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 속의 잠 - 최영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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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더위 속의 잠

 

 

최영건

 

 

 

 

    멀리서 새소리가 들려왔다. 할아버지들이 여행을 떠난 집은 몹시 조용했다. 늦잠을 자고 일어난 윤은 발을 끌며 욕실로 걸어갔다. 2층 거실의 열린 창문에서 부연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욕실은 거실 창문과 마주 보는 위치에 있었다. 윤은 욕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옷을 벗었다. 욕실 문을 잠그지 않고 샤워를 하기 시작했다. 물소리에 희미하던 새소리가 묻혔다. 그다지 크지 않은 할아버지 집에는 욕실이 두 개나 있었다. 오래전에 지어진 건물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특이한 일이었다. 1층의 욕실은 주로 할아버지들이 사용했고 2층의 작은 욕실은 윤이 사용했다. 그러나 윤은 노인들이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 한 번도 문을 잠그지 않고 욕실을 사용해 본 적이 없었다.
    윤이 샤워를 마쳤을 때는 열린 문 밖으로 물이 조금 흘러나와 있었다. 2층 욕실은 1층에 비해 훨씬 좁았다. 흰색과 청록색 타일들에는 금이 가 있었고, 샤워기에서는 자주 느닷없이 찬 물이 나왔다. 윤은 머리칼과 몸을 닦고 파우치에서 화장품이 담긴 작은 병들을 꺼냈다. 거울을 보지 않고 얼굴에 스킨과 로션을 발랐다. 발에 느껴지는 물기에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문 앞에 물이 고여 있었다. 머리칼에서 흐른 물방울이 군데군데 떨어진 채였다. 윤은 그것을 보다가 고개를 돌리고 수건으로 머리를 닦았다. 젖은 발로 돌아다니며 나무 바닥 곳곳에 물기어린 발자국을 남겼다.
    별다른 할 일이 없는 주말 오후였다. 계단을 내려간 그녀는 1층 거실 테이블에 놓여 있던 휴대폰을 손에 들었다. 폰에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남자 친구로부터 온 것이었다. 그는 노인들이 언제까지 집을 비우는지 묻고 있었다. 이미 몇 번이나 반복된 질문이었다.
    남자 친구는 과외 중이었고, 그 때문에 약간 정신이 없는 것 같았다.

 

    [다음 주 수요일이요]

 

    윤은 답장을 보내며 오늘은 토요일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덜 마른 단발머리 끝에서 물방울이 계속 떨어졌다. 바닥에 얼룩을 남겼다.

 

    여행 이야기를 들은 것은 그들이 떠나기 겨우 며칠 전이었다. 할아버지와 작은할아버지, 할아버지의 친구, 그리고 작은할아버지의 애인 등 네 분이서 떠나는 여행이었다. 할아버지들이 여행을 다녀오시는 동안 집을 사용하게 될 사람은 윤 혼자였다. 그들이 떠나도 그녀는 집에 남을 수 있었다. 그 사실은 윤에게 어쩐지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녀가 집에 들어오고 집에 머무는 일에는 항상 할아버지의 허락이 필요한 것만 같았다. 그동안 그녀는 줄곧 두 노인과 함께였다. 할아버지들은 대개 안방에서 시간을 보냈고 윤은 2층에 머물렀다. 세 사람의 생활은 공유된 공간에서 형식적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윤이 노인의 집에 얹혀살게 된 것은 몇 달 전부터였다. 할아버지는 그녀의 6촌 친척이었고 윤은 서울의 대학에 입학하게 된 지방의 학생이었다. 할아버지가 아니었다면 윤은 기숙사에 들어가거나 자취방을 얻어야 했을 것이다. 그녀가 그의 집에서 지내게 된 것은 운이 좋다면 좋다고도 불릴 수 있을 일이었다. 그들의 기묘한 동거의 시작점은 조금 이상하게도 장례식이었다.
    윤이 아직 대학에 들어가지 않았던 어느 날, 어머니와 아버지는 먼 친척의 장례식에 다녀왔다. 그곳에서 할아버지와 만났다. 오랜만에 뵙는 분이었지만 학구적인 인상은 조금도 변함이 없고 건강 또한 좋아 보이셨다고, 그날 장례식에서 돌아온 부모님은 할아버지에 대해 그렇게 말했다. 그는 서울에 살고 있으니 어쩌면 윤이 대학에 진학한 뒤 그에게 조금 신세지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마침 노인의 집은 윤이 지망하는 대학과 무척 가깝다고 했다.

 

    네 얼굴 꼭 한 번 보고 싶다고 그러셨어.
    어릴 때 봤는데 넌 기억 안 나지?

