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에 대한 몇 가지 단상 - 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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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in문학]

 

문장웹진 비평 기획
 

    2017년 3월부터 [비평in문학]에서는 비평적 글쓰기 형식의 다양한 방법을 비평가 자신의 실험을 통해 직접 만들어보고자 합니다. 자유로운 주제로 비평 양식에 대한 이론을 실제 비평으로 실천하는 글들이 이어질 것입니다. 비평의 효용과 기능에 대한 회의를 멈추기 어렵지만, 비평을 읽지 않고 쓰지 않는 문화가 더 낫다 생각할 수 없습니다. 비평의 새로운 정동과 문제의식을 스스로 요청하지만, 그것이 기존의 모든 비평을 폐허로 만든 자리에서만 가능하리라 판단하지는 않습니다. 한국문학 비평의 고답성 혹은 무용함에 대한 비판에 귀 기울이겠습니다. 앞으로 [비평in문학]은 ‘비평가’로서 어떤 글쓰기를 창안하고 실천할 수 있을까 하는 비평가의 고민을 구체화하는 장이 될 것입니다.

 

 

익명에 대한 몇 가지 단상

 

 

정은경

 

 

 

 

미스터리

 

    지난 학기 장르서사를 공부하면서 느낀 것 중의 하나는 미스터리는 철저히 근대 도시의 산물이라는 것, 그리고 도시의 익명성에 바탕하고 있다는 것이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사는 도시의 익명성은 카페에 앉아 타인의 수다를 백색소음과 배경으로 처리하며 자기 일에 몰두할 수 있는 자유로움을 선사하지만, 한편 어느 순간 그 익명들을 범죄자로 돌려세울 수도 있는 불확실성과 공포를 내장하고 있다. 과거 농촌공동체 사회의 ‘이웃’으로 얽힌 관계에서 현대적 의미의 ‘타자성’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고, 설명되고 이해되지 않은 뜻밖의 사건과 미스터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미스터리 장르의 번성은 익명성이라는 일상의 수수께끼와 함께 발전된 것이고, 한편 프로이트의 무의식 발견이라는 복수적 자아의 등장과 함께 ‘나는 누구인가, 너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에 대해 끈질기게 추궁해 온 근대적 신경증과도 맞물려 있다.1)

  1)  강화길의 「호수-다른 사람」(《악스트》 2016년 9/10)은 이러한 타자성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미스터리 문법으로 교묘하고 흥미롭게 형상화한 작품이다.

 

 

다정한 무관심

 

    구병모의 「한 아이에게 온 마을이」(《리터》, 2017.6/7)는 도시생활을 하던 부부가 한 산골 마을로 이사해서 겪는 불편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임신 4개월째로 접어든 정주는 교사인 남편의 전근 발령을 따라 시골로 이사 오고, 그녀가 도시에서 누렸던 익명의 영토는 ‘다정한 이웃’에 의해 남김없이 장악된다. 김 할머니를 비롯한 이웃들은 불쑥불쑥 그녀의 집을 방문, ‘관심과 호의’를 앞세워 그녀의 사적인 시공간을 헤집어 놓고, 남편의 직업은 물론 아이의 성별에 대한 호기심, 애를 낳지 않는 젊은 여자들에 대한 비난, 가부장적 가치관의 강요 등을 ‘딸 같고 며느리 같고’라는 친근함에 버무려 쏟아낸다. 학교 업무 이외에 마을 공공사업 등에 불려 다니는 남편처럼, 작은 마을에서 자신의 일상을 온전히 이웃에게 내어준 정주는 그들의 호명과 강요 속에서 꼼짝없이 ‘젊은 새댁’이라는 정체성에 갇히게 된다.
    택배기사의 잦은 방문과 슈퍼 주인에게 얻어먹은 커피 한잔조차 이웃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 완강한 결속을 겪으면서 정주는 이제까지 겪어 보지 못한 타인́의 육박을, 폭력성을 감지하게 된다. 한편 남편의 잦은 외출로 이웃의 무분별한 침입에 방치된 정주는 뜻밖의 타인에게 편안함을 느끼게 되는데, 그것은 조폭 같은 외모를 한 슈퍼 주인 최 씨이다. 정주는 바싹 깎은 머리에 한쪽 눈두덩 아래 꿰맨 자국을 지닌 최 씨를 처음 접하고 그를 경계했으나 차츰 그의 무심함에서 어떤 안온한 빈 공간을 보게 된다. 커피를 사러 슈퍼를 찾은 그녀에게 최 씨는 ‘엄마 될 사람이 무슨 커피야’라는 잔소리 대신 마침 커피메이커에서 내린 커피를 묵묵히 건네주고 침묵한다.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티타임과 침묵의 대화 속에서 정주는 그녀가 이제까지 도시에서 익혀 왔던 타인에 대한 예의를 기억해 낸다.

