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산이 작은 파도였을 때 외 1편 - 김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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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이 산이 작은 파도였을 때

 

 

김중일

 

 

 

 

    어느 파도는 너무 일찍 밀려왔다.
    어느 파도가 얼마나 일찍 왔는지, 일찍 올는지 알 수 없다.
    일찍 온 파도를 뒤집어 작은 돛배처럼 도로 바다로 떠밀어보기도 했지만,
    일찍 온 파도는 내 발목에 묶여있고, 내 다리는 무겁게 젖어있다.
    내 다리에 그림자처럼, 지구 한 바퀴만큼 긴 파도가 끌린다.

 

    특히 저 어린 파도는 유독 일찍 왔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이 산이, 아이 발등처럼 작은 너울이었을 때, 아이가 읽다가 엎어놓은 책이었을 때, 책을 잡던 작은 손등이었을 때, 그 손등에 입맞춤하던 엄마의 입술이었을 때, 콧등이었을 때, 솟은 젖가슴과 부푼 배였을 때, 기포였을 때, 티끌이었을 때, 수많은 키스이고 입김이고 손길이었을 때, 처음의 고백이었을 때, 속삭임과 휘파람이었을 때, 하나부터 열까지 다 우연이었을 때, 스침이었을 때, 옷깃 같은 파도였을 때, 한 아이 겨우 덮을 작은 이불 같은 흰 파도였을 때
    너무 일찍 밀려온 파도가 겹겹이 쌓여 이 산이 되기 전,
    울고 있는 한 사람을 간신히 건져 온 파도를, 파도와 파도를 천 일 넘게 덧대어 만든 이 산 한 척을 바다에 띄워, 오늘도 밀려오는 사람들 마중가야 할 텐데.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이 산이, 사람 키만한 작은 파도였을 때
    파도처럼 솟은 무덤이, 무덤처럼 솟은 파도로 이 산까지 밀려올 때
    무덤처럼 솟은 파도가, 파도처럼 솟은 무덤으로 쌓이고 쌓여,
    해일처럼 치솟은 산비탈에 깊이 박힌 돌을 빼내듯, 움직이지 않는 이마와 어깨와 손등을 부여잡고 흔들 때
    땅속에 평생 박혀 차갑게 젖은 돌 같은, 바다에 박힌 파도를 붙잡아 열어젖힐 때
    파도 한 너울이, 한 사람이 매달린 벼랑처럼 밀려와
    쉼 없이 내 눈가에 차오르고 있다.

 

 

 

 

 

 

 

 

 

 

 

 

 

 

 

그날의 눈송이와 오늘의 눈송이 사이

 

 

   
                        *
   
    달이 뜬다.
    폭설 속에 태어나, 폭설 속에 죽는다.
   
                        *

 

    오늘 밤도 눈송이 하나가 공중에 떠 있다.
    눈송이의 중력에 지구가 새털처럼 들리고 빨려들어 간다.
   
                        *

 

    그날의 눈송이가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는지.
    그 다음 날의 눈송이 위로 지구가 떨어져 녹았는지.
    그날의 눈송이와 그 다음 날의 눈송이 사이에
    하루 사이에,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났는지.
   
                        *

 

    밤마다 눈송이 하나가 바다로 떨어졌다.
    바다의 바닥까지 녹지 않고 떨어졌다.
    바닷속에서 천 일 넘게 사람들이 바닷물보다 차가운
    천 개 넘는 눈송이를 다 맞았다.
   
                        *

 

    차가운 달이 뜬 날마다, 폭설 속에 갇힌다.
    어제의 눈송이, 오늘의 눈송이, 내일의 눈송이
    우주라는 폭설 속, 지구에 가장 가까이 흩날려온 눈송이
    지상에서 가장 가깝고 큰 눈송이인 달이
    시침을 한 계단, 두 계단 밟고 내려와
    잠든 아이의 정수리로 떨어져 스며든다.
    체온에만 흔적 없이 녹아 사라진다.
   
                        *

 

    지구에 내린 첫 번째 눈송이와 오늘의 눈송이 사이
    폭설 속에 갇혔다.
    그날의 눈송이와 그날로부터 일천구십일 번째 눈송이 사이
    폭설 속에 갇혔다.
    매일 달을 맞고 얼굴이 젖었다.
    매일 물고기처럼 온몸이 젖었다.
   
                        *

 

    문득 뒤돌아 시커먼 허공에 불쑥 손전등을 비추니
    녹지 못한 수백 개의 눈송이가 가득하다.

 

    그 폭설을 뚫지 않고는 그날로부터 어디로도 갈 수 없다.

 

    지상에 있어야할 수백 명의 체온이 부족해서
    여태 녹지 않은 그 계절의 눈송이들 사이에 갇혔다.
   
                        *

 

    그날의 눈송이가 밤새도록 서서히 내려오다가
    눈앞에 천 일 넘게 멈춰 있다.

 

    오늘의 눈송이가 밤새도록 서서히 내려오다가
    새벽 등교하는 학생의 이마로 스며든다.
   
                        *

 

    하나의 눈송이와 눈송이 사이가 단 하루.
    어느 하루는 그 사이가 여생보다 길다.

 

 

 

 

 

 

 

 

 

 

 

 

 

김중일
작가소개 / 김중일

200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국경꽃집』, 『아무튼 씨 미안해요』, 『내가 살아갈 사람』이 있음.

 

   《문장웹진 2017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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