 

    그렇게 말한 것이 어머니였는지. 아버지였는지. 윤은 할아버지의 얼굴이 조금도 기억나지 않았다. 이름 또한 낯설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할아버지는 작은할아버지와 함께 윤의 집을 방문했다. 그들이 오기 전 어머니는 청소를 했다. 아버지는 닭죽을 끓였다. 당시 윤의 부모님은 두 분 다 일을 하지 않고 있었다. 어머니는 몇 년 전 건강 때문에 일을 그만두었고 아버지는 그해 들어 원치 않게 일자리에서 내몰렸다. 윤의 집에는 가난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집에 찾아와 닭죽을 먹으며 말했다.
    타지에서 애 혼자 살게 하면 위험하지. 요즘 그런 애들만 노려서 일어나는 범죄가 얼마나 많은데. 그러지 말고 애 대학 가거든 차라리 우리 집으로 보내. 학교도 우리 집하고 가깝다면서.
    할아버지는 마치 윤이 그 대학에 입학하는 게 당연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했다. 그의 집 가까이에 있는, 윤이 합격을 원하는, 그 대학. 할아버지의 말에 작은할아버지가 윤을 쳐다보았다. 윤은 눈을 깜빡였다. 할아버지는 당연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우리 집에 빈방도 있겠다, 애만 괜찮다 하면 걱정할 것 없이 우리한테 보내는 게 나아. 부모 입장에서도 그 편이 훨씬 마음 편하지 않겠어. 우리가 애 공부 방해할 것도 아니고.
    어머니와 아버지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윤은 닭죽이 담겨 있던 빈 그릇으로 눈길을 돌렸다. 부연 국물에 녹아 있는 희끄무레한 마늘 조각을 내려다보며, 우선은 서울로 대학을 가는 일이 더 중요할 것 같다는 자조어린 생각을 했다. 그때 윤은 재수생이었다. 집안 형편이 좋지 않을 때 재수까지 하다 보니 습관적으로 죄책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자기 생각을 내세울 입장이 아니었다. 그래서 윤은 부모님과 할아버지가 나누는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다. 그 뒤로 부모님은 가끔 할아버지와 전화 통화를 했다. 안부 인사 비슷한 통화였다.
    시간이 흘러 윤이 원하던 대로 그 대학에 합격했을 때, 부모님은 윤이 할아버지 댁에서 지내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그 편이 안전하다는 얘기였다. 돈 문제도 있었다. 서울에 자취방을 얻으려면 보증금이 필요했다. 다달이 월세도 내야 했다. 보증금으로는 대개 오백만 원 또는 그 배의 액수가 필요했다. 그보다 더 싼 방을 얻을 수도 있었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월세 역시 그랬다. 몇 십만 원을 다달이 지출하는 건 큰 부담이었다. 윤은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버는 건 어떨까 고민했다. 그걸로 월세를 마련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불확실한 방법이었다.
    그때까지 할아버지는 돈 얘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윤에게 방을 내어주겠다는 말이 전부였다. 보증금이나 월세, 생활비 이야기는 없었다. 결국 윤의 가족에게는 용기가 필요했다. 생판 모르는 타인에게 하듯이 다달이 월세를 낼 필요는 없는 것 아닐까. 염치라는 게 있으니 얼마의 생활비를 건네기는 해야겠지만 그래도 남 같지는 않겠지. 그들에겐 그렇게 믿고 믿음을 밀고 나갈 용기가 필요했다.
    아버지는 과거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할아버지가 보다 젊었을 때 아버지의 아버지가 일종의 은혜를 베풀었다는 이야기였다. 나 어릴 때 그 양반이 우리 집 뒷방에 살았어. 그때 우리 아버지가 그 양반을 항상 챙겼어. 어딜 가든 김 수재, 김 수재, 그렇게 그 양반 칭찬을 해댔어. 윤은 그 이야기를 듣고 할아버지의 젊은 시절 별명이 수재였다는 것을 알았다. 먼 옛날 동네에서 가장 영민한 꼬마였을 때 붙여진 이름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한편 할아버지의 과거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작은할아버지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윤은 할아버지 이야기도 작은할아버지 이야기도 그다지 궁금하지 않았기에 거의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주로 대학에 들어가면 무엇을 할지 상상하곤 했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남자 친구를 사귀고, 1학년 때부터 취업 준비도 착실히 해나가야지. 그런 생각으로 일일이 설명될 필요 없는 우울을 달랬다.
    그로부터 얼마 후 윤은 간단한 이삿짐을 챙겨 할아버지 집으로 가게 되었다. 그곳은 생각보다 크지 않은 이층집이었다. 거실 바닥과 계단은 나무로 되어 있었고 계단을 걸어 올라갈 때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윤이 지내게 될 방에는 청소기가 세워져 있었다. 오래된 농구공도 하나 있었다. 살짝 바람이 빠진 농구공은 잠든 고양이처럼 보였다. 그런가 하면 방 가운데 창문에서는 창살 너머로 마당의 농구대가 보였다. 어린아이용이었다. 장난감 농구대와 어른용 농구공이라니 이상한 조합이었다.
    이 집에는 어린아이가 살지 않는데 어째서 저기 저런 농구대가 있는 것일까.
    농구대는 햇빛에 색이 바래 있었다. 윤은 물결무늬를 그리듯 휘어져 있는 장식용 창살을 잠시 노려보다가 방을 나섰다. 아래층에 남겨진 짐을 가지러 내려갔다. 그것이 몇 달 전 일어난 일이었다.