 

    “밀랍으로 봉한 봉투를 뜯어 열 듯이 그에게서 뭔가 끌어내고 싶은 이야기는 없었다. 상대방이 먼저 입을 열고 싶어 어쩔 줄 몰라 하는 눈치가 엿보인다면 적당한 추임새라도 넣어 주었겠지만, 정주는 어차피 오랫동안 알고 지낼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그의 눈 밑 상처의 배경에 훅 불면 흩날릴 관심을 갖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타인에 대한 최대한의 예의라 믿었고, 김 할머니를 비롯한 동네 어르신들을 그동안 보아 오면서 깨달은, 타인에 대한 가장 바람직한 자세였다.” (18~19쪽)

 

    그들은 정체성에 대한 어떤 정보의 교환도 없이, 익명과 타자성이라는 모호함과 간극 속에서 편안할 수 있는 현대인의 포즈를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흉터와 개인 신상에 대한 이해 없이도 가능한 그 편안함은 어떤 관계를 맺지 않아도 좋다는 익명의 스침이고, 그 익명은 적대나 환대 등 어떤 작용하는 힘들과 무관한 무심함이다. 그것은 서로에 대한 ‘소외’이면서 또 한편 서로에 대한 무한한 ‘자유’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 소외이면서 자유인 익명의 관계는 타인을 ‘모르는 채로’ 그대로 수긍하면서도 타인의 부름에 귀 닫지 않는다.
    남편 이완이 시내에 두고 온 정주의 핸드폰을 찾으러 간 사이 정주는 양수를 쏟고, 폭우 속에 기진맥진 슈퍼까지 걸어온 정주를 발견한 최 씨는 트럭을 몰아 시내 종합병원으로 달려간다. 최 씨 덕분에 아이를 무사히 낳은 정주는 조리를 하면서 남편과 가족에게 다시는 그 시골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정주는 그녀가 시골 마을에서 겪은 그 낯선 ‘과도한 친밀함’이 ‘미지’와 ‘타자성’을 허용하지 않는 인간 탐욕이기도 하며, 그것이 시시때때로 환멸과 적대로 둔갑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정주는 문득 러시아워에 어깨를 부딪치거나 서로 발을 밟고 밟히는 사이였던, 다시 스쳐 갈 일 없으면 형상이 떠오르지 않는 수천수만의 얼굴들이 그리워졌다. 누구도 정주를 알지 못하며 정주 또한 그들을 모르는 세계에서의 불안과, 서로에 대해 잘 안다고 믿어 의심치 않으나 실상은 아는 것이 없는 세계에서의 안식 가운데 선택을 요하는 문제에 불과했다. 환멸과 친밀은 언제라도 뒤집을 수 있는 값싼 동전의 양면이었고, 이쪽의 패를 까거나 내장을 꺼내 보이지 않은 채 타인에게서 절대적 믿음과 존경과 호감을 얻어 낼 방법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때 폭우 속에서 자신을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의 정체나 이완의 내력이나 소재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고 병원까지 실어다 주었던 최 씨의 얼굴이 갑자기 생각나지 않아 정주는 의아해졌다. (…) 그보다는 그녀가 한 번쯤 고개를 제대로 들어 그의 얼굴을 마주 들여다본 적이 없어서일 터였다. 그대로 이렇게 인상 자체가 떠오르지 않을 줄 몰랐다. 마을을 떠날 정주에게 그는 오로지 눈 밑 상처만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었고 그것이 왼쪽이었는지 오른쪽이었는지도 분명치 않았다.”(24쪽)

