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카리아트 페미니스트 - 신샛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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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in문학]

 

문장웹진 비평 기획
 

    2017년 3월부터 [비평in문학]에서는 비평적 글쓰기 형식의 다양한 방법을 비평가 자신의 실험을 통해 직접 만들어보고자 합니다. 자유로운 주제로 비평 양식에 대한 이론을 실제 비평으로 실천하는 글들이 이어질 것입니다. 비평의 효용과 기능에 대한 회의를 멈추기 어렵지만, 비평을 읽지 않고 쓰지 않는 문화가 더 낫다 생각할 수 없습니다. 비평의 새로운 정동과 문제의식을 스스로 요청하지만, 그것이 기존의 모든 비평을 폐허로 만든 자리에서만 가능하리라 판단하지는 않습니다. 한국문학 비평의 고답성 혹은 무용함에 대한 비판에 귀 기울이겠습니다. 앞으로 [비평in문학]은 ‘비평가’로서 어떤 글쓰기를 창안하고 실천할 수 있을까 하는 비평가의 고민을 구체화하는 장이 될 것입니다.

 

 

프레카리아트 페미니스트

– 조남주, 강화길 소설에 주목하여

 

 

신샛별

 

 

 

 

    1. 신자유주의적 페미니즘과의 결별 : 왜 프레카리아트 페미니즘인가?

 

    문재인 정부의 페모크라트(femo-crats: feminist bureaucrats) 인선이 화제다. 언론은 ‘최초’가 된 여성들의 예외적 삶의 이력을 소개하고 그녀들의 특출함을 새삼스럽게 조명하느라 바쁘다. 특히 정치적 영역에서 여성이 겪어온 배제와 박탈의 역사를 떠올려보면 임기 내에 남녀동수내각을 실현해보이겠다는 새 대통령의 의지는 우선 반갑고, 그 첫 단계를 밟아나가는 한국사회의 긍정적 변화를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기분은 분명 감격스러운 데가 있다. 그러나 이를 두고 유리천장의 균열 운운하는 세간의 진단은 다소 성급해 보인다. 관행과 전통의 형태로 굳어져 있는 차별의 구조와 폐습이 몇몇 상징적 사건들을 계기로 일거에 사라지리라 기대하는 것은 무망한 일이거니와, ‘유리천장이 깨졌다’는 문장의 분별없는 확산은 여성의 삶이 이전보다는 여러 모로 나아졌다거나 머지않아 나아질 것이라는 안일한 착각을 유도한다.
    한국사회 요직에 여성들이 대폭 기용되는 초유의 광경을 앞에 두고서도 마냥 즐겁지만은 않을 다른 여성들에게 오히려 이목을 집중해야 한다는 동시대의 요청은 조남주의 장편소설 『82년생 김지영』에 대한 열띤 반응에서도 그대로 읽힌다. 이 소설의 주인공 ‘김지영’은 ‘맘충(mom+蟲)’으로 불린다. 하필 한국사회가 리더로서 추앙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여성들의 면면이 매스컴에 화려하게 전시되는 와중에 속수무책 벌레와 같은 신세가 된 여성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은 아이러니한 만큼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것은 ‘여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쉽게 화해되지 않을 차이들, 그 차이들로 인해 벌어질 연대의 와해들, 그 와해들이 초래할 실패들을 연이어 환기하는 한편 지금-여기의 페미니즘이 봉착한 중대한 곤경에 직면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힐러리 클린턴에 대한 낸시 프레이저의 평가는 곱씹어볼 만하다. “클린턴은 확실히 유리천장에 몸을 기울이고 그것을 깨부수는 데 집중하는 종류의 신자유주의적 페미니즘을 구현하고 있습니다. 이미 통치와 비즈니스에서 증가하고 있는 많은 양의 문화자본과 그 밖의 다른 형태의 자본을 보유하고 있는 고등 교육을 받은 특권층 여성을 방해하는 장애물들을 제거한다는 소리입니다. 이 페미니즘의 주 수혜자는 오히려 특권층 여성들입니다.”1) 낸시 프레이저에 따르면 전통적 권위의 해체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페미니즘과 신자유주의는 상호 친화적이다. 남성임금노동자를 핵심에 놓고 설계된 국가주도 자본주의체제가 자기갱신의 도정에서 자유롭고 유연하며 끊임없이 자기계발에 몰두하는 신자유주의적 정신을 재빨리 수혈했을 때, 젠더 부정의를 바로잡고자 했던 페미니즘은 그와 같은 변화에 도덕적 의미를 세공했다. 전지구적 신자유주의가 열어젖힌 새로운 노동시장을 만나면서 페미니즘이 주창하던 바대로 여성은 남성임금노동자에게 종속된 아내‧딸‧어머니의 지위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국가주도 자본주의체제와 사실상 한 몸이나 다름없었던 가부장제적 풍토는 시정되어야 마땅한 것이 됐다. ‘일하는 남편과 살림하는 아내’로 요약되어온 규범적 부부상이 ‘맞벌이 부부’로 변경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요컨대 ‘신자유주의적 페미니즘’은 “한쪽 끝에 위치한 전문적인 중산층 계급의 여성들에게는 유리천장을 부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다른 한쪽 끝에 위치한 여성 비정규직‧시간제 노동자, 저임금 서비스노동자, 가사노동자, 성노동자, 이민자, 수출가공공단(EPZ) 노동자, 소액신용대출자 들에게는 임금소득과 물질적인 안정을 추구하도록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전통적 권위로부터 해방되어 인간적 존엄성, 자기향상, 해방을 도모할 수 있게 해주었다.”2)
    그러나 페미니즘이 신자유주의와 접속함으로써 ‘전통적인 젠더종속’의 질서로부터 여성의 해방을 가속화하고 젠더위계의 극복과 무력화에 성공했을지언정 그 결과가 모든 여성에게 환영받을 만한 것은 아니었다. 페미니즘이 신자유주의와 “위험한 관계에 빠져”3) 정치경제 비판에 소홀해지는 동안 삶의 모든 영역을 시장의 논리가 장악한 탓에 대다수 여성들은 종전과는 다른 방식의 차별을 감당하게 됐다. 이를 낸시 프레이저는 ‘후-전통적인 젠더종속’ 상황으로 파악하고, 여기에서부터 신자유주의적 페미니즘 이후의 페미니즘의 활로를 모색하고자 한다.

  1)  낸시 프레이저, 문순표 옮김, 「신자유주의적 페미니즘의 도래-낸시 프레이저에게 듣는다」, 『말과활』11호, 2016년 가을, 175쪽.
  2)  낸시 프레이저, 임옥희 올김, 『전진하는 페미니즘』, 돌베개, 2017, 305~306쪽.
  3)  위의 책, 311쪽.