 

    윤의 남자 친구가 할아버지의 집으로 찾아온 것은 일요일 오후였다. 그는 영화가 담긴 외장 하드와 과자를 가져왔다. 봉투에 든 과자들을 거실 테이블에 꺼내 놓으며 말했다.

 

    생각보다 집이 크네.

 

    그의 셔츠에서는 새 책의 종이에서 날 법한 냄새가 났다. 윤이 선물한 향수였다. 남자 친구는 집 안을 돌아보며 과자 봉지를 뜯었다. 봉지 속에 손을 집어넣고 과자를 꺼냈다. 배가 고픈 사람처럼 거듭 과자를 입으로 가져갔다. 과자 냄새와 향수 냄새가 뒤섞였다.

 

    이 집이 커요?

 

    윤은 그렇게 물으며 거실을 돌아보았다. 남자 친구는 그렇다고 답하며 또 한 번 봉지에서 과자를 꺼냈다. 입으로 가져가 소리를 내어 씹었다.

 

    네 말만 들었을 때보다 훨씬 큰데.
    주택이면 다들 이 정도 크기 아닌가. 보통은.
    몰라. 이런 집에 안 살아 봤어.
    하긴 저도 잘 몰라요.

 

    창밖에서 햇볕이 밝게 내리쬐고 있었다. 마당의 흙이 본래 색을 잃고 햇빛을 반사했다. 바람에 대추나무 잎이 흔들렸다. 그리고 남자 친구가 과자를 씹는 소리가 들렸다.
    윤은 그를 돌아보고 웃으며 물었다.

 

    그런데 선배, 배고파요? 아침 안 먹었어요?
    응?
    오자마자…….

 

    윤이 고갯짓으로 그의 손에 들린 과자 봉투를 가리켰다. 남자 친구가 슬쩍 웃었다. 과자가 들여다보이는 찢어진 봉투를 아직 뜯지 않은 봉투들 옆에 내려놓았다. 과자 가루가 묻은 손을 몇 번 털었다. 거실 바닥으로 가루가 떨어졌다. 가루가 신경 쓰였지만 윤은 잠자코 있었다. 거실의 오래된 나무 바닥은 군데군데 갈라진 틈이 많았다. 그 틈으로 이물질이 들어가면 없애기가 쉽지 않았다. 더욱 신경 써서 청소를 해야 했다.
    이 집의 노인들은 두 사람 다 그런 틈새 청소를 신경 쓰지 않았다. 집 안은 대체로 깔끔했지만 완벽하게 깨끗하지는 않았다. 집을 자주 청소하는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작은할아버지는 소리에 예민했다. 청소기를 사용하는 일은 금지되어 있었다. 청소에는 빗자루나 걸레만을 사용할 수 있었다.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빗자루나 걸레로 하는 청소는 청소기로 하는 청소보다 조금 더 힘들었다. 할아버지들은 눈이 침침했고, 빗자루나 걸레질은 대개 완벽히 마치지 못했다.
    이 집의 규칙은 청소기 사용에 관한 것만이 아니었다. 밤늦게 TV를 보거나 쿵쿵 발을 구르며 걷거나 큰 소리로 음악을 틀수도 없었다. 물론 그런 일들은 자취방에서 혼자 살 때도 조심해야 하는 일들이었다. 방음이 잘 되지 않는 건물에 입주할 경우엔 더욱 그럴 터였다. 의도치 않은 소음으로 이웃들에게 폐를 끼치게 될 수도 있었다.

 

    네 방은 어디야?

 

    과자 가루가 충분히 떨어져 나가지 않았는지 싱크대로 가서 손을 씻으며, 남자 친구가 물었다. 물을 틀며 윤을 돌아보았다. 윤이 답했다.

 

    2층이요.
    아아, 맞아. 2층이라고 했지. 그럼 편하겠네. 1층하고 층을 따로 쓰니까.

 

    남자 친구가 계단을 힐끗 보며 말했다.

 

    올라가 보자. 네 방 보고 싶어.

 

    그는 윤을 따라 계단을 올라가며 중얼거렸다.

 

    근데 정말 생각보다 집이 좋다. 자취방 사는 것보다 여기 사는 게 좋을 수도 있겠네. 집도 크고. 여자애들은 혼자 사는 것보다 어른들이랑 같이 사는 게 정말 더 낫기도 하니까.
    왜요?

