정된 고유의 속성이 아니라 가변적인 것임을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속성으로서 고정적인 것이 아닌, 시대와 공간, 작가의 의도에 따라 가변적일 수밖에 없는 작품에 대해 특정 시점에서 그것의 속성을 묻고 답하는 일이 『즐거운 사라』 재판이었던 것이다. 읽는 이의 나이와 식견, 입수 경로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는 가변적인 작품을 죽은 고기에 등급을 매기듯 했으니 그 과정에서 작가의 의도는 고려 대상이 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검찰이 기소하면 법관은 가부간 결론을 내야 하는 것이 재판 제도이니, 판사나 감정인 모두 우문에 현답을 요구받았다는 점에서 안 교수 말대로 그 자신 또한 피해자였다는 것에 일면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필화 사건치고 결론이 작가에게 불리하게 내려진 경우, 그것이 당대의 도덕 기준에 반한 것이든 이데올로기에 어긋난 것이든 간에, 후대에 잘된 재판이었다고 칭송받는 예를 찾기란 매우 어렵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특정 이념이나 종교, 도덕을 법을 집행하는 국가가 강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학이나 예술의 완성을 위해 법이 정해 놓은 선을 넘나드는 예는 예나 지금이나 예술가들의 특권처럼 인식되어 왔다. 학문과 예술의 자유는 끊임없이 외부의 간섭, 당대의 보편적 가치관 또는 윤리, 나아가 법규범과 갈등을 빚으며 발전하고 성숙해 왔다. 학문의 자유를 위해 종교 법정이나 세속 법정에 세워진 수많은 학자들이 있었기에 인류의 학문(철학, 과학 등)과 문화가 여기까지 발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의 경우에도 학문이나 문학 분야에서 적잖은 필화 사건이 있었다.5) 예술 쪽으로 넘어오면 사회의 금기에 도전한 수많은 사례가 있다. 윤리는 벽이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법률이 정해 놓은 선을 넘나드는 예술의 예를 열거하자면 지면이 부족할 정도다. 음란성이라는 주제만으로 보더라도, 20세기 최고의 소설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는 밀러(Henry Miller)의 소설 『북회귀선』(Tropic of Cancer)은 출간 당시 플로리다(Florida) 주법에 의해 유죄판결(state obscenity)이 선고되었는데, 무려 30년이 지난 후에 이 판결은 연방대법원에서 파기되었다.6) 소설 『율리시즈』(Ulysses)도 과거에 음란물 논란에 휘말린 적이 있다.7) 『채털리 부인의 사랑』(Lady Chatterley's Lover) 역시 출간 당시에는 음란물이라는 이유로 법적 절차가 진행되기도 하였다.8) 그밖에 음란성이 문제가 됐으나 지금은 그런 문제 제기 자체가 문제가 되는 작품이 많다. 바이런(George Gordon Byron)의 "Southey and Shelley", 윌슨(Edmund Wilson)의 "Memories of Hecate County", 콜드웰(Erskine Caldwell)의 "God's Little Acre", 스미스(Lillian Smith)의 "Strange Fruit", 드라이저(Theodore Dreiser)의 "An American Tragedy" 등이 그렇다.9)
    문학이나 예술 영역에서 권력에 대한 조롱과 풍자를 탄압한 것은 오래전 일만이 아니다. 2014년 광주비엔날레 특별전 “광주정신展”에서 홍성담 화백의 대형 걸개그림 <세월오월>은 끝내 전시되지 못했다. 세월호와 5·18을 연계해 그린 이 작품에서 대통령을 허수아비로 표현한 것을 트집 잡아, 당시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이 주최 측에 연락해 전시를 막은 것으로 알려졌다. 