 

    위 인용문에서 정주는 서로 잘 안다는 안심과 부자유 대신, 익명의 자유와 불안을 선택한다. 위에서 정주가 그리워하는 러시아워의 익명의 스침, 그리고 익명의 최 씨에게서 느끼는 다정한 무심함에는 카뮈의 ?이방인?이 겹쳐 있다. 뫼르소는 아랍인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끊임없이 어머니에 대한 불효를 추궁 받고, 사회적 관습과 기대에 부응하지 않는 행동으로 법정과 여론의 질타를 받아 사형선고를 받는다. 뫼르소는 타인과 신부로부터 죄의식과 고통을 요구받지만, 그는 ‘이방인’처럼 그에게 요구되는 또렷한 정체성을 거부하고 ‘당위적 인간’ 바깥에 남기를 고집한다. 뫼르소에게는 타인과 공유하지 않는 자신만의 삶의 윤리, 자신만의 사랑의 방식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타인에게 복속되고 규정되기를 거부한 뫼르소는 사형집행 전에 다음과 같이 밤하늘에서 익명의 표정을 발견한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괴로움을 씻어 주고 희망을 안겨 주기라도 한 듯 표적과 별들이 가득 찬 밤하늘을 앞에 보며,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다정스러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그처럼 세계가 나와 다름없고 형제 같음을 느끼며, 나는 행복스러웠고, 지금도 행복스럽다고 생각했다.” (알베르 까뮈, 이휘영 역, 『이방인』, 문예출판사, 1990, 144쪽)

 

    돌에서 고통과 신의 얼굴을 보라고 하는 신부의 끈질긴 요구에도 불구하고 뫼르소는 끝내 돌이나 어떤 사물에도 인간적인 표식을 들씌우지 않는다. 그 이해와 동일화는 ‘나’를 안심시켜 줄 수 있을지는 모르나, 그 관계맺음은 타인을 소외시키고 ‘나’를 구속할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뫼르소가 본 밤하늘의 다정한 무관심은 타자를 ‘모르는 자’로 그대로 수긍했을 때 발현되는 익명의 표정인 것이다.

 

 

정체성

 