 

    앞서 계단을 올라가던 윤이 남자 친구를 돌아보았다. 남자 친구는 잠시 예상 밖의 질문을 들은 것처럼 멈칫했다. 그러고는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윤보다 4살 연상인 남자 친구는 올해 초 제대한 복학생이기도 했다. 둘은 학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사귀게 된 사이였다. 그들은 함께 일본어를 전공했고, 사귀기 시작한 후로 둘 다 과내에서 유명해져야만 했다. 복학생이 신입생을 낚아챘다는 수군거림과 함께였다.
    윤은 남자 친구에게 처음부터 지금까지 존대를 했다. 그도 그것이 싫지 않은 눈치였다. 그와 사귀는 까닭에 윤은 다른 신입생들처럼 여러 술자리에 불려나가지 않았다. 다른 남자애들을 소개 받거나 하는 일도 없었다. 남자 친구는 연상이라서 그런지 윤에게 대체로 자기 뜻을 내세울 때가 많았다. 편한 동생을 대하는 것처럼 구는 경우도 많았다. 둘이 사귄다는 소식을 듣고 다른 사람들이 떠들어댄 것처럼 일단 잠자리로 끌고 들어가려는 낌새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는 자주 어떤 미소를 보였다. 윤이 모르는 어떤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한 미소였다.
    남자 친구는 윤의 방에 들어서며 또 한 번 집이 참 좋다는 말을 중얼거렸다. 자기도 언젠가 이런 집을 사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는 얘기였다. 마당이 있는 집에 살고 싶어. 요즘은 다들 다시 이런 집에 살고 싶어 한대. 땅콩 주택인가, 아니 그거 말고, 아무튼 좁은 땅이라도 사서 집을 짓고 싶어 한다는 얘기. 그거 어디서 나왔는데. 그 얘기가.
    윤의 방에는 책상이 없었다. 방석에 앉아 키 작은 상에서 책을 읽고, 노트북을 사용하고, 그 밖의 여러 가지 일을 했다. 남자 친구는 윤이 밀어 건넨 방석에 앉아 방 안을 둘러보았다. 윤도 그 곁에 앉았다. 남자 친구가 창밖의 나무와 구름을 바라보며 말했다.

 

    부모님이 좋아하시겠다. 부모님도 여기 오신 적 있어?
    이 집이요?
    응.
    처음에 짐 정리 할 때 오셨어요.
    너희 집이 원래 거기라고 했지? 그, 거기.

 

    윤이 자기 고향을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다. 거기. 요즘 피곤한가, 자꾸 뭐가 말이 잘 안 나와. 생각은 나는데 머리에서 입으로 잘 이어지지가 않아.
    윤은 별 생각 없이 그의 말을 받았다.

 

    맞아요. 그럴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저도 요즘 그래요.
    네가 왜? 무슨 일 있었어?

 

    남자 친구가 윤을 돌아보았다. 정말 궁금해서 묻고 있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윤은 멈칫했다. 크게 당황한 것은 아니었지만 대꾸할 말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남자 친구가 보기에는 최근 그녀에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을지도 몰랐다.
    남자 친구는 최근 아르바이트를 하나, 과외를 하나 하고 있었다. 취업 준비와 학회 일도 있었다. 윤도 처음에는 아르바이트나 과외 자리를 구해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운이 나빴는지 그런 자리는 쉽게 구해지지 않았다. 재수생 시절에는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일들이 막상 부딪혀 보니 시작조차 어려웠다. 경쟁도 심했다.
    남자 친구는 군대에 다녀오기 전부터 친하게 지내던 과 친구들이 많았다. 윤과 사귀더라도 그들과의 관계는 꾸준히 이어졌다. 반면 윤은 입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남자 친구와 사귀게 된 탓에 다른 사람들과 그리 많이 어울리지 못했다. 주로 남자 친구와 시간을 보냈다. 가끔은 사람들이 그들 관계를 두고 수군거리는 것이 불편할 때도 있었다. 재수생이라 동기들보다 한 살 연상인 것도 약간은 걸림돌이었다. 결국 윤은 학생회는 물론 과 동아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남자 친구와는 달랐다.
    윤에게는 당장 바쁘게 해야 할 일이 많지 않았다. 바쁘기보다는 느긋할 때가 많았다. 수업을 듣고 도서관에 가서 혼자 책을 읽거나 토익 공부를 했다. 혹시 과외가 아니고도 해볼 만한 아르바이트가 있는지 가끔 찾아보기는 했지만 적극적으로 일을 구하지는 않았다. 학기 초에 나가 보았던 아르바이트 면접 자리에서 몇 번 기분 나쁜 일을 겪은 뒤부터 아르바이트에 대한 약간의 공포가 생긴 탓이었다. 되도록 아르바이트 대신 과외를 구해 볼 계획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할아버지 집에 살고 있으니 조금은 가족의 경제적인 사정에 공헌을 하고 있는 셈 아닐까. 적어도 조금은 덜 폐를 끼치고 있는 것 아닐까. 최소한 윤에게는 아직 그렇게 변명할 여지가 남아 있었다. 그 사실은 그녀를 약간이나마 안심시켜 주고는 했다.
    이곳에는 이곳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다. 아무런 사고가 생기지 않는 가운데 쌓여 가는 감정이 있었다. 크지 않은 이층집에 사는 세 사람. 두 노인과 한 젊은이. 윤은 집세 대신 관계로 인한 감정을 지불하고 있는 셈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상대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설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남자 친구는 자취방에 살며 매달 윤이 내지 않아도 되는 월세를 납부하고 있었다. 그는 가끔 그녀를 오해하면서 그녀를 이해하고 있다고 착각하고는 했다. 그에게 그녀의 사정을 이야기해도 그것이 온전히 이해받을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특히나 어떤 문제들은 그랬다.
    윤은 눈을 깜빡였다. 방 안에 갈 곳을 잃은 시선을 던졌다.
    부연 햇빛이 바닥에 드리워져 있었다. 구석에는 처음 왔을 때처럼 농구공이 놓여 있었다. 그녀는 이 집에 들어온 후로 노인들이 농구 비슷한 운동을 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같이 산 시간이 충분히 길지 않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어른을 위한 농구공과 어린이를 위한 농구 골대. 다시 보아도 이상한 조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윤은 농구공을 바라보다가 미간을 찡그렸다.