 

    페미니즘과 신자유주의가 갈라지는 지점은 젠더종속에 관한 후-전통적인 형식에서다. 후-전통적인 젠더종속의 형식은 개별화된 종속양식이 아니라 대다수 사람의 행동을 추상적‧비개인적으로 매개하는 구조적‧체계적 절차로 인해 야기되는 여성의 삶에 대한 구속이기 때문이다. 그런 전형적인 사례가 수전 오킨이 특징지은 ‘사회적으로 초래되며 현저히 불균등한, 결혼으로 인한 취약한 생애주기’다. 이런 생애주기 속에서 자녀양육과 돌봄이라는 여성들의 전통적 책임은 노동시장에서 여성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고 결과적으로 경제적 시장에서 여성이 불평등해지도록 만든다. 이 불공평한 힘들은 가족 안에서 여성의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강화하고 악화한다.4)

 

    이 글은 정치경제적 변동과 더불어 여성의 삶이 ‘전통적인 젠더종속’으로부터 ‘후-전통적인 젠더종속’으로 이행해왔다고 분석하는 위와 같은 관점에 기본적으로 공명하면서, 신자유주의적 페미니즘 이후의 페미니즘이 2017년 한국사회에서 발아하는 장면을 몇 편의 한국소설을 경유하여 스케치해보려고 한다. 모든 여성이 남성과 같이 잠재적 임금노동자로 성장하면서 무한경쟁의 트랙에 내몰리지만 불가피한 생애주기 탓에 남성과 동일한 임금수준 및 노동조건을 보장받지는 못하는 엄연한 현실에 붙박여 살고 있다. 맞벌이‧맞살림‧맞돌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점차 확대되고는 있지만 가사와 돌봄 노동에서 여전히 상대적으로 더 많은 책임감을 요구받고 느끼는 쪽은 여성이다. 말하자면 2017년 한국사회에서 여성은 차별적 노동환경을 감수하고서 임금노동자로 살아가기를 종용받는 동시에 전통적으로 여성에게 할애돼온 역할까지 고스란히 떠맡아야 하는 이중구속의 압력에 짓눌리고 있는 셈이다. 페미니즘이 유리천장에 접근이라도 해볼 수 있는 특권층 여성들의 상징적‧문화적 디딤돌 정도로 왜소화되는 일을 염려하면서, 이 글은 아래로 품을 넓히는 페미니즘을 상상하며 지금-여기의 우리에게 절실한 ‘다른 페미니즘’을 ‘프레카리아트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으로 제안해보려고 한다.5)

  4)  위의 책, 311~312쪽.
  5)  ‘프레카리아트’와 관련해 동시대 한국문학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는 이 글의 문제의식은 졸고 「프레카리아트 시대의 소설 쓰기-김혜진, 박민정, 김엄지 소설에 주목하여」(『현대문학』 vol.742, 2016.10)에서 이어지는 것이며, 이 글은 거기에 페미니즘의 문제틀을 접합한 것이다.

 

 

    2. 대표되지 못한 여성(들)의 필리버스터 : 『82년생 김지영』의 한계와 그 역설적 의의

 