홍 화백은 대통령의 얼굴을 고치라고 해서 큐레이터와 상의해 얼굴을 하얗게 지워버렸다가 다시 닭대가리를 그려 넣었으나 결국 전시하지 못했다고 한다.10) 금년 1월 국회 의원회관 로비에서 열린 “곧바이전(곧, BYE 展)”에 전시된 이구영 작가의 <더러운 잠>은 프랑스 유명화가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의 <올랭피아>(Olympia)를 패러디한 작품으로 박근혜 당시 대통령의 얼굴을 그림 속 주인공의 나체와 합성한 것이었다. 이 그림은 반여성적이라거나 대통령에 대한 도를 넘는 모욕이라는 공격을 받았는데 그 대상은 작가보다는 전시회를 주최한 야당 의원에게 향해져 결국 이 국회의원은 소속 당 윤리심판원에서 징계를 당했고 국회 윤리위원회에도 징계 회부되었다.11) 풍자와 조롱의 형식으로 권력을 비판하는 예술 표현에 대해 정치권과 언론은 과거와 크게 다름없이 경직돼 있는 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이 아닌가 싶다.
    금기를 처벌하는 수단으로는 특정 이데올로기를 법의 세계로 끌어들인 국가보안법만 있는 것이 아니다. 대통령을 쥐로 희화화한 그림을 공용 담벼락에 그렸다는 이유로 공용물 손괴죄로 처벌한 사례가 있는가 하면(이른바 “G20 정상회의 포스터 쥐 그림 사건”),12) 유행가 가사를 노동요로 개사한 곡을 만들어 노동자들에게 배포한 목사에 대해 달리 처벌할 죄목을 찾지 못해 저작권법위반죄로 처벌한 사례도 있다(이른바 “노가바 사건”).13) 재물손괴죄나 저작권법위반죄가 정치적 목적으로 표현의 자유를 옥죄는 데 쓰일 수 있다고 생각한 수사기관의 상상력이 놀라울 뿐이다. 법원은 질문에 대한 답만 내놓을 수밖에 없는 소극적 기관이라고 하지만, “노가바” 사건에서 대법원은 최종적으로 유죄 판결을 선고했을지라도 항소심 단계에서 한 때나마 무죄가 선고되기도 했다는 점에서 법원의 입장을 두둔하기는 조금 궁색하게 되었다. 참여정부 때 도라산역에 설치한 벽화를 이명박 정부 들어서 여론조사를 거쳤다지만 불과 3개월 만에 철거하여 소각해버린 그야말로 예술에 대한 테러가 발생한 적이 있다. 자신의 작품이 사라진 것을 뒤늦게 안 작가는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였고 대법원까지 가서 최종적으로 승소하였다(이른바 “도라산역 벽화 사건”).14) 비록 손해배상을 받긴 했지만 작품은 이미 사라져버려 위자료 몇 푼이 판결에서 말한 정신적 피해를 위자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십자군 전쟁을 치르는 등 수 세기에 걸쳐 앙숙 관계였던 가톨릭과 이슬람의 문화유산이 공존하는 스페인 여러 도시의 성당을 생각하면, 정권 교체에 불과한 두 정치세력이 그렇게도 다를까 하는 생각에 씁쓸해진다.
    법은 완전하지 않다. 법이 완전한 것이라면 개정이란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같은 법이 끊임없이 개정되고 있고, 앞으로도 그 작업이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은 그 자체로 법이 미완의 것임을 반증한다. 법은 당대의 윤리에 관한 최소한의 합의이자 정치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이념의 반영체다. 이와 같이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는 상대적인 법과 정치로 문학이나 예술을 재단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위헌법률로 판정된다면 무효가 된 법률로 행해진 재판에 대해 재심 등으로 번복하고 구제할 일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도덕에 관한 시대적 잣대가 달라지고 정치(정권)가 교체됨으로 인해 지배 이데올로기가 달라진 것으로 바로 재심 사유가 된다고 할 수 없다. 그 점에서 불완전한 법에 따라 단죄된 피고인들은 인간의 법정이 아닌 역사와 문학의 법정 심판을 기대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문학과 법의 갈등과 그로 인해 문학이 받은 피해를 후에 와서 법의 불완전성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유야 어찌 됐건 비겁하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법이 갖는 한계에서 오는 것이라면, 문학과 법학에서 우리보다 앞선 나라들도 겪었던 것으로서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비겁하다고만 할 수는 없다. 