 

    실은 선배한테 말하지 않은 일이 있었어요.

 

    남자 친구에게로 눈길을 돌리며 말했다.

 

    굳이 말할 필요 없는 일 같기도 하고, 솔직히 스스로도 좀 그래서, 뭐라고 말을 꺼내질 못했는데.

 

    남자 친구가 윤을 빤히 바라보았다. 윤은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사실 이 집에 고양이가 한 마리 있었거든요. 할아버지가 키우는 코숏 남자애였는데,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장난기도 많고.
    코리안 숏헤어. 알아.

 

    윤은 손가락으로 팔을 긁적였다.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한숨을 삼키며 거짓말을 이어 갔다.

 

    할아버지가 고양이를 예뻐하긴 했는데 아무래도 연세가 있으시고, 피곤하시고, 그러다 보니까 자주 놀아 주진 않으시더라고요. 근데 저도 고양이는 꽤 좋아하니까, 이 집에 온 후로 많이 놀아 줬어요. 마당에서 나뭇가지 같은 걸로 놀아 주기도 하고, 장난감 같은 걸 사서 놀아 주기도 하고. 목욕도 시키고. 아무튼 나만 좋으려고 그런 건 아니었는데.

 

    남자 친구가 눈을 키웠다. 다음 말을 기다리는 기색이었다. 윤은 시선을 돌렸다.

 

    잃어버렸어요. 실수로.
   고양이를?
   찾아봤는데 못 찾았어요. 마당에서 놀다 보니까 아예 밖으로 나가고 싶어진 건지. 사람이 있을 때는 담 가까이로도 안 갔는데. 담 넘을 만큼 높이 뛰지도 않았고.
   언제 그랬는데?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모르겠어요. 선배는 바쁘잖아요.

 

    남자 친구가 입을 벌렸다. 할 말을 찾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그는 당황해서 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윤은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자기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었다.

 

    뭐야, 그래도 말을 했어야지. 그래야 같이 찾아봤을 텐데. 고양이 사진이라든가 그런 거 있어?

 

    윤은 고개를 저었다.

 

    선배가 그렇게 신경 쓸 것 같아서 말을 못 했어요. 그냥, 그 얘기 하는 게 스스로 힘들어서…….

 

    목이 천천히 잠겼다. 남자 친구가 윤의 어깨를 문질렀다. 그 손길에 서서히 윤의 눈가가 붉어졌다. 남자 친구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말했다.

 

    야, 울지 마. 지금이라도 다시 찾아봐야지. 그러게 나한테 말을 하지.
    고양이 잃어버리고 나서 할아버지 보는 게 너무 힘들더라고요. 그런 일이 있어도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정말 내가 잘못한 건지도 모르겠고.
    그랬겠다. 정말 힘들었겠네. 할아버지는 뭐라고 했는데.
    할아버지는 어차피 길고양이들이 그렇다고, 다시 돌아올 거라고, 그 말만 하셨어요.
    원래 길고양이였으면 정말 그럴 수도 있긴 하겠다. 잃어버린 건 언제 그랬던 거야?
    벌써 꽤 됐어요.
    근데 왜 말을 안 했어. 말을 했어야지.
    모르겠어요.

 

    모르겠어요. 정말 모르겠어요……. 똑같은 말이 느리고 불분명하게 반복되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윤은 터무니없는 슬픔을 감지했다. 그렇게까지 과잉된 감정을 이끌어내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의도치 않게 표정이 주체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된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눈물은 뜨거웠다.

 

    일단 울지 마, 진정하고 마음을 가라앉혀.

 

    남자 친구가 그녀를 안아 주었다. 그에게서 종이 같은 냄새가 났다. 윤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녀에게는 자기가 한 말들이 농담처럼 느껴졌다. 남자 친구도 실은 전부 농담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라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몰랐다. 남자 친구가 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의 손가락에서 얼핏 과자 냄새가 풍겼다. 향수 냄새와 과자 냄새.
    할아버지들은 수요일에나 돌아오실 것이다. 남자 친구에게 안겨 있자 비로소 무언가를 통째로 이해 받고 있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소음 없는 대화를 위해서는 사실 거짓말들이 필요한지도 몰랐다. 윤은 어쩌면 이대로 그와 잘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거짓말은 온실처럼 그녀의 비밀을 보호하고 있었다.