    ‘프레카리아트(precariat)’는 ‘precarious(불확실한)’와 ‘proletariat(프롤레타리아트)’를 합성해 만든 신조어로서 신자유주의 정치경제체제가 적극적으로 조성한 “불확실한 생존 방식”6)에 처해있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프레카리아트는 대체로 비정규직‧아르바이트‧인턴 등의 임시직에 종사하지만, 보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그들이 어떤 형태의 노동을 하고 있는지와 관계없이, 심지어는 실업상태에 있을지라도, 생존의 전제 조건으로서 ‘불확실성’을 강요받는다는 점이다. 지난 십여 년 간 한국사회에서 ‘불확실성’은 ‘자유로움’, ‘유연성’, ‘탈조직화’와 같은 신자유주의의 기조를 내포한 어휘들로 갈음되면서 긍정적 이미지를 덮어쓰게 됐다. 불확실성을 낭만적으로 포장하는 이와 같은 흐름 속에서 프레카리아트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청년세대의 고민은 ‘아프니까 청춘이다’ 식의 자기계발 담론으로 흡수되어 버린 채 오랜 기간 진지하게 다뤄지지 못했다. 만혼과 비혼의 증가, 출산율 저하, 빈곤을 비관한 자살의 급증 등이 주요한 사회적 의제로 대두된 비교적 최근에 들어와서야 우리는 삶의 세부까지 지배하는 불확실성의 진가를 제대로 체감하는 중이다. 정도 차이는 있더라도 불확실성으로 인한 불안, 분노, 걱정, 고통, 좌절, 무기력, 피로감에 상시 노출돼 있다는 점에 착안하면 청년세대와 여성, 노인과 장애인, 성소수자에 이르기까지 프레카리아트의 범위는 확대될 수 있다.7)
    문제는 불확실성을 완화하기 위한 대부분의 국가적 정책들이 미래의 가장이 될 남성 청년 중심의 청년 담론과 약자를 선별해 지원하는 선택적 복지론을 바탕으로 입안되고 있다는 데 있다. 양질의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 청년 실업을 줄이고 그들이 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하지 않도록 돕겠다거나 저소득층‧노인‧아이‧장애인을 배려하는 복지혜택을 늘이겠다는 계획은 이제 상식적인 만큼 소극적인 것이다. 이 계획에서 ‘청년’에도 ‘약자’에도 포함되지 않을 여성의 경우 불확실성을 해소할 길은 원천적으로 봉쇄돼있다. 이처럼 정치적 영역에서 프레카리아트 여성의 발언권이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에, 대통령 탄핵과 대선을 거치면서 주권자로서의 자신을 재발견한 여성들의 여망이 더해진 상황이 『82년생 김지영』 열풍의 사회학적 배경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지난 19대 대선 직전 한 매체가 『82년생 김지영』에 대한 광범위한 호응을 받아 안으면서 1979년생부터 1982년생까지 다섯 명의 ‘김지영(가명)’이 방담을 나누는 현장을 취재하고8) 또 ‘1980년대생 엄마들의 표심’을 분석하는 기사를 기획했던 일은 시사적이다.9) 그 기획은 『82년생 김지영』이 하나의 정치적 세력으로 새롭게 부상하기 시작한 특정 여성 집단의 대표서사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 ‘김지영’이라는 이름은 그 집단에 소속된 여성들의 대명사가 됐다는 것을 일찌감치 포착하고 있었다.
    『82년생 김지영』의 주인공 ‘김지영’은 아직 남존여비‧남아선호사상이 공공연하게 신봉됐던 1980년대에 태어나 가정과 학교에서 남녀차별의 인습을 일상적으로 경험하며 유년시절을 보냈고, 각종 성폭력‧성추행‧성희롱의 위험과 1997년 이후의 경기불황 및 취업난을 통과하며 청소년기와 대학시절을 보냈다. 직장에 다니면서 그녀는 결혼‧임신‧출산에 대한 배려보다는 배제를 먼저 실감했고, 퇴사 후 가사와 육아를 전담하게 됐지만 주거불안 때문에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보고 있는 중이다. 이와 같이 ‘전통적인 젠더종속’이 잔존하는 시대에 나고 자라서, 2000년대 성인이 된 무렵부터는 신자유주의 정치경제체제 하의 ‘후-전통적인 젠더종속’의 상황까지 맞닥뜨리게 된 약력만 놓고 보면 김지영은 프레카리아트 여성을 ‘대표(representation)’하기에 맞춤한 인물 같다. 실제 상당수의 ‘남성’ 독자들은 이 소설이 우리 시대 프레카리아트 여성의 삶을 적확하게 ‘재현(representation)’하고 있다고 파악하고 김지영을 그녀들의 전형(type)으로 인정하는 독법을 취하고 있다. 예컨대 한 국회의원은 동료들에게 이 책을 선물하면서 “성장기와 고용 단계에 있어 겪는 남녀차별, 학교와 직장에서의 성폭력과 성희롱, 장시간 노동과 육아비용·주거 문제 등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가 주인공의 삶을 통해 잔잔하면서도 잔인하게 펼쳐집니다.”라고 적은 소개의 편지를 동봉했다고 알려진 바 있다.10) 이 책이 재차 화제가 된 최근에 한 정치인이 대통령에게 했다는 말 “82년생 김지영을 안아주십시오”11)와 같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감상평은 김지영의 고통스러운 삶이 역사적으로 축적된 한국사회의 부조리에서 비롯된 불행한 결과라고 여기는 듯하다.
    기실 이와 같은 역사주의적 독법은 이 소설이 적극적으로 유도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통계, 신문기사, 연구자료 등의 빈번한 인용은 김지영과 그녀의 가족의 것으로 제시돼 있는 이 소설의 에피소드들을 거시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도록 독자를 거듭 이끈다. 더욱이 김지영의 조부모와 부모 세대를 아우르는 가족사에는 노동에 무관심한 남편을 불가사의한 인내심으로 받들면서 홀로 실질적 가장 역할을 담당하고서도 “계집질 안 하고, 마누라 때리지 않은”12) 남편 정도면 괜찮은 축에 속했다고 말하는 식민지-한국전쟁 세대 여성의 이야기, 산업화시대를 거치며 물질적 안정을 추구해 중산층으로 성장하는 데 성공한 전후 베이비붐 세대의 이야기, 십대 때 여공으로 취직해 남자 형제들을 뒷바라지하다가 결혼 이후에는 남편과 자식 뒷바라지로 한 평생을 보낸 희생자 누이/어머니 이야기 등 우리가 익숙하게 접해왔던 한국현대사의 마스터플롯들이 중첩돼있다. 이 중첩된 마스터플롯들과 어울리면서 김지영의 삶은 한국현대사의 발전적 도식 이면에 상존해왔던 여성수난사의 최신 버전처럼 읽힌다. 즉 이 소설은 김지영과 그녀의 가족이 겪은 개별적 삶의 세목을 제시하는 데에는 애초 별 관심이 없다. 개별성은 곧장 보편성에 포섭돼 버리고, 등장인물들은 ‘한국현대사’라는 거대서사의 본류에서 탈선하지 않는 정도로만 고유하다.
    따라서 이 소설의 재현 방식은 여성 독자에게 근원적인 수준에서 불만족스러울 수 있다. 여성의 삶을 표준화하여 균질적인 것으로 만들어 제시하는 거대서사의 논리를 따를 때, 개별 여성의 경험이 지닌 고유성은 훼손되거나 소외되기 십상이다. 더구나 이 소설은 김지영의 유년기와 청소년기에 집중돼있는 전통적인 젠더종속의 사례들과 취직 전후의 후-전통적인 젠더종속의 상황을 ‘일대기’라는 서사 형식 속에 통합해서, 그 둘 사이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고 있다. 이처럼 성차별의 개인적‧문화적‧사회구조적‧경제적 요인의 구분을 모호하게 처리하면 당장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장기적 난제처럼 보이게 되는 착시효과가 생긴다. 스토커/바바리맨/직장 내 몰래카메라 사건과 기성세대의 부주의한 성차별적 언행, 그리고 전통적 명절문화와 노동시장에서 여성이 느끼는 고용불안까지, 이 소설이 제기하는 다종다기의 젠더 관련 문제를 각각에 합당한 규모의 사유로 펼쳐놓기에 일대기라는 서사 형식은 너무나 협소한 것이다. 또한 김지영의 삶을 인위적으로 구획하고 해당 시기를 대표할 만한 주요 에피소드를 선별해 나열하는 과정에서 여성의 삶을 좀먹는 불안과 분노, 두려움과 공포, 슬픔과 우울 등 연속적 관점에서 세심하고 깊이 있게 탐구돼야 할 감정들은 단순하고 일시적인 것으로 묘사된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해리장애가 의심될 만큼 불안정한 심리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설 전반에서 김지영의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이 소설은 정치적 텍스트로서 발휘하는 엄청난 소구력에도 불구하고, 서사의 심층에서는 성차별을 자연화하는 데 얼마간 복무하고 있다거나 여성의 삶을 표면적인 수준에서 그리는 데 그치고 있다는 비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어 보인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소설이 채택한 독특한 재현 방식, 즉 과도한 보편성으로의 경도는 여성 독자가 이 소설을 더 읽도록/더 쓰도록 추동하고 있는 것 같다. 한국사회에서 살아온 여성이라면 한번쯤 경험했음직한 에피소드의 최소공약수를 추려 간략하게 보여주고 그것이 보편적 여성의 삶이라고 웅변하는 근거들을 강박적이다 싶을 만큼 자주 덧붙이는 대목에서 김지영의 개별성은 번번이 지워지는데, 이렇게 지워진 개별성의 자리에 여성 독자는 스스로 김지영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고유한 체험과 그 체험에 응결돼 있는 감정들을 능동적으로 발굴해 기입하고 있다. 다시 말해 『82년생 김지영』이 프레카리아트 여성의 대표서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여성 독자의 더 읽기/더 쓰기를 북돋우는 재현 방식으로 일종의 참여를 유발하기 때문이지, 이 소설이 그 자체로 여성의 삶을 충분히 적확하게 재현하고 있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82년생 김지영』이 정치적 텍스트로서 그 효용을 발휘하고 있는 것과 거의 동시에 이른바 ‘엄마정치’의 필요성이 본격적으로 대두되고 있다는 데서도 확인할 수 있는바13) 이 소설에 대한 여성 독자의 열광적 반응의 배후에는 보다 더 잘 ‘재현/대표’되고 싶다는 강력한 정치적 욕망이 있다. 이 욕망이 사그라지지 않는 한 김지영의 삶을 더 읽는/더 쓰는 여성의 목소리는 잦아들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 겨우 첫 번째 필리버스터 주자의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6)  가이 스탠딩, 『프레카리아트』, 박종철출판사, 2014, 22쪽.
  7)  이와 관련해 한국문학(비평)이 ‘불확실성’을 사유하는 데 있어서 그간 다소 편향적인 접근 방식을 취해왔던 것은 아닌지 다른 자리에서 진지하게 반성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예컨대 우리는 문학작품에 나타나는 ‘퀴어’를 고정되고 규범화된 정체성의 경계를 지우는 ‘자유’와 ‘일탈’의 기호로서만 소비해오지 않았던가. 최근 발표되는 퀴어 소설들은 ‘불확실성’을 생존의 전제 조건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삶의 고충과 난경을 그려 보이는 데에 집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때 퀴어는 ‘자유’나 ‘일탈’이 아니라 상시적 억압과 폭력에 노출된 채 지옥을 살아가는 수인에 가까워 보인다. 퀴어 소설에 대한 문화론적 접근만이 아니라 유물론적 접근이 요청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8)  선명수 기자, 「엄마 착취, 이대로 괜찮은가요-1979년부터 82년까지, 다섯 명의 ‘김지영’이 한국정치에 묻다」, 『주간경향』1225호, 2017.5.9., 18~20쪽.
  9)  박은하 기자, 「19대 대선 흔드는 1980년대생 엄마들의 표심과 열망」, 『주간경향』1225호, 2017.5.9., 12~15쪽.
  10)  유성애 기자, 「금태섭, 동료의원 298명에 <82년생 김지영> 선물」, 『오마이뉴스』, 2017.03.03.,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303913
  11)  이승준 기자, 「노회찬 원내대표가 문재인 대통령 부부에게 선물한 책?」, 『한겨례』, 2017.05.19., http://www.hani.co.kr/arti/politics/bluehouse/795460.html
  12)  조남주, 『82년생 김지영』, 민음사, 2016, 26쪽. 이하 본문에서 같은 책을 인용할 때는 괄호 안에 쪽수만 표기.
  13)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의 기사들을 참조. 「엄마와 인간 사이 강요받는 선택, 후보들은 알까」(박기용 기자, 『한겨레』, 2017.04.23., http://www.hani.co.kr/arti/society/women/791938.html#csidx47d908e1e16fa45a2528ba27708e36e), 「독박 육아 끝장낼 엄마 정치(1),(2)」(양선아 기자, 『한겨레』, 2017.04.24., http://babytree.hani.co.kr/?mid=story&category=3742), 「장하나의 엄마정치」연재(『한겨레』 토요판, http://www.hani.co.kr/arti/SERIES/934/home01.html)

