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솔아 비극 외 1편 - 임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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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

 

 

 


임솔아

 

 

 

 

 

    감나무 밑에 떨어진 감이 보였다. 아무도 주워가지 않았다. 저 혼자 열심히 물컹물컹해졌다. 스멀스멀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나는 썩어가는 감이 거들떠보지 않는 감이었다.

 

    이가 없다며 떡은 안 먹던 할머니는 이도 없으면서 쇠고기는 꿀떡꿀떡 삼켰다. 번번이 접시 위에 남겨진 떡을 나는 꼭꼭 씹었다.

 

    국화빵 사서 갖다 드리라고 아빠가 천 원을 주었다. 종이봉투 속에서 흐물흐물해져버린 살색 국화빵을 할머니 방문 앞에서 내가 다 먹어버렸다.

 

    세상에 호상은 없는 거라고. 모든 죽음은 다 슬프다고. 언니가 울었다. 호상은 호상이지. 나는 머릿고기를 꿀꺽 삼켰다. 이 비극이 박약했다.

 

    늙으면 엄마가 더 열심히 씻을게. 왜, 엄마. 네가 노인 냄새를 싫어하니까. 가까이 가지도 않으니까. 노인 냄새를 싫어한 게 아니야, 엄마. 나를 사랑해준 노인을 만나본 적이 없었던 거야.

 

    국화빵 한 봉지 사들고 돌아와 할머니 방에 들어간다. 할머니가 앉던 방석에 앉아 할머니가 덮던 담요를 덮고 국화빵을 먹는다. 냄새를 생각할수록 냄새가 사라진다.

 

 

 

 

 

 

 

 

파리바게뜨

 

 

 

 

 

노인이 문턱에 서서
단팥빵과 우유를 달라고 했다

 

나는 카운터에서 걸어 나와 스위트 레드빈 브레드와 퓨어 밀크를
종이봉투에 담았다. 3650원입니다, 손님.

 

노인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반듯하게 접힌 천 원짜리 세 장을 꺼냈다.
찬찬히 영수증을 들여다보다
단팥빵이 얼마냐고 따졌다.

 

가진 돈이 그게 다라며
깎아 달라고 세 번을 말했다.

 

입을 벌린 채 문턱에 서 있었다.

 

말랑말랑하고 따끈한 빵을 들고 서서
나는 빵이 되어가고 있었다.
거대한 혀가 나를 휘감고 있었다.

 

손님이 돈을 안 내시면
제가 그 돈을 변상해야 해요.

 

노인처럼 나도 눈썹을 늘어뜨렸다.

 

천장의 모서리마다
눈동자가 지켜보고 있었다.
눈감아줄 수 없냐며 할머니가 매장으로 들어왔다.

 

자동문이 닫히다가 열렸다.
노인보다 더 큰 입이 매끈하게 닫히다 다시 열렸다.

 

 

    ● 시작 노트

 
    아홉 살 때였을 것이다. “할머니가 싫으니?” 내 손을 꼭 쥐고 아빠가 물어 보았다. 머뭇거리면서 한참 눈치를 보다, “응”하고 대답했다. 침울한 눈빛을 한 채, 아빠는 서 있었다. 아빠의 표정 때문에 말해서는 안 될 말을 한 기분이 들어, 이불에 오줌을 눈 것만큼이나 부끄러워졌다. 며칠이 지나 엄마가 나를 불렀다. 그렇게 대답하면 아빠가 얼마나 슬플지 생각해 보았느냐고 했다. 할머니를 좋아한다고 아빠에게 다시 말하라고, 부드럽게 타일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엄마 말을 듣지 않았다. 할머니와 아빠를 피해 다녔다.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사촌 오빠가 온다는 소식이 있을 때만 할머니는 방에서 나와 욕실에 들어갔고 머리를 감았다. 참빗으로 머리를 빗고, 은비녀로 머리를 틀어 올렸다. 속바지 주머니에서 빳빳한 만 원짜리를 꺼내 두 번 접어 랩으로 꽁꽁 쌌다. 광에서 다식판을 꺼내 오색 다식을 만들었다. 만들다가 부서진 다식 조각들은 언니와 나에게 주었다. 예쁜 문양이 새겨진 다식은 접시에 담아 사촌 오빠에게 주었다. 나는 다식이 얄미웠다. “엄마한테 남동생 낳아달라고 해”라는 말을 하면서 내 손에 쥐어주던 오백 원짜리 동전도 얄미웠다.
    명절은 별로였다. 차례를 지낼 때면 방에 들어가 나오지 말라는 말이 별로였다. 남자들만 큰 상에 둘러앉아 갈비찜을 독차지하는 것도 별로였다. 엄마와 함께 주방에 웅크려 앉아 ‘스댕 양푼’에 담긴 잡채를 먹는 것도 별로였다. 세배를 할 때, 남자들만 일렬로 서서 세배를 하고 세뱃돈을 받아가는 것도 별로였다. 언니와 나는 설날에 세배를 했던 적도 없고, 세뱃돈을 받은 적도 없었다. 아무도 우리에게 세배를 받지 않았다. 명절이 지나 학교로 돌아가 친구들이 세뱃돈 자랑을 할 때면 주눅이 들었다.
    할머니가 첩이기 때문에 그랬다는 사실을 스무 살이 넘어서야 알았다. 첩의 손녀는 차례상에 절을 할 수도, 본가 사람들과 섞여 세배를 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할머니의 유일한 손자였던 사촌 오빠만이 본가 남자들과 겸상을 할 수 있고 첩이었던 할머니의 유일한 자존심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할머니는 가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누구세요?” 할머니는 가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내가 나라는 사실을 말하면, 할머니는 내게 사촌 오빠는 언제 오느냐고 닦달했다.
    할머니의 장례식에서 친척들과 재회했다. 결혼 이후에 후덕하게 살이 오른 사촌 오빠, 어느새 할머니의 얼굴을 닮아 있는 고모들, 나와 몇 촌 사이인지 누구도 똑 부러지게 설명해주지 않았던 본가 친척들과 차례차례 인사를 했다. 큰할머니는 머리 크더니 명절 때 한번을 안 오냐며, 내게 못된 년이라고 했다.
    할머니의 영정 사진 앞에서 나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 나는 할머니를 사랑하지 않았다. 할머니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사실이었다. 사실인 채로 끝나버린 사실이다. 끝나버린다는 영원히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게 된다는 것이다. 할머니와 나는 감정에 너무 솔직하였다. 진심을 함부로 배설하는 태도가 우리의 가능성을 차단했다. 할머니와 내가 조금만 노력했더라면, 사실 바깥으로 손을 뻗어보려 애써보았더라면, 그랬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나는 어울릴 사람이 없어 장례식장에 온 네 살짜리 오촌 조카와 놀았다. 아이의 가방에 들어 있던 어린이집 일지에 ‘아이가 장례식에 가기 싫다고 합니다’라고 적혀 있는 것을 읽었다.

 

 

작가소개 / 임솔아(시인)

2013년 《중앙신인문학상》시부문 당선. 2015년 문학동네 대학소설상 수상.

 

 

   《문장웹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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