두 영역, 즉 문학이라는 예술 영역과 규범을 다루는 법학 영역이 갖는 두 가지 시차(時差, 視差)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3)  마광수 교수의 『즐거운 사라』 형사재판에서 마 교수의 변호인이기도 했던 한승헌 변호사는 최근 42년만에 열린 재심 형사재판에서 무죄 선고를 받아 화제가 되었다. 한 변호사는 1972년 여성동아에 ‘어떤 조사’라는 글을 통해 이른바 ‘유럽 간첩단 사건’으로 사형당한 김규남 의원(1929∼1972)의 죽음을 애도하고, 2년 뒤 같은 글을 자신의 책에 다시 실어 반국가단체 구성원의 활동을 찬양했다는 이유로 1975년 구속기소 됐었다. “‘시국사건 1호 변호사’ 한승헌, 재심 끝에 42년만에 무죄”, 연합뉴스 2017. 6. 22.자 기사,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06/22/0200000000AKR20170622095200004.HTML?input=1179m (2017. 9. 15. 방문).
  4)  안경환, 『‘법과 문학’의 관점에서 본 에로티즘, 안경환의 문화 읽기 사랑과 사상의 거리 재기』, 철학과 현실사, 2003, 190-191면.
  5)  문학평론가 임헌영(민족문제연구소장)은 경향신문 창간 70주년을 맞아 2016. 10. 6.부터 7개월에 걸쳐 “필화 70년” 시리즈를 연재하였다. 그는 지면을 통해 1946년 미군정 때 발생했던 만담가 최불출 테러 사건을 비롯하여, 유진오, 함석헌, 남정현, 김지하, 이호철 등을 다루었다. 임헌영, “[70주년 창간기획-문학평론가 임헌영의 필화 70년](33) 연재를 마치며”, 경향신문 2017. 5. 26.자 기사,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05252052005&code=210100 (2017. 9. 15. 방문).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필화 사건은 대체로 권력자를 조롱하거나 이데올로기와 관련된 것들이다. 그런데 정치적 이유 외에 외설 시비에 휘말려 논란이 일거나 사법처리가 된 사례도 지속적으로 발생했다. 대표적으로 1954년 정비석의 소설 『자유부인』, 1992년 마광수의 소설 『즐거운 사라』, 1996년 장정일의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 1997년 이현세의 만화 『천국의 신화』 등이 있다.
  6)  Christopher Thomas McDavid, I Know It When I See It: Obscenity, Copyright, and the Cautionary Tale of the Lanham Act, 47 U. Louisville L. Rev. 561, 581 (2008-2009).
  7)  U.S v. One Book Called "Ulysses", 5 F. Supp. 182 (S.D.N.Y. 1933), aff'd, 72 F.2d 705 (2d Cir. 1934).
  8)  Commonwealth v. Delacey, 171 N.E. 455 (Mass. 1930).
  9)  이상 Mitchell Brothers Film Group v. Cinema Adult Theater, 604 F.2d 852, 857 (5th Cir. 1979).
  10)  강윤중, “[기타뉴스]홍성담 ‘예술은 어떤 권력과도 불화해야 한다’”, 경향신문 2017. 2. 13.자 기사.
  11)  디지털뉴스팀, “‘대통령 풍자 누드화’ 전시 표창원 윤리심판원 회부…반 여성적”, 경향신문 2017. 1. 24.자 기사.
  12)  대법원 2011. 10. 13. 선고 2011도11074 판결.
  13)  대법원 1991. 8. 27. 선고 89도702 판결.
  14)  대법원 2015. 8. 27. 선고 2012다204587 판결.