 

 

    3. ‘안다’고 말하는 남성(들)의 ‘모르고 싶은’ 욕망 : 『82년생 김지영』의 결말이 제기하는 또 다른 문제

 

    김지영의 삶을 불충분하게 개괄하는 다섯 장을 지나 마지막 장에 이르면 이 소설을 지배해온 보편성에의 강박이 사실은 ‘남성’ 서술자-의사의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다른 여성들의 말을 자기도 모르게 대신 하는 증상을 보이는 김지영을 치료하고자 남편 ‘정대현’의 협조 하에 서술자-의사는 김지영을 상담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그녀의 삶을 인식/해석/기록했다. 그러나 일련의 치료과정을 착실히 밟아나간 뒤에도 김지영의 증상은 사라지지 않았고 그제야 서술자-의사는 고백한다. “김지영 씨를 직접 만나 보니 산후우울증에서 육아우울증으로 이어진 매우 전형적인 사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상담이 이어질수록 확신이 옅어졌다. (…) 김지영 씨가 선택해서 내 앞에 펼쳐 놓은 인생의 장면 장면들을 들여다보며 나는 내 진단이 성급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틀렸다는 뜻은 아니다.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하는 세상이 있다는 뜻이다.”(169~170) 서술자-의사가 다만 짐작만 할 뿐인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하는 세상”의 진상은 끝내 공백으로 처리되고, 그 공백에 잠복해있을 이상증세의 원인은 해명되지 않은 채로 남는다. 이는 앞서 살펴보았듯이 서술자-의사가 그녀를 진단하고 치료해온 관점, 즉 여성의 삶을 보편의 것으로 수렴시켜 인식/해석/기록해 온 시각에서 비롯된 것일 터다. 그런 점에서 김지영에 대한 불충분한 인식/해석/기록일 수밖에 없는 진료 차트를 앞에 두고 진단/치료의 실패를 선언한 서술자-의사가 김지영의 호소를 알아채지 못한 것은 차라리 자연스럽다. “김지영 씨는 당장의 고통과 부당함을 호소하지도 않고, 어린 시절의 상처를 계속 되새기지도 않는 편이다. 먼저 쉽게 입을 열지는 않지만 한번 물꼬가 트이면 깊은 곳의 이야기까지 스스로 끄집어내 담담하고 조리 있게 잘 말한다.”(170) 해설에도 잘 지적되어 있듯이 김지영은 고통과 부당함을 참고 말을 삼키는 데 익숙한 인물로 그려져 있다.14) 어쩌면 ‘남성’ 서술자-의사의 귀에는 공격성이 거세돼 있는 여성의 목소리, 그래서 “담담하고 조리 있게” 들리는 목소리만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의 재주로는 알아챌 수 없었던 ‘고통과 부당함의 호소’는 없었던 게 아니라 그에게 보이지/들리지 않았을 뿐이 아닌가. 그는 김지영을 보이는 대로만 보았으며 들리는 만큼만 들었다. 결국 달라진/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 중 가장 섬뜩한 대목은 어쩌면 이것일지 모른다.

  14)  “김지영의 삶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눈에 밟히는 장면들이 반복된다. 목소리를 삼키는 모습이다 (…) 김지영은 어처구니없고 부당한 상황에서 거의 대부분 입을 닫아 버린다. 그때마다 하고 싶은 말들이 있었지만 하지 않았다.”(김고연주, 「우리 모두의 김지영」, 『82년생 김지영』 해설, 민음사, 2016, 182~184쪽.)

 

    “내가 평범한 40대 남자였다면 끝내 알지 못했을 것이다. 대학 동기이자 나보다 공부도 잘하고, 욕심도 많던 안과 전문의 아내가 교수를 포기하고, 페이닥터가 되었다가, 결국 일을 그만두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나는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특히 아이가 있는 여자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 사실 출산과 육아의 주체가 아닌 남자들은 나 같은 특별한 경험이나 계기가 없는 한 모르는 게 당연하다.”(170)

 

