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하의 다음 외 1편 - 강혜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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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빙하의 다음

 

 

강혜빈

 

 

 

 

    울상을 짓기도 전에 얼어버리는, 눈송이를 모아서 무엇을 만들 수 있을까

 

    오늘은 우산을 잊어버렸어 어제도 그랬고 그제도 그랬지 잃어버리기 위해 다음을 준비했어 접었다 펼치면 튀어 오르는 물방울처럼 다음의 다음을 다음의 다음다음을…… 아니, 준비만 해서는 안 됐어 기지개 켜는 법을 떠올리려고 걸었어 얼어붙은 풀장처럼 뚱뚱해진 거리에서 속옷 위에 겉옷을 겉옷 위에 속옷을 입은 사람들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미끄러진다 옆 사람의 목도리를 잡아당기면서 서로의 뒤통수에 대고 악을 써

 

    좋았니? 좋았어?

 

    보라색 아침이었어 보타이를 맨 쥐들이 다락까지 몰려왔거든 나는 아무도 입지 않은 웨딩드레스처럼 잔뜩 구겨져 씨 없는 포도를 껍질째 삼키고 있었지 쪽창 밖으로 파리한 나무들이 둥둥 떠다녔어 남의 집 티브이 속에서 누가 대신 울어 주길 기다리면서 지금 울리는 전화벨은 여기의 것인가, 저기의 것인가 눈알을 굴려 봤자 눈보라가 지나가면 기억하는 채널은 씻은 듯이 사라졌어 전파를 지우면서 내리고 날개를 지우면서 또 내리는, 저것들은 다 뭘까

 

    하얀 지점토로는 지구도 만들고, 사람도 만들 수 있다

 

    정말이지? 손바닥 두 개를 모으면 둥근 방이 되니까 수도꼭지에 대고 깨끗한 물도 받을 수 있으니까 만약에 우리의 손 안에서 북극곰이 태어난다면…… 작았던 눈뭉치가 구르고 굴러서 마당에 심은 나무보다 커다래져서 울타리를 부수고 다닌다면 나는 폭신한 이불 속에서 꼼짝없이 당하고 있을래 부드러운 건 어쩐지 무섭지 오늘의 놀이는 모두 끝났단다 우리가 만든 덩어리는 대답이 없고 너는 차라리 입 속에 더 따뜻하고, 더 두꺼운 솜을 넣어 주겠지

 

    손등에 닿기도 전에 녹아버리는, 눈송이는 너무 착하기만 해

 

    오늘은 기분을 잃어버렸어 어제도 그랬고 그제도 그랬지 잊어버리기 위해 다음을 준비했어 당겼다 놓으면 날아가는 화살처럼 다음의 다음을 다음의 다음다음을…… 아니, 준비만 하지는 않았어 우는 아이를 찾는 사람처럼 이리저리 흔들렸지 더 추웠던 날과 덜 추웠던 날을 구분하지 못하는 풍경처럼 두리번거리며 우리는 자꾸만 몸에 맞지도 않는 거짓말을 껴입고 하얗게 질린 도시보다 비대해져서 서로의 뒤통수에 대고 악을 써

 

    좋았니? 좋았어?

 

 

 

 

 

 

 

 

 

 

 

 

 

홀로그램*

 

 

 

 

 

    너는 하루 종일 썰고 있지
    차갑고 딱딱한 감정을
    도마는 불쌍해, 아주 불쌍해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눈과 입술이 반대라니
    끼릭끼릭 웃음을 참고 참다가
    불이 닿기도 전에 끓는 주전자

 

    우리 집에는 우리가 살았고
    유령 같은 구름 한 점 없었는데
    대문 앞을 지나가는 이웃들은
    소금을 끼얹고 잠든대

 

    엎드려서 일어날 줄 모르는
    이런 접시에는 무엇을 담지
    그런 그림자는 아무도 안 사가고

 

    미안해 미안해 오늘은 햇빛처럼
    여러 가지 각도를 가져서
    해가 돌아눕도록 가만히 두어서
    까마귀들이 손등을 쪼는 동안

 

    침대보가 펄럭이며 머리를 덮으면
    눈보다 먼저 구두를 엎어둬
    세상에 비슷한 발들은 많으니까

 

    너는 하루 종일 꾸고 있지
    싱겁고 납작한 꿈을
    우리는 깨끗해, 아주 깨끗해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절대로…… 미안하다고 말하면 안 돼
    미안해 할 사람이 없는데
    미안하다고 말하면
    용서를 받아야 할 것 같고
    용서를 받으면
    이해를 받아야 할 것 같고
    시시한 일이 무서워지고

 

    그런 칼이 아니었는데
    그런 자세가 아니었는데

 

    아직 꿈속이구나?

 

    그만 일어나자, 타는 냄새가 나
    너는 자고 나는 머리를 흔들지
    흔들고 흔들면 몸속에서 누가
    먼저 흔들리는 것 같아서

 

    연기 속에서 목소리가 졸아든다
    잘못 빨고 잘못 말린 스웨터처럼
    순서를 잘못 배워서
    뒤늦게 잘잘못을 따지는 사람들처럼
    그럼에도
    서로를 껴안는 날실과 씨실처럼

 

    절대로…… 괜찮다고 말하면 안 돼
    괜찮아도 되는 일이 없는데
    괜찮다고 말하면
    용서를 해야 할 것 같고
    용서를 하면
    우리가 졌다는 미신이
    정말 사실이 되고
    시시한 일이 무서워지고

 

    그럴 사람이 아니라니
    그런 믿음은 잘 썰리고

 

    나의 검은 천사
    그렇게 말하려다 말고
    나는 너를 쓰다듬는다
    너의 뒤통수, 동그란 뒤통수를

 

    우리 집에는 우리가 당연히 살았는데
    아무도 나오지 않으니까
    몸이 조금 차가워지고
    뒤를 돌아보게 돼

 

    나는 아직도 코가 막혀서
    누가 방 안을 들여다보고 있어서
    우리만 한 동그라미를 빼면
    세상은 까맣게 그을릴 수 있겠지만

 

    방바닥에 모르는 접시들이 누워 있네
    나는 여기에 앉아
    밥도 먹는다

  *  우리는 무지개처럼 한 점에 기록된다.

 

 

 

 

 

 

 

 

 

 

 

 

 

작가소개 / 강혜빈

2016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문장웹진 2017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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