    익명은 어떤 원근법과 권위도 용납하지 않는 공평무사이기 때문에 다정한 무관심을 선사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폭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가령 운전할 때 더러 겪는 무차별한 폭언과 실랑이, 인터넷 가상공간에 넘쳐나는 익명의 폭언들이 그 예들이라 할 수 있다. 익명의 소통은 레비나스의 타자의 윤리학 위에 성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쉽게 말하고, 함부로 판단하며, 거침없이 심판하는 야만의 가면무도회가 되기 쉽다. 파편과 파편의 만남은 종합적 판단과 예의를 지운다.
    도선우의 ?저스티스맨?은 이미 우리의 일상의 영토가 되어버린 SNS와 인터넷상의 익명의 소통이 갖는 폐해와 폭력을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작품이다. 소설은 연쇄살인범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나, 그 중심에는 ‘지하철의 개똥녀’와 같은 스캔들에 대한 강력한 문제의식이 있다. 가령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는 원인과 과정과 결과라는 게 공존하기 마련인데 우리는 흔히 결과만을 두고 모든 것을 판단하므로 오류가 발생하기 쉬우며 그러한 집단 오류가 또 다른 이차적인 문제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우려와 항의 같은 것. 연쇄살인범 이야기는 익명의 스침과 집단 오류에서 빚어진 파탄과 복수를 따라가고 있다. 무법천지의 가상공간의 정의를 바로잡기 위해 나선 자는 바로 저스티스맨. 그는 평범한 보험설계사였으나 술 접대로 과음을 한 다음날 SNS상의 ‘오물충’으로 전락한 자이다. 거리에서 토사와 오물 위에 잠들어 있는 한 장의 사진이 네트워크상에서 급속도로 전파되고, 급기야 신상털기로 신분이 공개되자 그는 사회적으로도 매장된다. 이에 대한 응징에 나선 자가 바로 오물충의 변신인 저스티스맨이다.
    그러나 익명성이 저러한 오류와 부당함을 발생시킨다 하여 익명의 소통을 금지하거나 실명화 할 수는 없다. 익명성의 보장은 개인의 프라이버시와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는 근대 자유민주주의의 이념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운명의 한 부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밀란 쿤데라는 한 에세이에서 다음과 같이 질문한 바 있다. “개인이란 무엇인가? 어디에 그의 정체가 있는가? 모든 소설이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추구한다. 사실 자아는 무엇으로 정의되는가? 한 인물이 행하는 것 그의 행위들에 의해서인가? 하지만 행위는 행위자를 벗어나며, 거의 언제나 그를 배반한다.”2) 이어서 쿤데라는 “우리는 행위 한다고 생각하고, 우리는 생각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 안에서 생각하고 행위 하는 것은 타자 혹은 타자들이다.”라는 토마스 만의 말을 빌려 프로이트와 라캉의 발견을 승인한다. 쿤데라는 ‘존재의 개진’이라는 하이데거의 예술론에 기대어 소설은 이제까지 망각되었던 존재의 영역을 발굴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는 앞서 개인이 굳건한 정체성과 행위에서 살아가지 않는다고 했던 것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쿤데라의 언급이 아니더라도, ‘고정 불변하는 자아란 없다’는 불교의 무아론(無我論)처럼, 개인은 하나의 이름이나 정체성으로 규정되거나 붙박이지 않는다. ‘나’란 타자의 시선과 호명에 의해 다양한 정체성 ― 가령 엄마, 선생님, 딸, 단짝 친구, 동료 ― 의 가면을 쓰고 역할을 수행(perform)하는 가변적 존재일 뿐이지 단일한 성채로 존재하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익명이란 타자가 보지 못했던 존재의 무명의 영역이고, 언제든 표출될 수 있는 잠재태이다. 존재의 서사를 구구절절 이야기하는 소설이란 것도 단일한 이름표 뒤에 숨은 비동일성의 영역을 탐사하는 작업이다.
    ‘익명으로의 잠행’을 다룬 김승옥의 「야행(夜行)」(《월간중앙》, 1969)은 표면적으로는 도시의 위선을 비판하는 소설이지만, 근본적으로는 현대인의 정체성을 다룬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주인공 현주는 남편과 같은 은행에 다니지만, 동료들에게 결혼 사실을 감추고 서로를 ‘박 선생님’ ‘미스 리’로 부르며 연극적 삶을 살아간다. 기혼여성을 쓰지 않는 직장 규율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오랜 세월 이 위장에 길든 현주는 점차 자신의 연극에 혐오감을 느끼게 되고, 밤거리의 익명의 여자가 되어 남자의 유혹을 기다리게 된다. 현주는 자신의 야행이 직장에서의 가면놀이에 대한 환멸감에서 비롯된 것이라 말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정체성의 물화, 권태로부터의 일탈, 즉 “자기의 예정된 생활로부터, 자기가 싫증이 날 지경으로 잘 알고 있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해 보고 싶은 욕구”의 표출임을 알 수 있다. 그녀는 8월의 어느 한낮 자신을 여관으로 끌고 들어간 낯선 한 남자를 경험한 이후부터 그 공포와 혼란을 다시 갈망하게 된다.

  2)  밀란 쿤데라, 김병욱 역, 『사유하는 존재의 아름다움』, 청년사, 25쪽.