    아이가 ADHD를 앓게 되자 일을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된 서술자-의사의 아내는 초등학생용 수학 문제집 풀이에 집착한 듯하다. “내 뜻대로 되는 게 이거 하나”(173)라는 아내의 푸념은 “당신은 모르겠지만”(172)이라는 원망어린 핀잔과 포개지면서 서술자-의사의 둔감함, 무심함 등을 생각하게 한다. 문득 가정에 소원한 채로 아내와 아이를 방치했던 자신의 태도를 곱씹게 될 때면 “불쑥 죄책감”(174)이 들기도 하는 그가 평범한 남자들과는 달리 특별한 경험과 계기를 통해 “알게 되었다”고 자부하는 대한민국 여자의 삶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 천천히 짚어보자. 그는 자신의 아내가 겪을 수밖에 없었던 삶을 ‘함께’ 살았다. 명석하고 유능했던 아내의 실직, 독박육아, 경력단절, 이상증세(초등학생용 수학 문제집 풀이에 집착)를 곁에서 지켜본 이후 비로소 대한민국 여자의 삶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이제 그는 아내와 김지영에 대해 선의의 기도까지 할 수 있는 자칭 “특별한” 남성이다. “아내는 여전히 초등 수학 문제집을 풀고 있고, 나는 아내가 그보다 더 재밌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 잘하는 일, 좋아하는 일, 그거밖에 할 게 없어서가 아니라 그게 꼭 하고 싶어서 하는 일. 김지영 씨도 그랬으면 좋겠다.”(174)
    그러나 소설의 말미에서 서술자-의사는 임신으로 과거의 아내와 김지영이 그랬듯이 급하게 직장을 그만두게 된 여성 후배를 대신해 육아 걱정이 없는 미혼의 후임을 들이겠노라 다짐한다. 이 선택은 두 가지 방향에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그가 아내와 김지영을 관찰하여 얻은 앎은 불충분해서 그의 행동을 바꿀 만큼의 인식적 충격을 일으키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그는 무지해서 나쁜 선택을 해온 아버지‧형 세대가 갔던 길을 따르게 됐다. 둘째. 그는 그의 말대로 여성을 알게 됐지만 병원장의 입장에서 나쁜 선택을 했고, 그가 행한 부정의는 시장의 논리가 지배하는 체제에 속박된 개인으로선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이 두 가지 평가는 남성 계몽에 바탕을 둔 연대로부터 문화와 사회 구조의 점진적 변화를 기대하는 페미니즘 운동의 근저에 있는 어떤 믿음을 말해준다. 요컨대 악은 무지에서 오는 것이며, 깨우친 개인들의 힘이 모이면 여성을 착취하는 문화와 사회 구조는 바뀔 수 있다는 것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남성’ 서술자-의사의 ‘앎’이 이토록 수세적인 것이었다고 폭로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소설의 ‘여성’ 작가가 이를테면 ‘남장 서사’라고 할 수 있을 『82년생 김지영』에 부려놓은 가장 전위적인 질문을 발견한다. 아내와 김지영을 ‘안다’고, 대한민국 여성의 삶과 그녀들의 고충을 ‘평범한’ 남자들과 다른 나는 잘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이 ‘특별한’ 남성은 사실 더 ‘모르기 위해’ 서둘러 ‘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실상 그의 앎이 가져온 변화는 아무것도 없다. “아내는 여전히 초등 수학 문제집을 풀고 있고”(174) 김지영의 증상은 사라지지 않아서 그는 “김지영 씨에게 항우울제와 수면제를 처방했다.”(169) 멀찍이서 방관하며 두 여성의 더 나은 미래를 기도하는 그의 앎은 얼마나 무용한 것이며 또 위선적인 것인가. 그러나 그것만큼 여성을 읽는 ‘안전한’ 독법도 없었을 것이다. 달라진/달라질 여성의 미래를 적극적으로 견인하지 않는 남성의 여성 읽기, ‘안전한’ 현재로부터 이탈하기를 두려워하는 그의 앎을 경계하면서, 이 소설은 여성을 ‘안다’고 말하는 남성에게 ‘모르고 싶다’는 (어쩌면 자기도 모를/모른 체 하는) 욕망이 있음을 경고한다. 희생하는 어머니가 등장하는 마스터플롯은 여성의 삶을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성을 착취하기 위해서 지속돼왔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로 하자. 희생하는 어머니 서사를 전승시켜 온 이는 아내의 고통에 ‘무지했던’ 남편이 아니라 어머니의 삶이 얼마나 고단했는지 잘 ‘아는’ 아들일지 모른다는 말이다.
    ‘남성’ 서술자-의사가 가족사진을 골똘히 들여다보면서 밀려오는 죄책감으로 괴로워질 즈음 때마침 방문해 그의 감정적 동요를 깨트린 노크의 임자는 (사직을 알리러 온 여성인 동시에) 여성의 사직을 방조 혹은 강제하는 ‘시장의 논리’였을 것이다. “물론 이 선생은 훌륭한 직원이다. (…) 그런데 급하게 일을 그만두는 바람에 리퍼를 결정한 환자보다 상담을 종결한 환자가 더 많다. 병원 입장에서는 고객을 잃은 것이다. 아무리 괜찮은 사람이라도 육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여직원은 여러 가지로 곤란한 법이다. 후임은 미혼으로 알아봐야겠다.”(175) 발전 또는 현상유지를 위한 동력을 여성의 희생에서 얻는 것이 어느 정도는 불가피한 일이라고 여기는 후-전통적인 젠더종속의 상황에서 전통적인 젠더종속의 질서는 더욱 완고해질 수 있다는 낸시 프레이저의 귀띔을 떠올릴 때, 우리가 정말 두려워할 것은 ‘남성’ 서술자-의사의 머릿속을 장악한 ‘시장의 논리’이며, 그 초자아의 명령에 따라 재빨리 선언되는 ‘안다’일지 모른다. 『82년생 김지영』은 여성을 안다고 말하는 남성이 여성을 착취하는 문화와 사회구조의 계승자이자 부품으로 전락하는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지금-여기의 페미니즘 서사가 추진해야 할 일은 남성의 ‘무지’를 계몽하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섣부른 ‘앎’을 무너뜨리는 일이라는 것을 역설한다.

 

 

    4. ‘앎’ 이전의 수준에서 여성을 이야기하기 : 강화길의 소설로 본 우리 시대 여성의 결혼과 출산의 계급심리학

 

