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성 기억 - 윤고은
목록

[커버스토리]

 

 

식물성 기억

– 정미경 <내 아들의 연인>과 주차장

 

 

윤고은

 

 

 

 

 

    <주차의 달인>이라는 게임이 있다. 개발자가 아내의 주차 연습을 위해 시뮬레이션 게임을 만든 게 시작점이었다고 하니, 나는 정말 그 의도에 부합한 사용자였다. 게임을 즐기지 않는 편인데도 매일 20분씩 훈련하듯, 그 게임을 했으니 말이다. 게임 방식은 간단하다. 스마트폰으로 어플을 작동시키면 주차장 화면이 나타나는데, 이미 주차된 차들을 건드리지 않고 내 차를 목표지점에 주차하면 되는 것이다. 당연히 핸들도 있고, 브레이크와 액셀러레이터도 있다. 발이 아니라 손가락으로 조작한다는 게 현실과 다를 뿐. 다음 레벨로 올라가면 또 주차장이 펼쳐지고, 주차 난이도는 점점 어려워진다. 흥미로운 건 이 게임의 시점 변형이다. 내가 운전석에 앉아 바라보는 화면을 가질 수도 있고, 위에서 내려다보는 부감 혹은 조감 형식을 가질 수도 있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언제든, 주인공 시점에서 관찰자 시점으로, 또 관찰자 시점에서 주인공 시점으로 바꿀 수 있다. 나는 관찰자 시점을 좀 더 선호했다.
    그 게임이 내게 남긴 게 정말 주차 실력의 향상이었다면 좋았겠지만, 내가 운전 자체를 반쯤 포기했기 때문에 주차할 일도 없어져 버렸다. 자연스레 이 게임도 내 폰에서 지워졌는데 그렇다고 게임이 남긴 게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니었다. <주차의 달인>은 내게 ‘주차장-뷰’에 대한 친밀감을 남겼던 것이다. 운전은 몸으로 하는 거라더니, 복도를 걷거나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가 저 아래에 펼쳐진 주차장을 보게 되면 갑자기 그 현실이 게임처럼 느껴지곤 했다. 그게 3인칭 시점의 게임 화면이라고 생각하니 벌써 손가락이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그 몰입이야말로 정말 ‘몸으로’ 기억하는 것이어서, 먹통이 된 운전면허증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건 단지 차를 굴리기 위한 허가만은 아닐 거야, 몰랐던 사각지대를 보라는 거지, 사각지대를.
    그 사각지대 중 하나가 주차장이었을 것이다. 주차장은 딱히 내 시선이 오래 머무는 곳이 아니었지만, 현실과 게임 모두에서 주차를 하는 동안 샅샅이 훑을 수밖에 없는 관찰 대상이 되고 말았다. 눈으로, 손으로, 두 발과, 네 바퀴로. 출입구라든지, 이미 들어찬 차들의 배치와 간격, 그리고 내 동선에 대해 여러 각도로 생각해 보도록 부추기는 공간 말이다. ‘주차’라는 말을 곱씹다가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기까지 했는데 많은 활자 가운데서 유독 이런 문장이 도드라졌다. ‘즉시 운전할 수 없는 상태’.
    즉시 운전할 수 없는 차들은 이곳, 주차장으로 온다. 주차장은 대기와 보류의 공간이다. 규격화된 영역들 사이에서 언제 어떤 차가 다시 시동을 걸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에는 암묵적인 약속이 있다. 속도와 깜빡이, 무언의 약속들 말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그 암묵적인 약속을 뭉갠다. 너무 느리거나 빠른 속도, 잘못된 신호 등으로.
    정미경의 소설 <내 아들의 연인>의 누군가도 그런 돌발을 목격한다. 창밖으로, 남편의 차가 규격화된 속도로 빠져나가는 것을 보던 ‘나’는 곧 차 한 대가 너무 빠르게 달려오는 것을 보게 되는데, 결국 그 차는 쿵, 사고를 내고야 만다. 이미 주차되어 있던 벤츠의 백미러 한쪽이 파손되었지만,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운전자는 차에서 내리고 ‘내’게로 점점 가까이 온다. 연둣빛 봄 같은 옷을 입은 그 운전자는 하필이면 ‘내’ 집이 속한 라인으로 들어오고, ‘내’ 앞집을 방문하고, 밀폐된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와 같은 시공간을 공유한다. 잠시 후 파손된 게 107호의 백미러였으며 수리비가 2백만 원이고, 범인을 찾지 못해 엉뚱한 곳으로 불똥이 튀었다는 얘기가 들려온다. 제보를 받는다는 벽보가 붙지만, ‘나’는 침묵한다. 우리에게 CCTV가 필요한 건 24시간 관찰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선택적으로 침묵하기 때문이란 것을 건드리는 지점이다.