 

 

시차(時差)와 시차(視差)

 

    문학은 현재와 대화하기도 하지만 미래의 독자를 겨냥하기도 한다. 법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법 영역을 좀 더 구획해 들어가면, 형법과 저작권법의 지향점이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형법은 현재의 질서와 안정을 중시하려는 기본 태도를 지향하는 반면, 저작권법은 창작자를 보호하는 동시에 개개인이 누려야 할 표현의 자유도 고려한다는 점에서 미래지향적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음란성이 작품의 속성이 아니라 가변적인 것으로서 취향의 문제일 수 있다는 점에서 이에 관한 형법적 판단과 저작권법적 판단은 다를 수 있다. 단적으로 소설 『북회귀선』이 당대 음란물로 판정돼 밀러가 유죄판결을 받았다 해서 『북회귀선』을 저작물로 보호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시대의 윤리 기준으로 볼 때 음란하다는 이유로 밀러의 손에 수갑을 채우는 것과 그 작품이 후대의 독자들에게 판단 받을 수 있도록 저작물로 보호하는 것은 별개라는 것이다. 만약 음란물이라는 이유로 저작권법상 보호받지 못한다고 하면, 『북회귀선』은 누구나 같거나 비슷하게 써도 저작권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되어 오늘날까지 살아남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이에 대해 법에 의해 음란물로 단죄된 것을 국가가 나서서 저작권법으로 보호하느냐고 반문한다면,15) 이는 법리적으로 유치한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구청에 도로 점용료를 내지 않고 불법 영업을 하는 포장마차에서 음식을 먹은 사람이 불법 영업이므로 돈을 내지 않겠다고 하면 그의 행위는 정당한가? 나아가 돈을 내라고 한 주인에 대해 행패를 부리며 포장마차를 때려 부쉈다면 불법 영업이므로 영업방해죄가 성립하지 않는 것인가? 포장마차 주인이 점용허가를 받지 않고 한 영업을 한 행위와 손님이 무전취식 또는 영업방해를 한 행위는 각기 다른 법률, 즉 도로법과 형법에 의해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폭력을 행사한 손님을 영업방해죄로 처벌한다 해서 국가가 나서서 불법 영업을 보호하고 조장한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형법에 의해 음란물로 단죄된다 하여 저작권법상 저작물로 보호받지 못하는 것은 아니고, 작품의 도덕성을 따지지 않고 저작권으로 보호하는 것에 대해 법이 통일되어 있지 않다고 말한다면 법이 그렇게 단세포적인 것이 아니라고 응대할 수밖에 없다.
    법이란 이렇게 다층적이다. 중요한 것은 법이 특정 행위를 겨냥하고 있는 경우다. 형법상 음란물반포죄가 그렇고,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제작 및 반포죄가 그렇다. 이런 법 자체에 문제가 있다. 양심의 자유나 표현의 자유와 같은 기본적 인권을 제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같이 위헌적 소지가 있는 법률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만들어져 있는 법을 적용해야 할 경우 해석을 통해 좀 더 유연성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근본적으로는 이런 사건이 법원이나 검찰로 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 즉 해당 영역에서 걸러져야 한다. 우리 사회가 법을 언제부터 그렇게 애용했는지 툭하면 경찰이나 검찰과 법원으로 가져가려고 한다. 그런데 법정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곳이 아니다. 불과 1-2년 사이에 수갑을 찬 손과 수갑을 채운 손의 영욕이 갈리기도 했다. 그러니 더욱 법의 적용과 개입을 최소화해야 한다. 문학이나 예술 분야에 대한 검찰권 행사를 자제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검찰이 나서기 전에 해당 분야에서 보다 치열하게 합리적으로 논의해야 한다. 조영남 사건이 그렇고 신경숙 사건이 그랬어야 했다.

  15)  실제 십여 년 전에 음란물(포르노)이라는 이유로 저작권법상 보호를 받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논의가 우리나라에 있었다. 이에 관해서는 남형두, “합법성과 저작권 보호 요건 – 음란물을 중심으로”, 《민사판례연구》 통권 제34권, 2012. 2. 참조.

 

 

주리스토크라시(Juristocracy)

 

    문학, 예술 영역의 논쟁이 조기에 법정 분쟁으로 전환되면 예술 사조의 발전이나 새로운 시대를 여는 예술이 나올 기회를 차단할 가능성이 있다.16) 뒤샹(Marcel Duchamp)이 다빈치(Leonardo da Vinci)의 <모나리자>(Mona Lisa)를, 피카소(Pablo Picasso)와 달리(Salvador Dali)가 벨라스케스(Diego Velazquez)의 <시녀들>(Las Meninas)를 베꼈지만 뒤샹이나 피카소, 달리가 표절했다고 비판하지 않는다. 오히려 피카소와 달리는 입체파, 추상파, 초현실주의라는 새로운 장(場)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나 쉘리(Mary Shelley)의 표절 문제 역시 19세기 영국 낭만주의 문학에서 문학적 논쟁으로 승화되어 여성문학이 꽃피우는 계기가 되었다.17) 예술계의 자치에 맡겨둠으로써 예술 논쟁을 거쳐 예술의 발전을 가져올 수 있음에도 성급한 법의 개입(주리스토크라시, Juristocracy)은 예술의 자유와 발전을 저해할 수 있다. 워즈워스 외에 콜리지, 바이런은 영국의 낭만파 시인이라는 점에 공통점이 있지만 당대 모두 표절 시비에 휘말린 전력이 있다는 점에도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이들을 두고 지금껏 표절 시인이라는 멍에를 지우지 않는다. 표절 논쟁은 당대 문학 논쟁 속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그 또한 문학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18)

  16)  남형두, “법과 예술 – 조영남 사건으로 본 주리스토크라시(Juristocracy)”, 《정보법학》 제20권 제2호, 2016, 62면.
  17)  남형두, 『표절론』, 현암사, 2015, 564면.
  18)  위의 책, 32면.