    최근 상재된 강화길의 소설집 『괜찮은 사람』15)에 실려 있는 작품들이 주목할 만한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다. 여성을 ‘안다’고 말하는 남성의 욕망이 ‘모르고 싶다’라면, 역으로 ‘알고 싶다’는 욕망은 ‘모른다’는 선언으로부터 추동되는 것이 아닐까. 여성을 이야기하는 강화길의 소설들은 일단 독자를 ‘모른다’의 위치에 서게끔 한다. 특히 표제작을 포함해 소설집 앞부분에 배치된 세 편의 ‘사람’ 연작에서 그러한 경향은 두드러진데, 이는 우선 이 소설들이 전통적으로 추리소설의 장치들로 여겨지던 요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호수-다른 사람」에서 강화길은 친구 ‘민영’이 당한 사고를 추적하는 여성 ‘진영’에게 탐정의 역할을 부여했다. 그러나 진영의 입장에서 보면 영락없는 용의자인 민영의 남자친구 ‘이한’은 사고의 진상규명에 누구보다도 앞장서고 있는 또 한 명의 탐정이다. 한 사고를 수사/수습하는 두 탐정의 신경전에 초점화자인 ‘여성’ 진영의 불안정한 심리상태와 그에 따른 편향적 정보 전달 및 해석이 얽혀들면서, 이 소설이 처음에 던진 질문인 (민영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는 (진영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로 바뀌게 된다. ‘과거’에서 ‘현재’로 방향을 튼 이 소설의 물음은 그들을 둘러싼 공간 ‘안진’의 비리고 습한 이미지로 인해 불길한 징조들을 산출해내고, 새로운 범죄에 대한 독자의 예감은 점차 강화된다. 독자가 불안과 공포, 두려움과 긴박감에 사로잡힐 즈음 강화길은 데이트/가정 폭력의 피해자 여성의 얼굴들 그리고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접하는 위협의 순간들을 겹겹이 포개어 제시함으로써, 이 소설을 (‘생각을 위한 장치’로 소설을 규정했던 I.A.리처즈의 표현을 고쳐 말한다면) ‘느낌을 위한 장치’로 완성하는 데 성공한다. 요컨대 강화길의 소설은 여성의 감정을 보여주거나 말하기 위해 애써온 기왕의 서사 형식을 지양하고, 정교하고 전략적인 서사 장치의 운용을 통해 독자가 여성의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다. 여성 인물에 대한 독자의 이입 문턱을 확실히 낮춘 덕분에 이제 여성은 앎 이전의 수준에서, 감정과 심리의 상태로 체험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의 논점과 관련해 특별히 눈길을 끄는 작품은 ‘사람’ 연작 중 나머지 두 편, 「괜찮은 사람」과 「니꼴라 유치원-귀한 사람」이다. 각각 결혼을 앞둔 여성과 유치원생 아이를 기르고 있는 여성이 주인공인 두 편의 소설에서 강화길은 여성에게 결혼과 출산, 그리고 육아가 어떤 사건인지를 환상적으로 형상화해 보여준다. 여성 화자를 따라 섬세하게 구축돼 있는 환상적 장면들을 통과하면서 독자는 생애주기의 굴절 탓에 여성이 겪게 되는 불안과 공포를 추체험한다. 「괜찮은 사람」부터 살펴보자. 「호수-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이 소설의 첫 장면을 뒤덮고 있는 것은 범죄의 기운이다. 예상치 못한 어둠 속에서 남자친구의 손길에 떠밀려 넘어진 주인공 ‘민주’는 “살 속 깊은 곳까지 도려낸 어둡고 긴 구멍처럼”(82) 보이는 상처, “엉덩이에서 오른쪽 허벅지로 이어지는 자리에 길고 검은 멍자국”(82)을 갖게 된다. 소설의 전조이자 복선인 이 사고는 “실수였다”(83). 그러나 이 실수가 남자친구와의 관계에서 영문 모를 불안을 느끼고 있던 민주에게는 내면의 형질을 일순간 변화시키는 일종의 촉매로 작용한다. 제 몸에 새겨진 “어둡고 긴 구멍”을 헤집어보기라도 하듯이 남자친구에 대한 불신과 의심을 확인 또는 무마해 나가는 민주의 고통스런 내적 여정이 길게 그려지는데, 그것은 터널처럼 어둡고 싸늘하고 축축한 길을 남자친구와 동행하는 것으로 은유되고 있다. 그 길 끝에서 남자친구가 “누군가와 함께 살”(86) 작정으로 미리 마련해둔,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집안으로 결코 침범할 수 없을 것”(85) 같은 초록색 기와집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설정은 암시적이다. 마침 그 사고가 있던 날 청혼을 받은 민주는 남자친구가 제안한 ‘스위트 홈’의 불빛이 반짝거리는 꿈속으로 그와 더불어 입장하게 될까.

  15)  강화길, 『괜찮은 사람』, 문학동네, 2016, 이하 본문에서 같은 책을 인용할 경우 괄호 안에 쪽수만 표기.

 

    무엇이든 정확하게 계획하고 실행하는 그의 성격이 나는 좋았다. 그러면 나는 그 무엇도 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그러면 무언가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매일 다짐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노력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인간이라고 자책할 필요도 없었다. 맨발로 느끼는 차갑고 서러운 감각을 혼자서 견디게 될까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었다. 가만히 있는 것. 움직이지 않는 것. 나는 도축장에 매달린 거대한 가축 하나를 떠올렸다. 핏물 가득한 살점을 한 부위씩 도려내도 그 몸뚱이는 절대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가만히 매달린 채 칼날이 안쪽으로 파고들도록 내버려둘 뿐이다. 죽었으니까. 완전히 죽어버렸으니까.(101)

 

    결혼이라는 입사 제도가 주는 안도감 이면에 죽음의 공포가 도사리고 있음을 꿰뚫고 있는 민주의 환상 속에서 노라의 ‘인형의 집’은 음울한 판본으로 되살아난다. 그러니까 ‘집’은 세상의 위험들로부터 두 사람의 행복을 보호하는 안락한 요새일 수도 있지만, 두 사람이 서로의 적이 될 때 “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밖에서는 아무도 모를”(99) 감금의 공간이 될 수도 있다는 것. 이 소설은 전통적으로 여성소설이 자주 활용해온 ‘집’의 상징을 발전적으로 이어받으면서 ‘가정’이라는 사적 영역을 탈신비화 하는 쪽으로 집의 의미를 수정하고 있다. 사실 한국소설은 가정이 노동, 권력, 계급, 돈, 섹스, 폭력의 영역일 수 있다는 것을 사유하는 데 소극적인 편이었다. 가정‧가족을 상처받은 인간이 되돌아갈 최후의 보루처럼 그리곤 했던 한국소설의 어떤 경향이 여성의 고통을 외면하고 방조하는 데 혹여 일조해온 것은 아닌지 의심하는 독자에게, 강화길 소설의 이와 같은 시도는 더욱 주목에 값한다.
그런데 이 소설이 말하는 것처럼 여성에게 결혼이 도축장에 끌려가는 듯한 찜찜한 기분을 무릅쓰는 정도의 대단한 결심이 필요한 일이라면 누구라도 그 선택을 철회해야 마땅한 것이 아닌가. 주인공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고 여기에 섣불리 일반적인 답을 내놓는 건 곤란하다. 이 소설에 전개돼 있는 민주의 내적 여정은 그녀의 신경증적 증상에 기초하고 있다. 소설 초입과 말미에서 “돌아오는 봄, 우리는 결혼할 것이다”(82, 106)라는 결정을 반복해 말함으로써, 이 소설은 우리 앞에 펼쳐진 일들이 현실화 되지는 않은, 오직 그녀만의 망상일 수 있음을 비교적 분명하게 시사하고 있다. 라캉 식으로 말하면 신경증적 주체인 민주는 지금 현실이라는 상징적 세계에 침입해 들어온 실재와 홀로 대면하고 있는 중이다. 실재의 출현은 주체가 상징적 세계로 진입할 때 상실한 무언가가 있음을 환기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그녀의 신경증적 증상의 외현들 사이에서 정작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그녀가 그런 끔찍한 환상을 통해서만 비로소 결혼 직전의 현실로 복귀할 수 있게 됐다는 표층적 사실일지 모른다. 즉 그녀는 결혼을 결단하기에 앞서 무언가를 잃어버렸으며, 환상-여정은 그녀가 상실한 무언가에 대한 모종의 장례 절차인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민주가 결혼으로 잃게 된 것은 무엇인가.
결혼이 야기하는 여성의 상실에 대해 말하기 전에, 「니꼴라 유치원-귀한 사람」을 먼저 살펴두자. 이 소설은 ‘안진’에서 출세가 보장돼 있다고 소문난 ‘니꼴라 유치원’에 아들 ‘민우’를 입학시키려 분투하는 엄마의 기괴하고 섬뜩한 내면 풍경을 묘사함으로써 출산 및 육아와 결부된 여성의 욕망과 비틀린 모성을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결혼에서 출산으로 이어지는 여성의 입사식, 그리고 입사식에 동반되는 여성의 부정적 감정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괜찮은 사람」과 「니꼴라 유치원-귀한 사람」은 잇달아 읽을 만하다. 강화길 소설에서 여성의 증상은 주로 ‘구멍’의 이미지로 구현되는데, 「괜찮은 사람」에 “멍자국”이 있었다면, 「니꼴라 유치원-귀한 사람」에는 ‘니꼴라 유치원 10회 졸업생 여자’의 얼굴이 등장한다. “볼 부근의 화장은 들떠서 버짐처럼 번져 있었고 눈두덩이 푹 들어가 피곤해 보였는데 그 부분에 보라색 아이섀도를 진하게 칠해서 꼭 얼굴에 구멍이 파인 것처럼 보였다.”(70) 이를테면 강화길은 이 구멍들을 곰곰이 들여다보는 데서부터 출발하는 것 같다. 결여의 흔적인 그 구멍에서 흘러넘쳐 나오는 환상적 이미지들은 불안과 공포를 응집하고 있고, 강화길은 그 이미지들을 곳곳에 배치한 악몽의 미로를 구축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니꼴라 유치원-귀한 사람」의 미로를 헤쳐 나와 우리가 만나게 되는 진실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출산과 육아의 과정에서 “다시 태어나는 기분”(76)을 느끼는 여성은 그 재생(再生)의 기회에 귀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자신의 욕망을 겹쳐놓게 되고 결과적으로 기이한 집착에 빠져든다.’ 여성이 아이를 위해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하기를 결심하면서 스스로를 옥죄게 되는 사태, 이른바 ‘새로운 마미즘(momism)’16)의 노정에 투신하게 되는 과정을 이 소설은 임상적 차원에서 보고한다. 흥미로운 점은 ‘귀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엄마-여성의 욕망이 그녀의 어린 시절 트라우마들, 예컨대 한글을 읽지 못해 같은 반 친구들 앞에서 선생님에게 모욕을 당하거나 자신의 성적 때문에 부모님이 실망하는 모습을 보고 좌절했던 경험으로부터 비롯된 것일 뿐만 아니라, 누군가를 향한 분노와 복수심 쪽으로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는 것이다.