 

    할아버지 집에 들어와 살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초봄의 밤, 한번은 그런 일이 있었다. 소리에 민감한 작은할아버지의 특성을 알게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당시였다. 윤은 밤중에 노트북 스피커로 음악을 틀었다. 예전 버릇대로 무심코 한 행동이었다. 그녀는 몇 분이 지난 후에야 뒤늦게 작은할아버지를 떠올렸다. 할아버지의 집에는 규칙이 있었다. 항상 소음에 주의할 것. 거기 생각이 미친 순간 윤은 당황해서 노트북을 닫았다. 그녀의 방에 갑작스러운 정적이 찾아왔다.
    주위는 고요했다. 음악소리와 정적의 대비는 그녀를 조금 더 긴장시켰다. 윤은 한 손을 노트북 위에 얹은 채 잠시 가만히 앉아 있었다. 밤 열 시였다. 평소라면 노인들이 잠자리에 들었을 시각이었다. 어쩌면 그녀는 배려 없는 행동으로 노인들에게 폐를 끼쳐버렸을지도 몰랐다. 가까스로 잠이 든 노인을 깨웠을 수도 있었다. 그것은 몰염치한 짓이었다.
    작은할아버지는 늘 소리에 민감했다. 쉽게 신경질을 냈다. 작은할아버지가 투덜거릴 때면 할아버지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음악을 튼 것은 겨우 몇 분이었고, 보통이라면 윤은 그리 큰 잘못을 저지른 게 아닐지도 몰랐다. 그러나 노인들의 기준은 어떨지 알 수 없었다. 잠시 당황하던 윤은 결국 방에서 빠져나왔다. 삐걱거리는 소리에 주의하며 계단을 내려갔다. 몰래 할아버지들의 분위기를 살펴볼 생각이었다. 계단에서 보이는 1층 거실은 어두웠다. 노인들은 예상대로 안방에 있는 것 같았다.
    밤 열 시에 노트북에서 음악을 틀었다고 1층까지 내려와 집 안 분위기를 살펴야 하다니. 돌이켜보니 우스운 일 같기도 했다. 윤은 옅은 현기증을 느꼈다. 안방 쪽으로 몇 발짝 걸음을 옮기다가, 방향을 정하지 못한 사람처럼 망설였다. 안방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잠든 노인들의 방 앞을 느닷없이 서성이는 것은 지나친 행동인지도 몰랐다.
    긴장이 조금 풀리자 갈증이 느껴졌다. 윤은 마치 1층에 내려온 본래 목적이 그것이었던 것처럼 주방의 냉장고로 향했다. 냉장고를 열자 환한 불빛에 주위가 밝아졌다. 그녀는 차가운 물이 담긴 물병을 꺼냈다. 그리고 물을 마시려던 순간, 불이 꺼져 있던 1층 욕실에서 어떤 소리를 들었다. 변기 물을 내리는 소리였다. 이어서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욕실은 주방 맞은편에 있었다. 거기서 나온 것은 작은할아버지였다. 노인은 비틀거리며 욕실에서 나와 안방으로 걸어갔다. 어둠 속에서 노란 냉장고 불빛이 노인의 모습을 비췄다. 앙상한 다리 사이로 음경과 고환이 덜렁거렸다. 안방 문이 열리고, 노인의 마른 엉덩이가 천천히 문 너머로 사라졌다. 문이 닫혔다.
    작은할아버지는 마치 윤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잠결이라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아무리 잠이 덜 깨었다고 해도 냉장고 불빛 속에 서 있던 윤을 알아채지 못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있다는 것을 알고도 그처럼 태연하게 알몸을 내보였다는 가정 또한 이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윤은 노인이 사라진 후에도 넋을 잃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다 정신없이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작은할아버지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그가 고의로 윤에게 그런 행동을 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그저 노인은 딱하게도 잠시 정신이 없었던 것뿐인 듯했다. 윤은 그를 보며 그의 알몸을 떠올렸다. 노인의 몸은 창백했다. 그처럼 무방비하게 벌거벗은 몸과 거기 새겨진 굴곡을 내보이다니. 그녀가 그것을 목격해야만 했다니.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가차 없는 고통이 느껴졌다. 그러나 윤은 그것이 누구로부터 비롯되어 누구에게 가해지는 고통인지 분명하게 판단할 수 없었다. 웃음과 고통은 그들 모두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윤은 문득 그녀와 그녀가 아닌 사람의 경계가 이전처럼 뚜렷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들이라는 부름의 경계는 그녀와 이 집의 바깥까지 흐리고 넓게 펼쳐져 있었다. 경계 없는 감각이 그녀의 밤을 판단이 부재하는 유보로 이끌었다.
    그 뒤로 윤은 한동안 작은할아버지가 알아채지 못할 때마다 그를 바라보고는 했다. 그들은 한 집에 살고 있었지만 결코 가족이 아니었다. 노인을 볼 때면 그의 몸과 함께 그 사실이 떠오르고는 했다. 이후 그것은 그녀만의 비밀로 남았다.
    그들이 가족이 아니었기에 느낄 수 있는 것들도 있었다. 언제부턴가 윤은 할아버지가 잘 알지도 못하는 그녀를 집에 받아 준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자존심이 세고 남에게 신세지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윤이 그의 방이나 욕실을 청소하는 것도, 그가 음식을 먹은 그릇을 대신 설거지하는 것도 반기지 않았다. 그냥 둬라. 매번 그렇게 말했다.
    때로 윤은 할아버지가 어린 시절 수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거실 옆 작은 방의 책꽂이에는 낡아서 누렇게 변한 책들이 가득했다. 그러나 새로 나온 책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과거 직업은 뚜렷하지 않았다. 그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그 때문에 젊은 시절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윤의 친할아버지에게 신세져야 했다. 아버지는 그 관계에 대해 좋은 기억들만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을까. 윤의 경험에 따르면 남의 집에 얹혀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이제와 윤을 맡아 주는 것으로 지난날의 신세를 갚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것은 노인의 자존심을 위한 마지막 선택일 수도 있었다. 지난날 그는 가난했지만 지금은 적어도 어엿한 자기 집을 갖고 있었다. 그의 삶은 이제 비교적 온전했다. 언젠가 윤 역시 시간이 흘러 지금의 가난에서 벗어나게 된다면 누군가에게 노인과 같은 호의를 베풀게 될지도 몰랐다. 그것은 그녀의 삶이 이제 온전하다는 사실을 타인에게 또는 그녀 자신에게 증명하는 길이 될 터였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있는 반면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있었다. 윤은 대개 그녀가 살아온 삶과 그녀가 살아갈 삶만을 이해하거나 추측하려 할 수 있을 뿐이었다. 할아버지는 몇 번인가 전쟁과 동생에 대한 이야기를 흘린 적이 있었다. 그러나 길게 이야기하고 싶은 눈치는 아니었다. 윤은 전쟁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작은할아버지가 전쟁에서 무언가 큰일을 겪었다는 것만을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
    작은할아버지는 신경질적이었고 작은 소리에도 기분이 나빠지곤 했다. 또 그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어떤 할머니가 몰고 온 차를 타고 외출했다. 가끔은 하루가 지나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외출한 그가 밤이 되면 집으로 돌아오는지 아니면 계속 밖에 머무는지에 대해, 윤은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결코 가족이 아니었다. 그녀는 노인의 알몸을 알고 있었지만 그 사실은 아마 언제까지고 비밀로 남겨질 터였다. 윤은 그 사실에 대해 어떠한 판단도 내릴 수 없었다.