 

    “자기는 자기의 더러움을 보았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하고 싶었다 .마침 한 사람이 자기 곁을 지나가고 있었다. 자기는 그 사람의 손목을 붙잡고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데려다달라고 애원하였다. 그 사람은 자기를 데려다주었다.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더 나은 곳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적어도 ‘이곳’이 아닌 것만은 틀림없었다.”(김승옥, 「야행」, 『무진기행』, 문학동네, 1995, 350쪽)

 

    밤거리에서 낯선 남자의 억센 끌어당김을 기다리는 일탈의 욕망은 포로수용소의 울타리를 뛰어넘는 상상으로 반복된다. 이러한 현주의 욕망은 타자의 시선에 봉인된 ‘자아’를 해체하여 새로운 자아를 실험하려고자 하는 존재의 개진에 대한 갈망이며, 사물화 된 일상과 추상화에 대한 거부이다.
    자아동일성이란 전적으로 타인과의 관계에서 성립하는 것으로 끊임없이 해체되고 재구성되는 것이다. 개인에 의해 수행됨으로써만 현현되는 정체성이란 따라서 그 사람의 실체라기보다는 가면이다. 그것은 의복처럼 적절하게 선택되고, 바뀔 수 있다. 개인(person)의 어원이 페르소나(persona: 가면)이듯, 타인과의 관계에서 성립되는 정체성이란 실재계의 습격을 막는 일종의 필수적인 보호막이고 의례이다. 그것은 구성되고 해체되고, 또다시 회복되거나 폐기될 수 있는 무수한 ‘이름표’들이다.
    쿤데라의 ?정체성?은 회복되고 다시 구성되어야 하는 ‘잠재적 정체성’을 재치 있게 다룬 작품이다. 소설의 주인공인 샹탈과 장-마르크는 이제 서로를 탐색하지 않아도 될 만큼 익숙해진 커플이다. 서로에 대한 사랑과 믿음 위에 평온한 일상을 지속하지만, 그 안온함이 그들의 삶에 어떤 활기와 긴장, 가능성을 제거하고 있음을 감지한 장-마르크는 샹탈에게서 ‘낯선 얼굴’, 그러니까 과거 그가 알던 생동감 넘치는 여자가 아닌 다른 여자의 얼굴을 본다. 그리고 마르크는 그녀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생각해 낸다.

 

    “아니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의 시선이 아니라 천박하고 음탕한 익명의 시선, 호감이나 취사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고 사랑도 예의도 없이 필연적으로, 숙명적으로 그녀 육체로 쏟아지는 시선이다. 이런 시선들이 그녀를 인간 사회 속에 머무르게 하고 사랑의 시선은 그녀를 사회로부터 유리시킨다.” (밀란 쿤데라, 이재룡 역, 『정체성』, 민음사, 1998, 43쪽)

 

    “남자들이 더 이상 나를 돌아보지 않아요.”라며 자신의 노화와 어떤 떠밀림에 의기소침해 있는 샹탈을 위해 마르크는 익명의 연애편지를 쓴다. 마르크는 뭇시선에 의해 만들어지는 ‘매력적인 여성’이라는 샹탈의 잃어버린 정체성을 되찾아 주고자 한 것이다. 그는 기꺼이 익명의 시라노가 되어 샹탈에게 편지를 보내고, 그녀는 점차 그 숭배의 시선 속에서 유혹적인 여인으로 바뀌어 간다. 이야기는 샹탈이 익명의 송신자가 마르크라는 것을 알게 되고, 결국에는 파국 끝에 일상의 회복을 암시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결말이 아니라 마르크와 샹탈이 서로를 ‘익명의 유혹자’와 함께 정체성의 가면무도회를 펼쳐 나가고, 이 과정에서 서로를 다시 물음표로 돌려세우면서, 서로를 다시 탐색하고 그동안 망각했던 존재의 영역을 다시 개진한다는 데에 있다. 그것이 어떤 부분이든 타자에게 새로운 이름표를 부여받을 때, ‘우리’는 새로워지고 달라지며 삶의 밀도와 부피를 늘려 간다.