  16)  “이는 결코 실현하기 불가능한 완벽한 어머니가 되기 위한, 매우 낭만적으로 묘사되었으나 상당히 엄격한 일련의 기준이다. 새로운 마미즘은 어머니가 모든 신체적‧정서적‧심리적 에너지와 더불어 일본의 GDP에 해당하는 금액을 완벽한 아이를 키우는 데 쏟아 붓게 한다.”(수전 J. 더글러스, 이은경 옮김, 『배드 걸 굿 걸』, 글항아리, 2016, 513쪽.)

 

    얼마 전 신문사 대표의 강연을 들으러 갔을 때, 그는 고향에 돌아오자마자 그 일대 땅을 모조리 사들였던 순간이 가장 통쾌했다고 말했다. 평생 지시를 받고 살던 부모님이 누군가에게 일을 시키며 사는 사람들이 되었다고. 그렇게 살도록 해드렸다고. 그는 사람 좋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이 멍청한 내가 그렇게 해드렸으니 여러분도 그렇게 될 수 있어요. 그렇죠? 나는 그를 향해 박수를 쳤다.
    나는 민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문득 그날 박수를 치며 아릿하게 느꼈던 손바닥의 통증이 다시 강렬하게 기억났다. 그래. 이곳을 지나쳐간 많은 이들이 그들의 한계를 넘었듯 우리 역시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 나는 내 아이의 작은 어깨를, 이제 곧 시작될 작은 기대를 조용히 쓰다듬었다. 그렇게 나는 귀한 사람이 될 것이었고, 그렇게 새로운 소문이 될 것이었다. 아이가 어깨를 작게 수그렸다. 행복했다.(76~77)

 

    아이를 낳는 일이 자신의 새 삶을 낳는 일처럼 여겨질 때, 엄마-여성은 ‘내가 만약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이라는 가정을 해보게 된다. 이 소설은 엄마-여성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 “누군가에게 일을 시키며 사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의심의 여지없이 이 희망의 저편에 있는 것은 “평생 지시를 받고” 산 사람의 모욕감과 좌절감, 그리고 자신의 생애 동안에는 상황이 나아질 리가 없다는 절망이다. 갑‧을, 금수저‧흙수저 따위의 계급적 위계를 식별하는 말들이 넘쳐나는 지금-여기에서 계급-전복적 상상력을 만나는 것 자체가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출산이라는 생애의 한 단계를 거치면서 엄마-여성이 계급-전복적 상상력을 구체화하고 또 자신의 아이를 통해 그 상상을 실현하기로 결단하는 위의 장면은 좀 더 신중한 접근을 요청한다. 이 소설의 엄마는 출산 이후 여성이 당면하게 되는 계급적 추락과 그로 인한 박탈감을 지금 상상적으로 보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헬리콥터 맘’이나 ‘캥거루 족’처럼 아이의 인생과 자신의 인생을 구별하지 못하는 일부 여성들의 비틀린 모성을 비난하는 일은 정작 핵심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엄마-여성의 계급적 추락과 박탈감을 해소하지 않으면, 아이가 계급 상승의 수단이나 도구로 여겨지는 풍토는 사라질리 만무한 것이다. 사람들의 시선에 아랑곳없이 자신의 아이만 챙기는 엄마를 비난하기 위해 고안된 ‘맘충’이라는 최신의 유행어가 폭로하는 것은 ‘벌레’의 지위로까지 격하된 우리 사회 엄마-여성의 신분이다.

 

 

    5. 더 똑똑해졌지만 더 가난해진 여성들의 페미니즘 : 페미니스트가 프레카리아트가 되었을 때

 