 

 

오만과 편견을 넘어

 

    법의 관용, 법의 기다림 속에 문학은 발전되기도 한다. 그 점에서 법은 문학의 후원자가 되기도 하는 셈이다. 저열한 수준의 베낌을 패러디, 오마주, 패스티시라는 이름으로 덧씌워 창의적인 문학을 훼손하는 경우 법(학)은 문학을 지켜주기도 한다. 문학에서 허용되는 패러디와 법이 허용하는 패러디는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전자가 후자보다 넓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이, 즉 문학에서는 허용되나 법에서는 허용되지 않는 영역, 바로 이런 부분에 법과 문학은 긴장 관계에 놓이게 된다. 마치 비무장지대(demilitarized zone)와 같은 그 경계의 모호함, 그것을 없애 문학과 법이 바로 마주치게 하는 것보다는 그 모호함을 방치하고 이를 즐기도록 하는 것이 문학과 법 간의 바른 이해와 예의가 아닐까? 나아가 서로 쇳소리 나게 부딪치지 않는 소도(蘇塗)와 같은 영역이 존재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필요하다. 굳이 따지자면 금을 그을 수 없는 저수지 한 복판 어딘가에 그 경계가 있겠지만, 나누지 않고 문학과 법이 서로 퍼갈 수 있는 저수지가 넓고 깊게 있어야 한다. 그 저수지에 오스틴(Jane Austen)의 『오만과 편견』이 있고, 위고(Victor Hugo)의 『사형수 최후의 날』이 들어 있다.19) 법을 소재로 한 문학의 예를 들자면 끝이 없다. 반대로 법(학)은 문학의 저수지로부터 얼마나 많은 법사상과 정신을 길어 올렸던가. 문학적 상상력이 곧 법학적 상상력이 되기도 한다. 톨스토이의 『부활』에서 형벌론을, 존 스타인벡(John Steinbeck)의 『분노의 포도』에서 노동조합의 탄생을, 디포(Daniel Defoe)의 『로빈슨 크루소』에서 로크(John Locke)의 재산권에 관한 노동이론을 법학 서적보다 더 생동감 있고 설득력 있게 읽을 수 있다. 미래 사회를 예견하고 선도한 문학서는 법학자들과 입법자들에게 상상력이 현실이 되기도 한다.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이미 실험관 인간을 예정해 놓더니 헉슬리(Aldous Huxley)는 『멋진 신세계』에서 복제인간의 생명윤리 문제를 암시하였다. 오웰(George Orwell)의 『1984』에 나오는 텔레스코프는 이미 사생활/프라이버시 침해에 따른 법률 문제를 던졌는가 하면, 아시모프(Isaac Asimov)의 『아이 로봇』은 최근 들어 인공지능(AI)과 로봇이 가져올 파멸적 세계에 대한 규범을 만들 때 토대가 되고 있다. 법률가들의 생각이 근처에도 미치지 못했던 시기에 문학가들의 상상력은 이미 소설 속에서 법률 문제를 암시하는 것을 넘어 규범까지 예정해 놓았다. 이런 자양분으로 법(학)의 규범들이 만들어지기도 하니, 문학이란 저수지로부터 퍼 올릴 인문학적 지식이 없는 법학자들이란 얼마나 조야한 것인지 알 수 없다.
    법을 피도 눈물도 없는 것으로 치부한 나머지 희화화 대상으로 삼기도 하지만(『베니스 상인』), 법에는 용서와 사랑의 제도가 많이 있다. 독일의 법철학자 라드브루흐(Gustav Radbruch)는 문학은 인생을 예찬함에 반해 법은 인생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는 취지로 말했다. 그러나 둘 다 인생과 인간에 대한 공감과 애정이 없이는 곤란하다고 했다는데, 법에 인간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없다면 흉기가 되고 말 것이다. 법에는 기본적으로 강제력, 폭력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학과의 관계에서 법이 이기(利器) 또는 흉기가 될지는 이를 운용하는 법률가에 달려 있기에 법률가의 문학에 대한 이해와 소양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법학의 문학에 대한 오만과 문학의 법학에 대한 편견을 극복할 때도 됐다.(끝)

  19)  『오만과 편견』은 영국의 독특한 상속제도를 소재로, 『사형수 최후의 날』은 프랑스 사형제도를 소재로 한 소설이란 점에서 법이 문학의 중요한 플롯이 된 셈이다.

 

 

 

 

 

 

 

 

 

 

 

 

 

작가소개 / 남형두

현재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저작권법)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졸업
미국 워싱톤대학교 로스쿨(University of Washington School of Law) 박사(Ph.D.)
저서 『표절론』 『표절 백문백답』

 

   《문장웹진 2017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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