 

 

익명 소설

 

    구병모의 「어느 피씨주의자의 종생기」(《창작과 비평》, 2017 여름호)는 익명 저자와 독자와의 소통에 얽힌 해프닝을 다룬 작품이다. 6권의 장편소설을 펴낸 소설가 P씨는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인터뷰에도 응하지 않는 익명의 저자로 설정된다. 사건은 작가 P씨가 신작을 발표하면서 발생한다. 독자들은 P씨의 SNS 계정에 그들의 독후감과 불만을 토로한다. 주된 불만은 작가 P씨가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 청각장애인 등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방식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는 것. 가령 ‘외국인 노동자를 악인으로 그리는 것은 편견을 고착하는 것이고, 청각장애인을 과도하게 선하게 그린 것은 장애인은 모두 착하고 순박해야 마땅한 사람들이라는 고정관념을 강요하는 것’ 등등.
    대중들의 거듭된 질타에 대해 침묵으로 버티던 P씨는 SNS와 출판사를 통해 “순수창작이며, 누구를 폄하하거나 공격할 의도로 씌어진 게 아니”라고 해명하고 다큐와 창작의 차이를 설명하지만, 대중의 비난은 더욱 가열되고 결국 P씨는 절필하고 만다. 이 소설의 주된 문제의식은 이즈음 이슈가 되고 있는 ‘정치적 올바름’이다. 작가는 독자들이 요구하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회의적 시선을 던지고 있지만 이를 직접적으로 표출하지는 않는다. 작품에서 P씨는 표면적으로는 패배하지만, 작가는 P씨의 절필과 침묵 속에 작은 항의를 담아 놓는다. 그 항의는 문학에 있어서의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논리적 주장이 아니라 독자들이 생각하는 ‘작품과 실존 작가의 등식’을 깨어버리는 것이다. 즉 독자들은 작품을 통해 P씨를 ‘안정적 수입원이 있는 30대 중반의 남성, 값비싼 디지털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는 미혼의 프리랜서이거나 직업 작가’ 등으로 짐작하고 그의 실존적 가치관을 비난하지만, 사실 P씨는 네 아이를 둔 엄마이자 친정 식구들의 빈곤으로 허덕이는 가정주부라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이 정체성 정치에 근간한 ‘정치적 올바름’을 의문시하고 있는 것이다.
    주류 정치담론에 가려져 있던 비주류의 약자의 목소리와 권리를 되찾아 주자는 정체성의 정치는 일종의 ‘인간’ ‘시민’이라는 보편 인권 속에 은폐되었던 차이들에 주목하고 이를 배려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긴요한 것이다. 그러나 구병모의 작품에서 P씨가 ‘소설가’ ‘가정주부’ ‘30대 중반의 화자’로 변전할 수 있듯, 한 개인의 정체성이란 어떤 정체성 ― 여성, 동성애자, 외국인 등등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 어떤 지정석에 앉아 있기만을 강요한다면, 그 지정석이 아무리 배려와 올바름으로 치장된 자리여도 그것은 일종의 폭력이 될 수 있다.
   「어느 피씨주의자의 종생기」에서 보여주는 익명 작가의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요?’라는 조그만 항의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익명성, 정체성, 타자성 등등. 그 관계의 양상을 하나의 논리로 규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구체적인 상황과 맥락에 따라 ‘익명성’의 의미는 다르게 규명되어야 할 어떤 것이다. 다만 작가가 된다는 것과 익명성에는 모종의 필연성이 존재하는 듯하다. 문학사적으로 많은 작가들이 필명을 사용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 문학적 삶은 곧 실존의 이름과는 다른 삶을 사는 것이다. 물론 문학사적으로 필명 혹은 익명을 선택한 이유는 작가마다 다르다. ?전태일 평전?(조영래), ?죽음을 너머 시대의 어둠을 너머?(황석영, 이재의, 전용호), 조나단 스위프트, 조지 엘리엇 등은 검열과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 때문에 자신의 본명을 지운 경우이지만, 에밀 아자르(로맹 가리), 로버트 갤브레이스(조앤 롤링), 제인 서머(도리스 레싱) 등은 브랜드화 된 저자 대신 익명을 택함으로써 새로운 문학적 영토를 개척하려 한 경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작가들의 필명은 실체를 공개하든 그렇지 않든, 일상의 존재가 아닌 문학적 존재로서 사회적으로 관계 맺고자 하는 의지의 표명인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그것은 실존적 자아의 폐기인가, 혹은 반사회적 일탈을 위한 것인가.