    CCTV의 침묵이 단지 기록의 보존-유효기간의 문제라면 사람의 침묵은 좀 다른 문제다. CCTV가 사람보다 공감 능력이 뛰어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타인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건 아니다. 우리는 선택적으로 침묵하고 선택적으로 외면한다. 이건 어찌 보면 시점의 문제일 수도 있는데, 우리는 관찰자 시점으로 보던 일을 주인공 시점으로 그렇게 쉽게 전환하지 못한다. 터치 한 번으로 세상을 보는 각도가 바뀌는 세계도 있지만 그건 확실히 게임일 뿐이다.
    다만 사람의 기억은 일정기간이 지난다고 해서 완전히 폐기되지도 않는다. 기억의 생명력은 사람의 편집욕구와는 관계없이 움직인다. 우리는 ‘無’의 상태로 만들 줄을 모르니 수분을 날려 서서히 말리는 걸 택할 수밖에 없다. 시간, 시간이 수분을 말려 그 기억의 부피를 줄여 주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나’에게는 백미러 사고 목격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신경 쓰이는 존재가 있는데 바로 아들의 연인 ‘도란이’다. 오래전에 가난한 연인 ‘초핀’과의 기억도 그랬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CCTV가 될 수 없는 우리가 기억을 어떻게 정리하는지 보여준다.
    ‘도란이와의 다정했던 시간도, 백미러의 파열음도, 언젠가는 오래전 채집된 식물처럼 바스러질 것이다. 초핀과 내가 그날 느꼈던 몸의 열기가 이제 식물성으로만 기억되듯.’
    이제 시간에 낡아 간 기억들, 수분이 날아간 기억들은 힘이 없을까? <내 아들의 연인> 못지않게 내가 몰입해서 읽은 작품이 <밤이여 나뉘어라>인데, 이 소설은 그 식물성 기억들에 대해 우리가 방심할 수 없다는 걸 보여준다. ‘나’보다 늘 몇 미터 앞서 갔던 친구 P는 이미 빛바랜 존재, 그야말로 ‘식물성’ 존재다. 그러나 P를 알코올과 허무에 푹 젖은, 축축한 천재로만 읽어 가던 나는 어느 순간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뭉크의 도난당한 작품이 어디 있는지 알려준다던 P가 얼굴의 모든 근육을 이용해 스스로 ‘절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P가 내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아니 내가 P가 된 것처럼 느꼈다. 책을 읽다가 잘못된 경로로 빠진 것 같은 느낌에 가까워서 소설 속 ‘나’처럼 서둘러 책을 덮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외면하려고 해도 외면할 수 없는, 그 밀착된 느낌은 몇 번 더 이 소설을 펼치게 했다. 그때마다 매번 처음처럼 놀랐다. 어떨 때는 소설 속에서 P가 소리를 지르는 그 장면이 맨 마지막 장에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방심하고 있다가 놀랐고, 또 어떨 때는 어느 지점쯤 나타날지 기억했기 때문에 내내 가슴 졸여야 했다.
    식물성 기억들은 육식동물처럼 이동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발악과 포효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오랜 시간 ‘몸으로’ 압축된 그 기억들은 유효기간을 가늠할 수도 없다.

 

 

 

 

 

 

 

 

 

 

   

   

변웅필
8월 표지    / 변웅필

변웅필은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 독일 뮌스터 쿤스트 아카데미에서 순수미술을 전공했다. 현재 강화도에서 강아지 만득이와 살며 전업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작가소개 / 윤고은

1980년생. 장편소설로 『무중력증후군』, 『밤의 여행자들』, 소설집으로 『1인용 식탁』, 『알로하』, 『늙은 차와 히치하이커』가 있다.

 

   《문장웹진 2017년 08월호》

 

 

목록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