 

    시간은 그들 모두와 함께였고, 그녀에게는 아직 모른다는 말을 반복할 약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렇다는 착각이 들었다.

 

    월요일이 되어도 할아버지들은 당연히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월요일 저녁에는 어머니와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할아버지에게 얼마간의 생활비를 부쳤다는 얘기였다.
    걱정하지 마. 눈치 보지도 말고. 혹시 할아버지들이 많이 불편하게 구시는 건 아니지?
    부모님이 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것뿐인 것 같았다.
    그래도 참 점잖은 양반들이야. 우리 곁에 그런 사람이라도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야.
    아버지는 그런 말을 덧붙였고 윤은 그의 말을 잠자코 수긍했다. 통화는 짧게 끝났다.
    할아버지가 여행에서 돌아온 것은 그 다음날 오후였다. 계획보다 하루 빠른 귀가였다. 노인이 돌아왔을 때 윤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고요하던 집 안에 열쇠로 문을 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윤은 급히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계단을 내려갔다. 낯선 사람이 집에 들이닥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떠났던 이들이 일찍 돌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할아버지?

 

    그녀는 그를 부르며 거실로 들어섰다. 노인은 냉장고에서 차가운 보리차를 꺼내고 있었다. 예전 윤이 밤중에 물을 꺼내던 모습도 아마 그와 비슷했을 터였다. 노인은 포도가 새겨진 유리 물통을 열고 컵에 보리차를 따랐다. 그는 무척이나 피곤해 보였다. 평소보다 훨씬 초췌한 모습이었다. 그것을 본 윤은 문득 죄책감을 느꼈다. 일요일에 있었던 일 때문이었다. 그녀는 거짓말을 지어냈고 그런데도 눈물은 뜨거웠다. 잃어버린 고양이는 처음부터 어디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윤은 눈가를 문질렀다.

 

    어디 아프냐?

 

    할아버지의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몸살 기운이 있는 것 같아요.
    학교는? 몸이 안 좋아서요. 오늘은 수업도 하나밖에 없어서…….
    그래. 그럼 쉬어야지.