    몇 년 전 《문장 웹진》에서 기획 연재한 ‘익명 소설’을 눈여겨본 적이 있다. ‘작가의 브랜드화’에 저항하고 금기와 억압에 맞서 ‘끝 간 데 없이 신랄해지고 야해지고’ 싶다는 젊은 익명의 작가군들의 실험은 성공 여부와 무관하게 흥미로운 것이었다. 본명이나 필명 대신 M, V, H, W 같은 이니셜로 이들은 어떤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줄 것인가. 그러나 이들 익명 소설은 사실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물론 아랍인을 화자로 내세운 「해피 뉴 이어」나 기성문단에 대한 테러리즘을 외친 「18인의 노인들」, 에로티시즘의 감성으로 그린 「물고기자리」 같은 몇 편은 충분히 매력적이고 재치 있는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이들 소설이 반드시 익명으로 발표되어야만 했을까, 라는 생각에는 회의적이다. 왜냐하면 에로티시즘이나 기성 문학에 대한 비판 등은 우리 시대에 강고한 금기사항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한편에 내놓은 작가 브랜드화에 대한 저항은 설정 자체를 의문시하게 한다. 왜냐하면 이들 익명 작가들의 기존 브랜드를 모르기 때문에 그 차이와 간극에서 발생하는 놀라움을 독자는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이 익명 작가들은 좀 더 자전적이어야 하지 않았을까.
    오스카 와일드는 “그에게 가면을 주면 진실을 말할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는데, 나는 익명으로 말한다는 것, 작품을 쓴다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복면가왕>과 같은 프로그램에서 대중들이 향유했던 것은 가수의 속임수나 수수께끼가 아니라 ‘가면’을 빌려서 들을 수 있는 그들의 진짜 노래였을 것이다. 최근 재미있게 읽고 있는 엘레나 페란테라는 이탈리아 작가는 오랫동안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활동해 온 저명한 익명 작가이다. 그런데 그의 강렬하고 흡인력 있는 이야기에서 내가 느낀 것은 그의 어떤 강렬한 실존의 흔적들이다. 가령 또렷하게 실감할 수 있는 생동하는 인물들과 경험들. 엘레나 페란테에게는 진짜 자기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익명’이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익명이 소외의 결과물이든 혹은 자유의 방편이든 그것은 보호되어 마땅한 ‘공유지’와 같은 것이다. 그 탈영토화 된 공간에서 사람들은 다른 미래를 꿈꾸고, 새로운 자아를 빚어내고, 타자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문학은 본질적으로 이 익명성을 닮아 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서로에게 미스터리가 되고 실정법으로 금기된 말들, 실정법에 누락된 말들, 일상적 자아에 숨겨진 층위들을 이야기하고, 그 꿈과 저항을 끌어와 일상을 가꾸고 바꾼다. “생은 다른 곳에”라는 랭보의 말은 언제나 충분하지 못한, 정체성의 갑옷을 가만히 풀어 놓는 시적 언어가 아닌가.

 

 

 

 

 

 

 

 

 

 

 

 

 

정은경
작가소개 / 정은경

200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평론으로 등단, 비평집으로 『지도의 암실』 『기도이거나 비명이거나』 등이 있음.

 

《문장웹진 2017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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