    여성의 계급적 자기 인식이 이만큼 철저했던 적이 또 있을까. 「괜찮은 사람」의 여성은 남자친구의 청혼에 답하기를 머뭇거리는데, 그 까닭이란 이런 것이다. “왜일까. 스스로에게 자신을 갖는 일은 어째서 그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일까.”(105) 그녀가 결혼 앞에서 주저하는 것은 남자친구를 사랑하지 않아서도, 그가 ‘괜찮은 사람’인지 아닌지를 확인하지 못해서도 아니다. 실상은 오히려 그 반대다. 이 소설의 여성은 바로 자기 자신이 ‘괜찮은 사람’인지를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대학까지 미국에서 다닌 남자친구는 금융권에 법적 조언을 하는 변호사로 결혼 이후 윤택한 생활이 보장될 만큼 높은 연봉을 받을 뿐만 아니라 성품에도 구김이 없다. 그런 그와 결혼을 하게 됐다니 속 모르는 친구들은 운이 좋다며 무심히 축하를 건네지만, 그녀는 축하인사를 “그처럼 괜찮은 사람이 나를 만나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89)으로 비꼬아 받아들일 만큼 자존감이 낮다. 남자친구의 몸에 배어있는 여유, 배려, 자존감, 그런 것들 하나하나에 그녀는 위축됐고, 질투가 났다. 요컨대 그녀가 결혼을 앞두고 직면한 물음은 ‘나는 그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인 것이다. 이제 그녀가 남자친구와의 관계에서 줄곧 느껴왔던 근거 없는 불안의 정체도 이해가 된다. 그 불안은 계급적 차이에 의한 것이었고, 그 계급적 불균형은 악몽 같던 그녀의 환상-여정의 끄트머리에서 얼마간 해소되는 것처럼 보인다. “일단 그는 기울어진 차를 세우자고 했다. 나는 차문을 닫았고, 흩어진 물건들을 정리했다. (…) 차가 공중으로 떠오르더니 도로 안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동시에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105) 그러나 “평온한 날이다”(106)라는 그녀의 담담한 진술 앞에 작가는 “멀리, 빗소리가 들려왔다”(106)고 적어 넣으면서 그 평온이 임시적일 수 있다는 불길한 예감을 새겨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훼손된 자존감이 온전해지지 않는 한 그녀는 언제든 똑같은 악몽의 미로에 갇힐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이 지금-여기의 여성의 삶에 밀착해 지적하는 뼈아픈 진실 중 하나는 여성에게 연애와 결혼이 자존감을 담보로 내걸고 맺는 불평등한 계약이라는 점이다.
    연애와 결혼에 앞서 자신의 자격을 먼저 심사해볼 정도로 낮은 자존감을 가지게 된 청년-여성의 병든 마음을 제대로 살피기 위해 우리는 그녀가 자신의 좌표를 어떻게 설정하고 있는지를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나는 큰딸이었다. 동생 두 명이 사립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아버지는 삼 년 뒤 퇴직할 예정이었는데 그 이후 무엇을 할지 전혀 결정하지 못했다. (…) 아버지에게 내가 짐이 아닌가 하는 미안함이 들 때가 있었다. 동시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몇 년 째 혼자 지내는 아버지를 보고 있으면 그 노후가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나만 특별히 불행하다고 여겼던 건 아니다. 일을 하고, 월급을 받고, 대출금을 분할납부하고, 월세를 내고, 마른빨래를 쥐어짜듯 생활비를 절약하고 조금씩 저축하는 삶이 나는 불만스럽지 않았다. 친구들 대부분이 나와 같은 삶을 살았다. 이건 끊임없이 계속되는 일종의 제자리 걷기였다. 누구도 이 걷기가 끝나리라고 쉽게 낙관하지 않았다. 언제까지나 이어지리라는 걸 모두 알았기 때문이다. (…) 그러나 내가 이 대열의 끝자락에서 걸어가고 있다는 의심이 몸에 항상 달라붙어 있었다. 남들과 똑같이 살았지만, 나 자신은 누구와도 똑같지 않은 것 같았다. 남들과 나를 비교하면 자신이 없어졌고, 지금껏 이룬 모든 것들이 형편없게 느껴졌다. 나는 그저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누군가가 나에게 조금이라도 실망하거나, 나를 좋아하지 않으면 이 빈약하고 허름한 트랙에서조차 떨어져나갈 것 같은 불안이 밀려왔다.(87~88)

 

    부모에게 짐만 됐던 자기 자신을 원망하면서 다가올 부모의 노후를 걱정하고 있는 이 청년-여성은 직장에 다니며 나날의 삶을 간신히 꾸려가고는 있지만 자신이 “이 대열의 끝자락에서 걸어가고 있다는 의심”과 “이 빈약하고 허름한 트랙에서조차 떨어져나갈 것 같은 불안”을 떨칠 수가 없다. 사회의 최하위 계급에 자신이 속해있다는 생각과 자칫 최하위 계급에서도 밀려나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비단 이 소설 속 여성의 것만이 아니다. 단언하건대 그것은 강화길 소설이 주목하는 지금-여기 20~30대 청년-여성들의 일상적 고민이면서, 앞서 살펴 본 소설 『82년생 김지영』의 주인공에 자신의 모습을 겹쳐놓는 엄마-여성들의 흔한 심정일 것이다. ‘맘충’이라는 표현이 횡행하는 사회, 그러므로 미래에 기대할 수 있는 지위가 ‘벌레’ 밖에는 없는 사회에서 여성들은 연애 중이거나, 결혼을 했거나, 임신과 출산을 경험하는 등 각자 생애주기의 다소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여성’이라는 젠더와 결합된 계급적 공통감각을 가지고 있다. 이 공통감각은 1980년대에 태어나 10대 때 IMF를 경험하고 신자유주의 정치경체 체제 하에서 ‘88만원 세대, N포 세대’로 청년기를 보낸 그녀들의 세대적 특수성을 고려할 때 더 잘 드러난다.
    그녀들은 여성이 가정 내에서든 공적 영역에서든 어떤 경우에도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받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배웠다. 배운 대로 살아가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성차별적 문화를 경험하며 몸소 터득하기는 했지만, 그게 정의로운 상황은 아니라는 신념은 지켜왔다. 또래의 남성과 경쟁하며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 같은 말이 나올 정도의 취업난을 통과해나가면서 임금노동에 종사하는 것이 어떤 보람을 가져다주는지도 알았다. 그러나 그녀들은 결혼과 임신, 그리고 출산이라는 인생의 갈피들에서 ‘여성’이 차별과 배제를 합리화하는 계급적 표식이 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성차별은 용인하지 않는다는 사회적 약속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기만적 사회, 여성에게 경제적 ‘불확실성’을 강요함으로써 ‘확실한’ 이득을 취하려고 하는 약탈적 사회에 그녀들은 모종의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 그 배신감은 전통적 젠더종속의 부정의를 폭로‧부정하고 가부장적 문화의 일신을 주장했던 신자유주의적 페미니즘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페미니즘이 가르친 바대로 그녀들은 자신이 남성과 다르지 않다고 여기며 스스로를 채찍질해왔다. 그러면 남성과 다름없이 노력한 만큼 존중받고 대접받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들이 성인이 돼 맞닥뜨린 세상에서 누구에게나, 언제까지나 평등하게 보장되는 줄 알았던 자아실현의 욕망이란 결혼 전까지의 기간 동안만 일시적으로, 특정한 계급에게만 한정적으로 허락되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여성은 자아실현의 욕망과는 관계없이 적은 수입과 불안정한 노동에 일생을 의존하고 있다.
    그녀들의 좌절은 여성이라서 미리부터 많은 것을 포기해야했던 할머니‧어머니 세대의 그것과는 다르고, 그래서 어쩌면 더 심각한 것일지 모른다. ‘여성이라서 안 된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던 첫 세대인 만큼 그녀들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경험하는 차별과 배제에 민감하고, 어떤 세대보다도 강한 반발심을 가지고 있다. 이 세대에게 ‘여성’은 종전의 페미니즘이 그랬듯이 인정투쟁의 진지이기도 하지만, 더 시급하게는 생존과 결부된 계급적 저항의 장소다. 그녀들은 이전 세대보다 훨씬 똑똑해졌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더 가난해졌다. 세상에서 패배하지 않기 위해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단련해온 그녀들이 그동안의 수고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의 허탈감은 무엇보다도 그녀들의 전 생애에 대한 보상의 문제를 포함하고 있다. ‘여성’이 사회적 보상의 바깥, 정치의 외부를 나타내는 표지임을 뒤늦게 각성한 그녀들에게 이제 프레카리아트 페미니즘은 불가피한 하나의 구호가 된다.■

 

 

 

 

 

 

 

 

 

 

 

 

 

신샛별
작가소개 / 신샛별

동국대 국문과 졸업, 동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201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평론 「절망을 이야기하는 소설의 두 가지 행로-김애란과 김사과에 주목하여」가 당선되어 등단.

 

   《문장웹진 2017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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