 

    할아버지는 그렇게 말했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윤은 자신의 변명을 후회했다. 노인이 집을 비우자마자 게으름을 부리고 있었던 것 같아 부끄러웠다. 문득 그녀가 이틀 전 처음으로 누군가와 섹스를 했다는 사실이 뇌리를 스쳤다. 침묵을 깬 것은 다시 한 번 할아버지의 목소리였다.

 

    참, 작은할아버지는 안 온다.
    네?
    안 와.
    ……왜요?

 

    노인이 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눈길에 윤은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녀의 질문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는데도 그랬다. 노인의 눈길에는 피로가 담겨 있었다. 그는 윤을 잠시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보리차 통을 냉장고에 되돌려 놓았다.

 

    그 녀석은 김 여사네 집에 계속 있기로 했어.

 

    혼잣말에 가까운 중얼거림이었다. 김 여사는 아마도 승용차로 작은할아버지를 태우러 오던 그 할머니일 터였다. 윤은 이번 여행에도 그 할머니가 동행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가끔 흘리는 말들을 기억한 덕분이었다. 작은할아버지는 언제나처럼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된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윤은 그가 언제 돌아오는지 알 수 없었다. 돌아오기는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할아버지는 헛기침을 하고 윤을 바라보았다.

 

    몸도 안 좋다면서. 우리 신경 쓸 것 없다. 가서 쉬어.

 

    신경 쓸 것 없다는 말에 무엇이라고 대꾸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윤이 머뭇거리는 사이 노인은 안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식사는 하셨어요?

 

    윤은 그의 등을 바라보며 물었다. 노인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윤은 그 순간 자신의 태도가 우습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노인에게 근본적으로 깊은 애정이 없었다. 그런데도 이 집은 그녀와 노인의 경계를 불분명하게 만들고는 했다. 그들은 가족이 아니었지만 함께 살고 있었다.
    어쩌면 그뿐만이 아닌지도 몰랐다. 윤은 얹혀살면서도 아르바이트나 과외조차 하지 않는 잘난 데 없는 스물한 살이었다. 그것이 객관적인 세상의 평가였다. 그녀는 매번 그 사실에 죄책감을 느껴야만 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노인은 아직까지 한 번도 돈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고통스러울 정도로 예의바른 침묵이었다. 생활비를 부쳤다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말이 스쳐 지나갔고, 윤은 노인에게 무슨 말이든 건네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할아버지, 저는.

 

    그러나 거기까지 떠오른 말은 거기에서 멈췄다. 정말로 입 밖에 낼 수 있는 말은 없었다. 그사이 노인은 기침을 하며 안방 문을 열었다. 그래 그럼 난 들어가서 좀 쉴 테니까, 너도 가서…… 중얼거리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쉬어라.

 

    그 말을 끝으로 문이 닫혔다. 윤을 거실에 둔 채 방 안의 노인이 TV를 틀었다. 나지막한 뉴스 소리가 새어 나왔다. 1층 거실 창밖으로는 평소와 다름없이 햇볕이 내리쬐는 마당과 장난감 농구대가 보였다. 그 모습에 윤은 돌연 조용한 집이 그녀의 등을 떠밀고 있는 것을 느꼈다. 집이 그들을 가깝게 만들수록 비밀이 늘어났다. 누군가와 가까워질수록 비밀과 슬픔이 생겨나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의 방에는 여전히 잠든 고양이를 닮은 농구공이 놓여 있었다.
    언제까지 이곳에서 지내게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모든 것은 그로부터 비롯되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모든 것이란 무엇을 뜻하는지, 그녀는 그조차 알 수 없었다.
    윤은 계단을 밟고 올라서려다가 걸음을 멈췄다. 팬티가 보이게 비뚤어져 있던 파자마 바지를 고쳐 입었다. 계단을 내려가 거실 테이블로 다가갔다. 테이블 주위에는 아직도 남자 친구가 흘린 과자 가루들이 떨어져 있었다. 그녀는 티슈에 물을 적셔 과자 가루를 닦아냈다. 마루 틈새의 이물질을 빼내려 시도했다. 그사이 휴대폰에서는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림이 울렸다. 일요일에 보지 못한 외장 하드 속 영화에 대한 남자 친구의 메시지였다. 예상 밖으로 그는 잃어버린 고양이에 대해 어떤 말도 꺼내지 않고 있었다. 그가 고른 영화는 노인과 소녀의 사랑에 대한 슬프고도 작품성 있는 내용이라 했다. 메시지를 확인한 윤은 답장 보내기를 미룬 채 계속해서 마루를 문질렀다.

 

 

 

 

 

 

 

 

 

 

 

 

작가소개 / 최영건

1990년 출생. 2014년 《문학의 오늘》 신인문학상에 단편소설 「싱크홀」이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17년 민음사에서 장편소설 『공기 도미노』를 출간했다.

 

   《문장웹진 2017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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